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orgy Sviridov
날씨가 부쩍 추워졌네요. 눈이 내린 곳들도 있구요. 이런 날에는 항상 러시아 음악과 문학을 찾게되지요. 코로나19직전 제 마지막 여행은 2019년말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이르쿠츠크에서 내려 바이칼 호수를 보는 여정이었는데요. 약 3일 반 가량의 기차 여정에서 읽고 들었던 작품이 있습니다.
1900년대 출생임에도, 새로운 경향의 음악 대신 러시아의 후기낭만음악을 충실히 이어받은
Sviridov의 음악에는 러시아의 민속음악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영화음악, 관현악, 러싱의 시에 붙인 가곡들 등 당시 러시아/구소련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음악들을 작곡함으로써 구소련 정부의 신임을 얻었고, 인민예술가로서 스탈린 시절과 이후 소비에트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1982년 소련이 발견한 소행성에도 Sviridov라는 이름이 붙여질 정도였지요.
오늘 들어볼 음악은 러시아의 국민 문호 푸쉬킨의 <벨킨 이야기>에 수록된 두번째 이야기 <눈보라(Метель)>를 음악으로 구현한 작품으로, 원래는 1964년 동명 영화음악으로 작곡된 후 1975년 관현악 모음곡으로 편곡하였습니다. 구소련 시절에는 아련하고 슬픈 정서를 지닌 일종의 대중음악인 '러시안 로망스'가 대세를 이루며 당시 구소련 국민들의 심금을 울렸는데요. 이 작품 역시, 눈보라로 인해 어긋난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던 두 남녀의 슬픈 사랑이야기입니다. 아니, 세 남녀라고 보는 게 맞을텐데요. 고전적인 전개 속에 눈보라로 인해 초래된 예상치 못한 반전이 깊은 여운과 안타까움을 남깁니다.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운명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는 것, 인생이 우리 마음대로 흘러갈수는 없다는 당연한 진리를 일깨우는데요. 근데 이상하게도, 저는 이 이야기의 결말이 여기서 끝나지 않고 왠지 더 이어질거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떻게든 이들에게 희망의 서사를 부여하고 싶은 마음이 큰 나머지, 이 이야기는 결코 비극이 아닐거라고 혼자 염원했거든요. 여기서 줄거리를 이야기하면 재미없으니, 직접 <벨킨 이야기> 책을 읽어보시길 바랄게요. 이 작품 뿐만 아니라 나머지 네 작품도 모두 훌륭하고 재미있습니다.
이 작품을 읽으신 후 음악을 들으시면 정말 눈보라가 치는 풍경이 저절로 눈앞에 펼쳐질거에요. 러시아 특유의 왈츠부터 애잔한 로망스까지, 한편의 문학작품을 음악으로 충실히 표현하고 있거든요. 이 음악은 총 9개의 파트로 이루어져있는데요. 그중에 네번째 곡인 로망스가 가장 유명하고, 오케스트라 레퍼토리로 자주 연주됩니다. 두번째 곡인 왈츠도 잘 알려져 있지요.
(아래 영상기준)
00:00 1. Тройка(트로이카, 삼두마차) 03:04 2. Вальс(왈츠) 07:21 3. Весна и осень(봄과 가을) 09:32 4. Романс(로망스) 14:42 5. Пастораль(전원) 16:49 6. Военный марш(군악 행진) 19:21 7. Венчание(결혼식) 21:51 8. Отзвуки вальса(왈츠의 메아리) 23:44 9. Зимняя дорога(겨울길)
가장 유명한 4번째곡 '로망스'입니다.
영화의 분위기와도 무척 잘 어울리죠?
겨울의 스산하고 쓸쓸한, 동시에 낭만적인 분위기가 담겨 있기에 피겨스케이팅 음악으로도 종종 등장하는데요. 김연아 선수의 주니어 시절 Short Program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설원위의 스케이터들의 모습이 마치 푸쉬킨 소설의 주인공들을 떠오르게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