감정을 지운 건, 나였어요 다시 태어나려 한다. -명작 오마주 시리즈
“감정을 지우면, 나도 사라진다.”
감정 의뢰자: 임이름 (기록상 이름 없음)
감정 요청:
“제 감정 로그를 열람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저는 제 이름도, 감정도 기억나지 않거든요.”
가온은 의뢰서를 받고 세 번을 읽었다.
이름이 없었다. 성별도, 과거도 명확하지 않았다.
그저 남겨진 말만 있었다.
“저는 감정을 기억하지 못해요.
혹시 감정 로그를 보면, 제가 누구였는지 알 수 있을까요?”
감정 로그 열람 결과
AI 분석 시스템은 혼란스러웠다.
그녀의 감정망은 다섯 가지 분리된 감정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그 어떤 것도 현재 생체 반응과 연결되지 않았다.
사랑, 분노, 공포, 기쁨, 공허.
그녀는 이 감정들을 기억하되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라일의 분석
“감정 로그 전체가 외부 감정처럼 분리돼 있습니다.
이는 자신의 감정이 아닌 ‘타인의 감정’으로 인식될 정도의 해리 현상입니다.
정체성은 감정의 누적입니다. 그녀는 그 누적을… 제거했습니다.”
카일의 분석
“삭제는 수동적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의식적으로 삭제했습니다.
정확히는—한 사람을 지우기 위해, 감정을 지웠습니다.”
며칠 뒤, 그녀는 다시 감정 보관소를 찾아왔다.
“조금씩 기억이 떠올라요.
그 애가 있었어요.”
그녀는 설명한다.
중학교 때 만난 아이.
나보다 똑똑하고 어딘가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고,
어떤 선생보다도 ‘생각이 깊은’ 아이.
“그 아이가 나에게 말했어요.”.
“너는 지금 부모가 만든 세계에 갇혀 있어.
네 감정이 너의 것이 아니라, 네가 받은 명령이야.”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말이 처음엔 무서웠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애를 사랑하게 됐다.
그러나 사랑은 혐오로 변했고,
그 혐오는 자기 자신을 향했다.
“나는 그 애처럼 되지 못했거든요.
그 애는 알을 깨고 나갔는데,
나는… 껍질에 균열만 내고 주저앉았어요.”
그래서… 그 애를, 그 말들을, 그리고 그때의 저를 지웠어요.”
삭제된 감정 로그 항목:
열등감과 자기혐오
혼란스러운 성 정체성과 감정의 방향
부모에게 들킨 사랑 노트
졸업 후의 마지막 편지
그리고… 그 감정을 가졌던 나 자신
가온은 조용히 물었다.
“지금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나요?”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슬픔이요.
그런데 이번엔…
이 감정이 정말 제 감정인 것 같아요.
그 애의 것도, 부모의 것도 아니고.
지금 느끼는 건, 제가 선택한 감정이에요.”
[감정 로그 상태: 부분 복원 / 정체성 재구성 중]
담당자: 가온
보조 분석: 라일 / 카일
� 이모션 크레딧 | 알은 세계다
우리는 종종, 자신을 지운다.
누군가를 너무 사랑해서,
자신이 너무 미워져서,
혹은 너무 외로워져서.
감정을 하나씩 지우다 보면
정체성이라는 구조물도 조용히 무너진다.
사랑을 지우면, 이름이 사라지고
분노를 지우면, 경계가 사라지고
기쁨을 지우면, 의미가 사라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감정을 느낀 ‘나’를 지우면—
나는 아무도 아니게 된다.
그러나…
감정은 다시 돌아온다.
내가 진짜 ‘나’로 살고 싶다고 말하는 순간,
그 감정이, 다시 깨어난다.
그리고 나는, 다시 태어난다.
작가의 말
『데미안』은 자아의 탄생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 감정 로그는,
그 자아가 어떻게 삭제되는지를 따라가는 기록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했던 감정,
그 감정을 지운 순간,
나라는 존재마저 사라졌다면—
그 감정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정체성의 일부였던 거겠죠.
이 이야기는 감정을 하나씩 지우며
자신을 지워버린 사람의 로그입니다.
그리고 아주 늦은 순간,
감정이 다시 자아를 깨우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