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이.
1989년의 이른 겨울, 29살의 아내와 33살의 젊은 가장은 천호동의 한 지하 단칸방에 살게 되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 약 4, 5년 후의 일이었다. 그 둘의 첫 번째 독립인 것이다. 옮겨야 할 짐의 가지 수는 많지 않았다. 시집을 올 때 가져온 검은 자개장과 그릇들. 그리고 첫째 아들이 2살이 되던 해에 둘째를 가지게 되었다. 배 속의 아기와 함께 그들은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하였다.
어느 지하 단칸방이 그러하듯 모든 환경은 열 약했다. 그것은 현재와 과거를 막론하고 서울 변두리의 지하 단칸방들에는 어지간해서는 예외 없이 동일하게 적용되는 편이다.
그 곳은 대체적으로 볕이 잘 들지도 않거니와 습한 편이었으며 공동으로 사용하는 주방의 벽 또한 회색이어서 그 우울함은 쉽게 희석되지 않는 듯했다. 요즘의 모던한 디자인을 한 좋은 식당의 그 회색 벽과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그 지하에는 2개의 방과 함께 사용하는 하나의 주방, 그리고 두 집이 살았다. 쉽게 설명하자면, 그 집은 정원을 가지고 있는 전원주택의 지하 방이었다. 턱이 제법 높은 회색 계단을 올라서면 잘 조형되지는 않았지만 녹색이 있었고 햇빛도 있었으며 월세를 받아가는 주인집도 있었다.
아내와 아이는 주로 집 안에서 모든 시간을 보냈다. 임신 중이었기 때문에, 또 이미 배가 제법 불러온 상황이어서 쉽사리 움직일 수도 없었고 아이는 너무 어렸다. 그나마 행복했던 점이라면 아이는 다른 걷는 것도 옹알이를 하는 것도 또래 아이들에 비해 빨랐다. 그것은 이 젊은 부부에게는 큰 기쁨이었다. 여자는 한글을 잘 몰랐기 때문에 아이를 가르칠 수는 없었다. 그에 비해 아이는 벽에 붙은 한글이 적힌 종이를 좋아했고 여자가 하는 말들을 곧 잘 따라 했다. 또 조금 시간이 지나서는 동네 아이들과 소꿉놀이하는 것을 좋아했다. 어떠한 단어들을 동네 형과 누나들한테 배워 오는 날이면 엄마에게 그것들을 이용해 의사 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새벽일을 나가는 남자의 책임감은 아이와 엄마의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 내었지만 그것은 강철보다도 단단한 편이어서 이 둘의 시간은 지하방보다 답답하지 않고 유려하게 흘러갔다.
이사를 온지 2달이 되었을 무렵, 3월의 말미였다. 사람들은 봄이라고 이 시간들을 칭하지만 아직은 겨울의 시간과 차가운 바람결을 품고 있을 법한 시간들이었다. 한 마디로 봄치곤 아직은 제법 쌀쌀한 그 날들의 한 가운데. 그 날도 여느 때처럼 느린 시간 속에서 아이와 엄마는 둘만 있었다.
아이들의 세계와 어른들의 세계가 으레 다르듯이 아이들은 2시간만 있어도 쉽게 친해지는 것에 비해 수줍음이 많은 성격의 이 29살의 여자는 동네의 많은 사람들과 친해지기에는 2달이란 시간은 조금 짧은 것이었다. 여자는 전라남도 구례에서 올라와 성수동의 재봉틀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한 것이기에 재봉틀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몇몇의 친구들 외에는 서울에는 친구도 없었다. 독립은 또 다른 말로는 고립을 의미하기도 한다.
오전에는 아이의 목욕을 시켰다. 아이를 목욕시키며 몸이 조금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매일 새벽이면 남자는 일을 나가면서도 자신이 나갈 건설현장의 전화번호를 적어 놓고 문 옆에 놓고 나갔다.
햇빛이 방의 창문을 통해서 은은히 들어왔다 여자의 진통과 함께. 여자는 아파했다. 아이도 아프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표정이 일그러졌고 소리도 지를 수 없는 그런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여자는 남자에게 연락을 하고 싶었으나 직접 연락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아침에 적어 놓고 간 건설현장의 전화번호로 연락을 해 아이가 나올 것 같다는 말을 할 수 있었다. 아이는 그런 엄마의 표정을 지켜보다가 울면서 자신의 도널드 덕 변기를 여자에게 갖다 주었다.
“엄마, 배 아프면 여기다가 똥 누어, 오줌 누어”
“응, 엄마 배 안 아파. 괜찮아.”
아이가 여자에게 할 수 있는 최소의, 아니 최선의 응급조치는 그것 뿐 이었다. 상황이 제법 심각하다는 것은 두 살 배기 아이도 알 수 있을 만큼 급박했다. 이 둘은 무기력했지만 방 안에 새어 들어온 몇 조각의 파편 같은 햇살은 참으로 따스했다. 이틀 전 불어온 봄바람 같지 않은 칼바람에 비하면 날은 좋은 편이었다. 여자는 당황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쉽사리 생각이 나지 않았다. 갑작스레 찾아온 이 극심한 진통과 힘들 때 주위에 없는 사람들은 한번 겪어본 일이지만 전혀 겪어보지 않은 일처럼 새로웠다.
없는 정신에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보니 옆 집 아주머니를 부르는 일뿐이었다.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가야 하나 싶었지만 택시 안에서 아이가 나올 수 있을 정도로 여자는 힘들어했다. 방문 앞에 주저앉아 아주머니를 기다렸다. 아주머니는 자신의 아이를 오후반 학교에 보내 놓고는 올 수 있다고 했다. 와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 하나뿐이니 여자는 기다리는 것 밖에 수가 없었다. 결국 병원에 가기도 전에 아이가 나왔다. 여자는 방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아이를 낳아놓고 여자는 본능적으로 시계를 보았다.
1989년 3월 23일 12시 15분. 여자는 본능적으로 아이를 낳으면 시계를 본다. 아이와 내가 이어지는 시간을 눈으로 기록한다. 그것은 본능이다.
방바닥에 놓인 아이가 추울까 옆에 있는 이불을 끌어다가 덮어준다. 자르지 못한 탯줄이 아직 연결되어 있다. 방바닥과 벽지에는 이미 피가 범벅이지만.
이제 아이는 둘이 되었다. 첫째 아이는 그렇게 자신의 동생이 태어나는 순간에 함께했다.
옆 집 아주머니에게 여자는 탯줄을 잘라달라고 했지만 옆 집 여자는 해 본 적이 없으니 할 수가 없다고 한다.
“옆에 산부인과에라도 전화해주세요.”
옆 산부인과에서 의사가 아닌 간호사가 와서 탯줄을 잘라준다. 묶어준다. 남자가 도착하며 옆 집 아주머니에게 묻는다.
“애가 나왔나요?”
“네, 나왔어요. 남자 아이예요.”
지하방에 식구가 하나 더 늘었다.
파편 같은 그 햇살은 결국 아이와 엄마의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되었다.
지하방, 우리는 우리의 방에 들어온 모든 빛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