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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운 Oct 07. 2015

일꾼의 잠자리

고봉밥

밤에는 잠을 자지 않아도 되지. 약 정오쯤.

그러나 새벽 세 시 정도가 넘어서면 우리는 정해야 해.

일을 더 하던지. 술을 더 마시던지. 아니면 잠을 자던지.

하나 더 하자면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지.

선택을 해야 하지.

선택지는 많지 않아.

우리는 졸리기 때문에 잠을 자야 해.

결론적으로 이것은 사람이 죽는 것과 마찬가지이지.

사람은 죽게 되어 있어, 이 결론은 모두에게 마찬가지이지. 변하지 않아.

그걸 하루로 치자면 사람은 결국 자게 되어 있다는 거지.

하루를 정리하며 그 하루를 마지막으로 죽이는 행위인 것이지.

죽은 듯이 잔다고들 하지. 

그 말은 어쩌면 그런 의미의 선상에 놓인 것일지도 몰라.

억지스럽다고  생각해?

아니, 자연스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억지 스럽지는 않아.

새벽 세시, 영등포 청과시장 사이의 여인숙이다.

집에 돌아갈 수 없어 저렴한 여인숙을 찾는다. 처음 들어가보는 공간이다.

호기로운 젊음, 이성과의 잠자리일지라도 웬만하여서는 찾지 않는 공간이다.

그곳은 우리의 세대들에게는 어쩌면 미지의 공간이다.

쉬이 찾지 않는 공간이다. 모텔 애플리케이션이 쏟아지는 마당에 그런 여인숙을 찾는 것은 애인과 싸우자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낯선 공간이다.

고등학교의 기숙사의 이 층 침대이거나 군대의 침상과도 같은 공간이다.

혹시 가 본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내 친구들 중에서도 꽤 도전적인 사람일 것이다.

누군가는 잠자리가 바뀌면 그 날밤은 뒤척이기도 한다. 

눈을 감고서 잠에 들려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과도한 피곤함을 등에 업은 날이면 머리만 대면 잘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책상에 엎드려서, 지하철이라면 미안하고 민망하지만 가끔은 나도 모르게 옆 사람의 어깨에, 배낭을 메고 하는 여행이라면 이름 모를 교각, 다리의 그늘 진 공간에서.

우리는 잠을 잔다. 거기가 어디가 되었든 간에, 잠을 잔다.

잠이 들어 버리면 모든 공간은 신기하게도 그 이전의 내가 잠을 자던 공간과 동등하게  여겨진다.

그냥 이 공간은 나의 공간이 된다. 

내가 돈 주고 산 땅이 아니어도 내가 잠들어 버리면 속절없이 나의 공간이 된다.

단지 다른 점이라면 그 자리에 모기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새벽 네시, 영등포 청과시장 사이의 여인숙이다.

새벽  네시입니다.

여인숙의 주인이 옆 방의 사내들을 깨우는  듯하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다. 그 곳의 밤은 끊어진 듯 그렇게 다음 날로 이어 진다.

3년 전으로 돌아가 나는 공장에서 일을 하기 위해 한 달 간 울산에서 회사가 마련해 준 기숙사에 묵은 적이 있다.

울산 공장에서 나는 시내 버스에 깔릴 바닥재를  재단하는 일을 보조하거나 뼈대로 쓰일 철근들에 구멍을 뚫는 일들을 했다. 단순한 일이었다.

나는 서울에 계실 때는 일산의 한 교회의 장로님이시던 인자한 어른분과 함께 같이 숙소 생활을 했다.

공장 사람들은  그분을 장로님이라고 불렀다. 장로님은 회사생활을 오래 하신 분이었다. 무역회사에서 일을 하셨으며 옷감을 수입하여 제조하는 회사에서 수입일을 도  맡아하셨다고 했다.

우리는 울산에서 인연이 닿았으며 장로님과 나, 이렇게 남자 단 둘이 숙소에 묵게 되었다.

장로님은 열심히 일을 하셨고 퇴근 후에는 항상 책을 읽으셨다. 장로님의 핸드폰 배경화면은 손주들의 웃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런 장로님이 멋있고 좋게  느껴졌다. 내가 알던 꼰대의 특징은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으셨다.

나는 퇴근을 하면 느려 터진 넷북으로 이력서를 쓰곤 했다. 

