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은 연애> 열한 번째 이야기
1월, 나는 백수가 되었다. Staff으로 일하던 장편 애니메이션 <여우 소녀의 모험>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어제 2차 편집본 시사회를 갔는데 1차 때와 마찬가지로 또 끝까지 못 보고 잠이 들었다. 엔딩 크레딧에 내 이름이 올라가는 것도 확인하지 못했다. 오늘이 2년 동안 일 했던 스튜디오를 정리하는 마지막 출근이다. 가방 안에 멀티탭 3개를 챙겼다. 밤마다 애용했던 '라꾸라꾸'도 이제 안녕이다.
"야~ 너, 여권 재발급 제 때 했어?"
"그럼! 딱 챙겨서 비행기 티켓이랑 잘 뒀지~"
나보다 멀티탭을 2개 더 챙긴 친구가 내 여권의 안위를 물어봐주었다. 게으른 내가 여권 때문에 모처럼의 해외여행을 못 갈까 걱정인 모양인데 쓸데없는 기우다. [끌레르몽 페랑 영화제]에서 대학 때 만든 졸업 작품 <굶주린 히어로>가 단편 경쟁부문에 초청되었다고 이메일을 받았던 순간, 남자 친구가 내 여권부터 챙겼기 때문이다. 그는 매우 꼼꼼한 사람이다.
다행히 비행기 티켓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사주는 것으로 결정되어 남자 친구의 잔소리에서 비껴갈 수 있었다. 프랑스 '샤롤 드골 공항'에서 In&Out 날짜만 정하면 되었고 마침 백수가 된 나는 야심 차게 5주짜리 해외여행을 하기로 결정했다. 큰 배낭을 하나 구해 두꺼운 겨울 옷 몇 벌, 입고 그냥 버리면 되는 구멍 난 팬티들, 생리대,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용할 바디클렌져 및 세면도구 등을 챙겼다. 바퀴 달린 커다란 트렁크는 필요하지 않았다.
프랑스의 겨울은 한국의 겨울과 비슷했다. 나는 파리 시내에서 빈둥빈둥 관광만 하다 영화제 날짜에 맞춰 '끌레르몽 페랑'으로 향했다. '끌레르몽 페랑'은 파리 시내의 지하철보다 훨씬 진보된 기술력으로 보이는 깨끗한 '트램'만 없었다면 우리네 강원도 산골 마을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였다. 큰 도시도 아닌 것 같은, 작은 마을처럼 보이는 곳에서 영화제라니, 나는 정말 신기했다. 한국에선 어느 지역에서 영화제를 하면 대개 그 영화제를 채우는 사람들은 영화를 위해 온 다른 지역 사람들이었는데 '끌레르몽 페랑'에서는 그 지역, 영화와 관계없는 지역 사람들이 영화제를 더 즐기고 있었다. 물론 여기저기에서 온, 다양한 국가의 영화를 위한 사람들이 모인 것도 맞지만 그만큼 지역 남녀노소들이 모여 영화제를 함께 했다. 마치 마을 축제 같았다.
파리에선 한 없이 게을렀던 나는 이 축제 같은 분위기에 텐션이 올라갔고, 영화제에서 나눠준 디렉터라고 쓰인 'ID카드'를 목에 걸고 부지런히 상영극장을 돌아다녔다. 내 단편 애니메이션 상영 후에는 기립박수까지 받아 더 부지런해졌다. 상영되는 영화들은 당연히 한국말 자막은 없었다. 나는 대다수의 영화들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봤다. 그래도 졸리지 않았다.
"OH! Hi~ Excuse me? You are... a director?"
"... Ahh... Me? No! no director."
영화를 보려고 기다리는데 내 앞에 줄 서 있던 남자가 뒤를 돌아보더니 나에게 말을 걸었다. 영어로.
"You, you're a director. Your ID card says to me."
아... 영화제 주최 측에서 나눠준 ID카드는 티켓과 같은 것이었다. 목에 걸고 있다가 입장할 때 보여주기만 하면 그냥 들어갈 수 있어서 너무 좋았는데 이 순간엔 괜히 걸고 있었다는 후회감이 몰려왔다. 그는 푸른 눈에 하얀 솜털이 보이는 흰 피부와 금발 머리카락을 가진, 삐쩍 마르고 키가 큰 외국인이었다. 얼핏 손도 봤는데 손가락이 너무 길어서 영덕대게 같았다.
"This... Yes. Director. I am."
