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옥광 Jun 08. 2024

로또에 당첨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100가지 일들

21. 녹색 어머니회



21. 녹색 어머니회



* 20화와 동일한 등장인물입니다.


[하준이 자?]

[ㄴㄴ 아직 안 자 ㅠㅡㅜ 와쩝? 왜 후후들은 벌써 자?]

[ㅋㅋㅋㅋ 아니 애들은 용선이가 집중마크 중. 언니들 맥주 콜? 도연이는?]

[와우! 좋은 생각! 도연이는 자 ㅎㅎㅎ]

[ㅇㅋㅇㅋ 언니 하준이 빨리 재워!]

[하준아 빨리 자라!]

[ㅇㅋ요! 기다려!!!!!!!!!!]

 

지연과 선경, 나까지 셋이 쓰는 단톡방이 잠시 시끄러워졌다. 지연이 맥주를 한 잔 하잰다. 이제 밤 11시를 겨우 넘겼을 뿐인데… 하준아 어서 잠들거라, 제발.


[하준이 잔다! 나오자!]

 

하준이는 12시가 거의 다 되어 잠들었고 우리는 12시 10분이 조금 넘은 시간에 단지 내 <GS25시>에 앞에 모였다. 선경의 딸 도연이는 이미 11시 전에 잠들어 있었고 지연의 아들들 시후와 정후는 아직도 높은 텐션으로 아빠와 게임 중이라고 했다. 며칠 전, 하준이와 즐겨하는 ‘루미 큐브’를 알려줬는데 그게 지금 그 집에서 터진 거다. 지연이는 7살 정후가 의외로 침착하게 플레이해서 기특하다고 했다. 물론 상대적으로 어린 플레이어답게 자기 패를 종종 공개함으로써 다른 플레이어들을 곤란하게 만든다는 말도 덧붙였다.


“아이고 하준이 어머님, 드디어 녹색 어머니가 끝나셨다구요. 축하드립니다.”

“예예, 도대체 언제쯤 끝나려나 싶었는데 드디어 끝이 났습니다. 며칠 전에 시후네도 끝났지요. 더불어 도연이네도, 여러분 모두 축하드립니다.”

“저희는 끝났는데 또 시작하지만 그래도 일단 축하는 받겠습니다. 언니들 정말 축하드립니다.”

 

맥주는 시원했다. 한 모금씩 넘길 때마다 ‘영롱한 똥파리 초록색’ 463ml 캔이 쭉쭉 가벼워진다. 셋이 동시에 외쳤다


“크으~ 좋다!”

 

하준이 엄마인 나와 도연이 엄마인 선경, 시후와 정후 엄마인 지연 우리 셋은 아이들 유치원 통학 버스 앞에서 만났다. 아, 이때 정후는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구나, 하하.


5살 아이들이 함께 다니던 유치원 통학 버스가 마지막까지 기다리고 기다려 주다가 출발하는 시간이 8시 25분. 매일 아침이 전쟁이었다. 저 버스를 놓치면 원에 직접 데려다줘야 하고 그러면 백 프로 회사에 지각이다. 절대로 그럴 순 없었다.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하준이를 씻기지도 못한 채 그냥 둘러메고 버스 상하차 포인트까지 전력질주 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렇게 버스에 태우고 나면 한숨 돌려도 되었을까? 아니었다. 다시 출근을 위해 전략질주로 버스정류장까지 달려야만 했다. 가끔 버스 안에서 잠이 깬 하준이가 신나게 손을 흔들어 주기도 했는데 내가 자신이 탄 버스와 달리기 경주를 하는 것으로 여겼다고 했다. “엄마! 이겨라!” 그러니 주변에 다른 아이들 엄마들이나 아빠들이 제대로 눈에 들어온 적이 없었다. 출근에 늦지 말아야 했고 버스보다도 빨라야 했다.


