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은 연애> 열두 번째 이야기
-오빠 어디심?-
나는 방금 전까지 5번째 전화를 걸어 보았다. 받지 않았다. 3번째 전화를 할 때는 전화, 문자, 전화, 문자 번갈아 가면서 했는데… 그 어느 것에도 답이 없었다.
“뭐 해? 왜 자꾸 꺾어 마셔?”
나는 핸드폰에 정신이 팔려 소주를 계속 반 잔씩 꺾다가 결국 형주에게 한 소리 들었다. 원래 형주는 각자 마시는 술 속도에 대해 크게 간섭하지 않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날인지라 텐션이 좀 올라간 듯 보였다. 커튼 위에 드리워진 앵두 전구가 반짝반짝거린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다.
“아이~씨! 야 내가 희동이 오빠만 제대로 꼬셨으면 네들이랑 이러고 안 있어… 아 아까워!”
형주의 친구 미리는 이 자리에 있는 자신이 억울하다며 짠도 하지 않고 연신 소주를 마셨다. 물론 잔과 잔 사이에 프라이팬 위에 구워지는 삼겹살을 쌈도 싸지 않고 두세 점씩 먹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집주인인 형주는 무섭게 고기만 집어먹는 미리에게 한 마디 했다.
“아 진짜! 남미리! 너 천천히 먹어!!”
부산에서 온 형주는 학교 후문 쪽, 원룸에서 혼자 살고 있었는데, 덕분에 내가 술 마시고 집에 가기 귀찮을 때 자주 신세를 졌다. 미리도 형주와 같이 부산에서 왔다. 처음엔 나한테 아는 척도 잘 안 하더니 내가 동민 오빠 무리랑 어울리기 시작할 때부터 갑자기 내 번호를 알아갔다. 그러더니 심심하다며 내가 끼는 술자리에 자주 끼기 시작했다. 동민 오빠 동기, 희동이 오빠 때문이었다.
“야, 희동이 오빠는 진짜로 미리 별로라든?”
형주가 자기 잔을 비우며 나만 들리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나는 형주의 물음에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에서 차가운 살얼음을 입힌 소주 두 병을 꺼냈다. 형주의 빈 잔에 시원한 한 잔을 따라주고 또 문자를 보냈다.
-어딘데? 걍냥 동민 오빠한테 전화한다 지금! ㅎ 전화해라! ㅎ-
“야! 한미옥! 야!! 야~?!”
형주 친구, 미리가 나를 찾는다. 나는 핸드폰을 들여다보느라 대꾸도 안 했건만 미리는 계속 자기 할 말을 이어갔다.
“저번에 동민이 오빠랑 그 다른 오빠 우신? 신우? 암튼 그 생파 때, 곱창인가 막창인가 먹은 날, 희동이 오빠 나한테 엄청 잘해주지 않았어? 잘 들어가라고 택시도 잡아주고?! 기억나지? 그때 그 오빠가 나 얼마나 챙겼냐고! 너도 봤잖아? 한미옥! 봤지? 기억하지?”
형주가 이런 미리의 말을 잘랐다.
“아!! 진짜 야, 너! 고만 좀 해! 남미리!! 너는 야! 우진이한테 받아먹을 거 다 쳐먹으면서 왜 자꾸 그 희동이 타령이야! 적당히 좀 해! 쫌!”
이전부터 형주는 미리가 우진이한테 좀 너무 하는 거 같다며 못마땅해했고, 결국 못 참고 지금 한 마디를 뱉었다.
“내가 뭘? 너는 가끔 예민해질 때가 있더라?”
