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스도쿠
Prologue.
“스도쿠 잘하는 법이요?”
“네.”
“그냥 규칙대로만 하면 되는데. 음, 딱히 생각나는 게 없는데. 그래도 굳이 신경 쓰는 게 있다면... 저는 글씨요, 숫자.”
“글씨? 숫자?”
“네. 저는 스도쿠 할 때 숫자를 일정한 크기로 잘 쓰려고 노력해요. 또 후보숫자 적을 땐 힘 조절도 잘해서 최대한 힘 빼서 흐리게 쓰고 위치도 센터와 혼동되지 않게 확실히 일정한 모서리에 자리 잡게 쓰고. 그래야 헷갈리지 않더라고요.”
“아, 글씨를 잘 써야 한다...”
“그런데 그것도 자기 편의대로 하는 거고요. 하는 데에는 진짜 별거 없어요. 틀리면 다시 하면 돼요, 게임에 기죽지 말고. 결국 숫자들을 조건에 맞는 자기 자리에 적어놓기만 하면 되니까요. '방법은 자유롭게 구사하되 조건만 잘 지키자.' 조건을 마음대로 이래라저래라 바꿀 수는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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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시 22분. 다들 하던 일을 멈추고 의자를 옮긴다.
“어머, 오늘이잖아. 벌써 시간이... 서하씨, 우리도 의자 가지고 빨리 개발팀으로 가요.”
“지금요? 왜요?”
서하는 영문도 모른 채 은성을 따라 일어나 책상 한편에 두었던 핸드폰을 챙기고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 등받이를 당겼다.
“아, 서하씨 핸드폰은 두고 가야 돼요. 최주임님이 싫어해서요.”
은성의 말에 서하는 핸드폰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어차피 전화 올 데도 없다. 대신 간단한 필기도구를 챙겼다.
“자, 서둘러서 빨리빨리 옮겨요. 30분에 시작합니다. 그리고, 거기 윤서하씨!”
“네.”
“윤서하씨 의자는 이리로 가져오고 이 의자 가져가서 않으세요.”
“네?”
사람들을 소몰이하듯 몰아대는 최주임이 서하에게 오른쪽 팔걸이가 빠져 있고 빠진 쪽으로 갸우뚱 기운 의자를 내밀었다. 아마도 입사한 지 한 달도 안 된 서하가 가장 만만히 보인 거겠지. 서하가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듯 멀뚱하니 서 있기만 하니 최주임은 대답도 듣지 아니하고 멀쩡한 의자를 그냥 가져간다. 은성은 이건 아니다 싶었지만… 어쩔 수 없다. 여기 룰이 이렇다.
“서하씨, 내 잘못이에요. 미리 말해줬어야 했는데 미안해요.”
“네? 은성대리님이 왜 사과를 하세요?”
“아니야, 미안해요. 잠깐이면 끝나니까 서하씨가 내 의자에 앉아요. 내가 거기 앉을게요.”
은성이 자신의 의자를 내밀었다. 사실 이 의자도 멀쩡하진 않다. 등받이에 힘이 없어 조금만 기대도 등이 뒤로 넘어간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은성대리님은 편한 의자에 앉으셔야죠. 저는 괜찮습니다.”
서하는 은성의 제안을 거절하고 갸우뚱 기운 의자를 끌었다. 은성도 못 이기는 척 서하의 거절을 받아들였다. 서하는 의자가 자꾸 기운 쪽으로 방향을 틀어 버리려고 해 걸음이 점점 느려졌고 은성도 서하의 속도에 맞춰 느리게 걸었다.
“그런데… 무슨 전체 회의라도 하는 건가요? 갑자기 사람들을 다 모으네요.”
“아, 그게요… 이것도 내가 진작 알려 줬어야 했는데 다 나의 불찰이다. 우리 회사가 예배를 드려요. 자주는 아니고 한 달에 한 번, 첫째 주 목요일에. 그러니까 오늘 목요일.”
“예배요? … 기독교 예배 말 하는 건가요?”
“응. 얼마 안 걸려요. 대충 한 30분? 딱 점심시간까지만 하고 끝내니까 끝나고 얼른 밥 먹으러 가면 돼요.”
“… 저는… 교회 안 다니는데요.”
“아아, 그게 나도 안 다녀요. 그런데 우리 사장님이 다녀요, 사모랑. 독실한 종교인.”
은성은 말을 하다 말고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 아무도 없다. 손으로 입을 가리며 서하에게 다가가 낮게 속삭였다.
“최주임님이 그 교회를 같이 다녀요. 거기도 독실. 사장 사모랑 찐친, 언니 동생 하는 사이.”
은성은 서하의 표정을 살폈다. … 변화가 없다. 역시… 그러면 그렇지. 서하씨는 참 한결같다. 알고 지낸 지 3주 정도 되었는데 크게 놀라거나 당황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저기 저 쪽에, 원피스 입고, 닥스 가방 든 사람 보여요? 베이지색 트렌치코트 저 사람. 저 사람이 사장 사모예요. 피부 엄청 좋죠? 그 옆이 사장님 부부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냥 목사님 쫓아오는 사람들. 저렇게 와서 한 달에 한 번 와서 대충 좋은 말씀 해 주고 그래요.”
“… 흠, 은성대리님도 교회 다니세요?”