“잠깐만요. 잠깐, 잠깐!”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나를 불러 세웠다. 매일 아침 스치듯 얼굴만 보던 어떤 아이의 엄마였다. 급하게 돌아서던 나를 갑자기 불러 세우더니 다짜고짜 내 얼굴을 자기 손으로 비벼 댄다. 바빠 죽겠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보아하니 그쪽도 머리에 롤을 만 채 정장 상의에 수면 바지를 입은 것이 출근 전쟁 중인 것 같았는데.


“어머, 이 쪽은 제가 할게요.”

 

어라? 또 한 엄마가 붙는다. 각각 내 왼쪽, 오른쪽 뺨을 맡더니 위아래로 비벼 댔다. 나는 아차 싶었다. 아무 거절도 못 한채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로션. 얼굴에 바르는 로션 때문이다. 아침에 세수만 하고서 로션을 바른다는 게 잘 비비고 가볍게 두드려서 골고루 피부에 흡수시키지 아니하고 그냥 푹, 푹 찍어 양 볼에 연지곤지 찍 듯이 허옇게 올려놓고 하준이를 데리고 나갔던 것이다. 하준이 등원시키면서 이런 적이 이미 여러 번이다. 등원 버스와 한 판 승부 후 얼굴에 난 땀을 닦으면 손에 물컹하고 묻어나던 로션. 두 사람, 오늘은 도저히 그냥 못 보내 주겠다는 얼굴로 내 얼굴에 로션을 흡수시켜 주고 있다.  


“됐다.”

“저도.”

“그럼 안녕히 가세요.”

“저기, 고, 고맙습니다.”

 

양 뺨에 로션이 사라지자 다들 바쁘게 제 갈 길로 움직였다. 나도 지체된 시간만큼 더 열심히 달렸다.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언니들 좋겠다. 드디어 녹색 해방이야.”

 

셋이 사이좋게 녹색 캔 하나씩을 비웠고 지연이가 끊이지 않게 시원한 녹색 캔 세 개를 바로 따서 돌렸다. 선경은 출출하다며 ‘썬칩’ 한 봉지를 뜯는다.

 

“그래, 해방이지. 진짜 이게 뭐라고… 은근 스트레스였어. 해마다 그날 아침에 못 나갈까 봐 얼마나 두근두근 했는지.”

“우리는 작년부터 도연이 아빠가 나갔잖아. 며칠 전에 도연이 아빠 마지막으로 나간 날 우리도 맥주 깠어. 녹, 색, 해, 방!”

“시후는 아빠가 다 했잖아. 여긴 지연이 네가 나올 게 아니라 시후 아빠가 나와야 되는 거 아니야?”

“아니, 그거야 용선이네는 반차 쓰는 게 자유로우니까 그렇지. 우리는 협력업체 스케줄 때문에 회의도 아침 일곱 시 반에 할 때도 있다니까, 미쳤지 정말. 만약에 용선이까지 바빠서 반차 못 쓰면 우린 그냥 녹색 쨀 거였다고. 하아… 그나저나 앞으로 6년을 또 해야 돼. 어떡하지….”

“그래, 너 말고 용선씨가 6년, 자 대신 '짠'해.”

 

셋은 가볍게 새로 딴 묵직한 캔을 부딪쳤다.

 

“나 하준이 4학년 때 녹색 한 번 못 나갔잖아. 전 날 작업한다고 밤 꼴딱 샜더니 안 되더라고. 정말 소파에서 잠깐 눈만 깜빡였는데 9시가 넘었다니까. 누워있지도 않았는데… 진짜 그날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어. 회사를 지각해도 그렇게는 안 놀랐겠다.”

 

'녹색 어머니회'. 경찰청에 소속된 학부모들로 구성된 단체라는데, 이야 자그마치 경찰청 소속 단체라니. ‘사단법인 녹색 어머니 중앙회’ 홈페이지도 있다. 그냥 초등학생 학부모로서, 자발적이라 부르고 반강제적으로 해야 하는 교통지도 봉사활동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다. 자식의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엄마들은 자신도 모르는 어떤 사단법인의 회원이 되는 것이고 졸업과 동시에 회원 자격이 박탈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빠졌어도 별 일 없었잖아. 그랬지? 하준이가 집에 와서 뭐라고 하지 않았지?”

