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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정석 Nov 08. 2018

닳은 취미들

떨어진 내 부스러기를 돌아보다

    어릴 때부터 이상한 습관이 있었는데 공책을 쓸 데 없이 많이 사는 것이 특히 그랬다. 내 책상 주변에는 한 두장 쓰다 만 노트들이 수북히 쌓여있었고 또 새 계획을 그럴듯하게 세우려고 다른 노트의 맨 첫 장부터 쓰기 마련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 어렸었구나 생각이 들면서도 나름 그때의 심리를 떠올려낼 수는 있다. 노트는 나에게 두서 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도구였고, 무의식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나보다. 공부를 지겹도록 하면서는 점점 엉뚱한 생각을 하지 않게 되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더이상 노트만 보면 사다놓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단지 어릴 때 사놓았던 노트들이 아직도 내 방에 남아있기 때문에 '저걸 또 산다면 난 아직도 어린 거야' 하면서 지나칠 뿐이다. 그런데 가끔은 그렇게 쓸데없이 공책들의 두께와 마감과 재질을 유심히 들여다 보면서 무엇을 살지 고민했던 기억들이 순수했던 때문인지, 무지했던 때문인지, 그리워진다.


    우리의 취미는 다 어디로 갔을까. 실없거나 변변찮은 습관이나 취미들, 버릇들을 우리는 각자 많이 갖고 있었을텐데. 학교 앞 문방구에서 딱지를 사다 모으고 화장실에서 전쟁을 벌이고 누구의 좋아하는 감정을 놀려대고 하던 우리의 작고 의미없던 놀이들이 이제 점점 그리워진다. 우리에게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수업 내용을 잘 정리하는 방법, 중요한 수업에서 졸지 않는 법, 떠드는 다른 아이들 옆에서 집중하는 법 따위가 전부다. 하나 둘씩 스스로의 일부들을 가만히 내려놓고는 안개 속에 묻힌 대입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어릴 때부터 남들 다 다니기 시작하는 학원에 가는 대신 태권도와 피아노를 배웠다. 사실 이 둘은 배운다기 보다 익힌다는 표현이 더 맞다. 머리 속에 잘 정리하면 되는 지식이 아니라, 내 몸에 새겨넣고 연습해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는 태권도, 피아노, 미술학원이 함께 있는 복합건물에 다녔다. 피아노 학원에서 만난 어떤 애가 미술 학원도 다닌다고 하면 부모님께 졸라 미술 학원도 다니고 하는 분위기였는데, 그래서인지 학원 3개를 모두 다니는 애는 뭇 아이들의 부러움을 샀다. 또래들이 모여들고, 조금 더 큰 형, 누나들을 만나고 하는, 학교 같은 곳이었다.


    중학생이 되면서 점점 주변에 취미를 배우는 친구들이 없어졌다. 누구는 체르니 40번까지 배우고 그만뒀다고 하고, 누구는 태권도 2품을 따고 그만뒀다고 했다. 이젠 공부해야 할 때라고 했다. 그렇게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나는 많은 또래들을 도장에서 보지 못하게 됐다. 같이 4품을 따자고 약속했던 어떤 동생은 도장을 그만두고 과학고에 조기입학했다. 이제는 같은 반에서 음악 하는 친구 하나도 찾아보기 어렵다. 체르니 30번까지 했다는 어떤 친구는 이제 코드도 연주할 수 없다.


    다른 학생들에 비해 취미를 여럿 가졌었다. 어떻게 보면 공부하는 데 시간을 덜 썼다고 할 수도 있다. 피아노, 가야금, 프로그래밍, 마술, 작곡 등등. 이제는 취미를 더 가질 시간도, 여력도 없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것들 다 해봐서 후회는 없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중에 어릴 때 갖지 못했던 취미를 후회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런데도 학교의 삶이 이렇게 둔탁하고 삭막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어릴 때 함께 공유하고 수다 떨었던 많은 취미들, 그렇게 불거져 나온 유치한 논쟁들이 이제는 철이 들어서인지 아니면 시간이 없어서인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닐까. 즐길 수 있는 무언가가 이제 몇 남지 않았다는 사실은 곱씹을수록 슬픈 일이다. 동그란 딱지와 네모난 딱지 중 어느 것이 더 센지, 누가 더 품새를 잘하는지, 누가 학교에 큐브를 들고 와서 누가 맞추었는지, 이제는 우리 모두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져간다. 그저 유년의 추억들로 남는 취미가 다시 생각나는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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