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고 복싱장으로 갑니다

낮에는 회사원 저녁엔 복서

by 정작가

날이 많이 춥습니다.

사무실 컴퓨터를 끄고 퇴근 준비를 합니다.

옷을 잔뜩 껴입고, 지하주차장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탑니다.


그때부터 마음속에서는 집에 호다닥 들어가 침대 속으로 파묻히고 싶은 생각뿐입니다.

허나, 집에 들어가면 다시 나오기 어렵습니다. 침대에 등이 달라붙고 말거든요.

그래서 그냥 근처 역전우동에 들러 간단히 우동을 한 사발 하고 체육관으로 향합니다.


체육관에 들어가기 전,

자동차 열선 시트에 몸을 녹이다 보니 피곤함이 몰려옵니다.

나비잠에 들듯, 잠시 졸아 봅니다.

주변 소음이 다 들릴 정도로 얕은 잠이지만,

깨고 나면 두어 시간은 운동할 수 있을 만큼의 정신력이 생깁니다.


찌뿌둥한 몸을 피며 차 문을 열고 나섭니다.

조금은 눅눅한 기운이 서려 있는 지하 체육관입니다.

체육관이 따뜻하지는 않습니다.

평소에는 가벼운 바람막이와 반바지로 갈아입고,

'어휴, 추워. 어휴, 추워'하며 연신 신음을 내뱉고 4라운드 정도 줄넘기를 하다보면

땀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하고, 추운 기운이 사라집니다.


근데 오늘은 그럴 새가 없겠습니다.

링 위에서 코치와 학생이 스파링을 하고 있거든요.

아직 몸도 풀지 않았는데, 저도 빨리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선 스파링이 끝나자마자

잽싸게 코치에게 스파링 요청을 합니다.


그간 연습해 온 것들을 진짜 실력자에게 써볼 기회입니다.

지난 2주간 일곱 명의 상대에게 연습해 왔던 것들을 프로선수에게 테스트해봐야겠습니다.


복싱을 한지 4년이 되면서 링 위에서 일반인들의 주먹과 움직임은 조금은 쉽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지난 생체 대회 때는 상대의 주먹을 대부분 다 피하고, 그나마 점수로 인정될 만한 주먹은 두어대 맞았습니다.

실력이 참 많이도 늘었습니다.

제 인생 첫 스파링 때는 하도 쳐 맞고 지쳐서 2라운드에는 제대로 서있지도 못했는데 말이죠.


이제 코치와 스파링을 시작합니다.

지난주부터 연습하던 기술이 코치에게 먹히기 시작합니다. 일단 이것만으로도 오늘 스파링은 성공입니다.

배우고 연습했던 동작이 먹혀들어갈 때의 기분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마치 바둑을 두듯 서로의 수를 섞어 봅니다. 기분 좋음을 한 껏 느낀뒤 강도를 높여 봅니다.

강도를 높이고 한 라운드 정도 더 했습니다. 역시 우리 코치, ‘앞으로도 열심히 운동해야겠다~’ 생각이 들 정도로 맞았습니다.

코치가 잘 조절해서 어디 아픈 구석은 없습니다.

코치도 새로운 기술을 배워 왔더라고요.

지난주 체육관에서 독립 영화 촬영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 (전)동양챔피언이 함께했다고 합니다.


운 좋게 우리 코치가 전 챔프의 상대 역할을 맡았고,

촬영이 끝난 뒤 전챔프에게 여러 조언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걸 저한테 그대로 쓴 거죠.

그리고 저는 전 챔프의 기술을 우리 코치를 통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직접 당해 보니 무언가 느껴집니다.

왜 코치가 이 기술을 저에게 보여줬는지.

저한테 딱 들어맞는 스타일의 기술입니다.

맞으면서도 ‘이거, 내가 쓰면 딱인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스파링 끝나고 기술 전수를 받습니다.

기술 전수의 시작은 늘 그렇듯, 먼저 제대로 당해 보는 것부터입니다.

그래야 상대방 입장에서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고, 실전에서 상대의 움직임도 예측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스파링과 함께 복싱에 대한 자신감도 한 층 더 쌓입니다.


링에서 내려와 체력 훈련을 하고 나면

오늘의 복싱도 끝이 납니다.


언젠가 유튜브에서 UFC김동현 선수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MMA에서 제일 뛰어난 재능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체육관에 가는 겁니다"

그만큼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위해 꾸준히 해나가는 일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게 퇴근 후 체육관으로 가는 행위는 어떤 거창한 이유 때문은 아닙니다.

그저 내게 주어진 오늘 하루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각오입니다.

그렇게 집에 돌아오면,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한결 가볍습니다.

내일도 할 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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