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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광 Jun 23. 2024

로또에 당첨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100가지 일들

23. 망원동 조거

 

 

23. 망원동 조거

 


언젠가 본 미드 <CSI NY>에서 그랬다. 이른 아침, 해가 막 뜬 새벽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는 때, 뉴욕 센트럴 파크의 외진 장소에서 변사체가 발견된다. <CSI NY> 속 센트럴 파크 변사체 에피소드는 여러 개이고 그만큼 사인도 다양하다. 목이 졸린 질식사, 칼이나 송곳 따위의 날카로운 것에 찔려 생긴 자상, 과다출혈, 약물 중독, 원인 불명, 기타 등등. 그런데 사체를 발견하는 최초 목격자는 대부분 ‘조거’다. 조거, 조깅하는 사람들.

 

어떤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서도 그랬다. 어느 날 갑자기 뉴욕에 사는 여자 주인공이 남자친구, 걔네 말로 피앙세, 무려 결혼까지 약속한 자에게 차인 거다. 그래서 울더라. 꼴랑 작은 병맥으로 두 어 병 마셔 놓고 아이라인인지 마스카라인지 얼마나 쳐 발랐는지 눈 주위가 시커멓게 번지는 걸로도 모자라서 시커먼 눈물까지 철철 흘리며 울더라. 당연히 입술 화장도 다 번지고 할 수 있는 온갖 진상 짓은 다 하면서 길바닥에 드러눕고 뒹굴고. 그렇게 밤하늘 아니 새벽하늘을 향해 괴성까지 지르다가 장면이 컷 되면 다음 날 날씨 좋은 눈부신 아침으로 바뀐다. 그러면 여주가 숙취에 쩔어 침대에 널브러져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다. 화장실에 있다. 밤새 변기를 붙잡고 토한 몰골로. 그래도 교우 관계는 좋았는지 그런 여주의 사정을 알고 베스트 프렌드가 찾아오는데 그 친구가 ‘조거’다. 친구는 매일 아침 아니 새벽 조깅을 버릇처럼 하는 건지 여주보다 덩치가 크고 건강하게 생겼다. 심지어 걸치고 있는 레깅스나 탱크탑이 블랙이 아니다. 파스텔 민트 아니면 딸기 우유 분홍색 또는 형광 레몬색 같은 전부 팽창색이다. 허벅지 굵기로 치자면 그 친구가 더 굵을 거 같은데 나는 물벅지, 그녀는 말벅지. 탱크탑과 레깅스 사이, 나는 넘치는 물떡살, 그녀는 방탄 복근.


“그래서 그렇게 입겠다고?”

“어!”

“진심?”

“어! 진심! 나는 이번 생에 새로 태어날 거야. 다시 태어나야 할 수 있다는 그런 나약한 말 따위 입에 담지 않겠어!”

 

가율이 드디어 독립을 했다. 그토록 염원하던 망원동 작은 빌라에 혼자 살게 된 거다. 2학년 마치고 1년 휴학하며 하루 투잡, 쓰리잡으로 12시간 아르바이트를 한 것에 부모님의 마음이 움직였다. 이제 마음만 먹으면 학교에 ‘걷기’ 혹은 ‘뛰기’만으로 갈 수 있다. 그리고 한강과도 가깝다.


“더 이상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되겠어.”

“뭐가?”

“몸.”

“몸?”

“응. 몸. 몸이 오고 옷이 오는 게 아니라 옷이 먼저 오고 몸이 오는 거라고 하면 네가 이해를 좀 할 수 있으려나?”

 

가율은 자신의 새 집에 놀러 온 준경의 잔소리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레깅스에 탱크탑 차림으로 다양한 포즈를 취해 보았다. 일부러 윗배까지 끌어올린 하이웨이스트 레깅스에 일부러 윗배까지 끌어내린 크롭 탱크탑을 입었지만 팔을 조금만 위로 들어도 레깅스와 탱크탑 사이로 뱃살이 뿅뿅 올라온다.


“흠, 당분간 과격한 운동은 하면 안 되겠어.”

“그게 무슨 소리야? 운동한다고 옷 사 입고 과격한 운동은 안 되겠다니? 진짜 아까부터 철 지난 CSI에 여자 주인공 베스트 프렌드가 어쩌고 저쩌고 별 시답잖은 소리만 골라서 하고. 너 진짜 어떡하려고 그래?”

