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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광 Jul 14. 2024

로또에 당첨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100가지 일들

26. 스타킹



26. 스타킹



큰 아빠네는 부자다. 정확하게는 큰 엄마네가 부자다.


어릴 때 우리 집은 작은 방 하나였다. 쌍문동의 오래된 빌라 단칸방에 엄마, 아빠, 나, 남동생 이렇게 네 식구가 세 들어 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랬나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랬다. 토치로 켜야 했던 낡은 가스레인지와 개수대만으로도 꽉 차는 작은 부엌과 거실이란 게 있을 수가 없는, 네 사람이 누우면 저절로 다닥다닥 붙는 작은 방 하나가 다였다. 씻는 것은 가스레인지 옆 개수대에서 했다. 그냥 방에서 씻었다고 보면 된다. 화장실은 빌라 2층이었던 집에서 밖으로 나와 계단을 내려가 건물 입구 반대편으로 서둘러 걸어가면 나오는 가장 그늘진 구석에 있었다. 그 화장실은 우리 식구만 쓰는 게 아니었다. 세 들어 사는 다른 가족들도 사용했고 지나가는 행인들도 사용했다. 아직도 그 화장실을 생각하면 얼굴부터 찡그린다. 냄새가 얼마나 심했는지 또 얼마나 더러웠는지 이제는 제대로 기억도 못 하지만 화장실 때문에 찡그려진 얼굴은 좀처럼 펼 수가 없다. 집 안에는 오강이 있었다. 5살이었던 내가 오밤중엔 화장실에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강은 밤에만 사용하기로 했는데 가끔 낮에도 사용했다. 몰래 똥을 쌌다. 꼬꼬마의 마음에도 어른의 어깨너비만큼 다리를 벌리고 쭈그려 앉아 볼일을 봐야만 했던 푸세식 화장실에서, 똥만큼은 싸기가 싫었다. 그런데 그럴 때면 어떻게 알았는지 주인집에서 득달같이 쫓아왔다. 똥냄새난다고. 건물 안에서 냄새 피우지 말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오강뚜껑 아래 내 똥냄새보다 바깥 화장실에서 나는 냄새가 더 독한 것 같았는데.


그래서 명절을 기다렸다. 명절엔 군산 큰 아빠네 집에 갈 수 있다. 큰아빠집은 빌라 주인집보다(주인집엔 들어가 본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비교했을까?), 아니 그냥 빌라 건물보다 훨씬 컸다. 어린 내 눈엔 그렇게 보였다. 나는 큰 아빠 집에 가는 게 좋았다.


큰 아빠네 화장실은 집 안에 있었다. 냄새가 나지 않았고 설날 겨울에도 찬바람이 없어 따뜻했다. 앉아서 볼일을 볼 수 있는 깨끗하고 윤이 반짝반짝 나는 하얀색 변기도 있었다. 욕조에서는 대중목욕탕처럼 집에서 목욕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따뜻한 물이 나왔다. 집 안에서 물을 끓이지 않아도 따뜻한 물을 쓸 수 있다니! 샤워기라는 호스가 있어서 머리도 서서 헹굴 수 있다. 아, 여기서 잠까지 자고 가면 얼마나 좋을까?

큰 아빠네는 방이 여러 개고 어느 방을 들어가도 우리 집보다 컸으며 거실은 운동장만큼 넓었다. 소파라는 푹신푹신하고 긴 의자도 있었다. 나는 소파가 침대라고 상상하고 몰래몰래 누워 봤다. 그러다 큰아빠 눈에 띄면 큰 아빠가 물어봐줬다. "오빠 방에서 놀래?" 가장 기다리던 말이다.

