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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시누 Nov 03. 2016

영화 속 다양한 딜레마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러 딜레마적 상황들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용인되어야 하는가? 이 주제는 오랜 시간 많은 이들 사이에서 논쟁이 되어 왔다. 생명 하나하나의 존엄성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주장은 오랜 기간 대립하고 있다. 하지만 때때로 상황에 강력한 외재 변수가 개입되기도 한다. 트롤리 딜레마는 상당히 유명한 사례다. 상단의 단편 영화 <모스트>도 이 사례와 유사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폭주하는 기관차가 레일을 따라 달리고 있다. 그런데 당신은 철도에서 당신의 아이가 놀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대로 가다간 아이가 사고를 당하게 됨은 자명하다. 당신은 철도의 레일을 바꿀 수 있는 조종실에 있다. 만약 철도의 레일을 바꾼다면 기차는 아이를 피해 다른 방향으로 달리게 된다. 그런데 바뀐 레일에는 공사 중인 인부 6명이 일을 하고 있다. 즉, 레일을 바꾼다면 인부 6명이 죽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절대 다수의 행복을 추구하던 이들은 때때로 마음이 바뀌기도 한다. 그러한 변수는 자신의 아이라는 관계적 변수가 작용해 결정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직업윤리가 작용해 결정이 바뀌기도 한다. 때때로 딜레마의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아예 스위치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대답이 등장할 때도 있다. 사실 여기에 확실한 정답은 없다. 각자가 자신이 형성하고 있는 가치관에 맞게 행동을 할 뿐이다. 이러한 딜레마 적 상황은 시나리오의 극적 요소를 강화하는데 종종 사용되곤 한다. 실제로 많은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도 이와 유사한 딜레마들이 등장한다.





          많은 이들이 딜레마의 사례를 이야기 하면 영화 <다크 나이트>를 떠올릴 것이다. <다크 나이트>의 말미에서 악역 ‘조커’는 고담 시의 사람들에게 선택지를 부여한다. 두 개의 여객선이 물 위에 떠있다. 두 척의 배 모두 폭탄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를 폭파시킬 수 있는 버튼은 각각 다른 배의 사람들에게 쥐어져 있다. 즉, 버튼을 누르면 자신이 타고 있지 않은 다른 배가 폭발하는 것이다. 정해진 시간까지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두 배 모두 폭발하게 된다. 이 때, 한 쪽에는 범죄자들이 가득 타고 있고 한 쪽에는 평범한 시민들이 타고 있다. 과연 버튼을 누르는 것은 누구일까? 버튼을 눌렀을 때 발생하게 될 문제는 무엇일까?



          이 문제는 상당히 복합적인 내용의 딜레마다. 첫째로, 일반인과 범죄자들 사이에서 주어지는 딜레마다. 극 중 선택지는 각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쥐고 있지만 영화를 보고 있는 사람들은 그 상황에 몰입하게 된다. 누군가를 죽여야한다면 범죄자들을 죽이는 것이 옳지 않을 까하는 내면의 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둘째로, 결국 버튼을 누르는 건 단 한 명의 사람이다. 누군가 버튼을 누르면 배에 타고 있는 나머지 사람들은 목숨도 부지하고 윤리적 책임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버튼을 누른 사람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고 하더라도 다른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죽이는 데 일조했다는 비난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결국 버튼을 누르기로 결정했다 할지라도 누가 누를지의 문제가 남아있는 것이다.





          물론 위의 상황은 자신의 목숨이 걸려있다는 또 다른 변수가 작용하기 때문에 철도의 딜레마와는 별개의 상황이라 인지될 수 있다. 그렇다면 드라마로 넘어가보자. 미국 FOX 채널에서 방영중인 ‘고담’에서도 주인공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악역이 등장한다. ‘매드 해터’라고 불리는 이 악당은 주인공인 ‘짐 고든’ 경감에게 총을 쥐어준다. 짐 고든이 죄책감을 느끼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이 악당은 그를 다양한 선택지에 빠뜨린다. 처음에는 추락사의 위기에 빠진 신혼부부와 차에 치일 위기에 빠진 꼬마 아이 중 한명만을 구할 수 있는 상황에 그를 집어넣는다.



이 상황은 앞의 상황들과는 또 다른 상황이다. 둘 다 주인공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사람들이고, 어느 쪽도 죄가 없는 사람들이다. 한쪽은 이제 막 결혼식을 치른 부부, 한 쪽은 그야말로 순수하기 그지없는 아이다. 이 때 주인공은 어린 아이를 우선시해야 된다는 결정을 할 수도 있고, 두 명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생각할 수도 있고, 혹은 갓 결혼한 신혼부부의 이야기에 애잔함을 느끼고 그들을 구하러 갈 수도 있다.  





          한편, 인류의 존망과 관련된 딜레마도 존재한다. 이는 극중에서 주로 악역들의 미친 사상으로 묘사되곤 한다. 영화 <킹스맨>과 <인페르노>의 악당들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들의 주장은 폭발적으로 증가한 인구수가 결국 인류 전체의 멸종을 몰고 올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킹스맨>의 악당 ‘발렌타인’은 사람들에게 광기를 불어넣어 인구수를 조절하고자 했고, <인페르노>에서는 일종의 질병을 퍼뜨려 인류를 몰살하고자 하는 내용이 등장한다. 물론 인류는 과학 기술의 발전과 우주 개척으로 늘어나는 인구수에 따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류의 열린 미래가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을 희생하지 않으면 종의 유지가 불가능한 확실한 상황이 주어진다면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영화에서 등장하는 이러한 문제를 오래 전에 실제로 주장했던 학자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바로 ‘인구론’을 주장한 ‘맬서스’라는 학자다. 맬서스는 ‘인구론’에서 인류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결국 인구 과잉으로 인한 식량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그가 영화 속 악당들처럼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다녀야 한다는 주장을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소극적인 인구 감축을 주장했다. 이는 사람들이 질병이나 기아로 죽는 것을 방치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특히나 빈민가의 인구는 자신의 생산력을 감안하지 않고 인구를 증가시켜 질병 창궐을 장려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였다.





          물론 멜서스의 <인구론>은 많은 진보적 경제학자들의 비난을 받았다. 특히 독일의 경제학자 ‘베르너 좀바르트’는 멜서스의 <인구론>을 향해 “세계 저서중 가장 멍청한 책”이라고까지 평했다. 하지만 맬서스의 <인구론>은 현대에 내려와 인구 억제를 통해 빈곤 문제를 해결하자는 신맬서스주의로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딜레마 문제는 영화와 현실을 넘나들며 사람들에게 다양한 생각할 거리를 주고 있다. 이는 어려운 선택 속에 개인을 빠뜨림으로 골머리를 썩게 만들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윤리 체계를 확고히 정립할 수 있게 도와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갖는다. 윤리와 가치관은 시대적 보편성과 개인적 특수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니만큼 무비판적인 일방적 비난은 지양되어야 한다. 다만 각각의 선택이 가져올 영향에 대해 깊게 고민함으로 보다 발전적이고 이로운 형태의 윤리 체계를 만들어나가는 생산적인 토론의 뿌리로 작용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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