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소울 푸드
* 21화와 동일한 등장인물입니다.
소파에 누워 있던 지연이 공중으로 벌떡 솟았다.
“왔다! 내 소울푸드!”
주문한 H미 불닭발의 배달 완료 메시지가 떴다고 지연이 버선발로 달려 나갔다. 선경은 쏜살같이 냉장고로 가 몇 분 전에 냉장실에서 냉동실로 옮겨 두었던 캔맥주를 꺼낸다.
“우와, 차다!”
하준이, 도연이, 시후가 1박 2일 캠핑을 갔다. 선착순으로 뽑는 주민센터 프로그램에 운 좋게 당첨된 것이다. 심지어 무료. 혼자만 아무 데도 못 간다고 삐진 귀여운 꼬꼬마 정후는 아빠와 단 둘이 캠핑을 갔고. 오랜만에 당당하고 편안하게 나와 선경은 지연의 집에 모였다. 나는 먹고 있던 P테이토칩 과자 봉지를 치우고 지연이 불닭발 늘어놓는 것을 도왔다. 같이 온 계란찜 용기가 엄청 뜨겁다. 뚜껑을 여니 드라이아이스같은 김이 뭉게뭉게 올라온다.
“계란찜 진짜 부들부들하게 생겼다.”
“언니는 매운 거 못 먹으니까 계란찜은 더 만들어야겠다.”
“왜? 나 먹을 수 있어.”
“그래. 먹을 수는 있지. 대신에 먹고 우니까 그렇지.”
“그냥 울기만 하면 다행이게. 땀을 눈물만큼 흘리잖아.”
닭발은 맛있다. 곁들여진 부추 겉절이까지 전부 맛있다. 다만 너무 매워서 먹을 때마다 얼굴이 피 흘릴 것처럼 빨개진다. 눈물에 콧물까지 줄줄 흘리고 활짝 열린 땀구멍에선 땀이 콸콸 솟아난다. 하지만 도저히 끊을 수가 없다. 그렇게 너무 맛있다.
“나에게 닭발은 피, 땀, 눈물이야. 선경, 나 마요네즈 좀 꺼내 주라.”
“아이고, 또 마요네즈 한 통 다 먹겠구먼.”
“크크크. 선경 언니, 저 언니한테도 닭발은 소울 푸드인 거야.”
지연은 오른손으로 뼈 없는 불닭발을 야무지게 깻잎에 싸 먹으면서 왼손으로는 비닐장갑을 끼고 한 김 식힌 밥에 김가루를 듬뿍 넣고 참기름 휘휘 둘러 고소한 냄새가 솔솔 나는 동글동글 주먹밥을 빚어냈다. 나는 닭발에 마요네즈를 듬뿍 찍어 입에 넣었다. 마요네즈의 느끼함이 불닭의 매운맛을 적당히 잡아준다. 너무 맛있다. 물론 속도의 지연만 있을 뿐이니 입 안에 곧 불이 난다. 이럴 땐 차가운 맥주를 마시면 된다.
“아오, 살았다.”
“나도 마요네즈. 여기 짜 줘 봐.”
“응.”
선경의 손바닥 위 깻잎에 마요네즈를 짜주었다.
“그런데 아니야.”
“뭐가?”
“불닭은 내 소울 푸드가 아니야. 나 소울 푸드 따로 있다고.”
“진짜? 뭔데?”
“어?! 나 저번에 언니의 소울 푸드 들었던 것 같아. B처스 컷 스테이크. 하준이 가졌을 때 B처스 컷 스테이크 너무 맛있었다고 했잖아.”
“에이, 그것도 아니야. 하준이 가지고 입덧 와서 뭐 못 먹을 때 거기 고기만 먹을 만했다고 한 거지. 물론 거기가 심각하게 맛있긴 하지. 하지만 B처스 컷은 너무 비싸서 소울 푸드 자격 미달이야. 소울 푸드는 접근성이 낮으면 안 돼.”
“이거 봐, 이거 봐. 저 언니 은근히 까다롭다니까.”