“뭘 어떡하긴 어떻게 해? 나 내일 아침부터 한강 공원 뛸 거야. 센트럴 파크의 뉴요커처럼.”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가율은 새삼 깨달았다. 잠자는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고 아침은 빨리 온다. 그리고 웨이크업 알람은 몇 번 끄면 그만이다.


“그래서, 그 꼴을 하고 학교에 왔다고?”

“어!”

 

가율은 자신의 옷차림을 못마땅해하는 준경이 못마땅했다. 가율도 양심이란 게 있다. 아무렴 어제처럼 입었을라고. 초여름임에도 빨리 찾아온 더위 때문에 체감온도가 평소보다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긴 팔 바람막이도 걸치고 땀이 차는 걸 꾹 참고 ‘조거’ 답게 헤드셋도 목에 착용했다. 분명히 조신하게 입었다. 어제 같은 노출은 없단 말이다. 그런데 저 준경이는 무엇이 불만이란 말인가!


“네 레깅스 색을 봐 봐라. 그게 말이 좋아 레몬색이지 무슨 짜장면 중국집 단무지냐고!”

“그래? 이게 단무지 같아?”

 

가율은 자신의 허벅지를 팡팡 두들기며 금시초문이라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그러면서도 무슨 소리를 듣던 이 레깅스가 맘에 든다는 확신은 넘친다.

 

“응! 그걸 몰라서 물어? 거기다가 날도 더워 죽겠는데 그 반스타킹 양말은 뭐야? 그 와중에 또 운동화는 키높이야? 몇 센티니? 7센티는 돼 보이는데?!”

“아오 촌스럽게 반스타킹이 웬 말이야? 이거 니삭스. 니삭스라고 불러 줘. ‘조거’들한테는 양말도 패션이라고.”

“그러니까 내 말이! ‘조거’ 면 ‘조거’ 답게 달릴 생각을 해야지 너는 또 왜 엉뚱한 패션질이야?”

“아휴, 내가 말했지? 순서를 조금 바꾼 것뿐이라고. 몸이 오기 전에 옷이 먼저 온 것뿐이야. 조금만 기다려 봐. 내가 곧 날아다닐 테니까.”

 

라고 말은 했지만 가율도 조금 조급해졌다. 지난 학기엔 ‘밀덕’이 되겠다고 각종 군복만 잔뜩 사들였다가 예비역 아저씨 같다는 소리만 잔뜩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도 밀리터리 지식보다 옷이 먼저 온 것뿐이라고 말했었는데… 밀리터리 지식은 좀처럼 쉽게 와주지 않았다.


“가율아, 오늘 우리 조 과제 뒤풀이 가기로 했잖아. 그런데 어딜 간다고”

“한강. 내 비록 아침은 놓쳤지만 그렇다고 포기한 건 아니 거든. 지금 가서 가볍게 뛰어 주고 조금 늦게 합류할 테니까 먼저 놀고들 있어. 어차피 나 막차 끊기는 거 고민 안 해도 되잖아. 아하하하하!”

“진짜? 진짜 그렇게 다녀오겠다고? 진심?”

“어, 여기서 한강 따라서 집까지 갔다가 씻고 나오면 돼. 뭐 별 거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 건 군복은 전부 동묘 시장에서 구입해 큰돈은 깨지지 않았다는 건데 이번 ‘조거’가 되는 길에는 제법 돈이 깨지고 있다. 왜 마음에 쏙 드는 색의 레깅스는 또 탱크탑은 또 니삭스는 또 바람막이는… 다 비싼 건지… 아, 헤드셋도 정말 비쌌다. 생활비를, 이 중에 식비를 아껴야만 한다. 그러니 오늘 뒤풀이를 배부르게 먹고 내일 식비를 아껴야만 한다. 그렇게 호기롭게 한강 공원으로 향한 가율은 곧 큰 별 거를 느꼈다. 입으로, 눈으로, 콧구멍으로.


“으아, 이게 뭐야. 퉤, 퉤 퉤!”

