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정도 회사 일이 바빠 양평 고향 집에 안 갔다.
주말엔 주중에 쌓인 피로를 회복하기에도 급급했다.
올해는 6월, 8월, 9월, 10월, 11월 연달아 전시회를 주관하게 됐다. 국내기업이 적게는 50개사에서 많게는 400개 사가 참가하는 전시회를 국내와 해외에서 개최하면서 전시회에 방문할 바이어 유치 업무를 담당한다.
몇 주 정신없이 준비하다가 어무이 밥이 그리워 도저히 못 버티고 양평으로 도피했다.
오랜만에 집에 가서 쉬고 있는데, 거실에서 아부지가 “ㅇㅇ아~!” 하고 쩌렁쩌렁하게 내 이름을 외치셨다.
방 침대에 누워있다가, 한 번은 인지상정으로 외면하고 두 번째에 “왜요오오옷~!!” 하며 거실로 튀어 나갔다.
30대가 되어서도 이건 여전히 바뀌지가 않는 것 같다.
소파에 배 불뚝 아저씨가 앞 상에 다리를 올려놓고, 반쯤 누워 갤럭시 텝 화면을 휙휙 스크롤하며
작은 스파이크가 달린 축구화를 사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며 제품 사진 클릭부터 난항을 겪고 있다.
구석에 있는 작은 +버튼이 잘 안 눌리고, 스크롤을 위로 올려 제품 상세 설명을 봐야 하는데 뭐 하나 쉽지 않다.
어떤 걸 눌러야 신발 색상을 고를 수 있는지, 또 어떤 버튼을 눌러야 신발 사이즈를 고를 수 있는지 주문하기 버튼은 또 어딨는지 한 참을 헤맨다.
가까스로 장바구니에 추가 버튼을 누르고 결재 버튼을 눌렀지만 신용카드 번호 인증과 간편 결제 설정에서 혼절한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익숙한 세대인 나에게는 손가락 터치 몇 번이면 되는 인터넷 제품 구입이 아버지에게는 한 없이 어렵다.
가뜩이나 눈도 침침한데, 무엇하나 익숙하지 않은 화면에서 마치 잘못 누르면 핵미사일이 발사될 것처럼, 내가 '툭툭 툭툭툭' 거침없이 화면을 누르면,
급하게 좀 하지 말라며 버튼 하나 누를 때마다 큰일이 날 것처럼 반응하신다.
세상은 변하고 있고, 이미 많이 바뀌었는데 내 아버지는 아직 90년대다.
새로운 걸 받아들이기보단, 나에게 하듯 회사에서는 아래 직원들에게 시키는 게 편하고 익숙하신 거다.
화가 났다.
왜 화가 났을까.
아버지가 폰이나 인터넷으로 무언가 잘 못하시는 것이 화나는 게 아니라
새로운 것에 적응하기를 꺼려하심에 안타깝고 동시에 내 아버지가 외부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무시받을까 봐 그게 화가 났다.
우리 기관에는 수출을 하고 싶으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기업들에게 선생님처럼 멘토링을 해주시는 분들이 있다.
주로 무역상사에서 일했거나 대기업에서 30년 이상 해외영업, 무역업을 하신 분들이 정년퇴직을 하시고 우리 기관으로 넘어오신다.
정책상 매년 계약을 하고 만 70세까지 일을 할 수 있다.
해외 바이어를 어떻게 발굴하고, 미팅을 할 때는 어떤 것을 중점으로 협의해야 해야 하는지, 계약서에 반드시 필요한 조항은 무엇인지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겐 든든한 아군 역할을 해주신다.
나이대는 주로 50년대생 후반에서 60년대생 초반으로 이뤄져 있다.
내가 속한 부서는 고객 접점이 가장 큰 부서 중 하나로 우리 부서에만 그분들이 14명이나 된다.
현역땐 해외 법인장이나 사내이사까지도 하신 분들이 14명이나 있다.
부장님 실장님 이사님 14명과 함께 지내는 거랑 비슷하다.
다만 현역 때보다는 많이 내려놓으시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하며 속세에서 몇 걸음 벗어나신 느낌이다.
그분들이 나를 찾으실 때는 주로 컴퓨터로 무언가 할 때다.
프린트, 계정로그인, 각종 인트라넷 오류, 문서 편집, 엑셀 작업 등 다양한 이유로 나를 찾으신다.
그럴 때면 나는 후다닥 가서 처리해 드리곤 한다.