“그래서 언니의 소울 푸드는 뭔데?”
소울 푸드… 나의 소울 푸드는 앞서 말 한 입덧과 깊은 관련이 있다.
하준이 임신 초기부터 시작된 입덧은 출산할 때까지 지속되었고 드라마에서 봐왔던 밥 먹다가 욱, 변기 붙잡고 욱, 하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무얼 먹고 욱 할 만큼 구토가 올라오진 않았다. 대신 입맛이 변하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냄새가 바뀌었다. 그냥 밥냄새가 아닌 전기밥솥에서 밥이 지어질 때 나오는 수증기 냄새가 싫어졌고 그냥 튀김 냄새가 아닌 냉동만두만 기름에 튀길 때 나는 냄새가 싫어졌다. 몹시 예민해진 코만큼 입맛은 더 이상해졌다. 딸기? 레몬? 그런 건 생각나지 않았다. 생뚱맞은 냄새가 몹시 싫어지니 우울해지고 장어 생각이 났다. 기분이 좋아지고 싶었다. 평소 숙대입구에서 남산으로 향하는 길목에 P천 장어를 몹시 좋아라 했다. 초벌 구이 해 나온 통통한 장어를 숯불에 바짝 구워 간장 양념이나 고추장 양념을 듬뿍듬뿍 찍어 먹는 걸 매일 먹고 싶을 만큼 좋아했다.
“아, 그러면 언니의 소울 푸드는 장어구나?”
“아니야! 나 그때 장어에 정나미가 뚝 떨어졌었다고.”
지금은 없어서 못 먹지만 그땐 그랬다. 그렇게 좋아했던 장어를 부러 찾아가 먹었더니 내가 알던 장어가 아니었다. 가게도 그대로고 사장님도 그대로고 같이 간 일행 말로는 장어 맛도 그대로라고 했다. 나도 머리로는 장어 맛이 그대로인 걸 알았다. 그런데 입맛이, 내 입맛만이 그대로가 아니었다. 이상하게 돌아버린 입맛이 장어를 거부했다. 큼지막한 장어 한 토막을 입 안에 가득 넣고 마구마구 행복해질 참이었는데 처절하게 실패했다. 행복은커녕 크나큰 불행이 몰려왔다. 그렇게 고구마도 못 먹게 되었고 수박도 못 먹게 되었다.
“그런데 너무 웃긴 게 나 그때 매운 건 엄청 잘 먹었잖아. 그땐 엽떡 먹어도 땀도 안 났어.”
“진짜? 언니가 엽떡을?”
“응.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먹었다니까. 혀의 통각이 마비된 줄.”
“어머, 너무 신기하다. 그때는 그럼 원 없이 먹었겠네?”
“좀 그랬지.”
“그런데도 매운 게 소울 푸드가 아니라고?”
“내 꼴을 봐라. 맛이 있긴 하지만… 나를 이런 꼬라지로 만드는 애한테 소울이란 단어를 쓰고 싶진 않아.”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콧물도 닦았다. 땀은 한 번에 닦을 수 없어 휴지로 여러 번 닦아내야 했다. 테이블에는 내 턱에서 똑똑 떨어트린 땀방울 자국이 선명하다.
“그럼 그때 뭐 먹었어?”
“입덧할 때? 매운 비빔냉면. 물냉은 안돼. 그리고 돈가스.”
뭘 먹어도 이상했던, 좌충우돌 돌아버린 입맛 속에서 행복을 주는 맛을 찾아 헤맸다. 간절했다. 꼭 맛으로 행복을 찾아내고 싶다는 오기까지 생겨났다. 그나마 먹을 만했던 게 비빔냉면이었는데 이것도 처음 한 두 달까지만 좋았고 금방 질렸다. 그날 그랬다. 비빔냉면에 지쳐 먹을 수 있지만 먹고 싶지 않았던 날, 우연히 옆 집 S보텐 돈가스 전문점으로 들어갔고 거기서 찾아냈다. 행복을 주는 맛.
“그게 뭐였어? 돈가스? 치돈?”