“응, 안 했어. 하준이는 그때 나 녹색 나가는 것도 몰랐어. 그냥 일어나 보니까 시간이 그렇게 됐고… 그렇게 잠깐 멍 때리다가 녹색 회장 엄마한테 문자 보냈거든. 완전 역대급 대역죄인 빙의해서, 앞으로 어떻게 좋을까요, 다른 날에 녹색 땜빵 나가야 될까요, 진짜 구구절절이 써서 보냈다.”

 

물론 '녹색 어머니회' 활동 방법은 각 지역의 학교마다 다르다. 교통지도 활동을 따로 신청받는 학교도 있고 시니어 보안관 등 지역 지자체의 도움을 받아 녹색어머니 활동을 대신 하는 학교도 있다. 또 하준이가 다니는 학교처럼 운영하는 곳도 있고. 하준이의 학교는 각 학생의 가정이 모두 참여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하준이 입학과 동시에 녹색어머니 스케줄표를 받았고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어김없이 새로운 스케줄표를 계속 받았다. 1년에 한 번, 딱 한 번뿐이지만 그때 상황이 어떻게 될지 가늠할 수 없었으니 매번 긴장되었다.

 

“그래서 그때 뭐라고 했다고 그랬지? 그때 다른 날 땜빵 나갔었나?”

“땜빵은 무슨. 괜찮다고 아무 걱정 말고 신경 쓸 거 없다고 위로받았지. 정말 너무 그때... 그 엄마 너무 따뜻했어. 진짜 이 시대의 대인배!”

“그런데 정말 그렇다. 그게 빠져도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는건데 또 안 빠지고 나오는 엄마들 생각하면 그렇게 안 되니까. 다들 너무 알잖아, 서로 바쁜 거. 정말 아침마다 전쟁이야. 이건 출근이랑 상관 없다고.”

“뭘, 안 그런 집도 있지.”

“그건 그렇지... 그래도 이건 아니야. 이상한 거야.”

“그래도 6학년 올라오니까 봄에 했잖아. 1학년땐 한겨울에 했고 나중에는 장마철에 했고.”

 

녹색 활동 순서는 6학년부터 거꾸로 1학년 순서로 내려온다. 지나온 아침을 생각하니 이 타이밍에 ‘짠’을 아니할 수 없었다.

 

“맞아, 나 한겨울에 할 때 너무 추워서 발에 동상 걸리는 줄 알았잖아. 그때 진짜 딱 2분 일찍 철수했다가 녹색 교실에서 얼마나 혼났는데 왜 일찍 들어왔냐고. 그때 그 분 소리까지 질렀다니까.”


누군지 모르는 그 분은 복도가 쩌렁쩌렁 울리게 소리까디 질러대며 나를 혼내켰었다.


“누구야, 그 사람? 회장같은 거야? 그 사람이 누구였지?”

“뭐야, 회장이던 아니던 누군지 너무 했다.”

“몰라. 회장인지 누군지 몰라. 기억에 없는데. 그냥 너무 추워서 정신이 없었어. 왜 아무도 신발에 핫팩 넣어야 된다고 말들을 안 해 준 거야.”

 

진짜였다. 당시 기모가 두둑이 들어간 바지를 입는다고 입었는데도 발목이 너무 시려워서 끊어지는 줄 알았고 손가락과 발가락은 너무 추워서 오는 간지러움으로 빨갛게 괴로웠다. 40분, 아니 38분이라는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뇌도 얼어서 기억에 없었다. 꽁꽁 언 발에 고함소리는 뭣도 아니었다. 너무 힘들 땐 누군가의 혼 쭐 따위는 귓등으로 들린다는 걸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무슨 소리야! 그때 용선이가 핫팩 챙겨야 된다고, 꼭 챙기라고 그랬다고 내가 전해 줬잖아. 그래놓고선 언니가 말 안 들은 거면서.”

“아… 그게 아니지. 말을 안 들은 게 아니라 아침에 정신이 없어서 깜빡 한 거지.”

“그래, 정신 없을 수 있어.”