그러면 깜짝 놀라시며 "이야 역시 우리 ㅇㅇ대리님이야~ 박사~ 박사~" 띄워주며 칭찬해 주신다.
내가 때때로 "출장비는 천 원입니다~" 하면 손주에게 용돈 주듯 지갑에서 천 원을 꺼내 재밌다는 듯 주신다.
나는 “감사함다~” 하고 천 원을 받고 자리로 돌아와서 모니터 한 구석에 모아놨다가 나중에 과자를 사 와서 같이 나눠 먹는다. 내가 장난스럽게 표현하며 도와드리면 서로서로 즐거워서 좋다.
나는 그분들이 내가 업무로 얼마나 바쁜지 잘 아시기에 나를 부르기가 미안해서 답답한 상황에서도 선뜻 못 부르시는 걸 잘 안다. 그리고 나도 이분들이 나름대로 혼자 해결해보려고 하시다가 안될 때 나를 부르신다는 걸 안다.
그분들도 이제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쉬이 시킬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스스로 하지 않으면 도태되어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알고 있다.
무엇보다 이제는 지난 수 십 년간 있던 직장을 떠나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시는 걸 잘 알기에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뿐이다. 나 또한 언젠가 그렇게 될 평범한 직장인이기에.
타 팀의 젊은 여직원이 그분들을 무시하는 걸 본 적이 있다.
우리 부서가 주관하는 작은 세미나 프로그램에 그 팀의 발표가 있었다.
발표자와 그녀의 동료 직원이 그분들을 마주치곤 나이대로 짐작했는지 회사 내 고위직인 것으로 헷갈렸는지 냉큼 90도 인사를 했다.
그리고 몇 분 후, 잘 못 생각했다고 판단했는지, 90도 인사가 민망한 건지, 목소리 볼륨 조절에 실패하고 "아 괜히 인사했네" 이러는 게 아닌가.
순간 너무 화가 나서 행사고 나발이고 일단 저것들 좀 눈앞에서 반쯤 접어서 치워버릴까 고민했다.
평범해 보이던 그 직원의 얼굴이 추해 보였다.
우리 부서에서는 5개월에 한 번 인턴을 뽑는데 내가 면접관으로 들어갈 때는 늘 이것 만큼은 체크한다.
많아야 23~5살 정도인 친구들이 위와 같은 여러 상황에서 예의 바르게 행동할 수 있을지, 아버지, 할아버지뻘 되는 분들과 어떻게 소통하고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말이다.
아쉽게도 인턴 중엔 이런 친구도 있었다.
꼴랑 인터넷과 스마트폰에 익숙하다고 그분들이 뭔가 해결해 달라며 요청하면 삐딱하게 아니 이런 것도 모르냐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게 아닌가. 아유 참.. 이 어린 중생이. 아직은 세상 보는 눈이 작은 옹이구멍이라 그렇게 밖에 세상을 마주하지 못하는구나 하며 속으로 한숨 푹 쉬고,
따로 조용히 불러서 본인이 하고 있는 '짜치는' 태도가 얼마나 인생 이류, 삼류 짓인지 잘 타일러 알려준다.
내가 화났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내 아버지가 어디서 그런 대우를 받길 원치 않는다.
그래서 화가 났었다. 마치 벌써 당하신 것처럼.
나에겐 그분들이 해외 무역 업무에서의 스승님이자 동시에 이미 30년 가까이 해외 이곳저곳을 누비며 활동하셨던 선배님들이다.
기본 2~3개 국어는 능통하신 분도 많고 무역과 관련된 사안에서는 눈에서 인광이 번뜩이는 분들이다.
월급쟁이 직장인 생활을 30년 이상 한 경력자분들에게는 하다못해 연금 플랜을 어떻게 짜고, 어떻게 돈을 모았고 집을 살 준비를 했는지 등 다양한 경험들을 들어볼 수 있다. 중간에 창업을 하셨던 분들은 어떤 이유로 회사가 망했고, 대기업 중진 역할을 하셨던 분께는 해외영업 실적 압박을 받을 땐 어땠는지도 들어볼 수 있다.
여담이지만 사드문제가 터졌을 때 중국지역 전체 매출을 담당하셨던 분이 있었다. 한국 본사 이사의 불호령에 비행기를 타고 오는 내내 비행기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던 그 마음을 생생히 들어보니 직접 겪진 않았어도 듣는 것만으로도 등에 식은땀 났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경영학 책에나 나올 법한 이제는 고인이 된 대우 창업주 얘기도 들어 볼 수 있었다. 전용기를 타고 온 회장을 새벽에 해외 현지 공항 활주로에서 갓 출시한 대우 티코로 픽업해 장관과 미팅을 하며 현지 투자 업무협의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에 그렇게 IMF가 터질 줄은 몰랐고 또 대우가 그렇게 무너질 줄도 몰랐다는 마치 영화 같은 이야기를 하셨다.
