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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운 Apr 14. 2016

봄밤

흘리고 간 눈동자들이 여기저기 부수어져 있다. 눈동자들은 서로를 안고 부수어져 있다. 어떤 눈동자들은 서로를 안지 못하고 부수어져 있다. 

누군가에게 시기와 질투를 부을 힘마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너는 더 이상 무언가에 쓸모가 없는 사람이란 것도 함께 알게 되었다. 알게 된 그 사실이 때로는 분하기도 하였지만 우리에게 저항의 방법을 누군가 일러준 적이 없었다. 모든 것에 순종적이었다. 눈동자가 부수어질 때도 가만히, 순종적이었다.

균일하게 정렬된 지하철 역 9번 출구의 조도 앞에서 너는 불안함을 아무도 듣지 못할 작은 소리로 노래 부르며 걸었다. 침착하게 너는 생각해 놓은 경계선들을 아즈 라이 밟고 마치 기찻길을 따라 걷는 아이의 발걸음으로 너는 그렇게 노래를 부르며 걸었다. 혼자서 정해 놓은 그 선로에 본인이 정해놓은 규칙으로 혼자 아등바등 거리며 걸을 뿐이었다. 너는 왼쪽의 선로 위로만 걸었다. 오른쪽의 선로는 보지도 않았다. 왼쪽의 그 선로에서, 생각해 놓은 말들을 마저 아끼어 둔 채, 어쩌면 이것은 조용한 숨소리처럼 끝나지 않을 긴 밤이라고만 생각했다. 

반복되는 단어들로도 담을 수가 없는 것들은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려내지 못 했지만 너는 그것을 스무 살의 봄밤처럼 결코 간과할 수 없었는지라 이어질 문장만을 찾고 있었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 다시 나올 때 즈음에도 너는 이전에 사놓은 책에 접혀 있던 그 몇 페이지가 아른거려서 조금도 기뻐할 수가 없었고 누군가는 나에게 봄이라고 일러 주었는데 나는 일을 마치고 돌아와 이불을 덮고 홀로 잘 때면 방바닥이 이리도 차가운지 목까지 이불을 덮으라고 다독이던 당신의 음성만 떠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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