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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cques Apr 22. 2021

Babacar

France Gall

어제 소개했던 Claude Francois는 My Way의 원곡인 Comme d'habitude를 작곡했죠. 프랑크 시나트라의 노래가사와는 달리, Comme d'habitude는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후의 슬픈 마음을 바로잡고 평소대로 살아가겠다는 내용의 노래입니다. 실제 자신의 이별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그 상대는 바로 France Gall이었죠.


개인적으로, France Gall의 음악세계는, Michel Berger을 만나기 전인 60년대~70년대 초반과, Michel Berger과 결혼한 1973년 이후로 구분된다고 보고 있어요. 전자에서는, Chanson yeye의 스타로 떠오르며 남다른 외모와 톡톡 튀는 가창력으로 인기를 끌었지만, 화제에 비해 노래들의 깊이가 부족하여 커리어가 지속되기에는 한계가 있었구요. 게다가 그녀에게 곡을 주었던 작곡가들 뿐 아니라, 미디어나 소비자들은 성적으로 소비하려는 경향이 있었죠. 그 논란의 중심엔 Serge Gainsbourg가 있었습니다. 프랑스 갈에게 영광과 치욕을 동시에 선사했다고나 할까요? 그가 작곡한 노래 Poupée de cire, poupée de son(꿈꾸는 샹송 인형)로 프랑스 갈은 1965년 유로비전에서 우승하는데요.  자기는 밀랍인형이라는, 철저히 대상화된 가사의 노래지요. 다음해 세르쥬 갱스부르가 그녀를 위해 만든 또 다른 노래 Les Sucettes는 롤리팝이라는 뜻인데요. 표면적으로는 사탕을 좋아한다는 가사의 노래인데, 성행위를 묘사했다는 것으로 알려져 큰 논란이 되었습니다. 당시 프랑스 갈의 나이는 겨우 18세. 이 노래의 속뜻을 알고 불렀을리 만무했지만, 비난은 온통 그녀에게 쏠렸죠. 이후 그녀는 다시는 세르쥬 갱스부르의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세르쥬 갱스부르와의 사례 뿐 아니라, 1967년 발표한, Maurice Biraud와의 듀엣곡 "La Petite"는, 친구의 어린딸과 그 어린딸을 사랑하는 남자를 그린 노래였고, 사생활적으로는 당시 사귀었던 클로드 프랑수아가 프랑스 갈의 급부상안 인기를 질투하여 정신적으로 괴롭힌 것으도 알려졌죠. 이 일화들만 봐도 프랑스 갈이 대중문화에서 어떻게 소비되고 외면받았는지, 주위의 남자들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고통을 받았을지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프랑스의 성에 대한 의식은 정말 우리의 상식을 벗어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이후 잠시 인기가 주춤했던 그녀는, 1973년 뮤지션 Michel Berger와 결혼하여 전환기를 맞습니다. 남편의 영향으로 이전과는 확연히 비교되는, 좀 더 진중한 음악세계를 펼쳤고 남편과의 관계가 매우 좋아 그가 1992년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지고지순한 관계를 유지하였죠. 미셸 베르제의 마지막 앨범이 프랑스 갈과 함께 한 듀엣 앨범<Double Jeu>이었던 걸 보면, 음악과 인생의 동반자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음악과 더불어 프랑스 갈이 주목받는 것은, 생전 인도주의적 활동에 대한 관심과 참여 인데요. 특히 80년대에 미셸과 함께 아프리카 NGO 활동에 참여했고, 세네갈을 너무 사랑하여 이후에는 세네갈의 한 섬에 자택을 구입하여 매년 여러차례 찾아와 휴가를 보내기도 하였죠. 오늘 들으실 노래는 바로, 세네갈에서의 한 경험이 반영된 노래로 1987년에 발표되었습니다. 


J'ai ton cœur qui tape, qui cogne
Dans mon corps et dans ma tête
J'ai des images qui s'entêtent
J'ai des ondes de chaleur
Et comme des cris de douleur
Qui circulent dans mes veines
Quand je marche dans ma ville
J'ai des moments qui défilent
De ton pays d'ailleurs où tu meurs


나의 몸과 머리 곳곳에 

너의 심장이 뛰고 부딪혀 

나에겐 강렬한(몰두하는) 이미지와 

열기의 파도가 넘실대지 

그리고 고통의 함성처럼 

나의 혈관을 타고 흘러내려 

나의 도시를 걸을 때 

너가 죽어가는 네 나라의 순간들이 떠올라 


Ba-ba-car, où es-tu, où es-tu
Ba-ba-car, où es-tu, où es-tu
Je vis avec ton regard
Depuis le jour de mon départ
Tu grandis dans ma mémoire
Ha-ha, ha-ha
Ba-ba-car, où es-tu, où es-tu
Ba-ba-car, où es-tu, où es-tu


바바카 어디에 있니

바바카 어디에 잇니 

나는 너의 시선과 함께 살아가

내가 떠난 날부터 줄곧

나의 기억속에 네가 자라나 


J'ai des mots qui frappent, qui sonnent
Et qui font mal comme personne
C'est comme la vie qui s'arrête
J'ai des mouvements de colère
Sur le troisième millénaire
Tout casser et tout refaire
J'ai pas manqué de courage
Mais c'était bien trop facile
Te laisser en héritage un exil


