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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광 May 25. 2024

로또에 당첨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100가지 일들

19. 핑크 모루



19. 핑크 모루



요즘 정현은 괴롭다. 박남매 때문이다.


지난달까진 슬기쌤의 고래반 아이들이었던 두 아이는 이번 달부터 정현의 달님반으로 옮겼다. 누나가 초등학교 4학년이고 남동생이 3살 어린 1학년이다. 이 중 1학년 남동생이 슬기쌤을 때렸다. 뺨을 때렸다. 뺨을 때리기 전엔 꼬집었었고 꼬집기 전엔 침을 뱉었다. 침도 때리면서 뱉었다. 결국 슬기쌤은 이 아이들은 맡을 수 없다고 했다. 원장선생님은 슬기쌤에게 책임감이 없다고 했고 자신이 직접 가르치겠다고 자신했다. 그리고 정현을 불러 아이들 ‘일지’를 건넸다.


대학 졸업반을 앞두고 휴학한 정현은 ‘KAP(Kids-Art-Play) Studio’에서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고 있다. 이곳 영유아 대상 미술학원 ‘KAP Studio’ 원장선생님은 무슨 연유에선지 ‘학원’이란 단어 사용을 싫어한다. 학부모 상담을 할 때도 아이 어머님이나 아버님이 ‘학원’이란 단어를 말하면 ‘Studio’란 단어로 정정할 것을 요구한다. 허세다. 그래도 슬기쌤과 대화를 나눌 때 ‘학원’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도록 주의한다.


원장선생님은 못생겼다. 정현이 약 23년 살아오면서 한 손에 꼽을 만큼, 아니 겪을 만큼 겪은 요즘은 랭킹 1위에 올려놓고 싶을 만큼 못생겼다. 처음엔 그냥 평범해 보였다. 적당히 귀여울 수도 있는 작은 키, 글래머러스할 수도 있는 큰 가슴, 애교로 보일 수도 있을 그 큰 가슴만큼 나온 배, 인간적으로 보일 수 있는 고르지 못한 치아, 순발력이 좋아 보인다고 말해 줄 수 있는 가는 허벅지 두꺼운 종아리. 그런 게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를 겪으면 겪을수록 평범할 수 있었던 그녀의 외모는 단점이 되었다. 정현은 그녀를 통해서 ‘내면의 아름다움’에 대한 믿음이 커졌다. 다 원장선생님이 보여주는 ‘내면의 못생김’ 덕분이다. 그녀의 기가 막힌 ‘내면의 못생김’을 눈앞에서 확인하니 이 세상 어딘 가에 반드시 그 반대인 것도 존재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엔 희망이 없다.


희망… 지금 정현에게 매우 절실한 단어다. 박남매 중 동생 은호가 수채화를 하겠다고 컵에 물컵을 한가득 담아왔다. 누나 은수가 지난 시간에 수채화 한 것을 보고 자기도 하겠다고 나섰다. 식은땀이 난다.


‘Studio’는 기법이 자유롭다. 아이들이 갑자기 수채화를 하고 싶다고 하면 수채화를 할 수 있고 색연필로 그리고 싶다고 하면 색연필로, 오일파스텔을 하고 싶다고 하면 오일파스텔로 그릴 수 있다. 문제는 재료다. 물감은 항상 모자라고 색연필과 오일파스텔도 자주 사용하는 색은 거의 없으니. 색을 섞어 쓰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원장선생님은 이 점을 이상하게 왜곡시켜 학부모들에게 설명한다. 아이들에게 조색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색에 대한 진입장벽이 낮아질 수 있고 창의성과 메타 인지가 어쩌고 저쩌고… 그런데 이 ‘Studio’에서 사용하는 재료는 대부분 저렴한 군에 속하는 것들이라 색을 섞으면 섞을수록 칙칙해진다. 그러나 원장선생님은 아이들의 그림이 칙칙한 건 선생님 잘못이라고 한다. 색의 기본 원리와 섞는 법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선생님의 불찰. 새 물감이 들어온 날은 아이들의 그림이 화사해진다. 이런 날엔 원장선생님이 수업에 들어와 아이들에게 말을 건다. 그리고 자기랑 대화를 나눈 아이들의 그림이 밝아졌다며 학부모들에게 자신의 ‘대화법’에 대해서 떠든다.


