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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정석 Mar 09. 2021

신영복 옥중서간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그맘때의 생각



    먼저 글을 시작하기 전에, 이 글은 최근에 쓴 글이 아니라 거의 일 년 전에, 그러니까 온라인 유학을 시작하기도 전에 망해버린 갭이어 기간 한가운데에서 쓴 글이라는 것을 소개해 두고 싶다. 그맘때쯤의 나는 처음 겪어보는 목적 없는 시간 속에서 반쯤 헤매고 있었는데, 그런 성격의 시간은 사람을 생각보다 빨리 무너지게 한다는 사실을 몸소 깨닫고 있었다. 원래 계획은 가을 입학 전에 출간을 통해 들어온 수입으로 파리에서 한 달 살기를 감행할 계획이었지만, 코로나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집에 갇히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내 갭이어가 그렇게 날아갔다. 그러다가 신영복의 옥중서간을 만난 것이다. 거의 수감자나 다름없는(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생활을 하다 보니 책의 문장에 깊게 공감할 수 있었다. 이 글을 쓰고 읽어보니 너무 급하게 써진 글이라는 느낌이 들어 브런치 작가의 서랍에 넣어놓고 묵혀왔던 글인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내 정체성과 멀어질 글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아직도 글에 담긴 몇몇 감정들은 지금까지 갖고 있기 때문에, 더 늦기 전에 이곳에 남겨보려고 한다. 우울함 속에서 써진 글은 종종 두서가 없고 침체되는 경우가 많지만, 적어도 신영복의 문장에서 느낀 감정들은 여전히 나에게 유효하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글쓰기를 시작하려는 마음과 맞아떨어지는 글이기도 하다. 



고립되어 있는 사람에게 생활이 있을 수 없다. 생활이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정치적, 역사적 연관이 완전히 두절된 상태에 있어서의 생활이란 그저 시간의 경과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이 물질의 운동 양식이라면 나는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바위처럼 풍화당하는 하나의 물체에 불과하다.
신영복, ‘고독한 풍화’ 중


     나는 더 이상 고등학생 A가 아니다. 졸업한 지 네 달이 넘었고, 그만큼의 시간 동안 아무 존재도 아닌 채로, 그냥 나인 채로 있다. 졸업을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줄 알았다. 어릴 때 그렇게 가지고 싶어 했던 핸드폰을 가질 수 있게 되는 나이이자 내가 원하던 일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나이. 그게 내가 상상하고 있던 성인의 상태였다. 그런데 지금은, 새해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로, 미국 비자 신청서에 아무것도 아닌 나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다. 이런 게 내가 원했던 스무 살의 한 해였나? 사회적. 지난 다섯 달 동안 만난 사람들을 세라면 열 손가락으로 충분할 것이다. 친구들을 집으로 부르는 데에도 각자 충분히 안전한 삶을 살고 있었는지 서로 납득시켜야 하고 설령 부른다 하더라도 마스크를 쓰고 말을 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서 누구를 마음 편히 만나고 이야기를 하고 얼굴을 보기라도 할 것인가. 정치적. 이미 두절된 상태였다. 역사적. 작년까지 꾸준히 썼던 글들을 쓰지 않은지 너무 오래됐다. 쓰지 않는 상태로 시간이 흐를수록 내 글을 향한 자신감은 계속 떨어지는 중이다. 그렇지만 무엇을 쓸까. 아무런 소속도 없이 집에서 세끼 밥을 먹으며 연명하고 있는 상태에 대해 쓸 것인가? 스스로도 외롭지 않으려고 새로운 취미를 만들고 의미 없는 영상을 시청하고 있는 상태에서, 힘들다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쓸 것인가? 결국 아무것도 쓰지 않은 채로 시간은 뭉텅이로 흘렀고 내 지나간 5개월에 대해 먼 훗날 누군가 기록을 찾으려고 한다 해도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역사는 결국 기록으로 이루어지고, 기록이 없는 시간은 역사적인 의미가 없다.