“나?! 내가?! 아니! 아휴… 설마 그렇게 보이는 건 아니죠? 일요일에 잠잘 시간도 없는데 교회는 무슨 교회예요. 그냥, 회사에서 하라니까 하는 거죠.”
“…”
“그래도 우리 회사는 양반이에요. 어떤 데는 근무 끝나고 6시에 하는 데도 있데요. 우린 최소한 근무 시간 내에 하는 거니까.”
“저희… 이번 주 발주물량 늦어지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요? 이러면 오늘내일 잔업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은성과 서하가 근무하는 회사는 전체 직원이 30여 명 내외인 PCB(Printed Circuit Board – 컴퓨터 등의 전자제품 내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칩, 저항 같은 부품들이 꽂혀 있는 회로판) 제작 업체다. 두 사람은 QC(Quality Control) 팀으로 검수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사실 은성은 곧 휴직에 들어갈 예정이라 팀이라기보다는 은성이 서하에게 인수인계 중이라는 것이 더 마땅한 표현이겠다. 현재 SMT(Surface Mounter Technology) 팀이 3일째 연장근무 중이므로 PCB 불량 체크를 하고 간단한 납땜 수리까지 해야 하는 QC팀도 점점 수량에 쫓기는 상황이다.
“에이, 그럴 수도 있는데 아닐 수도 있잖아요. 좋게 좋게 생각하자고요.”
이때, 최주임이 뒤쳐진 두 사람을 발견했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면서 와? 빨리빨리 들어와야지. 목사님 기다리시잖아.”
“네, 네. 가요. 주임님.”
은성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런데 서하는 아니다. 서하는 계속 천천히 걸었고 최주임 앞에서는 멈췄다.
“저, 주임님?”
“왜요, 윤서하씨? 빨리 들어가야지.”
“저는 예배에 참여하고 싶지 않은데요.”
“뭐라고요?”
“저는 이 예배에 참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서하는 얼굴빛 하나 바뀌지 아니하고 최주임에게 예배 불참 의사를 밝혔다. 최주임은 얼굴에선 바로 불쾌감을 번졌다. 서하는 여전히 표정 변화가 없고. 최주임의 불쾌감에 반응한 건 은성이다. 은성은 긴장됐다. 며칠 전에도 최주임과 서하, 두 사람 사이에 가벼운 실랑이가 오갔다.
마침, 그날 사장님이 다니는 교회에 행사가 있었다. 행사의 내용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먹을 건 넘치게 많았는지 행사에 참여하느라 늦은 출근을 한 사장님이 직원 몇 명을 지하 주차장으로 불러내 큰 솥 두어 개를 가지고 올라왔다. 솥 안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떡볶이가 한가득이었다. 그래서 분위기가 묘해졌다. 들고 온 시간이 점심시간 직후였기 때문이다. 다들 배가 불렀는지 손을 대지 않아 가뜩이나 뿔어서 온 떡볶이가 더 뿔었고 더 맛이 없어 보였다.
“어머나, 이게 다 뭐야?”
이런 날엔 최주임의 목소리가 몹시 하이 해진다.
“너무 맛있겠다. 빨리 먹자. 뭐 해? 은성대리 빨리 와. 다들 빨리 와요.”
은성은 임신 중이다. 그리고 솔직히 그날의 은성은 입덧이 없었다. 임신 4개월 차가 지나니 정말 거짓말처럼 입맛이 변하는 입덧은 사라졌고 약간의 소화불량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최주임에게는 입덧이 심하다고 말했다. 갑자기 속이 너무 안 좋아져서 먹지 못하겠다고도 말했다.
“은성대리, 그러면 안돼. 입덧이 심하다고 해서 그렇게 안 먹으면 더 속만 버린다고. 그리고 나중에 애 낳으면 애 젖 물리느라 매운 거 먹고 싶어도 못 먹는다. 그러니까 일단 먹어 봐. 맛을 보면 마음이 바뀔 거야.”
최주임은 입덧 핑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무젓가락에 떡볶이를 푹 찔러 은성의 코 앞으로 들이밀었다. 은성은 이미 점심을 배불리 먹은 터라 너무 먹기 싫었고 그래서 난처했다. 그때 입사한 지 한 주 된 서하가 그 나무젓가락을 대신 받아 들었다.
“저 제가...”
최주임은 나무젓가락을 은성 대신 받아 든 서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러고선 입맛을 한 번 다시더니 뿔어터진 떡볶이를 위해 다른 사람들을 몰아 대러 떠났다. 은성은 일단 안심했다. 일단 최주임의 관심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뭐야? 윤서하씨, 나무젓가락을 왜 한 번만 쓰고 버려요?”
최주임이 다시 돌아왔고 멀어진 줄 알았던 그녀의 모든 관심이 일순간 서하를 향했다. 서하가 떡볶이 떡을 먹고선 바로 나무젓가락을 버려서다. 정작 당사자인 서하는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있는데 옆에 있던 은성이 화들짝 놀랜다
“필요 없어서요.”
“필요 없다니? 왜? 더 안 먹고?”
“네.”
“아니, 이거 우리가 안 먹으면 다 버려야 되잖아요. 그래야 되겠어요? 사람이 음식 귀한 줄 알아야지. 그렇게 얌체같이 딱 하나 맛만 보고 그러면 어떻게 해?”