사촌 오빠인 민성이 오빠 방에는 진짜 침대라는 게 있다. 나도 모르게 침대 위에서 뛰게 된다. 잘하면 천장에 닿을 것도 같은데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너! 자꾸 뛰면 큰엄마한테 쫓겨난다!" 아무리 조용히 뛰어도 엄마가 쫓아와서 등짝을 후려 친다. 할 수 없다. 잠자기 놀이나 하자! 그렇게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잠자는 상상을 했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진짜 잠이 든다. 그리다 눈을 뜨면 어김없이 시골 할머니 집이다. 그러면 왜 여기냐고 엄청 울었던 것 같다. 우리 집보다 작은 방, 아빠가 일어서면 아빠 머리가 집 천장에 닿는 그런 집. 부엌에는 커다란 가마솥과 아궁이가 있었고 방문은 문살에 창호지를 바른 집이었다. 손가락 끝에 살짝 침을 발라 종이에 대기만 해도 구멍이 뽕 났다. 어린 남동생도 나를 따라 했다. "네들! 지금 뭐 하는 거야!!" 또 엄마한테 혼났다. 아쉬운 대로 전부 동생이 한 짓이라고 덮어 씌웠지만 하나도 먹히지 않았다. 반대로 동생이 한 짓까지 전부 내 짓이란 소리를 들으며 등짝을 후려 맞았다.

그러니까 명절 연휴 내내 그냥 큰아빠 집에 계속 있었으면 좋았을 것 아니냐고! 뭐 하러 할머니 집에도 오고 잠도 큰 아빠네서 안 자고 여기서 자야 하는 거냐고! 나는 빽빽거리며 울었다. 그러나 나이를 조금 먹고, 마냥 빽빽거리며 울어도 아무것도 변하는 게 없다는 걸 슬슬 깨달을 무렵 하나 알아챈 게 생겼다. 할머니 집에서 큰아빠 가족은 본 적이 없다. 큰아빠네, 큰아빠, 큰엄마, 민성이 오빠는 할머니 집에 오지 않는다. 큰아빠네는 명절상에 올릴 음식만 보냈는데 그걸 나르는 건 우리 엄마와 아빠뿐인 게 의아했다.


명절이 다가오면 엄마는 항상 하루 이틀 먼저 큰아빠네 집으로 향했다. 그럴 때에도 떼를 부렸던 것 같다. 나도 데려가라고! 아빠랑 남동생이랑 늦게 가기 싫다고! 좋은 데 가는 거 나를 먼저 데려가 달라고! 엄마 출근할 때도 그렇게까지 떼써본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나도 같이 가!" 엄마를 붙잡는 나를 아빠가 번쩍 들어 올리면 허공에 대고 그렇게 발길질을 해댔다. 눈물 콧물 흘리며 소리까지 빽빽 질렀는데 "너 자꾸 울면 주인집 아줌마 데려 온다!" 엄마가 이렇게 말하면 나는 입을 있는 대로 삐쭉 내밀고 다물었다. 이때는 주인집 아줌마가 호환 마마였다. 그렇게 마냥 어린애같이 굴면서 몇 년을 더 보낸 후에, 비로소 엄마가 왜 명절 때마다 먼저 큰아빠네로 향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큰아빠네 집에서 큰엄마가 부엌에 들어간 걸 본 적이 없다. 엄마만 부엌에 있었다. 큰 엄마는 할머니집에 온 적이 없고, 할머니집 부엌에는 또 우리 엄마만 있었다. 그게 중학교 들어가기 전, 초등학교 5학년 때쯤이었는데... 그때부터였나 보다. 안 갔다. 그렇게 좋아하던 큰 아빠네도 안 갔고 가기 싫었던 할머니 집도 안 갔다.

물론 처음엔 힘들었다. 갈 때마다 큰 아빠가 쥐어주던 용돈이 크게 아쉬웠기 때문이다. 아들만 있는 큰아빠가 딸이라고 귀엽다며 몰래몰래, 우리 엄마 아빠 그리고 큰엄마도 모르게 돈을 쥐어줬다. 큰돈이었다. 설날, 다른 어른들로부터 받는 세뱃돈 모두 모은 것보다 큰 액수였다. ... 그래도 안 갔다.