“아니.”
등심, 안심, 새우, 생선 전부 아니었다.
“양배추였어.”
“양배추?”
“그거? 가면 그냥 주는 샐러드?”
“응. 그 양배추 샐러드.”
임신 전에는 양배추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그 특유의 향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그런데 이때 먹은 양배추는 한순간에 눈이 번쩍 뜨여 새 세상을 맞닥뜨린 심봉사의 심정을 십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평생을 첩첩산중 오지에서 산삼을 찾아헤매다 드디어 발견한 심마니의 ‘심봤다’였다.
“와 그게 그렇게 맛있더라고. 내가 그날 돈가스를 남겼어. 아니 거의 안 먹었어. 양배추 샐러드만 한 다섯 번? 여섯 번? 리필해 먹었을 걸. 너무 많이 하니까 나중에는 대야 같은 그릇에 한 번에 가져다주더라.”
“진짜? 뭐야? 양배추를 그렇게 좋아했다고?”
“그래서 설마 그 양배추 샐러드가 소울 푸드인 거야?”
“음… 응!”
선경과 지연이 다소 실망의 눈치를 보낸다. 아무래도 이보다는 조금은 덜 흔한 음식이라 생각했었나 보다.
“그런데 아니야.”
“아니라고? 뭐가?”
“양배추 샐러드가 아니라고.”
“방금은 양배추 샐러드가 소울 푸드가 맞다면서. 그런데 아니라니 뭔 소리야?”
“그러니까 그 S보텐 양배추 샐러드가 소울 푸드가 지금은 맞는데 그때는 아직 아니었다고.”
“그때는 아직 아니었다니… 뭐라는 거야?”
눈물을 닦고 콧물을 닦고 땀을 닦은 후 차가운 맥주를 들이켜고 말을 이었다. 이제 전남편이 등장한다.
“어이가 없는 게 그때 거기 전남편이랑 같이 간 거였거든. 그날따라 내 기분이 좋아 보이니까 자기가 사겠다고, 밥 값도 그 사람이 냈단 말이지.”
“아니 자기 애 임신한 아내한테 밥 한 번 사는 게 별 일이야? 왜 그날 따라야?”
“응. 그 사람이 안 그랬다가 좀 그랬어. 그런 게 있었어. 아무튼 여기까진 괜찮았어.”
“그래 뭐… 그런데?”
“아휴…”
큼지막한 매운 닭발을 마요네즈에 푹 찍어 한 입에 씹었다.
“문제는 그날 저녁에 터졌지. 갑자기 나한테 된장녀라잖아.”
“된장녀? 어머 그 단어 너무 오랜만이다. 그런데 왜? 어디서? 무엇 때문에?”
“그래 그 단어가 어떻게 나올 수 있는 거야? 맥락이 안 맞잖아!”
“돈가스를 남긴 게 결국 마음에 안 들었던 거지. 고작 양배추 하나 먹으려고 비싼 돈가스 가격을 치른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거야. 내가 S보텐 샐러드만 매일 먹고 싶다고 그랬었거든.”
“아니 그래서 된장녀라고 그랬다고?”
“응. 그래서 된장녀라고 그랬다고.”
“아니, 그럼 자기가 양배추 사다가 직접 S보텐 같이 가느다랗게 채 썰어서 소스도 구해다가 샐러드라도 해주겠데?”
“아니지. 당연히 셀프지.”
“와, 진짜 너무했다. 개짠돌이잖아.”
“아니야. 짠돌이라서가 그런 게 아닌 것 같은데, 그건…”
“뭐야, 선경 언니 이게 짠돌이가 아니면 뭐야?”
“그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그분은 저 언니한테 일종의 애정이 없었다는 소리 같은데.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단점을 발굴하려고 했던 거고. 그전에 연애할 때는 안 그랬을 거 아니야?”
“그럼, 안 그랬지.”