“아,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는 저도 모르겠는데요.”
“뭐라고요?”
“이거 만든 지 오래됐나 봐요. 떡도 너무 뿔어서 제 입 맛에는 안 맞습니다.”
“어머나, 윤서하씨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떡이 뿔다니? 표장마차에서 먹는 떡볶이들도 다 이래요. 안 먹어 봤어요? 윤서하씨가 아직 어려서 그런 건가?”
‘음, 서하씨가 어린가?’ 은성은 최주임이 서하에게 어리다는 표현을 쓰는 것이 맞는 표현인지 의문이 들었다. 최주임은 은성보다 일곱 살이 많고 경력직으로 입사한 서하는 한 살이 많다. 평소 최주임은 은성에게 어리다는 표현을 쓴 적이 없었다. 최주임에게 첫 임신 소식을 알렸을 때 최주임은 은성이 나이가 많아 노산이라며 걱정까지 해줬다. 다들 행복한 축하를 건네줄 때 최주임만 유독 ‘다운증후군’이 어쩌고 아이가 대학 갈 때 ‘엄마 나이’가 어쩌고 하는 걱정을 해줬다. 그리고 은성에게는 전혀 신경 쓸 필요 없다면서도 은성이 잘 들을 수 있는 앞에서 임신한 은성이 육아 휴직을 했을 때의 회사 걱정을 가장 크게 했다.
“가만 보니까 서하씨도 맨날 사 먹기만 해서 요새 젊은 애들이 먹는 자극적인 맛에 중독이라도 되었나 보네. 이게 다 조미료를 안 써서 그런 거지. 이런 건강한 맛을 몰라요? 진짜 윤서하씨, 우리 나이 돼 봐요. 요새 애들이 먹는 자극적인 게 얼마나 질리는 맛인지 잘 알게 될 테니까. 건강에는 이런 슴슴한 맛이 좋은 거라고요. 알겠어요? 윤서하씨는 멀었다. 너무 멀었다.”
“…”
“아니,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갑자기 왜 꿀 먹은 벙어리가 됐어요?”
서하는 떠드는 최주임에게 반응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은성이 나섰다.
“저기 최주임님, 서하씨가 점심을 배부르게 먹어서 그런 것 같아요. 정말 죄송한데요, 저도 좀 속이 안 좋아서… 저희는 이만 가 볼 테니까 있다가 다 드시고 여기 치울 때 불러주세요.”
은성이 송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최주임에게 청했다.
“됐어요. 그냥 가 보세요. 진짜 이러다가 아까운 떡만 다 불겠네.”
최주임은 이미 뿔만큼 뿔어서 온 떡을 꼭 마치 이제 뿔기 시작한 것처럼 걱정한다. 은성은 서하의 팔짱을 끼고 서둘러 자리로 돌아갔다. 곧 은성 없이 혼자 있을 서하인데 최주임과 서하, 두 사람 성격이 너무 안 맞다. 은성은 서하를 걱정했다. 가만 보면 일을 잘하는 만큼 융통성은 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예배에 관해서도 잘 이야기해주려고 했었는데 적당한 때를 봐서 친절하게 이야기해 준다는 게 그만 덜컥 예배하는 날이 돼 버린 거다.
“윤서하씨, 그건 안 돼요.”
“음,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왜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까지 예배에 참석해야 하는지?”
“그, 그건… 너무, 아직, 저기 사장님 생각이… 사장님 허락, 아니 저희 회사, 회사 방침이에요. 그러니까 들어오도록 해요.”
“아, 사장님 허락이 아니고 회사 방침… 네 일단 알겠습니다.”
은성은 참았던 한숨을 한 번에 내쉬었다. 마치 거대한 쓰나미가 덮쳤다가 정말 아슬아슬하게 발가락 끄트머리까지만 톡 건드리고 썰물이 되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은성은 서하씨와 예배를 볼, 회사에서 가장 깨끗한 제품 개발팀 사무실로 들어갔다. 이미 사무실 뒤편은 먼저 온 사람들로 꽉 차 있어 자리가 없었다. 설교하는 목사님 바로 맞은편 앞자리 중앙에는 사장님 내외분과 최주임이 앉아 있으니 은성과 서하는 좌우로 떨어져 의자를 놓고 앉아야만 했다. 서하가 쓰나미에 맞서지만 않았다면 좀 더 눈에 안 띄는 뒤편으로 앉을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당분간은 이 예배가 마지막 예배가 될 터이니 다른 생각은 안 하고 성심성의껏 앉아있자고 마음을 다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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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가 시작되면 프린트물 두 장을 나누어 준다. 한 장은 간단한 식순으로 오늘의 목사님 말씀, 기도문, 성경 구절 같은 게 적혀 있고 또 다른 장에는 오늘 부를 찬송가 악보가 프린트되어 있다.
