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 한다. 그것은 옳은 이야기이다. 미디어의 홍수와 때를 같이 하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실체, 즉 눈이 보이는 것이 아닌 것을 논하는 것은 어찌 보면 사기를 치거나 기만하는 것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열성적으로 수업을 하셨던 근현대사 선생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고 싶었는지 알 것 같고 선생님은 앞으로 아마 더욱 열심히 강의를 하셔야 할 것 같다.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보여주신 광주 민주화 운동의 동영상은 절대 잊을 수가 없는 이미지 중 하나가 되어 버렸다. 나는 내가 검은 색도 흰 색도 아닌 회색분자 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잘 알지 못해서, 또는 내가 다름이 아니고 틀린 것들을 이야기할 까 봐 두려웠기 때문에 손을 들고 이야기할 수 없었던 것으로 결론 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확인하고 미연의 실수들을 방지하기 위해서도 나는 때를 기다렸고 판단을 유보했다. 그러나 기다렸던 때나 시기가 오면 모든 사건은 종결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두려움의 몫도 컸다. 1학년 때, 집회에 참가하는 학생들이 충무로역 지하의 극장과 연결된 통로에서 전의경에 쫓겨 달리는 것을 보았다. 꿈인가 싶었던 장면이기도 하여 그때 즈음 그런 큰 시위들이 있었나 되짚어 생각해 보기도 했다. 꿈일지도 모르겠다.
1학년 때에는 그랬다. 친구는 학생회 활동도 열심히이고 거기에서 선배들과 어울려 술도 많이 마셨다. 학생회 선배들은 친구를 총애했다. 친구는 무슨 집회나 모임, 시위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편이었고 과정 중에 사람들의 마음 또한 많이 얻어내며 학교 생활을 했다. 1학년을 마치고 친구는 군대를 전경으로 갔고 제대를 하고 나서는 더 이상의 학생회 활동이나 집회, 대학생 모임 등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휴가 때 나와 친구가 하는 이야기들은 폭력시위에서의 집회 참가자들에 대한 대응 방법이었다. 주로 죽창과 방패에 관한, 또는 그것을 보는 눈과 그 눈이 다칠 것 같은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이미 모든 것이 두려워졌다.
판단의 유보, 결과를 기다렸던 과정, 감각적인 두려움까지 행동을 지연시키고 외면하는 데에 있어서 굉장히 합리적인 단어들이었다. 허나 이번 평화적인 촛불집회를 통해 느낄 수 있는 것은 나와 같은 사람에게도 대통령의 잘못된 행위에 대한 인지와 집회 참여에 대한 부담감과 두려움이 적다는 데에 있다. 그 부담감이 적다는 말의 속내는 명백히 잘못된 범법행위임이 나와 같이 무지한 사람에게도 마음으로 와 닿고 있고 분노보다는 이 사람과 냉정히 시간을 두고 싸워야 할 것 같다는 느낌으로 다가오고 있다. 모든 시민분들이 그런 평화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주어 감사하고 고맙다. 또한 너무나 명백히 잘못된 행동으로 나의 판단이 헷갈리지 않을 정도의 쉬운 문제를 풀고 있는 기분이다. 시간을 뒤로 미루어야 해결될 문제가 있고 지금 당장 풀어야 할 과제들이 있다.
내일은 날씨가 춥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