미리는 오늘, 우리를 만나자마자 우진이가 크리스마스라고 챙겨줬다며 큰 상자 하나, 작은 상자 하나를 보여줬다. 큰 상자는 크리스마스 시즌 케이크였고 작은 상자는 지갑이었다. 구찌였다. 미리 귀에 걸린 귀걸이는 샤넬이었는데 우진이한테 생일 선물로 받은 것이었다. 지난번, 신우 오빠 생파 한 날, 나를 쫓아왔을 때도 저 샤넬은 귀에 걸려 있었다. 미리한테 풍기는 진한 냄새도 우진이가 사준 디올이다. 취한 미리를 택시 태워 보냈던 날, 희동이 오빠와 나는 3차로 간 술자리에서 몰래 빠져나와 모텔엘 갔는데 그때, 이 디올 냄새 진짜 독하다며 둘이 투덜거렸었다. 디올 때문에 평소보다 샤워시간이 길어졌던 것도 불만이었었다. 디올이 웬만한 막창 냄새보다 쎘다.
“야 한미옥! 너는 원래 그 오빠들이랑 친하잖아? 희동이 오빠가 내 얘기 뭐 한 거 없어? 없데?”
“친하긴 뭘 친해? 그냥 그래…” 나는 받지 않는 전화의 연결음 소리를 들으며 대답했다.
“아 왜? 친하잖아? 희동이 오빠 그전에 사귄 그 여자, 전 여친 아직 못 잊은 건가? 그렇게 보이진 않던데… 정말 뭐 몰라? 응?”
“아우~ 고만해라, 남미리. 얘 지금 영혼 없잖아. 아까부터 핸드폰만 붙들고 있구만~”
형주는 크게 하품을 했는데, 크리스마스이브여도 변함없이 미술학원에서 애들을 가르치고 와서 그런지 피곤한 눈치였다. 알바 후엔 오락실에서 <펌프>로 스트레스를 풀었을 것이다. 나도 미술학원에서 애들 가르치는 건 마찬가지지만, 형주가 나가는 학원보다 학생 수가 적어서 형주보다는 덜 빡쎄다. 그래도 오늘은 밤 타임이 아니고 오후 타임 수업을 해서 지금 여유 있게 술을 마실 수 있다. 미리는 형주랑 같은 학원에서 가르치는데 오늘 아예 수업이 없었다. 정확히는 다른 복학생 오빠랑 수업 시간을 바꾼 걸로 알고 있다.
“한미옥. 오늘은 그 오빠들 안 모였데? 오늘 같은 날 안 놀아? 연락 없어? 진짜?”
내가 희동이 오빠한테 제법 길게 문자를 보내고 있는데 형주가 내 옆구리를 대 놓고 푹푹 찔렀다. 미리의 물음에 빨리 대답해 주라는 뜻이었다.
“오빠들 망원동 어디 있을 거야. 궁금하면 네가 연락해봐라.”
“희동이 오빠는?”
“… 몰라. 같이 있는지 없는지 연락해 봐, 네가.”
점심까지는 답문자도 바로바로 잘하던 희동이 오빠는, 오늘 학원 수업을 마치고 나오면서 다시 연락해보니 연락두절 상태였다. 오늘은 단 둘이 만나자고 먼저 말했으면서 말이다.
“여보세요? 동민 오빠?”
동민 오빠로부터 형주에게 전화가 왔다. 나한테도 동민 오빠가 전화를 하긴 했었는데 혹시 희동이 오빠한테 연락이 오면 뭐라 둘러대기가 곤란해질 것 같아서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았었다.
“누구? 미옥이? 여기 있지. 왜?” 이때, 미리가 희동이 오빠랑 같이 있냐고 물어보라며 형주를 독촉했다.
“오빠. 희동이 오빠는 같이 있어요? 뭐, 없어?” 형주는 수화기 너머로 다 들리게 미리에게 말했다.
“야, 희동이 오빠 없데, 거기 있다가 딴 데 갔다는데. 강희동 쓰레기는 자기한테 물어보지 말래.”
형주는 꼬시다는 듯 웃으며 미리에게 말했다. 그리고 나에게 물어봤다.
“동민 오빠가 너 와서 같이 놀재. 오빠들이 너 찾는다는데?”
“나를? 아 귀찮은데… 너는 안 갈 거잖아?”
“그치. 나는 잘 거야.”
