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夕陽)과 여명(黎明)

평행세계에 사는 사람들

by 자크슈타인


석양(夕陽, sunset)과 여명(黎明, dawn)


뒤돌아 보며 멈칫멈칫 발길을 주저하는 사람.

앞만 보며 나아가는 사람.


같은 시공간에서조차 교차점 없이 서로의 평행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

과거와 미래의 구분조차 희미해진, 자전주기와 공전주기가 일치하여 조석고정된 행성의 영원한 트와일라잇 존(twilight zone) 처럼..


차라리 영원한 불지옥과 영원한 동면의 땅을 피해 생존만을 목적으로 모여들 수밖에 없는 그런 곳이라면, 공감과 소통이 조금은 더 나아지지 않을까. 류츠신이 바로 그런 세상을 꿈꾸며 ‘삼체(三体)’의 사람들을 창조해 낸 것은 아니었을까.


아침도 오지 않고, 밤도 오지 않는 영원한 황혼의 땅..

짧디 짧은 이 생을 마치 ‘영겁(永劫)’처럼 살아가는 우매함의 굴레에서 그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사실은 없고, 오로지 해석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했던 니체의 말은 이제 그 언명이 제대로 현현한 세상을 만나버린 것만 같다.


정말로 객관적 사실이란 것이 있고 그것이 인간의 관심과 무관하게 중립적으로 드러나는 문제라면, 지금 이렇게 같은 현상에 대해서도 서로 너무나 다르게 보며 가치와 이념에 따라 재단하고 정의하며 오로지 나의 생각만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니체의 ‘사실이 없다’는 말은 이른바 사람들이 말하는 사실이란 것은 무수히 선택 가능한 사실들 중 나의 관심을 받아 선택된 사실에 불과하며, 따라서 그것은 객관적으로 드러난 사실이 아니라 보는 자의 관점에 의해 조명된 사실, 또 그렇게 선택된 사실이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이러한 선택의 기준, 관심(interest)과 관점(perspective) 없이는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사실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런 능력은 있는 그대로의 무심한 자연(自然)만이 가지고 있겠지.


하지만 관심과 관점이란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바로 인간 인식의 조건일지니, 인간은 모름지기 자신의 관점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실이 없다’, '사실이 아니다'라는 말을 자신의 행동을 부인하는 면피용 명제가 아니라, 이 세상의 무수한 사실들 중에서 그가, 그녀가, 당신이, 혹은 내가 - 어찌하여 다른 모든 사실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면서, 하필이면 그 ‘사실’을 인식했고 또한 열심히 말하고 있는가에 관련되어 요즈음의 현실에서 정말로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문제가 아닐까 싶다.





방향을 조금 틀어 보자.


작금의 언론들이 왜 시민들에게 '기레기'라는 멸칭으로 불리는지, 조중동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왜 시민언론으로 출발했던 한겨레조차 따로이 강력한 권한을 휘두르는 사주가 없을 뿐이지, 이미 시민들의 언론이 아닌 기자들, 그들만의 만족을 채우는 언론이 되어 버렸는지.. 어찌해서 이쪽과 저쪽의 이야기에 기계적인 중립을 맞추려는 바보 같은 생각만을 고집하고 있는 것인지.


이미 낡아 박제가 되어버린 종이신문 시대에 이야기하던 저널리즘이 아직도 그대로 유효한가. 올바른 저널리즘에 대한 치열한 고민, 저널리즘의 본령에 충실하되,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여 변화해 가는 저널리즘에 대한 지속적인 성찰이 왜 없어져 버린 것인지..


심지어 단순 기계적인 중립이나마 제대로 지키는 언론조차 별로 보이지가 않는 현실. 한쪽의 의도와 관점에 맞춰서 기사를 과잉-대량생산하면서, 다른 쪽의 관점은 철저히 무시하기.


그렇다.


사람이 쓰는 글에는 아무리 기사라도 글을 쓰는 자의 의도가 개입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인정한다.


다만, 화가 나는 지점은 그러면서 아닌 척, 자신들은 절대로 어떤 정파나 이념을 편들거나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중립적이라고 가면을 쓰고 거짓부렁을 해댄다는 점이다.


차리리 우리는 어떤 이념을 가지고 있고, 어떤 정파를 지지한다고 당당하게 공개를 하고 그런 기사를 쓰면 좋겠다. 그대들이 앙모하는 미쿡 언론들이 그렇게 하고 있지 않나. 그렇다면 본인들도 떳떳하고, 기사를 읽는 독자들도 '아, OO일보, OO신문, OOTV는 이런이런 이념을 가지고 어떤 어떤 정파를 지지하는 곳이지..' 하는 자각을 가지고 보다 객관적인 사실을 알기 위해 이를 감안해서 그들의 기사를 해석하거나, 혹은 알아서 다른 다양한 입장을 가진 미디어들도 찾아보는 노력을 '조금은 더' 하게 되지 않겠는가.


혹자는 기자들도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일 뿐이고, 사장(언론사주)의 입맛에 맞춰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지 않겠냐는 말을 하기도 한다. 또한 지금 새로 유입되고 있는 젊은 기자들 세대의 변화에 따른 특성도 어느 정도는 반영될 수밖에 없겠다. MZ라고 통칭되는 세대들, 쉽게 쉽게 당근을 얻어온 것 같은 기성세대에 반감을 가지고 있고, 갈수록 살기 팍팍해지는 사회에 대한 불만, 포기를 느끼며 자라온 세대.


기자도 하나의 직업인인 것은 맞다. 세대별 특성이 변화한 점이 있는 것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래도 그 구조 속에서 나름 열심히 공부한 대가로 어느 정도 안정적이고 사회적 시선도 나쁘지 않은 '기자'라는 타이틀을 얻지 않았나.


데스크에서 가로막힌다 해도 회사의 지면이 아닌 본인의 목소리를 낼 공간은 얼마든지 있다. 페이스북이나 블로그, 인스타 같은 소셜미디어 공간이든, 블라인드 같은 앱이든, 타 언론사에 익명의 인터뷰나 제보를 하든, 회사 로비에 대자보를 붙이든.. 나를 드러내든 드러내지 않든, 드러내지 않더라도 목소리를 전할 방식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그런데도 그렇게 프리랜서, 계약직, 파견노동자, 영세한 중소기업 직원 등 몇백만 일반 직장인들의 처지와 형편에 얹어서 '우리도 직장인이다!!' 그렇게 떠들고 싶다면, 그래서 데스크와 사주의 눈치를 보고 철저히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다면 이제 철 지난 '기자부심'은 버리길 바란다.


고고한 척, 만나는 상대들이 대단한 기업인, 권력이 있는 공직자들이 많으니 본인들도 잘난 줄 아는 그 태도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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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개혁’은 ‘검찰개혁’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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