사실 그즈음, 우리 집도 부엌 하나에 방 두 개가 딸린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했는데 깜짝 놀랐다. 화장실이! 화장실이! 집 안에 있다! 어쩌면 우리 집도 부자가 되었나 보다! 물론 방도 너무 작고 변기도 큰아빠네 변기보다 누렇고 칙칙했지만 충분히 좋았다. 엄마가 작은 방이 꽉 차는 작은 침대도 놔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옆동에 이모들과 외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결혼을 안 한 이모들은 나이 많은 큰 언니들 같이 예뻤고 세련됐고 똑똑했다. 아빠가 억지로 데려가려고 하길래 몰래 아파트 옥상에 숨어 있거나 주차장 트럭 밑에 숨어 버텼다. 우리 엄마만 부엌에 있는 집보다 이렇게 해서라도 엄마의 여동생들과 노는 게 훨씬 재밌었다.


"같이 가자. 빨리 나와."

"싫어."

"너 진짜 그러는 거 아니야. 너 민성이 못 본 지 오래됐잖아. 오랜만에 얼굴도 좀 보고 안부도 좀 묻고 위로도 좀 해주고."

"위로? 위로는 왜?"

"그런 게 있어. 가면서 얘기해. 가면서. 빨리 나와."


세월이 흘러 흘러 내가 결혼을 했다가 이혼을 하고 어느 날, 이제 완전히 할머니가 된 엄마한테 연락이 왔다. 사촌지간인 민성이 오빠가 병원에 입원을 했다고 난리다. 그 오빠를 마지막으로 본 게 2년 전, 잽싸게 밥만 먹고 도망 나온 작은 고모 생신잔치였는데... 그때도 자주 안 보니 서먹해서 서로 인사치레만 하고 말았는데... 엄마로부터 양손에 바리바리 싸들고 온 무거운 반찬통을 건네받아 엄마 뒤를 따라나섰다.  


"와, 1인실이야? 큰아빠네는 아직도 부자는 부자다."

"너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니야. 진짜 그 입 좀 조심해라. 아이고! 형님!"


큰 엄마였다. 더운 한 낮 여름날씨, 나랑 엄마는 땀으로 얼굴이 번들번들한데 큰엄마는 보송보송했다. 피부에 주름은 있을지언정 잡티는 나보다도 없었다. 참 고운 할머니가 될 뻔했는데, 이르게 한 눈썹 문신만 아니었다면. 큰엄마 젊은 나이에 한 눈썹 문신은 한동안 퍼렇더니 최근에 리터치를 하셨나 보다. 이젠 너무 붉다. 하얗게 분칠 한 얼굴에 눈썹 산을 뾰족하게 살려서 그것밖에 안 보인다.  


"어, 동서 왔어?"

"아이고, 민성이는, 민성이는 괜찮아요?"

"응. 그렇지, 뭐. 잠깐 검사하러 갔어."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에요. 민성이 밥 잘 먹으라고 반찬 좀 싸왔어요. 병원밥이 그렇잖아요, 좀."

"응, 그래. 우리 민성이 좋아하겠다."

"안녕하세요."

"응, 보경이 왔니?"


큰엄마는 나를 똑바로 쳐다본 적이 없다. 항상 몸방향을 다른데 두고 삐딱하게 쳐다본다. 어릴 땐 그러는 걸 아예 몰랐고 조금 커서는 몹시 불만을 가졌다가 거의 커서는 그러든지 말든지 신경을 안 쓴다.


"어디 있어?"

"뭐가?"

"아니, 오빠 와이프 말이야. 안 보이네?"


나는 민성이 오빠의 와이프를 결혼식장에서 본 게 다다. 오빠와 개인적으로 연락하고 살지 않았으니 따로 만난 적도, 대화 한 번을 제대로 한 적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작은 고모 생일잔치에서도 못 봤다. 그렇다고 막 보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냥 큰엄마가 불편해서 젊은 사람을 찾은 거였다.


