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일, 하셨더라면

부질없는 후회

by 자크슈타인


군대에 장교로 가려고 하셨던 아버지. 출판사를 운영하신 평생의 절친이 군대에 말뚝 박지 말라고 하는 조언에 사병으로 다녀오셨고, 9급부터 시작해서 행정직 공무원의 길을 걸어가셨다.

이후 아버지의 공직 생활이 잘 풀리지 않을 때면 아버지는 심심하면 친구분께 농반진반 ‘내가 군에 갔으면 별을 달았을 텐데 너 때문에 꼬였다’ 하시며 짓궂게 탓을 하시곤 했던 기악이 난다.


동대문구청, 서울시청 등을 거치며 행정가로서 공무원의 커리어를 착착 쌓아오셨던 아버지의 보직에 좀 다른 변화가 생긴 것은 88 서울 올림픽을 앞둔 시점, 지금도 있는 한강관리사업소로 발령이 나신 일이었다.


고속 발전의 그늘 아래 수질이 나빠진 한강의 수질을 개선하고 한강의 유량 관리, 수변 관리를 체계적으로 하고자 만들어진 기관이었다. 그때는 세계인의 스포츠 축제이자 사상 최초로 전 세계적인 국제 스포츠 이벤트를 개최하게 된 그야말로 국뽕이 차오르던 시절,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이게 아름답고 깨끗한 한강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였기에 엄청나게 바쁜 조직이기도 했고 여름 장마철이면 홍수에 대비한 비상근무로 비상이 걸리는 날마다 새벽출근을 하셔야 했었다.


이후에도 아버지는 시청의 과장급 직위로 공무원 생활을 계속하시다가 마지막에는 OO구청의 재무국장을 마지막으로 33년의 공직생활을 마무리하셨다. 국민의 공복이라는 마음으로 청렴한 공직생활을 하셨던 아버지는 늘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계셨다. 그래서 재테크는 커녕 너무 고지식하셨기에 일 외에는 잼병이셨다고나 할까. 어머니가 아주 간단한 선물이라도 받아둘라치면 어디 공무원 아내가 그런 걸 받냐고 하면서 호통을 치시고 당장 돌려보내야 했다. 사실 딩동 하고 초인종을 눌러 문을 열어보면 ‘사모님 안녕하세요, 저 누구누구입니다’ 인사만 하고 가지고 온 물품을 어머니께 그냥 안겨드리고 바로 가버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런 경우 어떻게 일일이 한사코 안 받고 쫓아 나가서 다시 쥐어준단 말인가.


암튼 워낙 유별나게 그러신 탓에 어린 마음에도 아버지의 청렴함에 대한 감탄과 존경심을 가질 수 있었지만, 반대로 어머니가 주도하는 우리 집의 재테크에 그 유별남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고, 오히려 정상적으로 해도 되는 일까지 막으시는 바람에 우리 집의 가세는 드라마틱하게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번 놓쳤더랬다. 나중에 자식들이 좀 더 커서 어머니께 그런 비하인드 스토리를 듣고는 삼형제 모두 이구동성으로 우리 집이 재복은 없나 보다며 혀를 찼던 기억이 난다.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알길 없던 당시의 아버지에게 스트레스를 주었던 유일한 지점은 당신보다 한참 어린 친구들이 행정고시를 거쳐 바로 5급 사무관으로 와서 잰척하는 것이었다. 어려운 집안 형편에 고학을 하셨던 아버지는 빨리 돈을 버셔야 했기에 행정고시까지 준비할 수는 없었고 9급으로 시작하셨더랬다.


공직생활의 끄트머리에서 아버지는 행정가로서 행정 실무를 하셨던 경험과 경력을 살려서 지방선거에 나가려 하셨다. 당신께서 나고 자라신 고향의 지차체장이 되어, 내가 태어난 그곳을 좀 더 살기 좋은 지역으로 만들고 싶으셨던 게다. 선출직 공무원으로서 고향에 대한 기여를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셨던 그 마음, 조금은 알 것 같다.