목사님은 날렵한 체형에 키가 큰, 공공 도서관에서 자주 봤을 타입의 아저씨로 중학교 2학년 딸과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을 두고 있다. 올 때마다 자신과 자신의 아이들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를 꼭 하는데 매번 자식들이 부모의 말을 얼마나 안 듣는지, 자식들에게 무얼 시키면 한사코 안 한다고 버텨서 힘들어 죽겠다는 말로 시작한다. 그래서 역경과 고난의 시간을 보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뜻에 따라 억지로라도 시켰더니 결국 아이들이 즐거워했다는, 한결같은 결말이다. 저 레퍼토리를 들은 게 대충 어림잡아도 42번이 넘을 것이다. 그리고 그 횟수만큼 은성의 의구심도 커져만 갔다. 저 집 아이들은 학습 능력이 없는 건지…
목사님 말이 사실이라면, 저 정도 반복했으면 저 집 아이들도 이쯤이면 부모가 시키는 일은 즐거운 일이라는 걸 깨달을 때도 된 것 같은데 매번 한결같이 부모가 시키는 건 안 한다고 하니… 아무리 생각해도 둘 중 하나는 거짓 같았다. 처음 안 한다고 버티는 게 거짓이거나 혹은 결말에 즐거워했다는 게 거짓이거나.
그래도 뭐, 대체적으로 목사님의 말씀이 크게 틀리는 건 없다. 목소리도 레크리에이션 강사 같고. 주로 자기 경험에 미루어 주님의 은혜를 깨달았고 좋은 경험이었으니 여러분도 함께 하면 좋겠다는 대충 그런 내용으로 오늘의 식순을 대충 보니 오늘은 인간관계, 예절 그런 걸 이야기하려는 건가 싶다.
“제가 며칠 전에 어느 모 기업의 이사님을 만났습니다. 대충 말만 하면 다들 알만한 기업인데요. 그 기업의 이사님이 요새 젊은 친구들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여러분 에어팟 아시죠? 귀에 꽂고 다니는 거. 그걸로 음악도 듣고, 인강도 듣고. 요새 젊은 친구들은 다 그걸로 귀를 막고 다닌다던데.”
어쩐지 큰 애가 에어팟을 사달라고 하는 걸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더라니 다 저 이야기를 위한 밑그림이었구나. 은성은 그럼 그렇지 하며 목사님의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출근길에 엘리베이터나 복도에서 만나도 인사를 안 한데요. 다들 에어팟으로 귀에 꽂고 그걸 핑계 삼아 봐도 못 본 척한다는 거죠. 그래서 그 이사님이 가끔은 그런 젊은이들의 태도에 너무 화가 나서 그 에어팟을 빼앗아 바닥에 내동댕이 쳐버리고 싶다는 충동까지 든다고 하십니다.”
아, 은성은 고개를 푹 숙였다. 저 목사님 이야기들은 대체로 크게 틀리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긴 한데 또 대체적으로 동의하기도 어렵다. 이러니 최주임이 핸드폰을 가지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지. 그러니까 만일 핸드폰이 손에 들려 있었다면 꼭 에어팟을 착용하는 젊은 사람이 아니어도 핸드폰으로 평소 챙겨보지 않는 웹툰이나 가십거리를 보고 싶게 만드는, 들려도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저 목사님은 주로 한다. 결코 귀담아듣고 싶지 않은 어중된 착한(?) 이야기. 은성은 자신의 오래된 핸드폰이 몹시 그리워졌다.
“자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거기 여자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네? 저요?”
“네, 자매님은 오늘 처음 뵙는 것 같네요. 무얼 그리 열심히 적고 계신가요?”
서하다. 하필 서하였다. 목사님이 서하에게 말을 건 것이다. 은성은 서하가 무얼 하고 있었길래 목사님이 저렇게 관심을 보이나 싶어 서하를 향해 고개를 쭈욱 뽑아 들었다. 제발 별 일은 아니어야 할 텐데.
서하는 작은 낱장 종이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글은 아니었고 숫자다. 서하의 종이에는 (3X3) X9= 총 81칸으로 이루어진 정사각형 표가 그려져 있었고 각 칸들은 숫자가 채워진 칸도 있고 없는 칸도 있다. 서 하는 이 중 빈칸을 채우고 있었다. 각각의 가로줄과 세로줄에 1에서 9까지 숫자가 중복 없이 하나씩 들어가야 하고 3X3(box) 안에도 1에서 9까지의 숫자가 중복 없이 들어가야 하는 룰에 따라서.
서하는 ‘스도쿠(9X9 칸에서 진행되는 숫자 퍼즐 게임으로 18세기 스위스의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가 창안한 라틴방진에 기초해 미국의 건축가 하워드 간즈가 ‘넘버플레이스라’는 이름으로 1979년에 소개했다. 이후 1984년 일본 니코리사의 잡지 <퍼즐통신 니코리>에서 ‘스도쿠’라는 이름을 붙여 수록하면서 대중화되었다.)’를 하고 있었다.
“숫자를 적었습니다.”
“숫자요?”
“네, 스도쿠 중이었거든요.”
서하의 손에 들려 있던 16절지보다 좀 작은 종이 속에는 스도쿠가 들어 있었다. 은성은 이미 서하가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에 종종 스도쿠 즐기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우와, 나 이거 뭔지만 아는데, 이거 스도쿠 아니에요? 안 어려워요?”
“어려운 건 어렵고 쉬운 건 쉽고 그래요.”
“그래도 서하씨 잘하나 보다. 이거 숫자가 몇 개 안 적혀 있잖아요. 제일 어려운 레벨 같은데.”
“아니에요. 그냥 중간 정도 레벨이에요.”