"흠! 흠! 흠!"


큰엄마가 갑자기 헛기침을 한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미리 이야기한다는 걸 깜빡했네. 어휴 이놈의 정신머리. 형님, 잠시만요. 잠시만요, 형님. 보경이 너 따라 일로와 봐."

“뭐? 왜? 뭔데?”


엄마가 나를 갑자기 병실 밖으로 끌고 나갔다. 무슨 대단한 말을 하려나 싶었더니 엄마는 대단하진 않지만 조금 놀라운 말을 해 줬다.


"민성이가 지금 이혼 소송 중이야."

"뭐라고?"

"이혼 소송 중이라고. 벌써 1년도 넘었어. 그쪽이 아주 보통이 아니라네. 민성이 지금 혼자 나와 사는데, 그래서 너네 큰엄마가 아주 걱정이 말이 아니야. 그러니까 계집애야, 너도 네 생각만 하지 말고 식구들 친척들 안부도 묻고 살아. 너는 그게 문제야. 맨날 지 생각만 하지. 다른 사람 어떤지는 관심이 없어."

"어쩐지, 어쩐지 엄마가 갑자기 민성이 오빠네 들른다고 하더라니. 그럼 그게 다 저 오빠 혼자 사는 집에 가는 거였어?"

"그래, 가서 반찬도 좀 해 주고 간 김에 집도 좀 청소해 주고 그랬지."

"..."

"왜?"

"엄마, 미쳤어?"

"뭐? 너 방금 뭐라고 그랬어? '미쳤어?' 너 엄마한테 미쳤냐니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아니! 그렇잖아! 민성이 오빠가 애도 아니고 무슨, 뭐, 뭐, 무슨, 어디 그 오빠 아파? 어디, 뭐, 뭐, 뭐 지능이 떨어져? 갑자기 어디 사지마비라도 왔데? 아니 청소도 혼자 못 해? 큰엄마는 뭐 하는데?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 오빠가 이혼을 당하는 거야!"

"어머! 너 어떻게 알았어? 하여튼 계집애 눈치는 백 단이라니까. 네가 맞아, 민성이가 소송당한 거야."

"뭐?"


나도 모르게 그냥 튀어나온 말에 엄마는 눈이 동그래지면서 갑자기 목소리를 낮춘다.


"바람 폈데, 민성이가."


조금 놀라운 말이 몹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되었다. 그리고 큰엄마가 등장했다.


"거기서 뭐 해? 볼일 다 봤으면 그만 들어와."

"어머, 네 형님."


천천히 들어가도 되는데 엄마는 지나치게 재빠르게 큰엄마의 부름에 응답했다. 뒤에서 어슬렁 거리는 나를 잡아끌면서 "아무튼, 너 상황 이러니까 알아서 입 다물고 얌전히 있어. 너네 큰엄마 속상하지 않게." 쳇, 내가 하면 뭘 한다고, 엄마는 맨날 나만 가지고 뭐라 그런다.


나는 얌전하게 소파에 앉아 큰엄마가 내어준 음료수를 마시며 핸드폰으로 가십뉴스를 봤다. 그러나 귀만큼은 활짝 열어두었다. 엄마와 큰엄마를 향해.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에서 알고 싶은 정보를 쏙쏙 모았다. 이 소송의 유책배우자는 민성 오빠다. 어쩐지 지난 작은 고모 생일잔치에서 평소 큰엄마 성격이면 우리 엄마를 붙잡고서 얼굴도 안 비치는 며느리 험담을 주야장천 했을 텐데 웬일로 입도 뻥끗 안 한다 싶었다. 이제야 이해가 간다.

