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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운 Sep 19. 2015

피자헛, 불고기 피자

위대한 J

19살 때 가장 충격적이었던 일은 아마도 이런 것이다. 클 만큼 컸다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더 커야 하는 상황들이 남아 있을 때. 
초등학교 때, 우리 집에 컴퓨터가 고장 나면 고치러 와주었던 건 삼성 컴퓨터 아저씨가 아니고 내 친구 J였다. 
그 친구는 우리 집에 플로피 디스켓을 들고 와서는 게임도 깔아주고 라면도 같이 먹고 책도 같이 보고 아무튼 우린 하루 종일 같이 있었다. 
그 친구가 밸런타인데이 날 여자애에게 초콜릿 받을 때도 옆에 있었으니 말 다 했다. 이 당시에 나에게 가장 충격적인 일을 꼽자면 친구 J의 집에 놀러 갔다가 먹게 된 피자헛의 불고기  피자였다. 
그 집 식구들이 먹고 남은 피자 2조각을 먹는 데 그게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상하게 그 당시의 우리 집은 먹을 거리의 선택의 폭이 넓지는 않았다. 한 달에 한번 정해 놓고 외식을 했는데 초등학교 4학년 때 까지 단 한 군데의 갈빗집만 가고는 했으니 은근히 고집이 있으셨나 보다 우리 아버지. 
아니 스마트폰 이런 거라도 있었으면 다른데 가셨으려나. 
피자에 관한 또 다른 기억 하나는 2학년 때 작은 아버지네 식구들과 어느 동네 피자집에서 먹은 것인데 그 날의 햇빛과 날씨 등이 너무 선명한 사진처럼 남아서 지금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작은 아버지네와 서로 왕래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들의 얼굴과 표정이 어제 산 판화처럼 뚜렷하다. 
피자를 먹을 때의 그 좋으면서도 주눅 들었던 기분까지도.

그러니 내게는 그 동네 피자집에서도 저 정도 이었는데 피자헛 불고기 피자는  미국이라는 땅에 가보면 이런 기분일까 싶을 정도로 12살에겐  마음속에서 화끈 거리는 불기둥 같았을 거다. 
나는  그때 알았다. 
한 동네에 살아도 우린 이런 게 다르구나.

다시 19살로 돌아와 나는 참으로 놀라웠다. 그 날 나는 야간 자율 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였다. 건물 옆 골목을 지나는데 마주친 J, 그의 손에서 붉은 빛이 돌고 연기가 났다. 담배였다. 
나는 조금 놀랐고 태연한 척 했지만 사실 충격을 받았다. 이 복잡 미묘한 감정은 중학교 때 좋아한 학원 여자애에게서 느낀 감정과는 또 다른 거였다. 
담배를 피우면 최소한 내가 걔보다는 빨리 필 줄 알았는데 그 착한 놈이 나보다 먼저 피고 있다니. 이건 일종의 패배감이랄까. 어이가 없는 거였다.

조금 당황해서 모하냐고 물어보며 그냥 대화를 얼버무리며 급히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는 집에 와서 방바닥에 누워 한참을  생각했다. 그 붉은 빛에 대해서. 어른스러워 보이는 그 불빛.
피자헛 불고기 피자에 버금가는 그 충격은 모두 나에게 오랜 친구, 착한 J를 통해서 왔다.
위대한 개츠비에 그린라이트가 있다면 오로지 내 인생에서만 인상 깊은 불빛을 꼽자면 나는 그 붉은 빛을 꼽을 것이다.

더 웃긴 건 그 친구가 불량스러워 보이는 성격의 행동은 그 뒤로도 없었고 계속해서 나보다 더 착했다는 것이다. 그 친구는 여전히 안경을 끼고 있었고 플로피 디스켓과 잘 어울리는  친구였다. 불량스러워 보이는 행동과 표정에 대한 동경은 내가 그 친구보다도 훨씬 크고 강렬했으며 또 월등히 잘했지만 피자헛 불고기 피자에 이은 나의 공식적 2번째 패배였다.

나는 아직 담배를 태우지는 않지만 군대에서 처음 동갑내기 이등병 동기를 따라 담배를 피워보려 했던  그때 나는 그 날의 그 상가 골목이 떠올랐다. 
그 붉은 빛과 앳된 친구 얼굴이.
당신도 알 거다. 내가 아는 착한 사람이 내가 아직 안 한 나쁜 짓을 할 때면, 우리는 태연한 척 이해를 해야 하는 거다. 
그건 서로에게 비밀스러운 영역이니깐 말이다. 
19살 때 가장 충격적이었던 일은 아마도 이런 것이다. 클 만큼 컸다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더 커야 하는 상황들이 남아 있을 때.

크게 요동 친 흙탕물 같은 것들이 네 안에서 천천히 가라 앉을 때.
우리는 고작 흐르고자 하는 금붕어 새끼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도 이제 클 만큼 컸다고 조금 더 껄렁댈 수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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