 

     혼자 있는, 문이 닫힌 방에서 이런 문장을 읽고 있자니 내 몸이 돌덩이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스무 살 노정석의 몸은 지금 이렇게 앉아서 그저 풍화당하고 있는 건가. 시간이 물질의 운동 양식이라면. 시간이 존재하기 때문에 물질이 움직일 수 있는 거라면 움직이지 않는 나의 몸은 양식을 소비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러면 하나의 바위처럼, 나는 그 자리에서 천천히 깎여나가기만 하고 있는 걸까. 존 듀이는 ‘민주주의와 교육’이라는 저서의 첫마디에 살아있는 존재는 스스로를 갱신시키며 살아간다는 점에서 무생물과 다르다고 썼다. 그러면서 바위는 충격을 받고 부서지거나 그렇지 않거나 할 수는 있어도, 생명체처럼 그 충격을 자신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에너지로 삼을 수는 없다고 했다. 신영복의 바위와 듀이의 바위는 닮았다. 바위는 생활하지 않고, 서로 관계하지 않으며 고난을 극복하지 않는다. 그리고 신영복의 문장은 내가 그 바위와 같은 상태라고 말하고 있던 것이다. 취준생이나 고시생이 되어본 적은 없지만, 그 상태가 주는 피폐함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다. 자신을 주체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냥 지금 이 곳에 있는 물체로 인식하게 된다는 건 좋지 않은 경험이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채로 풍화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끊어진 세 고리 중에 하나는 이어져야 저 날카로운 문장에게 사람 취급은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사회적 연관이 당장 이어질 수 없는 고리라면, 나는 역사적인 존재라도 되어야겠다. 위인전에 실리고 싶단 말은 아니고, 서른 살 즈음의 내가 지금의 나를 찾을 때 흔적이라도 남아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사 후 방 청소를 하다가 발견한 초등학교 일기를 발견했을 때 초등학생 시절이라는 내 숨겨졌던 역사를 찾아낸 것처럼, 어떻게든 어제의 나로, 작년의 나로 지나갈 시간들이라면, 다시 찾으려는 사람에게 어디로 찾아오라는 쪽지 하나쯤은 남겨야 하지 않을까. 지금의 나는 두 달 전과 세 달 전의 나를 찾고 싶어도 찾을 수가 없다. 아무런 기록도 성과도 남기지 않은 시간이었으므로.


황금의 유역에서 한 줌의 흙을 만나는 기쁨이 유별난 것이듯, 수인의 군집 속에서 흙처럼 변함없는 인정을 만난다. 이러한 인정의 전답에 나는 나무를 키우고 싶다...  그 자리에 땅을 파고 묻혀 죽고 싶을 정도의 침통한 슬픔에 함몰되어 있더라도, 참으로 신비로운 것은 그처럼 침통한 슬픔이 지극히 사소한 기쁨에 의하여 위로된다는 사실이다. 큰 슬픔이 인내되고 극복되기 위해서 반드시 동일한 크기의 커다란 기쁨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작은 기쁨이 이룩해내는 엄청난 역할이 놀랍다.
신영복, ‘니토 위에 쓰는 글’ 중

     같은 책에 실린 작가의 다른 편지를 읽어보면 이 지극히 사소한 기쁨이 정말 사소한 일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료 수감자들과 밤에 깨어 가족을 이야기하는 일, 조용한 독방에서 책을 읽으며 생각하는 일, 창틀에 핀 꽃 하나를 바라보는 일이 감옥에 갇힌 사람에게는 큰 슬픔을 몰아내는 작은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이 이 변함없는 일상에서 피어나는 사소한 기쁨이 될 수 있을까. 그 사소한 변화의 기쁨이 지금은 필요하다. 세바시에서 강연을 진행했던 유현준 교수는 아파트 거실이 전통적인 가옥의 마당에 벽과 지붕을 첨가해 만들어진 공간이라고 말하면서, 두 공간의 차이가 변화 가능성에서 온다고 설명했다. 마당은 사계절, 날씨 등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공간이고, 거실은 정해진 가구와 인테리어가 유지되는 변화하지 않는 공간이라는 말이다. 거실에서 자연스럽게 텔레비전을 켜게 되는 이유도 마찬가지로 변화를 찾으려는 무의식적인 욕구 때문이라는 대목이 인상 깊게 남았다.