오빠 결혼할 때 큰엄마가 잠실의 어느새 아파트에 신혼집을 얻어줬었다는 말을 들었었는데 그 아파트가 이 이혼소송의 핵심이라는 것도 알았다. 구리시 어딘가에 있다는 오빠 명의로 된 작은 상가 건물은 두 번째 핵심이다. 와, 군산에 부동산이 있는 건 알았지만 구리시에도 부동산이 있다니 이건 몰랐다. 양육비와 위자료는 두 핵심에 비하면 큰 비중이 없어 보였다. 심플하다. 아파트와 건물이다. 이 문제로 1년 넘게 소송 중이라니... 나는 이혼할 때 소송 할 핵심이 없어 짧게 합의 이혼으로 끝난 건 가 싶다. 아, 왜 슬프지. 쩝, 괜히 입맛만 다셨다.   


“그래서 그 스타킹은 어떻게 됐어요?”

“어떻게 되긴 그거 내 거라니까.”


스타킹?

   

“아니 내가 그 해 여름에 너무 더워서, 너어어어무 더워서 우리 민성이 차 얻어 타고 오다가 스타킹을 벗은 거라고. 그리고 깜빡 졸고 나서 그냥 내린 거야. 그게 다야. 그게 다라니까! 그런데 그 집 사람들이 이제 하다 하다 그 스타킹까지 걸고넘어지는 거라니까! 내 말은 듣지도 않아! 동서도 알잖아? 알지? 스타킹 그게 얼마나 답답한지 알지? 동서도 신어봐서 알잖아.”


망사 스타킹, 현 민성 오빠의 와이프 측에서 제시한 다수의 외도 증거 중 하나 스타킹. 듣자 하니 성긴 피시넷 망사 스타킹이 민성오빠가 몰고 다니는 아우디 뒷좌석에서 발견되었나 본데. (오빠 취향도 참.) 아무튼 그걸 큰엄마 당신이 벗어놓은 거라 말하고 있는 거다... 아휴... 저 말을 누가 믿냐고!


"어머, 잘 알죠! 스타킹 그게 얼마나 갑갑하고 더운데."

"그렇지? 동서도 알지?"

"그럼요, 그럼요. 아니 내 스타킹, 내가 벗어놓은 거 내가 알아보고, 내거니까 내 거라고 하는 건데 그걸 왜 안 믿어준데요. 그 사람들 참 박하네."

"내 말이 그거라니까."

"그리고 나이 든 사람은 망사스타킹 못 신나. 어디 법에 나와 있데요. 이래서 어디 나이 먹은 사람 서러워서 살겠나."

"그렇지? 그렇지 동서! 우리도 망사 스타킹 신을 수 있다니까."


맙소사, 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누가 믿나 했더니 우리 엄마가 믿는구나. 심지어 나이 들어도 망사스타킹 신을 수 있다고 응원까지 해준다. 아니 엄마, 정말 왜 그러는 거야?!                


"어?! 작은 어머니 오셨어요?"


문제의 민성이 오빠가 들어왔다. 교통사고라고 놀랐더니 엄마는 크게 다친 건 아니라고 했다. 그래도 입원까지 했으니 꽤 다친 줄 았는데 크게 다치지 않은 게 아니라 거의 다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얼굴 여기저기 살짝 까진 것과 갈비뼈에 실금 몇 개 생긴 게 다라고. 나는 쇄골이 부러졌을 때도 입원 안 했고 오른 네 번째 발가락이 부러졌을 때도 입원 안 했고 왼 손목뼈가 부러졌을 때도 입원 안 했는데.


"이야 보경이도 왔구나."

"네, 네 오빠 안녕하세요."

"그래, 야 어떻게 잘 지내지?"

"네, 네. 그럼요. 잘 지내요. 오빠도 잘 지낸다고 하기엔 지금 병원에 입원 중이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땐 잘 지내는 거죠?"  

"하하하하, 그럼 언제 술이나 한 잔 하자. 술 뭐 좋아해?"

"아. 네, 네. 술 좋죠."