 

평소에 모르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도 왜 달리려고 하는 이 순간 큰 존재감으로 다가오는지. 무수히 많은 날파리떼가 가율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닌가? 정확하게는 가율이 날파리떼 한가운데로 달려든 걸까? 작은 날파리가 눈으로 들어와 눈을 찌르고, 입으로 들어와 스스로 먹히고 콧구멍으로 들어와 더 이상 나오지도 않는 콧물까지 뽑아낸다. 게다가 늦은 오후 볕이 너무 따갑다.


평소 가율은 엄마와 이모들이 여기저기 ‘둘레길’을 걷겠다고 갖춰 입는 옷차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밭매러 갈 때나 쓸 것 같은 세련되지 못한 챙모자에 목까지 뒤덮는 마스크. 그냥 선글라스도 촌스러운데 거기서 더 나아가 아예 얼굴을 다 덮는 챙모자. 지나치게 기능적이기만 한 팔토시. 이미 아줌마라고 해도 일부러 너무 아줌마처럼 하고 다니는 건 좀 아니지 않냐고 볼 멘 소리를 했었으니 엄마와 이모들은 콧방귀만 뀌어댔다. 하…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들이 그립다. 정확하게는 그들의 중무장이 그립다. 그건 그냥 단순한 패션이 아니었던 거였어.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순 없지. 퉤.”

 

사실은 가볍게 뛰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급속도로 지쳤다. 그래서 이 날파리떼를 핑계 삼아 스스로 오늘의 ‘조깅’을 내일로 미룰까도 싶었지만… 자고로 시작이 반이라고 했다. 어떻게든 반은 해 놓고 싶었다. 그리고 제대로 했다고 해도 진짜 한 게 맞는지 의심의 눈초리를 쉽게 거두지 않을 준경이게 거짓을 고하긴 싫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안 했다는 말을 하는 건 더 싫었다. 그래서 날파리떼를 피해 고개를 이리저리 저으며 남이 보면 걷는 것처럼 뛰고 있었는데.


“으앜!!!”

 

넘어졌다. 앞도 제대로 안 보고 뛰다가(걷다가) 오른 발목이 안으로 꺾이면서 접질렸다. 마치 7cm 운동화에서 떨어진 것 같았다. 떨어지면서 같이 짚었던 손바닥은 작은 돌이 박히고 까져서 피가 났고 손목도 아팠다. 무엇보다 무릎이 아팠다.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바닥에 엄청 세게 박은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이이이잉! 단무지색 아니 레몬색 레깅스가 빵꾸가 났다. 아픈 무릎에서는 피도 났는데 그것보다 레깅스에 빵꾸가 난 것이 더 아팠다. 레깅스… 수선집에 맡기면 티 안 나게 꿰맬 수 있을까? 안 되겠지… 어찌저찌 일어나 보니 못 걸을 만큼은 아니었다. 도로변으로 나가면 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잡거나 할 수 있을 텐데 그러지도 못한다. 그렇게 가기엔 여기서 집까지 거리가 애매하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택시비도 없다. 가율은 스스로가 너무 처량했다.



**********   



“가율이 왜 안 와?”


이번 과제 조 조장 민경이가 가율을 찾는다. 오랜만에 <서강껍데기>에서 껍데기를 안 굽고 갈매기살을 굽는데 가율이 없다니 조원 모두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다.


“우리 조에서 제일 고생한 게 가율인데 가율이가 없으면 안 되지. 준경아, 네가 금방 온다고 했잖아.”

“그게… 그랬지. 그런데 갑자기 뭐 먹을 기분이 아니라고… 그냥 집에서 쉰다는데. 하아,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말도 안 돼. 우리 이거 가율이 먹이려고 여기 모인 거잖아. 그러지 말고 좀 오라고 해 봐.”

 

또 다른 조원 형준이도 가율을 찾는다.

 

“아니. 계속 오라고 하고 있는데… 진짜 무슨 변사체라도 발견한 거 아니야?”

“뭐, 변사체? 그게 무슨 말이야? 어디 무슨 살인 사건 났어?”

“그러게, 준경아 무슨 소리야?”

“하… 몰라도 돼. 그냥 농담한 거야, 농담.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런 게 있어. 진짜 아무것도 아니야.”