“그래도 너무 신기하다. 나는 이거 복잡해서 못 하겠던데. 이런 거 붙잡고 있으면 머리 아프다고요.”
“그렇긴 한데 저는 시간 때우는데 이거만 한 게 없더라고요. 특히 졸릴 때 하면 잠도 깨고 집중도 잘 돼서 좋아해요. 그리고 재밌고. 조건도 간단하고.”
“그래도 전 못 할 것 같아요.”
“에이, 아니에요. 제가 장담하는데 은성대리님도 하면 잘할 거예요, 분명히.”
“오, 진짜요?”
“네, 은성대리님, 글씨 잘 쓰잖아요. 은성대리님은 제가 아는 글씨 잘 쓰는 사람 탑 3에 들어가세요.”
“에이, 거짓말. 저 글씨 그냥 그래요. 헤헤헤. 그런데 글씨 쓰는 거랑 스도쿠랑 상관이 있어요?”
“저는 그렇더라고요.”
은성은 서하가 작은 ‘스도쿠’ 책도 가지고 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한 페이지를 뜯어 가지고 들어올 줄은 몰랐다. 얼른 사장님 내외의 얼굴을 봤다.
그들은 별 당황한 기색 없이 웃고만 있었다. 그럼 그렇지. 저들은 항상 저런다. 항상 친절하다. 특히 사장님은 직원들 앞에서 절대 친절한 미소를 잃지 않는다. 지난번 생산팀 아르바이트생 앞에서도 저 미소를 지으며 일을 잘한다며 오래오래 함께 하자고 덕담을 나눴고 바로 그다음 주에 최주임을 통해 그 아르바이트생을 해고시켰다. 사실은 아르바이트생이 일을 못 해서였을까? 아니다. 아르바이트생은 진짜 손이 빨랐고 일도 꼼꼼하게 잘했다. 다만 일 잘하는 아르바이트생이 하던 일을 다른 정직원들이 연장근무로 진행하는 것이 비용 절감에 효과적이라는 결론이 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일 잔업, 잔업… 은성은 그 몇 주가 정말 힘들었다.
은성은 빠르게 최주임 얼굴도 봤다. 역시… 똑같이 웃고 있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저들과 다르다. 그녀는 속에서부터 터져 올라왔을 불쾌감을 숨기지 못했다. 티 내지 않는 사장 내외 몫까지 더해진 것 같다. 그래도 쓰나미를 불러오진 않겠지. 은성의 시선은 목사님을 향했다. 저 불쾌감에 도움이 되는 건 목사님의 말씀밖에 없을 테니.
“이야, 스도쿠요. 저도 스도쿠 좋아합니다. 참 재밌죠.”
목사님의 말 한마디에 잠시나마 굳었던 공기가 말랑해진다. 목사님은 역시 베테랑 진행자답게 자신도 스도쿠를 좋아한다면서 분위기를 흐리지 아니했다. 또 별 다른 말 이런저런 강요 없이 그냥 넘어간다. 사실 여기 있는 모두가 기독교인이 아니므로 목사님도 어느 정도는 이해해 주는 게 맞지 않나 싶었다. 물론 최주임은 그냥 넘어가진 않을 테지만 이런 분위기라면 그녀도 앞으로 예배 시간에는 가지고 들어오지 말라는 간단한 주의만 주고 끝낼 것 같다. 다행이다.
“그런데 혹시 방금 이야기는 어떠셨나요?”
“네. 에어팟, 인사. 그냥 그랬는데요.”
“아… 그렇죠. 참 그냥 그렇죠. 오늘은 사람과 사이의 관계, 그리고 그 사이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에 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자, 여기서 그 젊은이는 무엇을 놓친 걸까요? 또 무엇이 이 이사님을 분노케 했을까요? 더 나아가 우리는 왜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지 못하는 사회 속에 살게 된 걸까요?”
“아멘.”
“우리는 여기서…”
최주임과 사장님 내외, 기타 등등은 중간중간 “아멘.” 추임새를 넣었고 목사님의 이야기는 예상되는 수순으로 이어졌다. 최근 젊은이들의 인사성 없음에 대한 문제 지적으로 시작해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까지 갔다가 다시 이사님과 젊은이의 에어팟 이야기로 돌아왔다. 최주임은 목사님이 이야기하는 이사님의 분노가 마치 자신의 분노인양 고개까지 끄덕였다. 분위기가 괜찮았다. 서하의 혼잣말이 들리기 전까지.
“인사를 못 받았다고 남이 하고 있는 에어팟을 집어던지고 싶다는 사람이니까 인사를 안 하고 싶어 지지.”
서하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크지 않았다. 작았다. 그저 타이밍이 절묘했을 뿐이다. 목사님이 잠시 목을 축이기 위해 입을 다물고 자신의 텀블러에 손을 가져간 순간이 있었을 뿐이고 하필 서하가 그 순간에 혼잣말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게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그 혼잣말이 크게, 널리 퍼졌다. 적어도 은성의 귀에는 쏙 박힐 만큼 앞사람들에겐 똑똑히 잘 들렸다. 은성은 눈앞에 역대급 쓰나미가 창궐하는 게 보였다. 방금 전 스도쿠도 그렇게 넘겼는데 왜 또 서하씨인 거야! 서하씨 제발!