오빠는 소송이 막 들어가기 전 집에서 나왔는데 급한 데로 그 아우디를 팔아 회사 가까운 곳에 오피스텔을 얻었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큰엄마는 바로 서울로 쫓아와 BMW를 새로 사줬고 급하게 얻은 오피스텔도 더 넓고 깨끗한 곳으로 새로 얻어줬다고 했다. 그러면서 금쪽같은 자기 아들을 자기가 사준 집에서 쫓아낸 며느리를 세상 보기 드문 파렴치한으로 몰고 갔다.  


"엄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군산에서 큰아빠가 도착했다고 큰엄마와 민성오빠가 병원 로비로 간다고 나가 병실에 엄마와 나 둘만 남게 되었다.


"내가 뭘?"

"아니 어떻게 망사스타킹 어쩌고 하는 거에 맞장구를 쳐 줄 수 있냐고! 사람이 생각이 없어?"

"너는 또 엄마한테 생각이 없다고! 진짜 네 말본새는 왜 그런다니?"

"엄마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대니까 그렇지!"

"뭐가 말이 안 돼? 그냥 한쪽말만 들을 땐 아 그쪽 말이 맞나 보다 하고 그러는 거지. 그리고 세상천지에 진짜 백 프로 말이 되고 백 프로 말이 안 되는 소리가 어디 있니? 그냥 대충 다 그런가 보다 하고 사는 거지. 얘는 맨날 지만 똑똑한 줄 알아."


나는 기가 막혔다. 어려서도 명절에 그러지 말라고 그렇게 떼를 썼는데도 기어코 큰아빠네 가서 부엌일 다 하고 할머니네 가서도 부엌일 다 하는 엄마였다. 아빠네 집안 제사상도 엄마가 다 준비했고 할머니 돌아가셨을 땐 큰엄마는 구석에 앉아서 핸드폰만 보고 있었고 엄마만 여기저기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그런 엄마였다. 이미 징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아니다.


"엄마! 엄마 딸도 남편이 바람 펴서 이혼했어. 기억 안 나? 옛날 엄마 사위가 그랬다고!"

"왜 기억이 안 나? 기억나지. 그놈의 자식!"

"그래! 그게 불과 몇 달 전 일이라고! 그런데 큰엄마한테 왜 그래? 큰엄마 저렇게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는데 맞장구를 친다고! 그것도 옆에 내가 있는데.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엄마 이건 아니지, 정말 이건 아니다."

"뭐가?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아니지!"

"에휴, 아무리 너는 내 딸이지만 도대체 누굴 닮은 건지. 니네 아빠도 안 그러는데. 너는 이상하게 삐뚤어진 데가 있어. 어떻게 좋은 게 좋은 거라는 걸 모르니?"

"엄마!"

"너 사람이 그러는 거 아니야."


미치게 답답해 속이 터져 나갈 것 같다.


"어머 아주버님!"


큰아빠다. 어릴 때 큰아빠는 키가 아빠보다 커서 큰아빠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민성이 오빠는 우리 아빠한테 작은 아빠라고 부르는 거고. 그 큰아빠가 지금은 너무 작아져서 오셨다. 몇 년전부터 볼 때마다 작아지신다. 하얗게 샌 머리카락은 개수를 헤아릴 수 있을 만큼 숱이 적었고 눈썹은 머리카락처럼 길게 난 몇 가닥만 보일만큼 흐렸다. 얼굴에는 검버섯도  투성이었고 옛날 얼굴형이 생각나기 힘들 만큼 주름살이 길게 늘어졌다. 그리고 눈빛, 눈빛에 빛이 없었다.


"보경이. 잘 있었나? 우리 보경이."


우리 보경이. 큰아빠는 언제나 우리 보경이라고 불러줬다. 어린 시절 중 한 구간에선 그렇게 불리는 게 어린애 취급당하는 것 같아 싫었는데 어린애가 아닌 지금은 어린애처럼 불러 주는 게 조금 쑥스러운 거 빼곤 괜찮다.