 

준경은 평소 말도 안 되는 가율의 말들에 브레이크를 걸어주던 게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율이 같은 소리를 해 버리다니. 준경은 얼른 눈앞에 소주잔을 비웠다.


갈빗살 한 판을 비우고 더 시켰다. <서강껍데기> 사장님이 알맞게 초벌 구이 된 갈매기 살을 더 가지고 왔다. 오늘따라 진짜 맛있는 것 같다. 차돌박이 된장찌개도 진짜 맛있고 다음 판에는 항정살도 시켜 먹을 건데… 가율이는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꾼 건지… 가율이는 아까부터 내내 이유는 말해주지 않으면서 계속 안 오겠다는 말뿐이었다.


‘레깅스가 너무 복부를 압박했나? 그래서 점심 먹은 거 체 한 거 아냐?’


준경은 조금 더 현실적인 이유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준경아, 뭐 해? 먹자!”


같이 가율이를 걱정해 주던 민경이 결국 눈앞에 고기에 눈이 멀었는지 열심히 달려든다. 준경은 그런 민경이 못내 섭섭해졌다.


“준경아, 왜? 괜찮아, 먹어. 가율이 곧 올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방금 전에도 톡 했는데 안 온다고 했다고.”

“아니야, 괜찮아. 형준이가 다 먹기 전에 빨리 먹어. 가율이는 금방 올 거니까.”

“야, 내가 뭘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그래?”

“응, 박형준. 네가 마음만 먹으면 여기 있는 고기 다 먹을 수 있다는 거 모르는 사람이 없거든. 그러니까 너는 천천히 먹어. 준경이도 먹게.”

“민경아, 무슨 말이냐니까. 가율이가 어떻게 와?”

 

그때였다. 열려 있는 <서강껍데기> 문 앞, 사장님이 초벌구이 하느라 하얗게 피어오른 고기연기 사이로 진짜 가율이가 나타났다. 낮과는 조금 다른 ‘조거’ 룩을 하고서.


“뭐야? 준경이 괜찮아? 많이 다쳤어?”

 

갑자기 나타난 가율은 준경이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무사무탈 사지멀쩡한 준경은 마냥 어리둥절해했지만 가율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준경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캔한다.


“가율아, 그러지 말고 얼른 앉아. 준경이 술 먹고 맛탱이 갔다고 한 거 뻥이야.”

 

민경이 준경이 옆자리 의자에 가율을 앉히며 잘 익은 갈빗살 한 점을 쌈장소스에 찍은 구운 마늘과 함께 가율의 입에 넣었다. 뻥이라는 말에 욱하려던 가율은 그 고기 한 점에 바로 행복해졌다.


“뭐야? 뻥이라고! 근데 너무 맛있다! 근데 왜 뻥 쳤어? 나 젓가락 좀!”

“왜는 왜야? 너 부르려고 그런 거지.”

“민경아, 너 가율이한테 나 맛탱이 갔다고 뻥쳤어?”

“어… 어. 너 맛탱이 가서 꽐라 됐다고. 그래서 그 건축과에 너 헤어진 오빠 있잖아. 그 오빠 찾는다고 그렇게 뻥 쳤는데.”

“뭐?”

 

가율은 준경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면서 야무지게 갈빗살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이 맛있는 걸 왜 거절했는지 스스로 한 결정이 너무 후회되었다. SNS에서 누군가 말했다. 자고로 중요한 결정은 감정이 격해졌을 때 하는 게 아니라고. 그 말이 너무 맞다. 고기를 먹을지 안 먹을지 하는 결정은 그런 순간엔 하는 게 아니었다. 아니, 처음부터 고기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무조건 먹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홍민경! 그렇다고 그런 뻥을 치면 어떻게 해?”

“가장 설득력 있는 뻥이잖아. 너 저번에 우리 과제 중간 뒤풀이 할 때도 술 먹고 얼마나 난리 쳤냐? 그때, 가율이가 너 빵꾸 낸 것도 메꾸느라 고생 많이 했지.”

“맞아, 나 진짜 그때 고생 많이 했어.”

“그래서 그다음에 내가 또 가율이 거 메꿨잖아.”

“그래 그래. 다들 잘했어. 가율이도 왔으니까 짠 하자, 짠.”

 

짠! 넷은 잔에 소주를 가득 채워 제대로 된 건배를 했다.