“그래서 저번에 B처스 컷도 다른 친구랑 갔다고 했었구나. 왜 남편이랑은 맛집을 안 다니나 했었어. 상대방이 자꾸 그렇게 나오면 내 쪽도 내 취향에 관한 공유를 하고 싶지 않게 된다고.”
“선경이 말이 맞아. 걔는 그냥 짠돌이였던 게 아니야. 나한테 단점을 찾아내고 싶으니까 스스로 짠돌이 프레임을 씌운 거지.”
“뭐야, 뭐가 이렇게 복잡해. 그래도 S보텐 샐러드에 된장녀는 너무한 거 맞잖아.”
너무했지. 너무했다. 전남편은 그날 이후 냉장고에서 두 어 번 양배추를 찾기도 했다. 자신이 양배추 샐러드를 직접 해 먹자고 했으니 집에서 해 먹고 남은 혹은 해 먹을 양배추를 찾은 것이다. 눈에 안 보인다고 직접 사 오거나 하진 않았다. 왜 없냐고 묻기만 했고 나는 거짓을 말했다. 양배추 샐러드도 맛이 없어졌다고, 먹기 싫어졌다고. 그리고 S보텐에 다른 친구와 가거나 아니면 혼자 가서 사 먹었다. 내 돈으로 편안하게 맛있게 사 먹었다. 먹고 싶은만큼 돈가스를 남기는 게 미안해질 정도로 양배추 샐러드를 맛있게 먹었다.
“자 닦아.”
지연이 휴지를 내밀었다. 내가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다.
“누가 보면 양배추 샐러드 때문에 슬퍼서 그런 줄 알겠네. 아, 뭐야! 코도 풀어. 더러워!”
팽! 코도 풀었다.
“아우, 맵긴 맵다. 계란찜 더 한다며? 어딨어?”
“기다려 봐.”
선경이 전자레인지에서 막 쪄진 계란찜을 꺼내 왔다. 냉면그릇만 한 국그릇에 만들어서 양이 어마어마하다.
“가만 보면 닭발이 아니라 계란으로 배 채우는 느낌적 느낌이야.”
“그거 그냥 물 안 넣고 다시 국물 넣었거든. 맛있어서 깜짝 놀랄 거다.”
“그래서 양배추 샐러드가 그렇게 소울 푸드가 된 거야?”
“그건 아니지. 아직 소울 푸드 되기 전이야.”
“아 진짜. 이 사람 까다롭다니까. 그럼 언제 되는데?”
하준이를 낳고 입덧이 사라졌다. 신기했다. 확인을 위해 마트에서 반조리된 장어를 사 와 집에서 구워 먹어봤는데 너무 맛있었다. 가스레인지 앞에 선 채로 혼자 2인분을 다 먹었다. 수박은 철이 아니라 못 먹어 봤지만 고구마는 먹을 수 있었다. 역시 너무 맛있었다. 그리고 다시 ‘슈퍼 맵찔이’가 되었다. 엽떡은 언감생심 두려워 J스 떡볶이를 먹어봤는데 거의 대성통곡을 했다. 너무 매웠다. 그래도 다시 돌아온 피, 땀, 눈물이 너무 반가웠다.
“그리고 이혼을 했지.”
본격적인 육아가 시작되니 전남편의 외박하는 횟수가 더 늘었고 그가 꾸준히 해오던 배우자의 단점 발굴 작업은 더 뻔뻔해졌다. 나는 그의 외박에 양배추 때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 신경 쓰지 않는다고 거짓을 말했고 스스로에게도 괜찮다고 거짓을 말했다. 그저 아이에게 웃어주는 것에만 몰두했다. 이 거짓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내가 몹시 독한 사람이라는 단점이 되어 돌아왔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 아무렇지도 않게 아이에게 웃어줄 수 있냐며, 너 같이 독한 사람은 처음 본다며. 아이에게 간신히 웃어 주던 게 단점이 되었다.
“나 법원에 이혼서류 접수하고 나오면서 만세 불렀잖아. 톰 크루즈와 이혼한 니콜 키드먼 빙의했었다고.”
“나 같아도 만세 삼창이야.”
“건배해. 건배해.”