"네 잘 계셨어요? 건강하시죠?"

"걸어 다닐 수 있잖니, 그럼 건강한겨."


큰아빠는 큰엄마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그렇게 움직이기 싫어하는 큰엄마인데 큰아빠 움직이는 데는 솔선수범이다. 큰아빠의 손을 잡은 큰엄마의 손이 단단해 보인다. 민성이 오빠는 환자복을 입었으니 환자역할에 충실이라도 해야 하는 것처럼 피곤하다고 침대에 누웠다.


"동서가 민성이 아빠가 가지무침 좋아한다고 이렇게 많이 만들어 왔어요."

"아이고, 역시 우리 제수씨밖에 없어요. 우리 어머니도 제수씨가 만든 가지무침 좋아하셨는디."


만든 우리 엄마는 가만히 있는데 큰엄마가 나서서 가지무침 홍보를 한다. 매번 이런 식이다. 큰엄마는 항상 말뿐이다. 엄마는 그게 호구 잡히는 건지도 모르고 싱글벙글 만사 오케이 해주는 거다. 말해도 내 속만 답답할 뿐이고.

아이고 모르겠다. 민성이 오빠 멀쩡한 것도 봤고 큰엄마 큰아빠한테 얼굴도 비췄으며 엄마가 만든 반찬도 무사히 날랐으니 이만 집에 가자고 해야겠다.


"보경이 시어른들은 안녕하시냐?"

"네?"


갑자기 큰아빠가 이제 법적으로 존재하지도 않는 ex시부모님의 안부를 묻는다. 어떻게 된 일인지 엄마를 봤다.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나를 피한다. 아, 말을 안 했구나. 엄마가 내 이혼 사실을 전하지 않았어. 나한테는 요즘 세상에 이혼은 아무 흠도 안 된다며 당당하게 굴라더니, 말만 그렇게 하고서 큰아빠네 한테는 알리지 않은 거였어. 어쩐지 큰엄마가 아무 말도 안 하더라. 진작에 여자 혼자 사는 게 어쩌고저쩌고, 아빠 없이 애 키우는 게 어쩌고저쩌고, 잔소리 한바탕을 퍼붓고도 남았을 텐데 조용하다 했어. 민성이 오빠도 너무 해맑게 웃으며 내 안위를 물어보더라니. 우리 엄마… 사람 참 안 변한다.


"전화 자주 드리고."

"네?"

"꼭 무슨 명절이다 뭐다 그럴 때만 찾아뵙지 말고 시간 나면 틈틈이 찾아뵙고 얼굴 비춰. 시어른들한테 그래야 돼. 우리 보경이 알겠냐?"


아, 매일 전화하는 시어머니와 한 달에 한번 마산으로 오라는 시아버지가 내 이혼 사유 중에 하나인데. 엄마는 그런 ex사돈댁 이야기 듣고 거품을 물고 욕하며 그 댁 해달라는 거 들어주지 말라고 내편까지 들어줬었는데. 그래 놓고 큰아빠의 뒷북 아닌 뒷북을 듣게 하다니. 나는 또 엄마를 쳐다봤다. 이번엔 엄마가 내 눈을 피하지 않고 같이 바라봐 준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하더니 어색하게 웃는다. 저 미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그리고 그걸 눈치챈 나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결코 알고 싶지 않은 영역,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할 수 있는 만드는 이상한 감정의 영역.


"우리 보경이도 건강하고 시어른 공경 잘혀서 시어른도 건강허게 모시고."


아, 이유야 어찌 됐든 큰아빠 입장에선 당신 며느리에게 섭섭한 게 많이 쌓이셨나 보다. 또 이유야 어찌 됐든 큰아빠가 80넘은 노인이 된 것도 맞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유야 어찌 됐든 한때 나에게 가장 큰 용돈을 준 어른이기도 하고. 그래서 이유야 어찌 됐든... 아니다. 그래도 이유는 핑계일뿐, 아닌 건 아닌 거다. 나는 당당하다. 아니 당당해져야 한다고 결심했다.