“아휴 정말, 오지라퍼 남용선... 용선이는 이번에 나가서 또 누구 아빠더라, 아무튼 어떤 애 아빠 전화번호를 또 따왔더라.”

“대박! 진짜? 안그래도 그때 봤을 때 어떤 아빠랑 같이 있긴 했는데 진짜 용선씨 친화력 장난 아니다.”

“도연이 아빠도 용선씨 보면 가끔 신기해서 말 안 하고 가만히 쳐다만 보잖아.”

“그러니까, 걔는 진짜 왜 이렇게 말이 많은 거야. 잠드는 순간까지 떠드는 것 같아.”

“그래도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그 장단에 제일 맞춰 주는 게 이지연, 너님이거든요.”

 

지연이는 매번 용선씨의 ‘수다력’에 투덜거린다. 그리고 그만큼 용선씨 때문에 웃는다. 용선씨의 친화력이 가장 빛을 발하는 순간이 지연이의 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연이 아빠도 만만치 않아. 용선씨 옆에서 상대적으로 묻혀서 그렇지. 조용히 계속 말해.”

“그건 그래, 사실… 도연이 아빠도 마지막으로 녹색 나가서 번호 따왔잖아. 220동 사는 집 할아버지. 몇 년을 봐왔는데 이제야 인사드린다고.”

“아, 나 누군지 알아. 그 할아버지, 쌍둥이네 할아버지. 그런데 그 집은 할아버지가 나왔어?”

“응. 그 할아버지 딸네 딸쌍둥이가 우리 애들이랑 동갑이잖아. 그 집 아들네도 할아버지가 봐주시던데 할머니 하고 같이. 그 아들네도 쌍둥이야. 그 집은 아들 쌍둥이, 이제 4학년.”

“아직 4학년?”

“응, 그 아들네는 밑에 여동생도 있잖아. 그 여동생이 정후랑 동갑이다.”

“대박, 그 집이 진짜 녹색 전쟁이다.”

“그 집은 또 두 집 다 맞벌이하잖아. 아들 며느리가 육아휴직 문제로 엄청 스트레스였다던데. 회사에서 눈치가 눈치가!”

“언니가 그 집 며느리 그런 걸 어떻게 알아?”

“나? 그 집 할머니랑 옛날에 베프였어. 놀이터 베프.”

“뭐야? 자기 시어머니는 없으면서 왜 남의 시어머니랑 친한 건데?”

 

아직 초등학교 입학 전, 하준이가 어릴 때였다. 6살? 7살이었나? 놀이터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있을 때였다. 술래인 하준이를 피해 숨어든 벤치 의자 뒤편에 웬 할머니가 쪼그리고 앉아 계신 게 아닌가. 어디가 편찮으신 줄 알아 염려되려던 찰나 곧 들리는 말소리. “할머니, 할머니 어디 숨었어? 할머니!” 5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할머니는 나도 숨어들 수 있게 조용히 자리를 내어 주셨다. “엄마! 나 엄마 찾는다!” 할머니도 하준이의 외침을 들었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동지애가 싹트던 순간이었다.


“그 뭐냐, 무슨 웃기는 드라마 있지 않았어? ‘그린 마더스 클럽’? 이요원이랑 추자현 나왔던 거. 맞지?”

“‘그린 마더스 클럽’? 뭐야? 번역하면 ‘녹색 어머니회’? 제목 왜 이래?”

“선경이 너는 이거 안 봤어?”

 

있었다. JTBC에서 방영한 ‘그린 마더스 클럽’이라고, ‘녹색 어머니회’를 굳이 ‘영어’로 초월 번역해 제목을 붙인 ‘우리나라 드라마’. ‘스카이캐슬’ 초등학교 버전으로 시작하니 아니나 다를까 등장하는 엄마들 중 한 명을 죽이고 불륜, 아동 학대, 학폭, 의료사고, 약물 불법 유통, 이로 인한 협박이 난무하는… ‘막장 스릴러’ 드라마였다.

 

“김규리도 나왔지? 거기서 추자현 너무 예쁘지 않았어? 나 그 드라마 은근히 재밌게 봤는데. 말이 하나도 안 되는데 재밌어. 이상해.”