내 아버지도 유능했다.
사람과 관계를 잘 맽고 중간에서 업무 조율을 잘하신다. 급한 성격이지만 그만큼 실행력은 발군이라 거침없는 추진력으로 22살 때부터 지금까지 40년 넘게 농협에서 일하고 계신다. 실제로 양평에서 국민연금을 제일 오래 부은 직장인이라고 했다.
내 아버지는 한 마디로 '핵인싸'다
20대 시절 고향인 하남을 떠나 양평에 있는 농협으로 발령받았고, 그 옛날 시골 농부들의 지역 텃세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자리를 잡으셨다.
내가 초등학생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어린 나이였음에도 기억이 또렷이 난다. 문상객이 너무 많아 그 큰 장례식장이 공간이 부족해서 병원 지상 주차장까지 다 써가며 캐노피 천막을 쭉 깔아놓고 문상객들을 받았다.
내가 성인이 되고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지인들에게 부고 메시지를 보내라며 핸드폰을 주셨을 때 저장되어 있는 연락처만 5천 개가 넘었다.
우리 집을 지을 당시에도 아버지가 아는 지인들로만 해서 집을 완성할 정도였다.
이런 식이다. "아 그거 오 알지 알지 건축하는 지인 누구, 전기 작업하는 누구, 조경하는 누구, 원두막 짓는 누구, CCTV 하는 누구.."
내 아버지 시대의 가장 중요했던 능력은 아마 지역주민들, 특히 지역의 주요 경제주체였던 농사와 관련된 사람들과 네트워킹을 하며 그들이 생산한 농산물을 매입하고 판매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정말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억센 토착인들의 텃세에 외지인이 섞여 들어가려면 얼마나 서글서글하고 능글맞아야 했을지, 정말 고생 많이 하셨을 것 같다.
시대에 뒤처짐을 한탄해야 하나, 시대에 뒤처짐에 이제는 내가 도와드릴 차례가 온 건가.
며칠 뒤, 양평 집에서 푹 쉬고 돌아와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오전 11시쯤 아부지한테 전화가 왔다.
보통 이 시간엔 전화 안 하시는데? 항상 의외의 시간에 전화가 오면 불안하다.
누군가 다쳤거나 별로 안 좋은 소식은 아닐까 싶어서.
핸드폰 너머로 다급한 소리로
"ㅇㅇ아! 지금 내가 관광버스 타고 어디로 이동 중인데,
갤럭시 탭이 인터넷이 안된다. 이거 어떡해야 되냐?!
앞으로 3시간은 타고 가야 되는데 핸드폰은 화면이 작아서 불편해서 못 보겠다.
원래 자동으로 핫스폿인지 뭔지 그거 됐는데? 원래는 됐는데? 아니 글쎄 원래 됐었다니까 아~?!"
그렇게 몇 분 실랑이를 했다.
나는 아이폰 유저라 갤럭시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에서 핫스팟 연결하는 게 어색하다.
설정하는 순서도 다르고 기능 명칭도 다르니 이걸 말로 설명하는 건 더 어려웠다.
마치 테러 단체가 숨겨놓은 폭탄의 시계 초침을 멈추기 위해서 주인공이 수화기 너머로 대테러부대의 폭탄 전문가 지시에 따라 순서대로 전선을 자르는 데, 당최 뭔 소린지 잘 못 알아먹겠다는 그런 느낌이겠다.
귀에 이어폰을 끼고, 내 폰으로 '갤럭시 안드로이드 핫스팟 연결 방법'을 검색해서 그 화면을 보며
아부지에게 하나하나 설명했다. 설정에 들어가서 어떤 글씨를 클릭하고, 비밀 번호를 설정하고 저장을 누르고, 네트워크 이름 뭐를 눌러서 연결하고...
그렇게 20여 분 만에 가까스로 성공했다.
아버지는 이내 안심하고 아이고 됐다 됐어하시면서
"우리 아들이 최고다 최고" 하시곤 끊었다.
아니 취업했을 때도 들어보지 못한 우리 아들이 최고다 최고를 이걸로 듣다니. 거참..
전화를 끊고 잠시 멍했다가 실소를 터뜨리곤 이상하게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앞선 고민이 사라지고
그냥 이렇게 살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