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라루스 혁명을 장식하는 저항의 노래들
80년대, 구소련이 붕괴되기 전. 고려인 빅토르 최는 록밴드 키노(Кино)를 조직하여 젊은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다.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등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던 소련의 사회상과 맞물려, 정작 그는 자신의 노래가 정치적으로 해석되기를 원하지는 않았고 그럴 의도도 없었다고 했지만 Rock이라는 서방 세계의 음악과 변화를 꿈꾸는 가사는 그 당시 변화의 열망을 부추기기에 충분했다. 키노의 대표적인 노래 중 하나인 변화(Перемен)의 가사를 살펴보자.
우리의 마음은 변화를 원한다!
우리의 눈은 변화를 원한다!
우리의 웃음과 눈물
그리고 혈광의 박동 속에서
변화! 우리는 변화를 원한다!
"Перемен!" требуют наши сердца.
"Перемен!" требуют наши глаза.
В нашем смехе и в наших слезах,
И в пульсации вен:
"Перемен! Мы ждем перемен!"
올해는 그가 의문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되는 해로, 이 노래는 공산주의의 붕괴 이후 동유럽과 러시아의 주요 시위들에서 항상 불려진, 이제는 '저항'을 대표하는 노래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2020년 여름, 벨라루스의 시위에서도 이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고, 시위에 참여한 DJ가 공연에서 이 노래를 틀었다는 이유로 10일간 구금되는 등의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벨라루스는 구소련으로부터 독립한 CIS 국가 중 러시아 의존도가 가장 높고 폐쇄적인 국가로서의 인상이 짙다. 나에게 있어 벨라루스의 첫 인상은 바르샤바를 방문했던 201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다페스트에서 바르샤바로 가는 야간 열차에서, 내가 잠을 자는 동안 내 앞에 앉는 사람들이 계속 바뀌었는데, 바르샤바에서 내릴 때 마지막으로 본, 집시소녀처럼 보이던 승객이 벨라루스의 수도 민스크행 티켓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 바르샤바 국립박물관의 특별전시. 벨라루스를 풍자하는 현대미술 전시회였는데, 사진으로 표현된 벨라루스의 모습은 마치 북한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도 그럴것이, 벨라루스는 '94년 루카셴코가 대통령으로 집권한 이후 지금까지 한번도 권좌에서 물러나지 않았고, 올해 26년 집권을 맞아 시행된 대선에서 또 다시 승리한 것으로 발표되었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 대해, 부정선거 의혹이 야권 후보로부터 제기되었고, 이 불꽃은 금방 사그라들지 않아 야권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루카셴코의 퇴진과 재선거를 요구하는 시위가 1개월째 지속되고 있다. 그 동안 루카셴코의 지배 아래 숨죽이고만 있던 벨라루스 국민들이 이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거리로 나왔으니, 가히 혁명이라 할 만하다.
1개월이 지났지만, 야권 주요 인사들이 실종되는 등 대립은 더욱 깊어지는 상황. 러시아와의 밀착관계가 깊은 나라이기에 러시아와 유럽 모두 촉각을 곤두세울 수 밖에 없고, 지금도 주요 서구 언론에서 많은 기사들을 쏟아내고 있다. 이 중에서 관심을 불러일으킨건, 벨라루스 시위대를 통해 울려 퍼지는 음악들.
루카셴코의 독재하에서 벨라루스의 Rock 뮤지션들은 정부로부터의 제재와 검열 때문에 자유로운 음악활동을 할 수가 없었고 음악만으로는 생계를 이어가기 어려웠기에 주차장 운영, 음악레슨 등의 부업을 병행해야 했다. 이번 시위를 통해, 그동안 억눌려 왔던 자신들의 음악을 펼칠 기회를 얻게 되었고 벨라루스 국민들에게 자유의 소중함과 용기를 북돋고 있다.
앞에서 소개한 키노의 노래와 더불어, 벨라루스 혁명을 응원하는 노래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는데, 그 중 가장 맘에 들었던 곡들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1) Грязь (Griaz’) – “Перемен” (Peremen)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키노의 Перемен을 오마주한 곡으로 코러스 부분에서 "우리는 변화를 원한다"는 키노 노래의 가사가 그대로 등장하는, 힙합 스타일의 곡이다. 이 곡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예전에 모두에게 사랑받았던, 밤낮으로 국가를 운영하느라 잠을 자지 못했던 아버지가 변해버리자, 주변 사람들과 모여 전쟁을 선포한다는 내용으로, 아버지가 현 대통령 루카셴코를 가리킨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흔히 벨라루스 이외의 지역에서 루카셴코는 "бацька", 즉 벨라루스 어로 "아버지"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2) Naka & Friends – “Вам” (Vam, 당신에게)
민스크 기반 록그룹 Naka의 노래로, 지난 2010년 야권 대선후보로 출마했던 시인 블라디미르 네클라예브(Vladimir Neklyayev)의 시에 곡을 붙였다. 그는 대선 이후 반란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수감되었다가 풀려난 이력이 있다. 이 노래에서 말하는 "당신"은 시위를 진압하는 경찰대로,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길래 날강도, 악당, 도둑이 되어 버렸는지 한탄한다.
3) TOR BAND - Мы - не "народец"! (우리는 작은 나라가 아니야!)
루카셴코는 자신이 벨라루스의 대통령임에도, 벨라루스를 비하하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한 때 벨라루스에서 화폐가치가 하락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화폐대란이 발생했는데, 루카셴코는 이들을 두고 "народец"이라고 조롱하였다. 이 단어는 "나라"를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단어로, 변방의 나라, 주변화된 나라라는 뜻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에 대해 벨라루스 시인 Valzhyna Mort는 "국민이라 부를 가치도 없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해석하였고, 이에 영감을 받아 Tor Band는 우리는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라고 루카셴코에게 선언하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ai9tQCrRsQ&feature=youtu.be
4) Зьміцер Вайцюшкевіч(Dzmitry Vaiciushkevich) - МУРЫ(Walls)
2010년 야권대선후보 네클라예프를 지지했던 바쉬케비치가 2011년, 폴란드 저항가 "Walls"를 벨라루스어로 개사하여 녹음하였다. 발매 당시에는 큰 관심을 받지 못했으나 이번 시위를 통해 재조명되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MKEITqEBJI
음악은 언제나 우리의 매 순간에 함께 하고, 거대한 저항의 물결이 이는 순간마다 언제나 음악이 있었다. 음악이 가지고 있는 생생한 선율과 진정성 있는 가사는 저항에 가담하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울려, 그들이 지치지 않도록 하는 원동력이 된다. 벨라루스의 혁명이 언제 종지부를 찍을지, 그리고 과연 재선거라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을지, 지금으로선 희망적이진 않지만 조금이나마 그 열망이 희미해지지 않기를 바래 본다.
올해 봄, 한국문학번역원에서 펴낸 벨라루스 시선집 <그래도 봄은 온다>를 구입했다. 동명의 시 "그래도 봄은 온다"는 얀카 쿠팔라가 1908년에 발표된 오래된 시이지만, 행 한나 하나하가 현재 벨라루스의 현장을 생생히 담아내고 있는 것 같다. 이 시의 마지막 연으로 이번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자유로운 힘이 끈으로 묶여
잠들어 있어도 겁내지 마라,
폭력이 진실을 억눌러도
죽음이 여기저기서 무덤을 파고 있어도
그래도 봄은 온다!
그래도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