 

“우리 가율이 많이 먹어. 너 없어서 형준이가 다 먹으려고 했어.”

“그건 아니라니까!”

 

자꾸 아니라고 말하던 형준은 가율이 나타나자 먹는 속도가 빨라졌다. 아니 형준뿐만 아니라 모두 속도가 빨라졌고 갈빗살 한 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항정살로 바꿀까도 했지만 가율이 갈빗살이 더 먹고 싶다고 해 민경은 갈빗살 한 판을 더 시켰다.


“그런데 너 레깅스 왜 그래?”

“레깅스가 왜?”

“왜 갑자기 레깅스가 반바지가 됐어. 9부였잖아? 거기다 니삭스는 어디에다 팔아먹고? 너 진짜 조깅한 거 맞아?”

“그럼. 당연하지. 그래서 니삭스는 없는 거잖아. 땀나서.”

“그럼 이 레깅스가 왜 반바지가 된 건데? 아니 이렇게 잘 먹을 걸 애초에 왜 안 나온다고 했던 건데?”

 

가율은 비싼 레깅스를 되살릴 방법을 강구했었다. 강구하고 강구하고 고기까지 포기해 가면서 강구했던 방법이 과감하게 레깅스를 잘라내는 것이었다. 9부 레깅스를 가위로 잘라 5부 레깅스로 만들었다. 단처리는 따로 하지 않았다. 왜냐면… 할 줄 모르니까. 게다가 잘못 꿰매면 레깅스 위로 뱃살이 튀어나오듯 바짓단 아래로 허벅지살이 튀어나올 것이다.


“준경아, 레깅스가 무슨 상관이야. 이유야 뭐가 됐던 이렇게 왔으면 됐지. 그런데 가율아 어떻게, 택시 타고 왔어?”

“아니. 택시 안 탔는데. 돈 없어서.”

“그럼 어떻게 왔어? 내가 톡 보낸 시간 생각하니까 엄청 빨리 왔는데.”

“아, 뛰어 왔어.”

“뭐? 진짜?”

“응, 그냥 뭐… 준경이가 진짜 그 인간한테 연락했을까 봐… 그거 생각하니까 발이 막 이렇게 막 축지법으로 막 움직이던데?”

“진짜? 진짜 그랬다고?”

“응.”

“에이, 뻥치시네, 그냥 좀 빠르게 걸은 거겠지. 뛰긴 뭘 뛰어? 어떻게 뛰어?”

“아니야. 어쩌면 그럴 수도 있어. 진짜 민경이가 친 뻥이지만 그게 뻥이 아니고 진짜였다고 생각하면… 나도 막 그렇다. 아휴.”

“아, 진짜 연락 안 한다고! 내가 미쳤냐고! 나 진짜 완전히, 퍼펙트, 개퍼펙트하게 정리했다고!”

 

졸지에 몇 주 전 흑역사가 소환된 준경이 발을 동동 굴렀다. 문득 그 모습을 본 가율은 어떤 생각이 들었다.


“뭐야? 준경이가 그러면 로코의 여자 주인공이야?”

 

그리고 그 생각이 자연스럽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준경이가 무슨 영화 찍었어? 웬 로코?”

“그러게, 뭔데? 단편 영화 같은 거야?”

“아니야. 내가 무슨 영화야? 영화는! 니네 가율이 하는 말에 일일이 궁금해하면 하지 마. 니네 속만 터져.”

 

뜬금없는 가율의 말에 민경, 형준이 궁금해했지만 준경의 속만 터지게 했고 가율은 긴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단지 또 다른 뜬금없는 대답만 해 줄 뿐이었다.


“영화는 아니지만 그런 게 있어. 그러나… 만에 하나 준경이 포지션이 그렇다면 역시 나의 ‘조거’의 삶은 희망이 있는 거야. 나는 할 수 있어!”

“‘조거’의 삶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정말! 고기나 먹어!”

 

그러고 보니 준경은 지난 흑역사 속에서 변기를 붙잡고 울었었다. 가율은 그때 끝까지 준경 옆을 지켰다. 물론 힘에 부쳐 그냥 경찰서에 버리고 갈까 잠깐동안 진지하게 고민도 해보았지만 역시 안 그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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