당시는 김종필 총재의 자민련이 있던 때로 충북 영동이 고향이신 아버지는 자민련으로 출마하시는 걸 고려하셨는데, 실제 자민련 쪽 사람들이 소위 아버지를 엄청 꼬셨더랬다.


뜻을 모으는 사람들과 어떻게 얘기가 된 것인지, 일단 고향의 군수보다는 정년퇴임 당시 마지막으로 근무하셨던 서울시 OO구청장 선거에 나가려고 마음을 굳히신 듯했다.

그 이야길 집에서, 어머니에게 하시자 어려운 집안 형편에 재테크에는 관심 없는 아버지 대신 집안의 경제적인 대소사를 도맡으셨던 어머니는 엄청 반대를 하셨다. 오랜 세월 홀로 집안 살림을 꾸리며 계며, 저축이며, 부동산이며 이런저런 재테크까지 신경 써서 어렵게 어렵게 돈을 모으신 어머니로서는 이제 좀 살만 하니까 선거에 나가신다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우셨을 것이다.


선거에 미치면 집안 뿌리 다 흔들린다, 정치에 빠지면 패가망신한다.. 는 소리를 자주 들어온 것도 있고, 무엇보다 지금의 국힘인 당시 한나라당의 영남계가 주류 보수세력으로 버티고 있는 정치지형에서 충청도라는 지연을 고리로 자민련을 뒷배 삼아 선거에 나가시려는 것도 영 불안하셨을게다. 그래서 주변에서 아버지를 꼬시고 바람을 넣은 사람들을 무척 싫어하셨다.


그땐 자식들도 역시 아버지가 선거판에 나가시는 걸 좋아하지 않았고, 암묵적으로 아버지의 의사에 반대 표시를 했다. 가족 모두 아버지가 선거에 나가서 당선되어 당신께서 하시고 싶은 일을 하시며 보람을 느끼는 것은 좋았지만, 당선이 보장되지도 않는 불리한 여건에서 낙선에 대한 걱정이 앞섰던 것이 반대의 가장 큰 이유였다. 선거에 돈이 많이 들어간다는 것은 다 알고 있었고, 어머니로서는 어렵게 모은 재산, 월급 외에는 재산형성에 기여한 것도 없는 아버지가 말아먹을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두려움이 컸을 것이고, 우리 자식들은 아버지로 인해 집안형편이 어려워질 것에 대한 일말의 불안감이 있었던 것도 아닐까 싶다.


그렇게 옥신각신하며 서로 스트레스를 받던 와중에.. 결국 지지해 주는 가족구성원 한 명 없는 채로 어머니의 뜻을 꺾지 못한 아버지는 출마를 포기하셨다.


그 부분이.. 그 부분에 대한 후회와 미안함이 아버지가 암에 걸려 이미 손을 쓰기 어려운 말기 상태라는 의사의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자리에 주저앉아 무너지며, 어머니가 남기신 회한의 절규였다.


“너네 아버지 이렇게 가시면 안 된다.. 그때 선거에 나가고 싶다고 할 때 그러라고 할걸.. 하고 싶은 거 하게 해 줄걸.. 그게 뭐라고. 돈 좀 날리면 어떻다고.. 확실하게 믿어주고 지원해 줄걸.. 그걸 못하게 해서 스트레스 받아 암에 걸린 게 아닌가 모르겠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어머니의 절규하며 우시는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지나고 나면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후회되는 것.

내가 선택하고 결정했던 것과는 다른 길에 대한 아쉬움.

다른 길로 갔더라면 지금과는 다른 상황이지 않았을까 하는 회한. 하물며 반려자의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일에서야 오죽하셨을까.


66세.. 한창 때의 나이.

요즘엔 노인으로 치지도 않는 여전히 젊으셨던 시절.


가셔도 너무 일찍 가셨다. 우리 아부지..


돌이켜질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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