이미 지난 일이니 또 만세는 그렇고 하니 대신 차가운 맥주로 건배를 나눴다.
“그럼 양배추는?”
“아니 이 사람들이 애 안 키워 봤나. 그거 사 먹으러 갈 시간이 있었겠어? 그거 나 혼자 먹겠다고 채 썰고 할 여유도 없었고.”
“그건 맞아. 애 낳고 미역국을 왜 먹는데. 젖 잘 도네, 산후조리네, 그건 다 핑계고 그냥 밥 말아서, 한 끼 때우기 제일 편해서 먹는 거야.”
”크크크크, 맞아 맞아. 그리고 사실… 하준이 낳고 나니까 별로 먹고 싶다는 생각도 안 들었어. 그래서 안 먹었지. 애 낳고 이혼할 때까지 거의… 아니다, 한 번도 안 먹었어.”
그렇게 서류 접수를 하고 숙려 기간까지 지나 합의이혼신고서도 제출, 모든 이혼 절차를 완료했다. 모든 게 끝났다.
“그날 구청 근처에 치과를 갔어.”
“치과?”
“응. 그전부터 잇몸이랑 이가… 충치도 있었고 한데 치과에 갈 시간이 없어서 못 갔거든. 그래서 다 정리가 된 후에 치과부터 가려는데 세상에 세상에 그날따라 배가 너무 고프더라고.”
“배가 고팠다고? 그러면 어떻게 해?”
“왜 이래? 취했어?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뭘 먹으면 되지.”
‘먹으면 되지.’라는 말을 하자마자 흰 밥에 김치 올리듯 계란찜 한 수저에 닭발을 올려 먹었다.
“아으, 맵다. 그래서 주변을 둘러봤는데 거짓말처럼 ‘짜잔’ S보텐 돈가스가 보이는 거야. 정말 치과 건물 옆 2층에 딱 있더라고. 그것도 엄청 크고 깨끗한 S보텐이. 그게 거의 2년 남짓 만에 간 거였어.”
합의이혼신고서 제출일만 손꼽아 기다렸던 나는 아침에 하준이를 어린이집에 보내자마자 후다닥 구청으로 향했다. 급한 마음에 아침도 안 먹고 이동했다. 그래서 그랬나 보다. 모든 절차가 끝나고 나니 무언가 마비되었던 감각이 갑자기 되살아 났다. 아팠던 이가 다 나았나 느껴질 만큼 허기가 점점 심해졌다. 급기야 등에선 식은땀이 나기 시작하더니 빨리 뭘 먹지 않으면 손까지 벌벌 떨릴 것 같았다. 그게 딱 3층에 있던 치과에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치과 문손잡이를 잡았던 손을 놓고 치과 건물 1층에 작은 김밥집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건물 밖으로 나갔다. 반드시 S보텐 양배추 샐러드가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근처 직장인들이 우르르 모여들 점심시간이었다. 웨이팅이 2팀이 있었고 20분 정도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아니라고 하겠지만 당사자인 나는 분명히 느끼는 허기짐의 진동. 양손을 떨고 있었다. 마음이 급했다. 200분 같은 20분을 기다리면서 핸드폰도 안 보고 벽에 걸려있던 디지털시계의 숫자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대략 20분이라고 했으니 20분을 채우지 않아도 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속으로 간절히 외쳤다. 이윽고 먹고 있던 누군가에게 나의 외침이 닿았는지 15분 정도 되었을 때, S보텐 직원이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큰 소리로 “네! 네!”라고 소리쳤다. 만일 안내받은 테이블이 미처 치우기 전이라서 누군가 먹다 남은 음식이 남아 있었다면 그거라도 먹어 치울 기세였다.
“우와, 간만에 S보텐 양배추 거덜내보자!”
“멸종 가자!”
“푸하하하하, 뭐야? 진짜 취했나 봐. 멸종이 뭐야? 크크크. 그런데 바로 주문하지 못했어.”
안내받은 자리가 빛이 잘 드는 창가 옆, 뷰가 좋은 4인석이었다. 홀에서 가장 뽀송해 보이는 넓고 좋은 자리.