 

     내 방에서 변화하는 건 창문 밖 풍경뿐이다. 지난봄에는 집 앞 벚나무에서 핀 꽃들이 사각 프레임에 들어차더니 지금은 시퍼런 잎들이 빽빽이 우거져있다. 가을에는 떨어진 잎들로 땅이 누렇게 물들고 겨울에는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달이 잘 보인다. 산 중턱에 집이 있기 때문에 창 옆에 있는 책상에 앉아있을 때면 참새들이 열린 창 모서리에 와 앉기도 한다. 원하지 않았지만 강제로 집에만 있게 된 요즘, 반복되는 일상이 주는 무력감을 해결해줄 수 있는 자연의 변화에 조금 더 집중하게 된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잘 모르고 있던 풀들의 이름과 한나절 비가 오고 나면 불쑥 자라 있는 잔디의 모양새 같은 것들에 관심이 생기고는 한다. 가장 깊은 슬픔이 지극히 사소한 기쁨에 의하여 극복된다는 사실은, 여전히 무기력한 나의 글과 생활에 조금이나마 변화의 여지를 던져준다.


 무기징역이라는 길고도 어두운 좌절 속에는 괭잇날을 기다리는 무진장한 사색의 광상(鑛床)이 원시로 묻혀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저는 우선 제 사고(思考)의 서랍을 엎어  전부 쏟아내었습니다. 그리고 버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물이나 인식을 더 복잡하게 하는 지식, 실천의 지침도, 실천과 더불어 발전하지도 않는 이론은 분명 질곡이었습니다... 진왕(秦王)의 금서(禁書)나 갱유(坑儒)의 도로(徒勞)를 연상케 하는 참담한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은 버려야 할 ‘것’, 챙겨야 할 ‘대상’이 둘 다 서랍 속의 ‘물건’이 아니라 생활 그 자체인 ‘소행이었기 때문이라 생각되었습니다.
신영복, ‘버림과 키움’ 중

 

     작가의 문장은 지금까지 읽어왔던 산문이나 문학과 사뭇 달랐다. 자주 한자어와 익숙하지 않은 표현들이 나타나 여러 번 표현을 곱씹게 했는데, 수 십 년 전에 써진 글인 탓으로 생각해보았다. 내게 있어 한자란 일간 신문에서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게 위해 표기되는 짤막한 단어나 어릴 때 배웠던 한자 학습지에 등장하는 언어였는데, 일반적인 책을 읽을 때도 한자가 병기되지 않는 시대에 태어나서 자라면 한자에 대한 이해도가 많이 떨어지는 것 같다. ‘중량’, ‘하중’, ‘중력’ 등 같은 글자가 들어간 단어들에 비슷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정도가, 한자를 시간을 들여 배우지 않은 학생들에게는 최선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책처럼,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서 접하던 고어는 아니지만 적당히 모르는 단어로 서술된 생각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새삼 한자어의 아름다움 비슷한 것을 알게 된다. ‘사침(思沈)하여야 사무사(思無邪)할 수 있다’, ‘고달픈 수정(囚情)들이 잠든 새벽녘’, ‘니토(泥土) 위에 쓰는 글’ 등 우리말로는 풀어서 써야 하는 미묘한 표현들을 익숙하지 않은 한문의 모습으로 접할 때, 낯선 것을 바라보는 호기심 같은 감정이 일어났던 것 같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뜻밖의 표현을 시의 구절에서 읽을 때처럼, 익숙지 않은 한자로 서술되는 생각은 한 번 더 생각할 시간을 만들어 준다.


