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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셔스식 레게(Seggae), 혁명의 메아리

Ras Kouyon - Kaya

by Jacques

최근 일본이 저지른 불미스러운 유조선 침몰로 인해, 뉴스에서 그 어느 때 보다 모리셔스의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남의 나라 바다를 더럽힌 것도 모자라 미온적이고 책임회피적인 모습에 분노한 모리셔스 국민들은, 돌고래의 사체가 발견되자 그 분노가 극에 달했고 이 사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총리의 퇴지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국내의 한 언론에서는 이번 시위가 40년만에 최대규모라고 했는데, 정말 40년동안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해 왔을까. 혹시 그 평화가 폭압적인 정부에 따른, 평화를 가장한 모습은 아닐까. 모리셔스는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에 비해 비교적 안정적인 경제와 소득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이러한 설명이 설득력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에 대해 모리셔스의 소설가 린지 콜렌(Linsey Collen)은, “모리셔스는 다인종이 평화롭게 조화를 이루며 사는 다문화사회”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나, 역사를 돌이켜 봤을 때 크게 세 번의 동요가 있었다고 전한다. 첫 번째는 1968년 인종차별 철폐를 통한 독립 전쟁, 1979년 총파업(아마 국내 언론에서 이 파업 이후 40년만에 큰 시위가 일어났다고 이야기한 듯 한다.), 그리고 1999년 공권력에 대항하는 봉기.

기사를 쓴 분이 1999년 봉기를 몰라서 “40년만”이라는 말을 쓴 건지, 이 봉기의 규모가 예전의 소요사태에 비해 적었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리셔스 인들에게 있어 1999년은 잊을 수 없는 해로 기억될 듯 하다. 바로 이 봉기가, 모리셔스인들이 사랑하던 뮤지션 Kaya가 경찰에 구금 된 후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되면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레게는 저항과 평화의 음악으로 인식되는데, 이 레게 장르는 모리셔스에서 전통음악형식인 Sega와 융합되어 세게(Seggae)라는 모리셔스 식 레게로 재탄생했다. Sega 음악 자체가 흑인 노예와 그 후손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음악이기에, Seggae역시 본질적으로 저항적인 속성을 내포하고 있었고, 뮤지션 Kaya는 바로 이 세게 장르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Kaya의 노래 중 하나인 나의 음악(Mo La Muzik)의 가사 일부분을 살펴보자.

이것이 나의 음악. 세게는

정신적 속박으로부터의 해방

Sa mo lamizik seggae pou

liberasyon mantalite kaptivite

이것이 나의 음악. 세게는 너가 어디에 속했든

그 곳에 행복을 가져 준다네.

Sa mo lamizik seggae pou

egeye tou kalite nation ki to ete

카야 역시 크레올로, 16살때부터 기타를 배우며 음악을 시작, 우연히 밥 말리의 음악에 크게 경도되어 그의 노래제목을 따라 자신의 예명을 Kaya로 명명한다. 밥 말리에 대한 경애심은 자연스레 레게 대한 숭배로 이어지고, 밥 말리의 음악을 오랫동안 연구하고 고민한 끝에 1986년 모리셔스 식 레게인 Seggae를 창시, 모리셔스 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공고히 한다.

이러한 그의 저항적인 태도는 정부의 눈엣가시가 될 수밖에 없었다. 1999년, 카야는 크레올인의 인권을 위한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사법개혁을 촉구하였는데, 이 개혁의 중심에는 “대마의 합법화”가 있었다. 당시 모리셔스 감옥 수감자 전체 중 75%가 가벼운 마약 소지혐의로 수감되었고, 결국 이 마약을 빌미로 공권력이 남용되는 상황을 타파하고자 했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 모리셔스 정부는 보건, 교육, 연금의 민영화를 추진했었고, 이에 대한 국민의 저항은 더욱 커져 갔다. 이러한 반정부 시위와 공연에서 카야는 마리화나를 피운 것을 빌미로 경찰에 잡히고, 석연치 않은 이유로 구금해제일이 연기되더니 1999년 2월 21일, 난데없이 주검으로 발견되는 일이 벌어진다.


경찰은 공식발표를 통해, 카야가 자신의 몸을 벽에다 던지다 두개골이 손상된 점을 사인으로 규명하였지만, 레위니옹 출신의 주치의였던 Ramstein은 구타에 의한 사망이라고 폭로함으로써, 경찰의 발표를 뒤집어, 모리셔스 사회에 큰 충격을 안기고, 이것이 바로 1999년 봉기의 시작점이 되었다.

시위대는 Kaya의 죽음에 대한 진상 규명을 촉구함과 동시에, 그 동안 차별받았던 크레올 인권을 보장할 것을 주장하였고, Kaya의 노래를 부르며 행진하였고, 가장 많이 불렸던 노래가 Ras Kouyon이다. 이 노래는 독립 이후에도 모리셔스에 여전히 남아있는 식민지성과 인종, 계급에 따른 차별을 타파해 나가자는 저항의 의미를 담았다. (참고로 모리셔스에서는 인도계 힌두인이 주요 경제권을 독점하고 있다고 한다.) Ras Kouyon이라는 제목 자체가 “무지한 인종”이라는 뜻이니 그 의미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거짓된 문화와 미신에

지배당했네.

Noun fini fini fini fini devoster

Avec foss kiltir ek siperstisyon


노예화됨으로써 우리에게 어둠과

절망이 찾아왔네.

Lesclavaz finn sanze finn vinn

mizer noir


좋은 것은 무시당하고

나쁜 것이 정상인 것처럼 되었네

Pran bon pou pa bon

Pran pa bon pou bon


크레올 언어를 살펴보면 프랑스어 단어들이 철자는 다르나 비슷한 발음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기존 토착어에 식민 국가의 언어가 혼합되어 독특한 언어가 탄생된 결과이다. 특히 카야는 이 노래를 통해, 그 동안 밥 말리의 정통 레게를 추구하던 모습에서 벗어나, 레게의 리듬에 모리셔스의 Sega를 점복하여 아프리카와 카리브 지역의 음악을 하나로 묶고, 정치적인 메시지 역시 놓치지 않음으로써 Seggae의 기원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Kaya의 죽음으로 촉발된 1999년 봉기는 힌두인과 크레올인 간의 인종차별, 나아가 국가에 대한 저항으로 그 성격이, 확장되었고 시위 이후 모리셔스 정부는 신탁기금 조성을 통해 그 동안 경제적으로 열악했던 크레올인의 소규모 사업을 지운함과 동시에, 인종간 화해와 사회적 통합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약 20년 뒤, 모리셔스는 지금 또다른 위기의 시험대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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