“아, 자매님. 무슨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일단 쓰나미가 덮치기 전 목사님이 나서 주었다. 그러나 은성은 더 불안하다. 서하는 돼 묻는다고 해서 자신이 했던 말을 얼버무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네? 아, 제 말은...”
은성이 막 입을 연 서하를 향해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오만상을 찌푸리고 흔들었다. 평소에는 잘 안 하는 짓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쩔 수 없다. 서하를 향해 시계를 한 번 보라고 눈치를 주면서 열심히 흔들었다. 점심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뜻을 전달하고 싶은 것이다. 서하가 은성을 봤을까? 은성의 마음을 알아챘을까? 서하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 뭐 더 하고 싶은 말은 없습니다.”
휴, 다행이다. 역대급 쓰나미가 물결치다 다시 멀어지는 게 보인다. 짧은 시간 재난의 위기를 재차 겪으니 은성은 평소보다 더 배가 고파왔다. 이제 찬송가 하나만 부르고 기도 한 개만 끝내면 밥을 먹으러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났다. 아직 쓰나미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으니 은성은 쓰나미 앞에 목사님을 바라봤다. 다행히 목사님도 시계를 한 번 쳐다보더니 더 이상 무어라 하지 않고 예배를 진행한다. 곧 쓰나미는 잔잔해질 것이다.
찬송가는 모르는 노래였지만 은성은 열심히 부르는 척 입을 더 크게 벌리고 닫았다. 이어지는 기도에선 맞잡은 두 손을 더 꽉 쥐고 눈도 더 꼭 감았다. 이번이 당분간 이 회사에서의 마지막 예배였으면 좋겠다. 속으로 쓰나미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쓰나미여!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자주 나타나냐! 어서 사라져라! 제발 사라져라! 제발 내 말 좀 들어주라! 내가 무사히 휴직할 수 있게 좀 해주라!’
드디어 예배가 끝났다. 다들 각자 가지고 온 의자를 제자리에 돌려놓는다. 사장님과 최주임은 사모님과 목사님 그리고 그의 팀과 배웅 시간을 가진다. 은성은 이 틈에 서하를 데리고 빠르게 구내식당으로 움직이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빠르게 의자를 움직이려 하는데 서하가 사모님을 향해 직진한다. 그 기울어진 의자를 끌고서.
“이거.”
“네?”
“제 의자를 가져가려고요. 지금 앉아 계신 의자, 제가 일 할 때 앉는 의자거든요.”
서하가 사모님 앞으로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기울어진 의자를 내밀었다. 서하의 멀쩡한 의자에 앉아 있던 사모님은 웃으면서 사장님 한 번, 최주임 한 번, 또 사장님 한 번 번갈아 가며 쳐다본다. 그러더니 천천히 일어났다. 정말 천천히.
의심의 여지없이 쓰나미다. 역대급. 은성의 눈앞에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던 쓰나미가 다시 출렁인다. 사장님과 목사님들은 서하를 없는 사람 취급하면서 사장실로 이동했고 그 뒤로 최주임이 나타났다.
“윤서하씨, 잠깐 이야기 좀 하죠.”
최주임이 서하를 불러 세운다. 어디 사람 없는 조용한 데서 이야기해야 할 분위기였는데 따로 이동하진 않아도 되었다. 그들이 있는 곳에 그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빠르게 빠져나갔다. 정적이 흘렀다. 제품 개발팀 사무실엔 최주임과 서하, 은성만 남아 있었다. 최주임은 한없이 못마땅한 얼굴로 서하를 노려봤고. 서하는 평소와 다름없는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최주임을 바라봤다. 은성은 멀찍이 떨어져서 기회만 엿봤다.
물론 은성도 쓰나미를 피해 다른 사람들과 빠르게 나가도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후임으로 온 서하를 쓰나미 앞에 혼자 둘 수도 없었다. 눈치를 봐서 자신이 잘 말하겠다고 하고 서하를 데리고 나오고 싶다. 은성은 서하가 회사의 좋은 면만 볼 수 있도록 노력했고 그만큼 서하가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주길 바랬다. 그러나…
“윤서하씨, 그거 알아요?”
“네?”
“그거 아냐고요.”
“글쎄요… 다짜고짜 그거 아냐고 물으시면 저야 당연히 그게 무엇인지 모릅니다만.”
“나요, 나 윤서하씨 같은 사람 처음 봐요. 기껏 경력직이라고 뽑아 놨더니 사람이 사사건건 왜 이래요?”
“네?”
“이전 회사는 어땠는지 모르겠는데 여긴 달라요. 새로운 회사에 왔으면 새로운 회사 룰에 따라야지. 왜 이렇게 자기 멋대로 구는 거냐고요!”
“제가 뭐를 제멋대로 굴었다는 말씀 이시죠?”
“예의! 사람이 기본적인 예의를 지켜야죠! 어떻게 그런 딴짓을 할 수 있냔 말이에요!”
최주임이 목소리에 감정이 흠뻑 담겨 있었다. 불쾌함과 분노, 어이없음. 최주임은 서하가 ‘목사님 말씀’에 혼잣말로 끼어든 것을 에둘러 서하의 ‘스도쿠’ 이야기를 하고 있다. 분명히 그 혼잣말만 없었다면 ‘스도쿠'도 그냥 넘겼을 거다.