     새벽마다 저는 두 개의 종소리를 듣습니다. 새벽 4시쯤이면 어느 절에선가 범종 소리가 울려오고 다시 한동안이 지나면 교회당의 종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러나 이 두 종소리는 서로 커다란 차이를 담고 있습니다. 교회 종이 높고 연속적인 금속성임에 비하여, 범종은 쇠붙이 소리가 아닌 듯, 누구의 나직한 음성 같습니다. 교회 종이 새벽의 정적을 휘저어놓는 틈입자라면, 꼭 스물아홉 맥박마다 한 번씩 울리는 범종은 ‘승고월하문(僧敲月下門)’의 ‘고(敲)’처럼, 오히려 적막을 심화하는 것입니다... 끊일 듯 끊일 듯하는 범종의 여운 속에는 부동의 수도자가 서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집은 닭을 키웠다. 그중에 수탉은 내가 실제로 본 닭 중에 가장 잘생긴 닭이었는데, 여느 프랑스 집 위에 올라가 있는 수탉 모양 철제 풍향계가 살아난다면 딱 그 모습일 것 같았다. 아무튼 이 수탉은 동틀 녘에만 우는 게 아니라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댔는데, 매일 새벽 한 시쯤 자려고 누우면 꼬끼오하며 한참을 울어댔다. 신영복이 감옥에서 듣던 범종 소리가 내게는 수탉의 울음소리가 아닐까 한다. 종소리가 정적을 깨어놓는 소리가 아니라 오히려 정적을 심화한다는 말이 와 닿아서 같은 문장을 여러 번 읽었다. 차도의 소리,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배경음악이 되는 도심의 아파트 단지와는 다르게 산속에는 그렇다 할 소음이 없다. 아침에 들리는 새소리가, 이따금씩 들리는 개들 짖는 소리가 전부다. 정적 가운데 있으면 그 정적을 인식하기 어렵다. 소음 가운데 있으면 소음에 무뎌지는 일과 비슷하다고 생각되는데, 정적 가운데서 주목할 만한, 그러나 주의할 정도는 아닌 소리가 들려올 때 비로소 내가 정적 가운데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나지막이 들려오는 새벽의 범종 소리를 ‘산이 부르는 목소리’라고 표현하지 않았을까. 


     내가 이 책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평소 수감자들의 삶을 자주 상상해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옥’이 포함된 책의 제목을 보았을 때 바로 집어 들어 읽기 시작했고, 지금까지는 접해보지 못했던 삶의 양식과 생각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대부분의 글들은 작가가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글로 이루어져 있다. 누군가의 안부를 묻기도 하고, 읽을 책을 보내줄 것을 부탁하기도 하고, 창 밖에 핀 꽃으로 시를 써보기도 하며 작가는 20년 간의 수감 생활을 글로써 남겼다. 한 권의 책으로 묶인 이 많은 사색의 흔적들은 분명 감옥이라는 특정한 공간의 덕이 아닐 것이다. 작가가 갖고 있던 삶의 태도는 최소한의 자극을 주는 몇 평 남짓한 방 안에서도 글을 읽고, 생각하고, 또 글을 쓰게 했다. 내게 있어 이 책은 단순히 한 사람의 삶을 엿보는 일을 넘어 한자로 써진 표현의 매력을 깨치게 하고, 단절된 공간에서 세상과 단절되지 않는 방법을 알게 하고, 무엇보다 기록하는 일의 가치를 알게 하는 책이었다. 

    무엇이 모두살이를 각살이로 조각내는가? 조각조각으로 쪼개져서도 그 조각난 개개인으로 하여금 흩어져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수많은 사람, 수많은 철학이 이것을 언급해왔음이 사실이다. 누가 그러한 질문을 나한테 던진다면 나는 아마 ‘사유’라는 답변을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개인과 개인의 아득한 거리,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을 위협하지 못하게 하는 벽, 인간관계가 대안의 구경꾼들 간의 관계로 싸늘히 식어버린 계절... 개미나 꿀벌의 모두살이에는 없는 것이다. 신발이 바뀐 줄도 모르고 집으로 돌아온 밤길의 기억을 나는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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