밤잠이 많은 형주는 늦게까지 놀기를 항상 거부했다. 미리는 희동이 오빠가 없는 술자리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도… 연락이 안 되는 희동이 오빠를 기다리는 것에 지쳤다. 그치만…
“망원동까지 택시 애매해. 안 가. 그냥 너랑 잘래.”
내가 한 말이 들렸는지 동민 오빠가 형주의 수화기 너머로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이 들렸다.
“왜 그래? 미옥아! 오토바이로 데리러 갈게!!”
희동이 오빠는 며칠 전에 VESPA GTX300을 샀다. 자기 차도 있으면서 학교 주변은 차로 왔다 갔다 하기 힘들다며 구입한 스쿠터였다. 하늘색과 초록색 중에 무슨 색이 좋냐며 나에게 물어봤고, 나는 초록색을 골랐다. 내가 생각한 초록색은 한 여름 나뭇잎 색이었는데 실물로 영접한 초록색은 배추벌레 연두색이라서 조금 실망했었지만. 동민이 오빠가 말하는 오토바이가 희동이 오빠의 초록색 스쿠터다. 그 초록색 스쿠터가 동민이 오빠한테 있다는 것은 희동이 오빠가 어디 멀리 간 건 아니라는 뜻이 되는 건가? 에라, 나도 모르겠다.
“남미리. 너는 어떡할래?”
분명히 미리는 희동이 오빠 없는 술자리엔 따라나서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예의상 물어봤고, 미리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안 가겠다고 선을 그었다. 미리의 원룸도 이 근처라서 자기는 천천히 가겠다고 나더러 먼저 나가라고 했다. 나는 내가 마시던 잔과 사용하던 그릇, 수저 등을 설거지통에 잘 넣어놓고, 형주가 들려주는 쓰레기봉투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형주는 동민이 오빠가 술 좀 마신 것 아니냐며 걱정했지만 나는 그 오빠는 쫄보라서 술 마시고 스쿠터를 운전할 위인이 못 된다고 했다.
“그럼 누가 데리러 와?”
“아마… 신우 오빠?”
예상대로 신우 오빠가 왔다. 헬멧을 쓰고 있어서 낯빛을 볼 수는 없었지만 나는 아직 이 오빠가 취한 걸 본 적이 없었다. 문제는 내가 쓸 헬멧을 챙겨 오지 않은 것이었다. 희동이 오빠는 내가 쓰는 헬멧을 자꾸 차 트렁크에 넣어 놓는다.
내 친구들도 희동이 오빠 친구들도 우리 둘 사이에 벌어진 일들은 아무도 모른다. 희동이 오빠는 여럿이 떠들썩하게 어울리는 분위기가 좋다며 당분간 비밀로 하자고 했다. 나도 왠지 다른 오빠들과 어색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동의했다. 단 둘이 있을 때 이것저것 잘 챙겨주는 것에 만족해서 나는 이 관계가 싫지 않았다. 가끔 연락이 안 되는 때가 있긴 하지만, 다 이유가 있다고 하고 보통 그다음 날이면 미안하다며 바로 연락이 왔었다. 보통 연락이 안 되는 날은 단 둘이 보자고 한 날이라서 다른 오빠들 연락을 피하느라 오늘처럼 희동이 오빠 없이 다른 오빠들이랑 어울리는 일은 드물었다. 뭐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니까.
나는 헬멧이 없어서 패딩의 후드를 뒤집어쓰고 목도리로 얼굴을 미라처럼 칭칭 감고 신우 오빠가 운전하는 스쿠터 뒷좌석에 탔다. 코너를 돌 때마다 유독 희동이 오빠가 운전할 때 보다 스쿠터가 더 기우는 느낌이었지만 내가 술기운이 올라 그렇게 느끼는 거려니 했다. 목도리로 칭칭 감았지만 뒷좌석 겨울바람은 너무 시렸다.