“진짜 웃기는 드라마였어. 시작할 때 녹색 하러 가면서 풀메에 풀착장 하고. 이게 말이 돼? 반모임도 바빠서 그러고는 안 나가겠다. 거기다 주인공 누구야? 누구였지? 방금 말했는데.”

“이요원.”

“그래, 이요원은 어떻게 그런 머리를 해? 그게 제일 말이 안 돼.”

“무슨 머리?”

“완전 긴 생머리. 그런데 그걸 계속 풀고 있어. 그런데 떡이 안 져. 얼굴에도 안 붙어. 진짜 말도 안 돼.”

“대박, 진짜 막장이다!”

 

선경이 어이없다며 육포를 어금니로 쥐어뜯었다.


“그런데 언니들, 진짜 웃기지 않아?”

“뭐가?”

“아니, 우리도 애들 아빠가 나가고 선경이 언니네도 언니가 나갔다가 오빠가 나갔다가 하고 쌍둥이네들도 할아버지가 나가는데 왜 ‘녹색 어머니회’는 ‘녹색 어머니회’야?”

“흠, 그러게. 웃기네. 왜 그런데?”

“그거야 모르는데. 안 그래도 어떤 동네는 그냥 ‘교통 도우미’, ‘녹색 학부모회’ 대충 이렇게 부른다고는 하는데 공식적으로는 ‘녹색 어머니회’라잖아. 너무 말이 안 되지 않아?”

“진짜 시대에 뒤떨어지긴 했다. 분명히 한 50년 전쯤에 만든 걸 거야. 아, 생각하니까 너무 별론데. 이런 이름 핑계로 ‘녹색 어머니’ 활동 못 해준다는 아빠들도 있을 거 아니야.”

“에이, 설마... 진짜? 진짜 있다고?”

“그럼, 세상에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래... 뭐야? 이 언닌 왜 갑자기 조용한 건데. 왜 말이 없어? 언니도 한 마디 해야지.”

 

이 타이밍에 나는 말없이 육포를 씹어 먹고 과자 봉투 바닥에 깔려 있던 ‘썬칩’을 하나씩 하나씩 주워 먹었으며 고개를 쳐들고 들고 있던 맥주캔을 말끔히 비웠다. 속이 좀 답답해지는 것이… 얘네 둘 말하는 걸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 앞에서 이렇게 말하면 아니 되는 거 아닌가 말이다.

 

“언니 왜? 한 캔 더 할 거야? 사 올까?”

“아니, 그게 아니라 이름이야 뭐 그냥 형식적인 거겠지. 그냥 공무원들 지들 이름 바꾸기 귀찮으니까 그런 거고. 아니 그렇지만 그래서 그건 그거대로 괘씸하긴 한데... 그래도 아무튼 너네들이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왜?”

“뭘?”

 

지연은 영문을 몰라 들고 있던 캔만 입에 물었고 선경은 그냥 멀뚱히 쳐다만 본다.


“아니, 너네는 다 신랑이 있으니까 되는 사람이 나가고, 또 되는대로 번갈아 나가고 하지. 나는 신랑이 없잖아, 신랑이. 나는 정말 완벽한 녹색 어머니 활동을 했다고. 그러니까 어쨌든 나는 그 이름에 불만이 없어. 그 이름에 불만을 가질 수가 없어.”

“뭔 소리야, 갑자기?”

“그래. 그건 아니야, 언니. 그렇게 말하기엔 언니는 한 번 빠졌잖아.”

“아니, 그건 그렇지만, 내가 그런 실수를 범하긴 했지만 어쨌든 우리 집은 정말 활동할 수 있는 사람이 ‘어머니’. 어머니인 나 하나밖에 없으니까. 나는 너희들과 함께 그 건으론 투덜거릴 수가 없는 거라고. 왜냐? 왜냐면 나는 반드시 내가 어머니 활동을 해야 하니까.”

“뭔 진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어디서 진지한 척이야. 그러니까 누가 이혼을 하래?”

 

선경의 마지막 말 한마디에 나는 잠시 '어버버' 거렸다.