"저기 제가, 제가요 큰아빠 아니 큰아부지."

"이걸로 네 맛난 거 사 먹어라."


나는 당당한데... 큰아빠가 주섬주섬 옷섶에서 꺼낸 꼬깃꼬깃한 만원 짜리 네 장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우리 보경이 너무 말랐어. 맨날 애 입에만 뭐 넣어주지 말고. 이걸로 우리 보경이 맛난 거 사 먹어. 네 남편도 주지 말고 네만 먹어라."


아이고 큰아부지. 만 원짜리를 쥐어준 큰아빠 손이 너무 작다. 엄청 컸던 손인데 정말 작아도 너무 작다.


"네 남편이 암만 속상하게 굴어도 어른들한테는 잘 햐. 알겠지?"


나는... 나는… 남편도 없는…


"네. 네 있다가 저녁에 시어머니한테 전화드릴게요."

"그랴, 우리 보경이는 언제 봐도 참말로 착햐. 참 예쁘고 착햐."

"아이고, 진짜 이 양반은 보경이 어릴 때도 우리 보경이 우리 보경이 하고, 여즉 지금도 우리 보경이 우리 보경이 해 싸네. 참 보경이 밖에 없어요. 참 그래요? 어떻게 그래요?"


나는 굴복했다. 큰 아빠한테 이제는 있지도 않은 시어머니한테 잘하겠다고 약속했고 있지도 않는 시아버지한테 좋은 말동무가 되겠다고도 약속했다. 에라 모르겠다. 한 번 시작한 거짓말은 막 남발되었다.


"잘했어."


돌아오면서 엄마가 칭찬했다. 이런 칭찬이 제일 싫다.


"잘했어. 잘한 거야. 그 양반들 살면 얼마나 살겠니. 그냥 말 한마디 편하게 해 주는 게 잘하는 거야. 우리가 입 바른 소리 한다고 알아 먹히는 것도 아니고. 어디 가서 좋은 소리 듣기도 힘들 텐데 우리까지 보탤 이유가 뭐가 있니?"

"아 몰라. 맘에 안 들어."


엄마가 마치 예전엔 안 그랬고 최근에야 그런 사람이 된 것처럼 말한다. 아디거든! 엄마는 원래부터 그랬거든!


"그러지 말고 날도 더운데 엄마 냉면이나 사 주라."

"싫어. 내가 왜 냉면을 사?"

"왜 너 돈 있잖아! 아까 너네 큰아빠가 용돈 주는 거 엄마가 다 봤는데."

"그럼 엄마도 알겠네. 이거 큰아빠가 나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준 거야. 하준이한테도 뭐 사주지 말고 나한테만 쓰라고 했다고."

"어머 애 좀 봐라. 아주 어릴 때 하던 버릇이 고대로 남아 있네. 어쩌면 너는 이렇게 변하는 게 하나 없어!"

"아! 아 왜 때려?!"


엄마가 내 등짝을 후려쳤다. 엄마는 나 어릴 땐 힘조절 해준 거라며 나이에 맞게 꾸준히 강도를 높여 후려치는 거라고 했다. 그래서 항상 최근 강도가 최강이다.


"가자!"

"뭐?"

"엄마, 냉면 말고 고기 먹으러 가자!"

"진짜? 그러면 네가 고기 사는 거야?"

"아니. 엄마가 사 줘!"

"뭐?"

"엄마가 사줘!“

“아니 내가 왜 사?”

“엄마 때문에 나 거짓말 했잖아. 엄마가 고기 사 줘!”


엄마가 또 후려쳤다. 아프다. 엄마 손은 여전히 맵다. 몹시 맵다. 그래서 다행이다. 너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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