신우 오빠 허리를 감싸기는 싫어서 양 옆구리를 꽉 부여잡았다. 큰길에 의외로 차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평탄한 큰길로 갔으면 했는데 지름길이라며 상수역 큰길로 빨리 나가지 않고 골목골목을 누볐다. 띄엄띄엄 내린 눈이 큰길에는 다 녹아 없어졌는데 골목 안에는 작은 무덤처럼 쌓여 있었다. 하얀 푸라푸치노 위의 계핏가루처럼 지저분해진 눈 위에 시커먼 먼지가 쌓여 있었다. 그리고 내 얼굴이 그 눈더미를 들이받고 있었다. 스쿠터가 코너를 돌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붕 뜨더니 옆으로 고꾸라졌고 나는 눈더미에 얼굴이 쳐박히고 내 오른쪽 어깨 뒤로 스쿠터가 쓰러졌다. 나는 땅에 떨어짐과 동시에 스쿠터에 깔렸다.
“어휴 씨발! 야! 너 괜찮냐?”
고개를 들어 소리 난 곳을 쳐다보니 신우 오빠가 더 높게 싸인 눈더미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저 오빠는 스쿠터에 깔리진 않았다. 헬멧을 쓴 머리통도 멀쩡해 보였고 눈을 털어내는 모양새를 보니 팔다리도 멀쩡해 보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스쿠터가 들이받은 것 같은 생물도, 물체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갑자기 왜 엎어졌는지 모르겠다. 신우 오빠가 내 위의 스쿠터를 바로 세웠다.
“야! 미옥아! 괜찮아? 일어나 봐!”
신우 오빠가 손을 내밀었지만 나는 그 손을 잡기 전에 왼 손으로 얼굴부터 더듬어 보았다. 목도리는 그 새 눈 녹은 똥물에 젖어 있었고 그 사이로 만진 코는 다행히 부러지진 않은 것 같았다. 눈도 잘 보이니 괜찮은 것 같았고 입술과 뺨을 더듬었는데 피가 난 것 같지 않았다. 일단 얼굴은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로 땅을 들이받았기 때문에 머리도 괜찮은 것 같았다. 대신 넘어질 때 패딩 후드가 벗겨졌는지 머리카락이 다 삐져나와서 목도리와 같이 똥물에 젖어 있었다. 이제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나 봐야겠다. 그런데…
“어?!”
“왜 왜 그래? 왜? 어디야? 어디 아퍼?”
“오빠 나 오른팔이 안 움직여.”
정말이다. 오른팔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픈 것도 아닌데, 그냥 움직일 팔이 없는 것처럼 아무 느낌이 없었다. 왼 손으로 오빠 손을 잡고 일어섰다. 일어나 보니 두 다리는 멀쩡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나마 다행이다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나는 오른손 잡인데… 무슨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사이 신우 오빠는 동민이 오빠한테 전화를 해서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것 같았고, 다음엔 스쿠터 주인 희동이 오빠와 통화하는 것 같았다. 오늘 밤 내내 연락이 안 되던 그 희동이 오빠 말이다.
정신을 차려 보니 병원 응급실에 누워 있었다. 목도리를 다 풀어냈는데도 똥물 냄새가 코를 찔렀다. 머리카락 때문이다. 여긴 응급실이지만 나는 응급 환자는 아니었다. 옆엔 자동차 추돌 사고로 실려 온 아저씨가 있었는데 무릎이 아저씨 머리보다 더 크게 부어있었고 정강이는 허리만큼 굵어져 있었다. 좀 멀리에는 머리가 깨져서 온 여자가 있었는데 머리카락이 피랑 엉겨 붙어 목덜미에 붙어 있었다. 저 정도는 돼야 응급 환자가 되나 보다 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신우 오빠는 안 보였다. 대신 동민 오빠랑 얼굴만 아는 다른 선배가 와 있었다. 119 대신 얻어 타고 온 차가 저 선배 차였다.
희동이 오빠가 신우 오빠가 음주에 걸리면 서로 귀찮아진다고 동민이 오빠에게 다른 사람을 섭외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섭외한 사람이 저 선배라고 한다. 여기까지만 들었다. 나머진 어떻게 설명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오른 쇄골뼈가 똑, 똑, 부러져 세토막이 되었다고 했다.
To be continued...
크리스마스에 차인 일(上). by 옥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