하루라도 빨리 이 곳에서 탈출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그 곳에서 저녁을 먹는 것도 싫었다. 사실은 사장님이 저녁 식비를 지원해주지 않아서 저녁을 먹지 않겠다고 했다. 치사하다는 생각에 작은 반항을 했다.

나는 저녁을 먹지 않겠다고 했더니 장로님은 화를 내셨다. 그래도 밥은 먹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못 이기는 척 장로님을 따라가 한 식당에 갔다. 

생대구탕을 하는 식당의 집이었다. 메뉴는 생대구탕 하나였다. 

허름해 보이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사람의 왕래가 많지 않은 곳에 음식점이 있어서 이런 곳도 장사가 될까 싶은 집이었다. 

나는 그 곳에서 생대구탕을 처음 먹어 보았다. 

국물은 하얀데 칼칼하니 맛이 있었다.

그 곳에서의 일상은 그런 일들의 반복이었다.

아침이면 식빵과 계란을 구워 남자 둘이서 아침을 해 먹었다. 

장로님이 한번, 내가 한번 이렇게 돌아가며 아침을  준비했다. 

우유 한 잔, 계란 하나씩, 식빵 두개, 딸기잼. 아침식단.

버스에 올라 30분 정도를 등교하는 학생들과 함께 일터에 갔으며,

점심이면 공장 옆 정자에 누워 하늘을 보며 낮잠을 잤다. 낮잠을 자면 이 곳은 다시 서울 같았다.

저녁이면 퇴근을 해 돼지 국밥집을 가서 저녁을 먹고 돌아와 각자의 방에서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장로님은 주로 성경책을 보시거나 책을 읽으셨고 나는 느려 터진 넷북으로 필사적이진 않지만 이력서를 썼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의 방에 나와 9시 뉴스를 함께 봤다. 

반복 반복 반복. 나는  스물일곱, 그 해 가을을 울산에서 그렇게 보냈다.

나는 졸리지 않아도 일찍 잠에 들었다. 일이 고된 것은 사실이었으나 졸리지는 않았다.

잠자리에 일찍 들은 이유는 어찌 보면 현실 도피일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들었다.

일을 하면 유난히 더 피곤한 날이 있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유난히 더 일터에 나가기 싫은 날이 있다.

그럴 때는 잠을 잤다. 최대한 많이.

남들은 도피성 유학이니, 도피성 대학원 진학이니 이러쿵 저러쿵 말들은 많지만 그래도 도피적인 성격의 일이지만 발전적인 일을 하는 마당에 나는 도피성으로 잠을 퍼질러 잤다.

내가 실패해야 할 요소들은 참으로 많았다.

그렇게 울산에서 일을 하다가 서울에 일자리를 구해 올라가게 된 때에 나는 장로님께 머뭇 거리다가 서울로 가게 된 아니 가야 할 사실을 털어 놓았다. 장로님은 잘한 일이라고 했다. 나는 미안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몰랐다. 

원래 가던 집 앞의 대구탕 집이 아닌 옆 동네의 대구탕을 먹고 들어오는 길이였으며 우리는 다음 날 먹어야 할 식빵을 동네 허름한 슈퍼에 들려 사가지고 돌아오는 길이였다.

그 날, 나는 현실 도피성 잠을 퍼질러 자는 것도 실패했다.

고봉밥을 나는 장로님과 나누어 먹으며 그 시간을 보냈고, 그 울적한 숙소에서 함께 잠을 잤다.

이번 추석에도 연락을 드리고 싶었으나 나는 연락을 드리지 못 했다.

아직 살아 계실까 하는 생각도 든다.

밤에는 잠을 자지 않아도 되지. 약 정오쯤.

그러나 새벽 세 시 정도가 넘어서면 우리는 정해야 해.

일을 더 하던지. 술을 더 마시던지. 하나 더 하자면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지.

아니면 잠을 자던지.

선택을 해야 하지.

선택지는 많지 않아.

우리는 졸리기 때문에 잠을 자야 해.

결론적으로 이것은 사람이 죽는 것과 마찬가지이지.

사람은 죽게 되어 있어, 이 결론은 모두에게 마찬가지이지. 변하지 않아.

그걸 하루로 치자면 사람은 결국 자게 되어 있다는 거지.

하루를 정리하며 그 하루를 마지막으로 죽이는 행위인 것이지.

죽은 듯이 잔다고들 하지. 

그 말은 어쩌면 그런 의미의 선상에 놓인 것일지도 몰라.

억지스럽다고  생각해?

아니, 자연스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억지 스럽지는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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