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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정석 Oct 22. 2018

학생 J의 독서란

고등학생의 독서 이야기-1

취미와 특기를 적으시오

   독서. 나의 가장 첫 번째 취미 칸부터 가장 최근의 그것에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개근한 나의 만년 취미다. 개근상이라도 줘야겠다. 선생님께 취미가 뭐냐고 물었더니 내가 재밌어하는 일을 적으라고 했다. 특기는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적으라고 했다. 그래서 나의 취미와 특기는 독서가 되었다. 취미가 독서라니, 이 얼마나 진부한 말인가. 내 취미를 밝힐 때면 그래서 진짜 취미는 뭐냐고 묻는 어른들이 있었다. 진짜 취미라니, 그럼 가짜 취미도 있다는 말입니까.


  그냥 읽는 게 좋았다. 조용히 앉아 두 시간이든 세 시간이든 책을 붙들고 있는 게 좋았다. 어릴 때는 독서가 그저 재밌어서 했다. 조금 커서 보니까 나 같은 사람이 잘 없다는 걸 알았다. 책을 읽는 또래들은 많았지만 재밌어서 읽는 애들은 찾기 어려웠다. 아마도 독서의 즐거움보다는 다른 것의 재미를 알아채기가 더 쉽기 때문이리라.


  글을 빨리 배웠다. 아버지는 내가 성경을 빨리 읽기 바라는 마음에서 가르치신 것이지만 아주 어릴 때 읽은 것은 만화가 대부분이었다. 그렇다고 후회하지는 않는다. 내 방에는 교육만화 시리즈가 수두룩히 꽂혀 있었는데, 나중엔 읽을 게 없어서 똑같은 책을 다시 읽고, 다시 읽고, 다시 읽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어떤 것을 보더라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힘이 그때 읽었던 수많은 만화책들 덕인 것 같다.


  독서는 쉽지 않다. 몇 시간씩이나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곳을 응시하는 일이다. 누군가 방해할 수도 있고 지루할 수도 있으며 몸이 피곤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쉽게 빠져들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마음에 드는 책을 읽고 있으면 식사도, 공부도 의식에서 멀어진다. 물론 그만큼 좋다는 것이겠지만.


그 정도면 책 그만 읽어도 되지 않아?

  고등학생들의 독서란 고달프다. 재미있어서 읽는 게 아니라 읽어야 하기 때문에 읽는다. 대학 입시에 필요하기 때문에, 부모님이 읽으라고 했기 때문에, 남들이 다 읽고 있어서 불안하기 때문에. 그렇게 책을 집어 든다. 책과는 담쌓고 지내던 친구들이 입시설명회에 다녀와서는 "저 대학에 가려면 독서활동란에 적어도 몇 권은 있어야 한대." 하며 도서관에 줄을 선다. 한참을 고르더니 진로와 맞는 책이 없다면서 재미있어 보이는 소설책을 고른다. 그리고는 그 책마저도 열 페이지 남짓 읽고는 대출기간이 다 되어 반납한다.


  학생들이 이토록 독서와 친하지 않은 것은 왜일까? 분명 독서는 권장된다. 아무도 독서가 유해하거나 쓸데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독서는 친근하지 않을까. 아마도 독서보다 공부가 우선이라는 암묵적인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 자습시간에 텅 빈 책상 위에 책 한 권 덩그러니 펼쳐 놓고 읽는 학생은 아마도 선생님에게 좋게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책 읽는 그 학생도 주변에 공부하는 친구들을 보면 마음 편치만은 않을 것이다. "음.. 독서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내신을 먼저 챙기는 게 좋지 않겠니?" 마음속에서든 바깥에서든 책 읽는 학생에게 꼭 들리기 마련인 말이다.


  지난 학기에 16권의 책을 읽었다. 내 독서활동란을 보고는 너무 과하다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렇게 많이는 필요 없을 거라나. 필요하기 때문에 읽은 것이 아니다. 읽고 싶었기 때문에 읽었다. 지금 책을 읽지 않으면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서 읽었고, 다음 페이지의 내용이 궁금해서 읽었다. 도장에 나가 태권도를 수련하고 축구를 하고 게임을 하듯이, 하고 싶었기 때문에 읽었다. 왜 독서란 취미는 다른 취미와 다를까, 아니 왜 온전한 취미가 아닐까. 어쩌면 독서가 학생들에게는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즐거워서 읽어본 적은 없지만 많이 읽으면 유리하기 때문에. 결국 학생부에 기록을 많이 남기고 내신 잘 받는 사람이 장땡이다. 그것이 대한민국 모든 학생을 붙들고 있는 대전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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