아, 만약 ‘만들기’를 원하는 아이가 있다면 그 재료를 구하기 위해 건물 지하의 분리수거장에 가서 쓸 만한 걸 주워 와야 한다. 그리기 재료만큼 만들기 재료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기법이 된 것이 이 ‘Studio’의 교육 철학 때문은 절대, 절대 아니다. 원장선생님은 각종 유튜브에서 발췌한 ‘메타인지’가 어쩌고, ‘예술 감수성’이 어쩌고, ‘창의 미술’이 어쩌고 하는 그럴싸한 단어들로 말하는 것을 정말 좋아하는데 듣다 보면 결국 결론은 ‘커리큘럼’이 없다는 걸 알게 된다. 떠드는 ‘교육 철학’은 있는데 교육엔 철학이 없다. 그녀는 외적으로는 그룹 수업이지만 내적으로는 1:1 수업인, 시공간을 초월한 진행 방법을 선생님들에게 요구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그리기 기법이 매번 바뀌어야 하고 그리는 내용도 매번 바뀌어야 한다. 그림에는 전적으로 아이들 의견만 100% 들어가야 하고 선생님은 아이의 그림을 조금이라도 거들어선 안 된다. 그림은 순수 아이의 것이어야만 한다. 만일 형태를 봐주거나 조금이라도 색을 조색해 주면 아이의 창의성을 망치려 한다며 원장선생님 개인 면담을 하게 된다. 이게 정말 싫다.


그룹 수업은 한 번에 4명에서 5명으로 구성되고 60분 간 진행한다. 정현은 일 시작하고 한 달 되던 때 원활한 수업 진행을 위해 50분 수업, 10분 준비 시간을 요구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처음 개원했을 때부터 그런 적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했다. 60분 간 진행하면서 다음 수업 준비는 앞 수업 진행할 때 충분히 가능하며 그게 안 되는 것은 선생님이 일머리가 없어서라고 했다. 항상 수업이 끝나고 시작할 때 나가는 애들과 들어오는 애들이 우왕좌왕한다. 가끔 앞 타임 친구의 마르지 않은 그림을 뒷타임 친구가 만져 싸움으로 번질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절대 아이들을 혼내선 안 된다. 아이들에게 부정적인 언어 사용은 금물이다. 선생님은 항상 친절한 미소로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언어만을 사용해야 한다.


보통 대부분 6시에 모든 수업이 끝난다. 그래서 6시에 ‘Studio’ 청소를 시작하고 일지를 쓴다. 일지는 수기로 작성한다. 청소하고 정리하는 데에만 적어도 30분이 걸리고 남은 30분에 하루에 다녀가는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수업 내용을 손으로 써 내려가야 한다는 말이다. 계약상 1시에 출근해서 7시에 퇴근인데 7시에 나가 본 적이 없다. 더군다나 주 1회 오는 박남매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6시에 온다. 다니는 학원이 많다고 한다. 그 시간에 다른 아이들은 없다. 그리고 오늘 박남매가 왔다. 이 타임 하나로 별 일 없이 집에 가도 거의 9시가 될 것이다. 아, 물론 근무 외 수당 같은 건 없다.


누나 은수는 ‘최애의 아이’의 ‘아이’와 ‘루비’를 그리고 동생 은호는 ‘괴물 악어’와 ‘괴물 호랑이’, ‘괴물 개’를 그리고 있다. 은수는 ‘아이’와 ‘루비’를 예쁘게 그릴 수 없다며 그리기를 거부하고 있고 은호는 괴물들을 멋지게 못 그린다며 역시 그리기를 거부하고 있다. 정현은 이 아이들을 어떻게든 달래서 결과물을 만들어 내야 한다. 못 그러면 이 또한 ‘개인 면담’행이다. 7시 30분에도 겨우 퇴근할까 말까인데 그 시각에 불려 간다. 슬기쌤은 지난번 불려 가서 거의 9시에 집에 갔다. 정현도 그런 적이 있다. 원장선생님과 개인면담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괴롭지만, 또 전부 견디기 힘들지만, 특히 견디기 힘든 건 그녀의 자기 자랑이다. 그녀는 아무런 맥락 없이 자신이 남자들로부터 얼마나 인기가 많았는지도 이야기한다. 정말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자신이 양다리를 걸쳤었다고도 하고 양다리를 걸치는 도중에 고백을 받았단 말도 한다. 그러니 정현은 이 아이들을 꼭 그리게 하고 싶었다. 아, 슬기쌤이 지금 원장선생님한테 불려 가 개인 면담 중이다. 그러니 기회는 지금이다.


