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rra의 노래들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첫 영화 <자나(Zana)>. 코소보 지역의 알바니아 여인은 오랫동안 불임 상태이고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시어머니의 압박에 시달린다. 사실 그녀에게는 아이가 있었다. 코소보 전쟁 희생자 기념일. 4년의 짧은 인생을 살다 간 자나(Zana)의 이름을 카메라가 오랫동안 응시하고, 주술사에게 가는등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극복하지 못한 트라우마는 바로 세르비아군에 의해 자나가 학살된 사실과 연관되어 있다. 한 밤중 몽유명에 걸린 환자처럼 숲 속을 헤쳐나가는 여인. 무언가를 발견한 것일까.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에 한 여인의 구슬픈 노래가 흐른다. 기도와 위로, 주술이 뒤섞인 듯한 오묘한 느낌을 자아내는 노래. 이 노래의 제목은 자나의 자장가(Zana's Lullaby)'로, 어린 시절 이유도 없이 스러져야 했던 한 소녀의 영혼을 달래고 있다. 언어적 기원의 측면에서 다른 유럽어들과 전혀 다른, 인도유럽어 계열에 속하는 알바니아어로 부르는 노래.
영화에서 희생자 기념일에, 알바니아 국기가 걸려 있다. 코소보 전쟁의 배경을 안다면 코소보 지역에 왜 알바니아 국가가 걸려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알바니아인들은 1800년대부터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른 희생자로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신세에 처했고, 비록 지금 "알바니아"라는 국가는 유럽의 최빈국으로 그 영향력이 미미하지만 코소보를 비롯한 발칸반도 여기저기에 알바니아 인들이 퍼져 있고, 강경 민족주의자들은 "대 알바니아"를 꿈꾸며 알바니아인들을 위한 제국을 건설할 꿈을 가지고 있다. 얼마전 코소보 계인 인기 가수 "두아리파"가 자신의 트위터에 알바니아는 자생(Autonomous)한다는 내용을 암시한다는 게시물을 올렸다가 큰 논란에 직면했는데, 민족주의자들은 이 게시물을 크게 환영했음은 당연하다.
자나의 자장가를 부른 가수는 Andrra. 독일에서 태어나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로, 부모님이 알바니아계 코소보인이다. 첫 싱글 Kalle Llamen은 코소보 지역에 만연하던 조혼을 해야하는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 곡으로 주목받았다. 이후 안드라는 2014년 코소보의 여러지역을 여행하며, 농촌 지역의 여성들이 부르는 구전 민요들을 수집, 이를 기반으로 2017년 첫 앨범 PALINË 를 발표한다.
Kalle Llamen은 "램프를 밝혀라"는 뜻으로, 결혼하기 전날 밤, 가족들과의 마지막 밤을 보내는데 정전일 일어나자, 램프를 최대한 길게 밝혀서 가족들을 떠나기 전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길 원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뮤직비디오에는 코소보에서 전해 내려오는, 결혼식 날 신부들의 의식인 Temena가 현대적으로 해석되며 Andrra의 실제 친척들이 뮤직비디오에 참여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ieuLgbgUKs
앨범에 수록된 동명곡인 PALINË 역시 조혼을 앞둔 소녀 PALINË와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가사의 첫줄에서 "팔리네, 왜 이렇게 화가 나 있니?"라는 물음에 팔리네는 "우리 아빠가 나를 결혼시키려고 해"라고 대답한다. 이를 들은 화자는 이렇게 반문한다.
"나만큼 누가 널 사랑한다고,
나만큼 누가 널 아껴한다고,
나만큼 누가 널 신경쓴다고"
kush te do si une t'kam dasht,
kush t'i ngon si t'kom ndigue,
kush t'punon si t'kam punue,
결국 다음날 아침이 밝았고, 팔리네는 담담히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떠날 준비를 한다.
"오늘 나는 친구들을 떠나네
엄마의 사랑
그리고 언니의 사랑도"
sot t’lan shoqet e t’la loja
ty sot t’la dashnija e nanes
ty sot t’la dashnija e motres
그런데 뮤직비디오를 보면, 주인공 팔리네가 전통 의상을 입은 여성들 맞딱뜨리고 어딘가로 달려감으로써, 과거로부터의 인습에 저항하고자 하는, 가사와는 상반된 이미지를 감상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sPi07EC2w8
Andrra는 인터뷰에서, 코소보 지역을 여행하면서 이전 세대 여성들이 노래를 통해서만 자신들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었다는 지점, 그리고 이들의 노래가 비록 투박하지만 진정성과 알바니아 전통으로서의 정체성을 뚜렷이 드러냈다는 점에 흥미를 가지고, 이들이 부른 노래의 가사 속 내용을 가져와 새로 곡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kanagjegj, 즉 결혼식 전날 친척들이 불러주는 전통노래 형식에 흥미를 느끼고, 자신의 어머니 역시 조혼을 통해 결혼한 만큼 코소보를 비롯한 알바니아 사회에 여전히 남아 있는 조혼 관습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한다. 노래 중간의 가사 중에는 그녀가 만난 코소보 여성들의 노래가사에서 일부를 차용한 부분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은, 그녀가 조혼관습을 비판하기 위해 앨범을 작업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조혼 관습이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직접적으로 사회비판적인 메시지를 담기 보다는 모두가 주목하지 않는 코소보 사회의 현실을 담담히 이야기하고, 앨범을 듣는 이들이 스스로 생각할 여지를 만드는 것에 주력했고, 이 현상이 비단 코소보 뿐만 아니라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이기에 보편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조혼을 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아버지와 매우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안드라의 노래를 들어보면, 알바니아어 가사로 인해 이질성이 느껴질 뿐 완전히 현대적인 electro-pop 형식을 취함으로써 음악적 트렌드 역시 놓치지 않은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그녀의 실험과 고민은 이번에 선보인 영화 Zana 속 어머니와도 맞닿아 있다. 코소보 전쟁 후, 딸 Zana를 잃은 어머니는 딸을 잃은 슬픔을 추스리기도 전에 시어머니와 주변인들로부터, 어서 새 아이를, 그것도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린다. 이러한 압박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망령에 씌었다는 모함까지 받게되고, 결국 그녀는 영화의 마지막, 자신만이 할수 있는, 아니 필연적으로 할수밖에 없는 선택을 한다. 그리고 시대의 아픔에 스러져간 모든 코소보 여성을 위로하듯이, 엔딩 크레딧이 흐르면 잔잔히 Zana의 자장가가 흐른다. 아직 다수의 국가로부터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코소보. 그리고 그 속에서 더욱 큰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는 여성. 안드라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느껴질지 언정, 그 속의 울림은 깊은 잔향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