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과 팔로워십의 정의나 담론을 이 지면을 통해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미 많은 의견과 혜안이 네이버나 구글 검색으로 살펴볼 수 있다. 그중에서 정재승 교수가 ‘현대사회의 빅맨 리더십’ 이란 칼럼에서 “인간은 대뇌에 리더십이 아닌 ‘팔로십’이 내장돼 있다. 유명한 실험에 따르면, 사람들을 모아 과제를 제시하면 리더를 정하라는 지시가 없더라도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팀을 이끌 리더를 찾는다.” 는 대목은 특히 생각해볼 지점이다.
사람들은 자신보다 나은 사람의 의사 결정을 따르는 것이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전략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사람들이 스스로 리더를 찾는 과정은 마치 공정한 절차처럼 보이지만 이익관계로 조립된 집단에서 리더는 민주적으로 탄생하지 않는다. 대체로 리더는 이미 정해져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리더를 잘 만나는 우연이 사회생활의 성패를 결정하기도 한다. 그 박복함을 이겨 내기 위해 대뇌의 팔로워십이 작동하기도 하고 때론 이미 만들어진 체계의 리더를 교체하려는 새로운 팔로워십과 리더십이 분투하기도 한다.
정재승 교수의 지적처럼 팔로워십의 세포는 빌트인이지만 리더십은 그렇지 못한다. 팔로워십이 조직 내에서 안정적인 생존을 한동안 보장할 수는 있겠지만 더 나은 질적 성취나 물적 보상까지 선물하진 않는다. 게다가 바뀌는 리더십에 따라 팔로 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감수성을 가진 유니버설한 능력은 리더십보다 한 차원 높은 경지일지도 모른다. 어떤 조직에서든 리더는 조직의 소실점에 해당되기 때문에 자원이 적을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이러한 숫자 때문에도 리더가 되려는 욕망이 커지기도 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뽐내어 사람들을 이끄는 자리에 올라서는 것이 비로소 이 사회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처세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누구나 리더가 되고 싶지만 누구나 리더가 돼선 안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만 있으면 사장이 될 수 있지만 사장이 곧 리더는 아니다. 조직 내의 리더들은 그나마도 리더십, 팔로워십을 검색이라도 한다. 올바름을 장착한 자본가가 리더가 되는 바람은 환상일 뿐이다. 이러한 현실을 사려 깊게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에 사장, 리더, 리더십은 모두 독립적인 개념임에도 마치 잘 섞인 한 덩어리의 반죽처럼 취급되었다.
이러한 반죽을 솜씨 좋게 째고 꿰맸던 드라마가 있다. 아이폰 1세대가 우리나라에 출시된 해에 방영됐던 ‘하얀거탑’. 그 안의 장준혁과 최도영의 캐릭터는 리더와 리더십, 상사와 멘토의 분할을 정확하게 가르려 한다. 하지만 선과 악의 구도처럼 그려가는 장준혁과 최도영을 그대로 양분하기에는 너무 많은 변명이 존재한다.
질병만을 사랑하여 얻은 능력과 그에 따른 교만과 자신감이 부른 추잡한 사변을 비토하고 소신과 따뜻한 인간성으로 사람 자체를 보살피는 최도영의 자세를 현실세계에 넣고 한없이 긍정하고 동의할 수 있을까? 우리들의 일그러진 장준혁은 우리 세계에 최고로 잘 복무한 진골이며, 최도영은 만들어 갈 세계를 생각하는 이상주의자 즉 반골이다. 가슴에서 반골인 최도영을 응원하면서도 장준혁에 반해 버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개개인이 꿈꿔왔던 그야말로 리더, 거탑이기 때문이다. 정치에 밝고, 말보다 몸이 먼저 아는 리더십,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 어디 하나 빠지는 게 없다.
그에 비해 현실 조직의 리더들과 갑이라는 계약 관계만 있는 리더들은 어떤가? 하나 같이 능력도 없으면서 면피할 알리바이나 구상하며 자신의 고집을 고집하기 바쁘고 자기의 손해는 단 한치도 용납하지 못하여 그것을 하급자나 을에게 전가시키는데 뜨거움을 발휘하는 현실을 수 없이 목격하게 된다. 세상이 그렇다 보니 일그러진 인간성을 가졌을지 언정 환상을 사회화한 장준혁 같은 리더를 한 번이라도 닮아 보고 싶은 팔로워와 인간성이나 태도 정도는 얼마든지 묻어줄 수 있는 팔로워십이 생기는 건 인지상정이다.