“그게 왜?”
“왜긴, 나는 혼자니까…”
배고픔에 공격적인 기세로 테이블을 향해 걸었는데 막상 테이블 앞에서 쉽게 착석하지 못했다. 머뭇거렸다. 그런데 직원은 내가 앉든지 말든지 메뉴판만 테이블 위에 두고 바쁘게 떠났다. 나는 의자 앞에 서서 서성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식사하러 온 다른 손님들은 서로 이야기하느라 먹느라 바빴고 나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들에게 투명인간이고 그들도 나에겐 투명인간이다. 홀 입구에서 웨이팅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봤다. 그들에게도 나는 투명인간이다. 누구도 나를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그걸 머리로만 알았다. 마음은 아닌 걸 알면서도 불편하고 신경 쓰였다. 너무 배고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뒤에 온 여럿이 온 팀에게 양보해야 하는 건 아닌지, 직원들이 신경 쓰였다. 최소한 홀매니저만큼은 혼자 온 내가 4인석에 앉는 걸 싫어할 것 같았다. 대놓고 뭐라고 할 줄 알았다. 그래서 한참을 의자에 앉지도 못 하고 눈치만 봤다. 서서 메뉴판만 정독해 읽어가며 머뭇거렸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누군가 다가왔다. 하필이면 홀매니저다. 혼자 온 거니 더 기다렸다가 2인석으로 가자고 할까 봐 무서워졌는데… 그랬는데 그는 친절했다. 친절하게 왜 서 있는지 혹시 어떤 불편한 점이라도 있는 건가 살펴봐 줬다.
“언니가? 왜? 왜 그렇게 눈치를 봤어? 세상 뻔뻔한 사람이 왜 그랬어? 뭣 때문에?”
“음… 몰라. 나도 몰라 왜 그랬는지. 그냥 그때 그렇게 눈치가 보이더라. 지금 같으면 4인 자리에 앉지 말라고 해도 배고프면 눈에 뵈는 게 없어서라도 엉덩이부터 들이밀 텐데. 그땐 그랬어.”
홀매니저의 친절에 겨우 용기를 얻어 의자에 앉았다.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메뉴판에 코를 박고서 히레 돈가스 하나를 주문했다. 곧 주문한 돈가스와 주목표였던 양배추샐러드가 나왔다. 미안한 마음에서라도 돈가스만큼은 안 남기려고 했는데, 입덧할 때만큼 양배추샐러드를 맛있어하지 않았음에도 샐러드를 먼저 먹어치웠다. 조심스레 리필을 부탁드렸다. 세 번을 리필할 때까지 돈가스는 반 이상이 남아 있었다. 다급했던 허기가 사라지니 새삼 양배추가 이런 맛이었구나 싶었다. 샐러드를 네 번째 리필했을 때 비로소 샐러드 소스에서도 생경함을 느꼈다.
‘이 맛이구나. 이런 맛이었구나. 내가 이 맛을 그렇게 좋아했었구나.‘
새삼 잃어버린 줄도 몰랐던 감각들이 되돌아왔다. 꽤 많이 먹어봤음에도 한입 한입 맛볼 때마다 새로웠다. 리필을 더 부탁했고 새로 올 때마다 샐러드의 양은 점점 더 많아졌다. 어떤 창피함과 송구함을 함께 느끼면서도 다섯 번, 여섯 번째 리필을 부탁했고 일곱 번째 리필까지 먹고 나니 비로소 허기가 사라졌다. 아마도 별 수고를 들이지 않은, 어쩌면 의무적인, 그저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고 이야기 할 홀매니저의 작은 친절은 나에게 와서 최대 행복이 되었다.
“만족스러웠어. 너무 오랜만에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식사를 했어. 굶고 살지도 않았으면서 굶고 살았던 사람처럼. 그리고 곧 후회를 했지?”
“후회를? 왜?”