“자기가 하고 싶어서 이혼해 놓고선 그걸 왜 여기 갖다 붙여서 핑계를 삼는 거야.”

“어허, 핑계라니, 나는 그냥 사실을 말하는 거지.”

“그건 그래.”

“그렇지? 지연이 네 생각도 그렇지?”

“아니, 언니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고! 언니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게 그렇다고!”

“왜? 내가 또 뭘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데?”

“솔직히! 언니가 돌아오는 명절마다 우리 놀린 거 생각 안 해 봤어?”

“어?”

“뭐가 '어' 야? 언니 맨날 명절 때마다 우리 약 올리잖아. 생각이 안 나냐고? 뭐, 어떻게, 카톡 보여줘?”

“어?”

“어머, 뭐야, 이 언니! 명절에 우리 시댁 갈 때마다 ‘잘 다녀와 크크크크크크크’, ‘언제 와? 크크크크크크크’, ‘설마 자고 와? 크크크크크크크’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이모티콘 날리고 그랬잖아. 언니가 그랬잖아, 자기는 휴일을 휴일답게 즐긴다면서 '크크크크크'.”

“그래, 정말 그런 거 생각하면 지금 이걸로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어, 내가 그랬다고? 생각이 안 나는데? 크크크.”


점점 단호했던 나의 입꼬리가 실룩거린다. 웃음보가 터지려 든다.


“뭐야? 카톡 까? 진짜 보여줘?”

 

하하, 생각이 안 날 리가 있나. 매년 명절 때마다 두 사람의 스트레스에 각종 이모티콘으로 약을 올리던 나를 나는 정확히 기억하지.


“진짜! 저번에는 언니 말이 씨가 돼가지고 시댁에서 자고 올 뻔했다고! 완전 시어머니 시아버지는 가만히 있는데 갑자기 아주버님이 으쌰으쌰 해가지고 한 집에서 모두 모여 2박 3일 같이 있자고. 진짜 그때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니까.”

“와, 진짜? 형님이 가만있었어?”

“내가 말 안 했어? 했잖아. 그날 형님이 그 집 애들만 데리고 그냥 형님네 친정으로 도망갔어. 아주버님은 버리고 그래서 우리도 그냥 그 틈에 친정으로 빨리 갔지.”

“진짜? 와, 진짜 다행이다. 그 2박 3일 생각만 해도 너무 피곤하다.”

 

지연이의 경험할 뻔했던 '경험하지 않은 경험담'을 상상하니 그것만으로도 피곤이 몰려온다. 그렇다. 녹색이나 명절, 횟수가 중요한 게 아닌데... 그걸 유독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타인의 시간을 두고 일 년에 한 번, 일 년에 하루, 일 년에 며칠을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소비해야 하는 것에 가벼이 여기는 사람들. 으이그, 괜히 빈 캔을 찌그러트렸다.


“어떻게 한 캔씩 더 할까?”

“와, 그럴까? 막잔 막캔?”

“어우, 난 여기까지. 들어가서 하던 작업마저 해야 돼. 더 마시면 아니 될 듯. 모자라면 좀 사 가서 도연이 아빠랑 한 잔 더 하던가.”

“안 돼. 거긴 내일 출장이야.”

“왜? 나는 내일 아침에 회의가 있다고. 자기 전에 옷 다 입고 화장까지 하고 자야 될 판이라고.”

“그럼 지금 들어가면 되겠네.”

“아니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나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아휴, 그래. 우리 녹색해방 했으니까!”

“그래. 오예, 녹색해방!”

“으음, 너는 아니야. 다시 6년이야.”

“아 몰라! 그래도 일단 녹! 색! 해! 방!”

 

해방은 해방인데 그냥 해방이 아니고 일단 해방이다. 뭐가 끝났지만 사실은 하나도 끝나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무어가 어찌 됐든 밤 12시가 넘은 오밤중에 10분이면 닿을 거리에 편의점 맥주 한잔을 할 수 있는 해방 동지들이 있으니 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21

이전 20화 로또에 당첨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100가지 일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