능력도 없는 리더십에 치를 떨고 이치에 맞지 않는 고집스러움에 모욕당하는 세상에서도 살아남고자 오늘을 버둥거리는 것은 오로지 밥벌이 때문이다. 그것을 무기처럼 붙잡고 있는 조직에서 성공하기 위해 기꺼이 내줘야 하고 이용을 허락해야 하는 신념과 영혼이 늘어 나는 사회는 명백히 재앙이다. 이렇게 불행한 조직과 사회를 견인하는 것은 권력을 익명으로 처리한 기득권에 취한 일부 리더들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현상은 몇몇 일 못하고 성과가 떨어지는 팔로워들이 목로의 주점에서 막걸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있는 리더들이 구축하는 것이다.
밥벌이는 숭고하지만 벌어오는 과정은 그렇지 못한 공포스러운 현실에서 조차 우리의 가슴속 한편에 불가능을 꿈꾸는 이상주의가 있다. 최도영과 같은 따뜻한 리더가 조직을 이끄는 꿈,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리더를 팔로우하는 꿈.. 하지만 팔로워십의 역사 또한 아름답거나 존경을 기반으로 하지 못한다. 어느 것 하나 리더십스럽지 못한 리더들 틈바구니에서도 진정한 리더들은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경험과 지혜를 나누려 노력하고 팔로워들의 신념을 위해 자기의 신념을 포기했던 리더들은 항상 쓰러졌던 역사가 있다.
밥벌이의 패배주의에 빠진 팔로워들은 조직적인 사유화를 통해 여론을 조작하려 애쓴다. 막걸리에 단톡방에 최신 커뮤니케이션 툴이 다 동원된다. 이러한 행동의 이유는 악화의 리더를 발치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리더는 자신들을 이용했던 조직처럼 이용하기 좋기 때문에 학습된 팔로워십이 수행된다. 악화던 양화던 어차피 하이라키의 상단이 빠지면 그 계층을 메우기 위한 기회가 찾아온다고 믿는 팔로워십이 염연히 존재한다. 명백한 합리와 최소한의 룰을 보장하여 사람들의 인격과 신념을 보호하려 했던 리더를 쓰러뜨리는 일은 그저 리더 개인의 좌절이 아니다. 팔로워십의 사유화로 인해 리더가 가지고 있던 모든 상식적이며 합리적인 가치 또한 사라지는 비극이다.
솔선수범, 언행일치, 주변 사람을 자산으로 여기는 리더십, 책임감 있고 헌신하는 팔로워십은 그야말로 희극이다. 리더십은 왜 솔선수범, 언행일치를 해야 하는가? 기득권을 수성하기 위함이다. 팔로워십은 왜 책임감이 있고 헌신해야 하는가? 기득권을 쟁취하기 위함이다. 현실은 비극이며 가슴속 해피앤딩보다는 비극이 레퍼런스가 되어 대물림된다.
팔로워십은 이미 대뇌에 장착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리더십은 그런 팔로워십이 힘껏 뭉쳐서 만들어 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분명 어떤 리더와 팔로워들은 서로 간의 투쟁이 아닌 과거와 몰상식에 맞서 도처에서 싸우고 있다고 믿는다. 모두가 기득권을 둘러싼 분투의 콜로세움에서 칼을 휘두를 때 쉽게 베고 쨀 수 있는 길이 있는데도 아주 가끔 이상을 믿는 소수의 리더와 팔로워가 이상하게도 그동안의 선택과 다른 선택을 할 때가 있다. 그때가 바로 양심을 따르는 진정과 헌신이 빛을 내는 순간이다. 리더십과 팔로워십은 그런 이상한 때를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이상한 때가 많을수록 조직이 바뀐다. 이젠 희극도 비극과 함께 대물림된다. 그리고 역사가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