“그날 그러고 나서 치과 가는 걸 깜빡했거든. 좋다고 부른 배 두들기면서 그냥 집으로 간 거지. 다음에 한참 있다 다시 동네 치과 찾아가려는데 어찌나 귀찮던지.”
“뭐야? 진짜.”
“여러분은 그러지 마. 치과는 정말 이상하다 싶었을 때 빨리빨리 가야 돼. 그때 정말 돈 수억 깨지는 줄 알았어. 눈물 났다고.”
“으이그, 더 늦게 갔으면 더 깨졌겠네.”
그날부터, 치과를 망각하게 만든 양배추 샐러드가 소울 푸드가 되었다. 여전히 양배추를 엄청 좋아하진 않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S보텐이 아닌 다른 곳에서 나오는 양배추 샐러드에는 감흥이 없었다. 결코 맛이 더 없는 게 아니었다. 어떤 곳은 양배추도 더 싱싱했고 더 곱게 썰려 있었고 소스도 훨씬 맛있었다. 그런데 감흥이 없었다. 다른 곳 샐러드에서는 그 어떤 소울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게 뭐야, 소울 타령 하기에는 너무 프랜차이즌데?”
“아, 몰라. 그래도 할 수 없어. 내 소울 푸드는 프랜차이즈 서비스 요리 인 걸. 이게 팩트야. 돌이킬 수 없다고.”
“서사구나. 뭐 이것저것 다 필요 없고 소울도 그냥 서사였어.”
지연이 핸드폰을 또 확인했다. 그러더니 아까보다 더 빠르게 공중 부양을 한다.
“왔다! 내 소울 푸드!”
나는 이게 무슨 데자뷔인가 싶어 선경을 바라봤다.
“뭐야? 이거. 우리 타임루프에 빠진 거야? 내가 분명히 저 모습을 좀 아까 봤는데.”
“하하하, 언니도 취했어? 타임루프는 무슨. 옛날 통닭 왔어. 좀 아까 시키더라고 애들이랑 있을 때는 튀김옷 입혀진 프라이드, 매콤달콤 양념만 먹는다고, 이럴 때 깔끔한 전기구이 통닭을 먹어줘야겠데.”
“그럼, 닭발도 소울 푸드, 옛날 통닭도 소울 푸드 도대체 소울 푸드가 몇 개야?”
“뭐, 소울 푸드가 꼭 하나란 법이 있어? 나는 언니처럼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맛있으면 소울 푸드야.”
지연이 들뜬 손놀림으로 묵직한 봉투의 입구를 열자와 함께 밀가루 튀김옷 대신 바삭한 닭껍질을 두르고 있는 통닭의 모습이 드러났다. 선경이 아직 뜨거우니 손은 못 대겠다고 포크를 사용해 통닭을 부위별로 해체했다. 그리고 닭가슴살을 들더니 거기에 마요네즈를 찍어낸다.
“뭐야? 왜 거기에 그걸 찍어?”
“몰랐어? 이제부터 나는 마요네즈가 소울 푸드야.”
내 양배추 샐러드를 프랜차이즈라고 얕게 보더니 선경은 그냥 기성 제품을 소울 푸드라고 말한다.
“맛있고 소울이 느껴지면 소울 푸드잖아. 나는 그게 마요네즈가 되었어. 먹으면 먹을수록 느끼하고 고소한 게 맘에 쏙 드네. 있다가 고추냉이도 섞어 먹어야지.”
나도 한쪽 닭날개를 잡았다.
“그래, 다 자기 마음이지. 우리는 결국 닭은 머리만 빼고 다 먹는구나.”
“아니지, 언니가 계란찜에 달걀을 몇 개를 먹었는데 이미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먹은 거야.”
“흠, 뭐 아무튼 지연이의 소울 푸드는 그냥 닭이다.”
“아니야, 좀 있다 소울 아이스크림도 먹을 거야. 입가심도 해야지.”
오랜만에 보내는 만족스러운 밤이다. 그러면서 캠핑 가서 톡이나 메시지 한 번 없는 아이들이 하나도 그립지 않다고 말하면서 그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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