“저 제가 무슨 딴짓을 했다는 말씀이신지… 저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데요?”
“어머, 어머나. 사람이 많이 뻔뻔하다. 그럼 윤서하씨가 딴짓을 안 했어요?”
“네. 저는 딴짓을 한 게 없는데요. 저는 여기 출근하면서 근무 시간에 딴짓을 한 적이 없습니다만. 그건 제 업무일지만 봐도 알 수 있으실 텐데요.”
“정말 사람이 따박따박 못 하는 말이 없네. 오늘, 지금, 스도쿠인지 뭔지 게임했잖아요. 윤서하씨가 우리 예배 시간에 딴짓했잖아요! 그게 딴짓이 아니면 뭐냔 말이에요!”
은성은 집채만 한, 아니 어디 산만한 초울트라 메가톤급 쓰나미가 코 앞까지 다가온 것을 느꼈다.
은성의 나이 서른일곱. 확실히 임신에 이른 나이는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늦은 나이이긴 하다. 남들보다 이른 결혼에 비해 오랜 시간 아이가 없었으므로 남 모르는 마음고생도 심했다. 그래서 임신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회사를 쉴 생각부터 했다. 말이 좋아 QC 컴퓨터 앞이지 납이며 PCB 세척 용액 등, 안 좋은 화학약품에 노출되어 있는 건 다른 팀과 다를 바 없이 마찬가지였다.
큰 결심을 하고 최주임에게 넌지시 다소 이른 육아 휴직 의사를 밝혔다. 그간 아이는 엄마 손에 커야 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해왔던 최주임이기에 많이 갑갑한 면이 있어도 은성의 상황만큼은 쉽게 이해해 줄줄 알았다. 그런데… 돌아온 것은 일종의 비난이었다. 밑도 끝도 없이 회사라는 공동체에 대한 애정이 없다며 무책임하다는 비난 그리고 그간 QC업무를 은성 혼자 해왔으니 제대로 된 후임이 올 때까지 휴직은 안 된다는 말뿐.
서하가 나타나기 전 두 명의 사람이 입사했다가 퇴사했다. 한 명은 자신은 QC업무만 하는 줄 알았지 PCB 수리까지 해야 하는 줄은 몰랐다며 퇴사하는 날 최주임 욕을 엄청 하면서 그만뒀고 또 한 명은 컴퓨터를 켜고 끌 줄만 알아서 QC 프로그램 자체도 어렵고 PCB 세척용액 냄새 때문에 두통이 너무 심해졌다며 그만뒀다. 그러니 협력 업체에서 소개받은 QC경력 베테랑인 서하가 나타났을 때 은성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저 사람이다. 저 사람이 대신 남아준다면 무사히, 아무 비난 없이 육아휴직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럴 경우, 휴직 후 돌아올 자리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아니 아마 없겠지.
“저는 최주임님 말씀이 도통 이해가 안 가는데요.”
“아니, 뭘 잘했다고, 자꾸 말대답이지?! 목사님 말씀하시는데 말도 안 되는 혼잣말이나 하고. 그게 예의가 없는 행동이라는 걸 몰라요? 그리고 사람이 이 정도 알아듣게 설명을 해주면 ‘네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안 그러겠습니다.’ 하고 머리 숙이고 사과부터 해 야지. 도대체 사회생활을 어떻게 하는 거예요?! 이러면 경력이 다 무슨 소용이야!”
파국이다. 쓰나미가 밑도 끝도 없이 커진다. 은성은 이대로 가다가 서하마저도 그만두겠다고 할 까봐 무서워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서하만 한 사람은 없다. 은성은 서하가 그만 멈춰주기를 빌었다. 그런데 어떻게 끼어들 틈이 없다.
서하는 시계를 봤다. 그리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아니 자신 때문에 이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은성을 봤다. 이윽고 최주임을 바라봤다.
“최주임님, 정확하게 무엇이 문제인가요?”
“그걸 지금 몰라서 물어요? 내가 계속 말하잖아요! 딴짓하지 말라고요. 특히 목사님 말씀 중에…”
“목사님 말씀 중에 입만 꾹 다물라고 하는 거라면 그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딴짓은 잘 모르겠는데요. 자꾸 딴짓 딴짓 하시는데 애초에 저는 딴짓을 한 적이 없습니다.”
“아니, 딴짓을 한 적이 없다고요?!”
“네! 저 예배라는 거 말입니다. 이건 업무시간에 같은 종교인이라고 해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더군다나 같은 종교도 아닌 타 종교, 무종교인 사람들까지 회사 측에서 먼저 강제적으로 예배라는 딴짓을 강요하는 거 아닌가요? 그렇게 회사 측에서 딴짓하라고 강요하는 시간에 제가 개인적으로 무엇을 했던지 그게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는데요.”
“아니, 윤서하씨! 회사 다녀봤잖아요. 사회생활 해 봤잖아요. 이 회사는 이렇다고요. 그리고 예배드리는 걸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어떻게 예배가 딴짓이 돼요? ”
“그러면 업무시간에 하는 예배가 업무시간에 하는 딴짓이 아니고 무엇인가요?”
최주임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반면 서하의 목소리는 커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더 작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했다.