정현은 티 안 나게, 정말 연필을 살살 그어서 은수의 ‘아이’를 예쁘게 고쳐줬다. 은수가 잘만 따라 그리면 된다. 은호는 일부러 은수와 멀리 떨어트려서 앉혀놨다. 언제 어떻게 사고가 날지 모른다. 은호는 수채화를 한다며 ‘괴물 악어’를 칠하다가 다 번져서 다시 그리겠다고 새 종이를 집어 들었다. 은호가 ‘괴물 악어’는 엄청 크다고 4절지 종이에 꽉 채워서 밑그림을 그리겠다고 했다. 정현은 좋은 생각이라고 칭찬해 줬다. 은호가 진짜 4절지 종이 만한 악어를 그렸다. 크기는 커졌는데 디테일이 없다. 정현은 은호를 도와주고 싶었다. 악어에게 어떤 무늬가 있는지 상상해 보자고 했다. 은호는 인상을 쓰더니 악어는 무늬가 없다고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악어 그린 것을 찢었다. 두 아이를 괜히 떨어트려서 앉혔다. 은수 자리에 있던 정현이 말리러 가보기도 전이었다. 찢은 걸 또 찢으려고 할 때 정현이 붙잡을 수 있었고 붙잡힌 것에 반항하는 은호의 손이 튕겨 수채화 하려고 가득 받아온 물컵을 건드렸다. 가득 담겨 있던 칙칙한 시멘트똥색의 물이 왕창 쏟아졌다.


쏟아진 물은 은수의 그림에도 튀었다. 겨우 진정시켜서 진행했던 그림인데… 은수는 다른 사람이 그림에 무얼 묻히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원에서 주로 그 다른 사람은 동생 은호다. 갑자기 은수가 은호한테 달려들었다. 얼굴을 할퀸다. 은호는 은수의 머리끄덩이를 잡았다. 그러다 두 아이가 정현을 잡았다. 정현이 그 두 아이를 떼어놓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정현의 팔에 상처가 났다. 정현의 옷에는 쏟아진 물이 다 묻었다. 와중에 바닥에 물감 몇 개가 떨어졌고 두 아이 중 누구의 발인지 모르겠으나 발에 밟혀 바닥은 물감범벅이 되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날따라 두 아이, 박남매를 픽업하러 온 아빠가 평소보다 일찍 원에 도착했고 이 모습을 직접 보았다. 아마 정현 입장에선 다행일 것이다. 아빠가 직접 보지 않았으면 이 난장판의 책임을 고스란히 정현 앞으로 돌렸을 테니. 누가? 못생긴 원장이.


원장선생님은 개인 면담을 할 때는 원장실 문을 꼭 닫아 놓기 때문에 원장선생님과 슬기쌤은 박남매의 아빠 보다도 좀 늦게 난장판을 발견했다. 원장선생님은 즉시 박남매의 아빠에게 죽을죄를 진 사람처럼 머리를 조아렸다. 박남매의 아빠는 정현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슬기쌤은 언제고 이 사달이 날 줄 알았다는 얼굴로 침착하게 어질러진 난장판을 치워갔다. 정현은 그날 어떻게 집에 왔는지 기억이 없다. 물론 대중교통을 이용해 잘 왔겠지.


그다음 날, 정현은 원장선생님과 2시간짜리 면담을 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최대한 귀담아듣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므로. 그다음 주부터 박남매는 원장선생님이 직접 지도하겠다고 나섰다. 원에는 선생님이 둘 뿐이고 이 두 사람이 거부했으니 이번엔 원장선생님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원장선생님은 두 선생님의 아이들을 컨트롤할 수 없는 미흡한 대처 능력에 경악했고 일머리 없음을 비난했다.


박남매는 그다음 주에 나왔다. 그리고 그 다음다음 주부터 안 나왔다.


