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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wNhere May 08. 2019

치매, 요리를 접다

치매의 기록

2015년, 그렇게 

봄과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 


시어머니의 일상은 큰 변화가 없었다. 

약을 드시니 컨디션의 기복도 심하지 않았다.  

크게 외출하시는 일도 없어서 감기를 크게 앓는 일도 없었다. 

출산을 하고 아이가 5,6개월쯤 되던 가을부터 난 다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프리랜서라는 핑계로 일주일에 2,3번 출근하는 조건이었다. 

4개월짜리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부담도 덜했다. 

서울 하늘 아래에서 맞벌이 안 하고 살 수가 있겠는가. 


그러다 간혹 육아서비스도 안되고 신랑 찬스도 안 되는 날은 

시어머니께 아이를 맡기고 나와야 했다. 

시어미니는 50대에 한동안 동네 아기를 봐주시는 일도 하셨었다며 걱정을 말라하셨다.

 

미리 꺼내 놓은 모유와 개량해 놓은 분유, 먹으는 시간까지 꼼꼼히 메모를 하고 집을 나섰다. 

시어머니가 두 아이를 케어 할 수는 없기에 

첫째 아이는 어린이집을 풀타임으로 다녔고 그 아이가 하원 하는 시간 맞춰 

신랑과 난, 둘 중 하나는 꼭 집에 있도록 하였다. 

되도록 빠른 시간 안에 집으로 돌아오려고 노력했다.


그러던 어느 날, 

출연자 미팅이 있어서 사무실로 안 가고 미팅 장소로 바로 가는 길이었다. 

집을 나선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시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둘째가 울고 불고 난리가 났다는 거다. 그러니 나보고 들어와서 애를 보라고 하시는 거다. 

어머니께 아직 배고플 때가 되지 않았다고 조금만 달래 보시라고 말씀을 드리고 전화를 끊었는데 

10분이 채 되지 않아서 다시 전화가 왔다. 

너무 우는데 모유도 안 먹고, 분유도 안 먹고, 그냥 계속 울기만 한다고 엄마가 없어서 그런 거 같다고 

들어오라고...  

어렵게 잡은 출연자 미팅을 그대로 펑크를 내고 갈 수는 없었다. 

시어미니께 한 시간만 있다가 바로 들어가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리곤 다시 전화가 안 왔다. 

난 겨우겨우 미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상황 종료. 

아이는 자고 있었고 어머니도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 계셨다. 

6개월 전후의 아가니까 막 울고, 막 먹고, 막 자고 그랬으리라. 

고요해진 집안으로 들어오면서 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벌써 왔니?'라고 물으시는 어머니께 '네. 일이 일찍 끝났어요."라고 말씀드리고 짐을 풀었다. 


그 이후로는 시어머니께 아이를 맡길 순 없었다. 

그 대신 친정엄마 집으로 향했고 틈틈이 친정엄마 + 시집간 여동생 찬스를 섰다. 

그나마 내가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하면서 가까워진 친정과 여동생 찬스가 생겼다는 게 다행이었다.

 


다시 추석이 찾아왔다. 

그 무렵 시어머니는 요리를 할 때마다 나에게 물으시곤 했다.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 나와 동서 옆에서 어머니도 거드시겠다며 손을 걷으셨다. 

양념을 뭘 넣어야 하는지, 마늘을 넣었는지 안 넣었는지, 간이 맞는 건지 아닌 건지... 

차라리 우리끼리 후다닥 하는 게 속이 편할 거 같았다.  

동서도 나와 두 달 간격으로 출산을 한 터라 여기저기서 갓난쟁이들의 울음소리가 났다. 

아기들의 울음소리와 시어머니의 질문 세례가 서라운드로 들리기 시작했다. 

난 '어머님 그냥 앉아서 쉬세요."라는 말만 계속 되풀이했다. 

하지만 몸에 베인 습관은 잘 지워지지 않는 법. 시어머니는 싱크대 앞에서 떠나질 않으셨다. 

음식을 하는 사람도, 도와주려고 애쓰는 사람도, 그 관경을 지켜보는 사람도, 우는 아가들을 달래는 사람도

전부 짜증스러운 상황이었다.   

"전이든 나물이든 다 사면되지, 이걸 누가 먹는다고 집에서 하고 있어. 요즘 누가 차례음식을 집에서 해?"

누군가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래 내년부턴 다 사서 하자" 

시어머니가 대답하셨다. 


"나도 편하고 니들도 편하고 다 사서 하자. 

나 죽으면 제사도 지내지 말거라. 납골당도 하지 말아라. 

어차피 죽으면 아무것도 아닌데 납골당에 넣어준다고 죽은 사람이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화장해서 물에 뿌려라"


시어머니도 아내였고 며느리였으니 조상을 위하고 싶으신 거였는데...  죄송했다. 

"다음 차례부턴 큰애야 네가 다 알아서 해라. 난 이제 졸업하련다."

그 이후 어머니는 요리에서 접으셨다.

간혹 계란 프라이나 식은 음식을 데울 때는 있으시지만 

스스로 국을 끓이시거나 탕을 하는 일은 없다. 

요리를 하는 것이 어렵다고 스스로 느끼신 것이다. 



기억은 없어도 감정은 남는다 했는데... 

치매는 참 힘들다. 





1. 시어머니는 4년 전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습니다. 

2. 제일 처음 치매가 의심될 때부터 지금까지의 치매 행동에 대한 에피소드입니다. 

3. 저처럼 처음 치매를 겪는 가족 분들에게 "경험의 공유, 위로"라는 마술을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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