“예배는! 예배는! 예배는…”
“그리고 아까부터 사회생활에 대해 이런저런 말씀을 자꾸 하시는데요. 저는 사회생활에서 회사에 일하러 옵니다. 종교 활동을 위해 회사에 오지 않습니다.”
최주임이 할 말이 없는 건지, 아니면 있는데 입 밖으로 뱉지를 못하는 건지 입만 뻐끔거린다. 그러면서 손으로 얼굴에 부채질을 했다. 손목만 흔들면 될 것을 어깨까지 흔들어 재끼며 부채질을 해댔다. 서하는 신기할 정도로 작은 미동도 없이 움직이지 않았다.
꼬르륵!
이때 은성이 소리쳤다. 정확히는 은성의 위장이었다. 아무 말 못 하고 기다리기만 하던 은성을 대신해 은성의 위장이 배고프다고 외친 것이다. 그 소리가 매우 커 은성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갑자기… 이게 제 맘대로 되는 게 아니라서…”
“은성대리 먼저 식사하러 갔어야지, 왜 안 가고 거기 있던 거예요?”
“아… 그게, 저는 서하씨랑 같이 가려고…”
“진짜, 정말 서하씨는 챙겨주는 사람도 있어서 참 좋겠네요.”
그러고 보니 최주임의 얼굴도 은성 못지않게 귀까지 벌게져 있었다. 최주임도 배가 고파서였을까? 아니면 서하와의 실랑이로 열이 받아서일까?
“윤서하씨, 뭐 해요?”
“네?”
“은성대리가 밥 먹으러 가자고 기다린 거라잖아요.”
“네.”
“그럼 빨리 가보세요. 진짜 눈치라는 게 없다니까.”
“더 하실 말씀은 없으신 건가요?”
“아니, 사람이 말이 통해야 대화를 나누지. 윤서하씨 같은 사람이랑 내가 무슨 대화를 하겠어요.”
거기까지였다. 서하는 최주임의 말에 별 대꾸 없이 고개만 숙였다. 대충 알겠다는 의사 표시를 한 것이다.
“은성 대리님, 괜히 저 때문에 오래 기다리셨죠? 빨리 가요.”
서하의 목소리가 상냥하다. 은성이 그동안 들어왔던 목소리 중 가장 상냥했다.
은성과 서하는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어차피 늦은 거 더 천천히 가기로 하고 지하 1층에 있는 구내식당으로 가는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선택한 것이다. 사실 엘리베이터에 최주임이 탈 것 같기도 했고. 오는 길에 사장님실을 얼핏 보니 아무도 없었다. 최주임만 남겨놓고 어디로 간 것이다.
“저기 서하씨, 나 물어볼 게 있는데…”
“네, 뭔데요?”
“진짜 물어봐도 돼요?”
“네, 그럼요. 편하게 물어보세요.”
“저기… 서하씨, 혹시 우리 회사 그만두진 않을 거죠? 오늘 일로 막 화가 나거나 그래서… 아니죠?”
“그럼요. 저 이 회사 좋은데요. SMT 대리님들도 좋고. 개발팀 과장님도 좋으신 분이고요.”
“그렇죠? 그럴 거죠?”
“은성대리님 계속 같이 일 못하는 게 아쉽긴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으니까요.”
“어어, 정말요? 저랑도 계속 같이 일 하고 싶으세요?”
지난 회식 생각이 났다. 서하는 최주임과는 다르게 다른 부서 팀원들과도 잘 어울렸다. 회사 안에서와는 달리 잘 웃었고 되지도 않는 농담도 잘 주고받았다. 일 할 때는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이 나왔지만 대신 철두철미 스케줄을 놓치는 법이 없었다. SMT 기계로 흘리기 어려운 PCB 수리도 섬세하게 잘했으며 손까지 빨랐다.
처음 은성은 서하가 말 수가 적은 무뚝뚝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다 가끔 자신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할 때면 이 사람 마음에도 없는 실없는 소리도 하는구나 싶었다. 뭐, 어쨌든 상관없었다. 은성이 싫은 소리 안 듣고 무사히 휴직할 수 있도록 서하가 있어주기만 하면 되었다. 그래서 지금까진 서하 걱정만 했다.
그런데 이제부턴 최주임이 걱정된다. 사실 서하는 은성은 피하고만 싶었던 쓰나미를 스스로 일으키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 솔직한 사람이다. 은성은 여전히 쓰나미는 싫지만 서하는 믿기로 했다. 은성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백두산, 한라산 만했던 쓰나미가 작은 물웅덩이가 된 것 같았다. 그 물웅덩이를 발로 찰박찰박 밟았다. 별 거 없다.
“은성대리님 갑자기 무슨 신나는 일 생겼어요. 조심해야죠. 그러다 넘어져요.”
“어머, 하하하하. 네네, 조심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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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성의 육아 휴직은 무사히 처리되었다. 사장님은 서하를 필두로 예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은 꼭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방침을 내렸다고 한다. 덕분에 전체 인원의 3분의 2가 빠졌다고. 사장님이 좋아서 내린 건지 울며 겨자 먹기로 내린 건지는 알 수 없다. 그렇다고 예배에 참여하지 않기로 한 사람들이 업무를 봐야 하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들에겐 그냥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서하는 그 시간에 스도쿠를 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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