원장선생님과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주 수업했다. 그때 정확하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정현과 슬기쌤은 모른다. 원장선생님은 세상 친절한 태도로, 원장실에서 개인 면담을 하듯 박남매를 데리고 들어가 문을 꼭 닫고 수업을 진행했는데 수업 도중에 은수가 울면서 뛰쳐나왔다. 열린 문으로 살짝 보니 은호는 원장선생님을 때리고 있었다. 원장선생님이 힘으로 아이를 제압하려고 하는데 마음처럼 안 되 보였다. 은수의 ‘아이’ 그림은 찢어져서 바닥에 뒹굴고 있었고 은호의 ‘괴물’ 그림은 더 처참하게 찢어져 나란히 뒹굴고 있었다. 어쩌다 그런 상황이 된 건지 아마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원장선생님은 절대 그 이유를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대신 원장선생님이 아이들 험담을 했다. 쌍욕까지 섞어서. 그날 이후로 박남매는 학원에서 존재가 지워졌다.


위기는 기회. 위기가 아니라 거의 재난이지만 어쨌든 위기라고 치고 기회. 박남매 사건을 통해서 정현과 슬기쌤은 7시 퇴근을 지켜 줄 것을 요구했고 수기로 작성하는 일지의 부당함을 주장했다. 원장선생님은 두 사람이 쿠데타라도 일으킨 것처럼 경기를 일으키면서 결국 두 요구를 전부 수락했다. 수기 일지 쓰는 것은 사진 촬영하는 것으로 교체됐다.


일요일, 정현은 오랜만에 ‘다이소’에 갔다. 수업시간에 쓸 모루를 사기 위해서다. 박남매 같은 아이들은 정말 특이 케이스로 몇 명 없다. ‘KAP Studio’에는 평범하고 재밌는 아이들이 더 많다. 요즘 그 아이들 몇 명과 모루로 꽃 만들기를 하고 있는데 완성된 모루꽃은 생각보다 훨씬 예쁘다. 여기에 파스텔로 가루를 내서 살짝 그러데이션까지 만들어주면 꽤 근사해진다. 물론 원장선생님은 처음에 한 번 재료를 사다 주고 이후에 발생하는 모자란 색 모루는 못 본 척, 모르는 척하고 있다. 정현도 그런 원장선생님을 못 본 척하고 있다. 그냥 본인 사비로 산다.


확실히 핑크색은 인기가 많다. 딱 한 개 남아 있다.


“어?! 그거 내건데.”


너무 오랜만에 듣는 익숙한 목소리. 정현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은수였다. 어쩜 애가 그대로다. 못 본 지 오래된 것 같은데 제대로 기억을 더듬어 보니 아, 박남매가 ‘Studio’를 그만 둔지 2주밖에 안 됐다.


“그 핑크색 내 거야.”


박남매 중 누나 박은수, 여전히 반말이다. 변함이 없다. 하긴 2주밖에 안 됐는데 그대로겠지. 은수는 한 개 남은 핑크색 모루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미 정현의 손에 들려 있는 걸 잡은 것이다. 무얼 만들려는지 은수의 다른 손엔 여러 색 모루들이 종류별로 들려 있었다. 핑크색 하나만 빼고. 정현은 순간 고민했다. 어떡하지? 그래도 양보를 해야 하나?


정현은 주변을 둘러봤다. 바로 옆에 모르는 어른 둘과 아이 둘이 있다. 은수의 일행으로 보이진 않았다. 혹시 주변에 은호나 박남매의 부모님이 있는지 둘러본 게 아니다. 그렇다고 다른 동행이 있는지 궁금했던 것도 아니다. 그저 이곳이 어디인지 환기시키고 싶었다. 여기는 그냥 ‘다이소’다.


“선생님! 내 말 안 들려? 내 거라고. 내가 살 거라고.”

 

은수 이제 겨우 4학년인데… 참 짜증을 잘 낸다, 못생긴 어른처럼. 정현은 은수의 어른스러운 모습에 감탄했다. 그래서


“야. 네가 뭔데?”

 

그냥 편하게 대하기로 했다.

 

“어?!”

“어쩌라고? 계산했어?”

“선…?”

“내가 왜 네 선생이야?”

“…”

“야, 놔.”

 

은수는 눈이 크고 예쁘다. 그 큰 눈을 꿈뻑꿈뻑 거리는 걸 보고 있자니 정현은 너털웃음이 났다. 큰 눈의 은수는 순순히 모루를 놔주지 않았다. 더 세게 쥐었다. 정현은 그냥 힘으로 모루를 빼냈다. 모루는 쑥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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