나에겐, 누구 못지 않게 때리고 울리고 해롭게 하는 단어들이 있지 마치 멈춰버린 삶처럼 느껴져 세번째 천년 속에 분노에 차 움직이지 모든 것을 깨트리고 다시 시작해 난 용기를 잊지 않았지만 너무도 쉽게 너를 떠나고 말았지 


Ta princesse de hasard
Est passée comme une étoile
En emportant ton espoir


네 우연의 공주가 너의 희망을 앗으며 별처럼 너를 지나갔지


Babacar는 France Gall이 세네갈에서 만난 한 아이의 이름입니다. 어느 날 한 식당에서, 식당에서 일하는 엄마 옆에 Babacar가 있었어요. 프랑스 갈은 Babacar를 보고 귀엽다고 했는데, 그의 엄마는 프랑스 갈에게 자신의 아들을 데려가달라고 합니다. 아마 더 좋은 환경에서 아이가 자라났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프랑스 갈은 이 제안을 듣고 당황하고, 프랑스에 돌아온 후에도 계속 이 아이가 머리속에 떠나지 않았다고 해요. Michel가 상의한 끝에 입양은 결국 하지 않고 다만 Babacar에 대한 노래를 만들어 재정적으로 도와주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노래가 나오고 얼마 후 다시 Babacar의 엄마를 찾아가, 새로운 집을 마련해주는 등 지원을 해 주었다고 합니다. 여기까지가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논란이 될 수 있는 여지가 숨어 있었습니다. 프랑스 갈이 2018년 1월에 세상을 떠나고, 프랑스의 여러 언론에서는 이 노래의 주인공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 세네갈을 직접 찾아갔는데요. 그 중에서도 Paris Match가 취재한 내용에 따르면, 실제 사연이 알려진만큼 그렇게 감동적이지는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이 기사 하나로 모든 걸 믿을 수는 없겠지만, 생각의 여지는 남기고 있습니다. 


우선, 바바카의 엄마가 마치 프랑스 갈에게 제발 바바카를 데려달라고 애원했다는 식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인터뷰에서는 자신은 바바카를 남에게 줄 생각이 전혀 없었고 "그럼 꼭 데려가셔야 겠네요"라고 농담을 한 것인데, 마치 자신의 가정환경이 어려워서 부탁한 , 비정한 엄마인 것처럼 와전되었다고, 이제야 진실을 말할 수 있어 기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네갈 변호사 Seck이 고용되어 가끔씩 아파트를 찾아오고 프랑스 갈의 편지를 전해주었다고 하는데요. 자신들을 신경써 준 것이 고마워, 프랑스에게 연락을 하고 싶고 다카르로 공연하러 올 때 직접 보고 싶었지만 Seck이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등 이들을 거의 감시하다시피 했고, 결국 나중에는 계약조건을 어겼다면서 아파트를 떠나라는 말까지 듣게 되었다고 해요. 바바카의 엄마는 이후로도 프랑스 갈을 계속 보지 못했구요. 게다가 프랑스의 한 언론에서는 프랑스 갈이 고용한 바바카의 유모였다고 주장하는 기사가 나왔지만, 바바카의 엄마는 한번도 이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고 했죠. 


이 모든 것이 중간에 고용된 변호사의 음모 또는 횡포일 가능성이 커 보이죠. 프랑스 갈에게 사실대로 전달하지 않거나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습니다. 바바카에 따르면, 그는 2015년에 세네갈을 방문한 프랑스 갈을 만났고, 그 날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어린시절 이후 이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녀를 본 날이었거든요.  "네 주변에 아버지가 널 지키고 있어"라고 말하며 단번에 자신을 알아보고 따뜻하게 않아주었다고 하네요. 그런데 2015년의 다른 인터뷰에선 "1985년 이후 바바카를 본 적이 없고 뭘 하는지 모른다."고 말했다고 하는데요. 자신이 이미 미디어에 의해 희생당한 적이 있어서 바바카를 보호해 주고 싶어서 그랬던 건지, 자신의 사생활을 극도로 숨기고 싶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 동안 세네갈을 매년 방문했다면 바바카를 이전에도 만날 기회가 충분히 있었을텐데 왜 2015년이 되어서야 만났는지도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더욱 안타까운 건, 바바카는 프랑스 갈의 장례식에도 초청을 받지 못했다고 하네요. 그래서 더더욱 슬펐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사실과 달랐다고 추정되는 내용에도 불구, 바바카는 여전히 프랑스 갈을 그리워 하고 그녀와의 인연을 소중한 기억으로 간직한다고 기사는 마무리하고 있는데요. 이 외에 다른 자세한 기사들을 찾을 수가 없고 프랑스 갈과 당시 세네갈 변호사는 모두 세상을 떠났기에 정확히 판단을 내릴 수는 없겠습니다. 당시에 이 노래가 큰 인기를 끌면서 세네갈을 비롯한 아프리카의 현실을 서구 사회에 각인시키고, 프랑스 갈 본인도 세네갈에 대한 특별한 마음을 표현할 만큼 끊임없이 활동에 참여했다고 하는데요. 다만, 국제개발 NGO와 관련해서 꾸준히 제기되는 문제인 "빈곤의 대상화," "불행 포르노"와 이 노래가 실제로 기능했던 방식이 무관하지 않은 것 같아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Do they know its Christmas?"라는 노래가 비판받는 이유도 이 지점에 맞닿아 있죠. 오늘은, 노래가 품고 있을 양면적인 속성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어요. 


https://youtu.be/Q9hyz_7-0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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