그는 내가 왜 감독 아이디카드를 걸고 있는지 집요하게 영어로 물어봤고 나는 영화 상영을 기다리는 내내 영어로 끊임없이 대답해주었다. 내 단편 애니메이션에 대해서도 설명을 해줘야 했고, 상영관 문이 열리고 들어가서는 옆에 나란히 앉은 그에게 보고 있는 영화들에 대해서도 내 느낌을 말해줘야 했다. 물론 다 영어로 말했다. 미국에서 온 그는 자신이 쓴 시나리오로 만들어진 영화로 영화제에 왔다고 했고 자기를 '댄'이라고 부르라고 했다.
"Yes. So... Dan...”
나는 미국인 댄에게 앞서 파리를 돌아다닐 때 만난 외국인들을 통해 느꼈던 점을 말해주기로 했다. 구구절절이 상황 설명은 생략하고 요점만 말했다.
“Dan. You need to know something. I am so tired because speaking in English."
"Oh... Why? Your English is so good. I'd like... Hey~ How about a beer with me, now?"
"No. Uhm... I am very smart person. but when I speak in English, I think I don't look smart. I don't like this."
"Oh! you're awsome smart! I can see! Look at yourself."
영화를 보고 나오니 산골 마을의 해가 저물고 있었고 맥주 한잔 하기 딱 좋은 하늘색이 되어있었다. 댄은 한국의 주입식 교육으로 완성된 나의 영어에 감탄했고, 나는 그런 댄의 맥주 요구를 저녁노을을 핑계로 동의했다. 우리는 작은 펍으로 갔다. 이 곳의 다른 카페나 식당처럼 여기도 아이디카드로 할인을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I'm from Paris."
댄은 자신이 파리에서 왔다고 했다. 그리고 혼자 낄낄거리고 웃더니 프랑스 파리가 아니라 미국의 텍사스 파리라며 좋아라 했다. 아, 나는 어느 타이밍에 웃어야 할지 몰라 웬만하면 그가 문장을 끝맺음할 때마다 웃어줬다. 그는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했다. 한국의 영화, 좋아하는 감독, 좋아하는 배우 등 영화에 관련된 것들을 연신 물어봤다. 나의 주입식 영어는 매끄럽진 못해도 그를 꽤 잘 이해시키고 있었다. 나는 이해시킴과 동시에 그를 찬찬히 훑어봤다.
걸어오면서 보니 키는 185cm는 넘는 것 같았고 얼굴도 나보다 작아 보였다. 문득 어제 호텔에서 본 영화가 생각났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얻어걸린 '포르노'였는데 영화 속 외국 남자의 음경이 엄청 컸었다. 같이 나온 여자의 팔뚝만 한 길이였는데 내가 진짜 놀란 것은 사이즈가 아니었다. 너무 유연했다. 그렇게 커졌는데도 이리 휘고 저리 휘는 걸 보면서 가짜가 아닌가 의심이 들어 꽤 들여다봤다. 댄은 영화 속 배우와는 다르게 생겼다. 그 남자 배우는 구릿빛 피부에 기름진 근육질이었고, 댄은 허벅지도 영덕대게처럼 가늘고 길었다.
"What's your favorite movie? You like romatic movies?"
"Quentin Tarantino."
"Oh! you know Reservoir Dogs?"
내가 <저수지의 개들>의 영어 제목을 몰랐기 때문에 나는 그의 영어를 쉽게 이해하지 못했고 <저수지의 개들> 자체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My life as a dog. I love this best."
댄은 영화 <개 같은 내 인생>을 자신의 인생영화라고 했다. 내가 제목만 안다고 하니 열심히, 열심히 영화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 대부분의 대화가 이런 식이 었다. 그는 나에게 쉽고 단순한 단어들로만 설명을 해야 했고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중간중간 이 말을 꼭 해야 했다.
"No! no, you have to use more easy words. And more speak slow, ok?"
뭐가 그리 재밌는지 댄은 내가 이 말을 할 때마다 웃었다. 나는 또 왕가위 영화가 좋다고 했고 우리가 마신 맥주의 빈병이 늘어갔다. 내 눈이 가물가물해졌다. 영어로 말하는 것이 피곤한 일이라고 한 영어로 말한 내 말은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You look a little sleepy. You ok?"
"No! I want to go to Hotel. I want to sleep!"
끌레르몽 페랑 밤공기는 찼다. 제대로 겨울이었다. 하얀 입김을 뿜으면서 말로는, "I love TRAM"이라고 꿍얼거렸지만 걸어가고 있었다. 옆에는 나란히 댄이 걷고 있었다. 내가 약간 비틀거려서 댄의 팔을 붙잡고 걸었다.
"You know what? Chris?"
크리스는 몇 시간 전, 급하게 만든 나의 영어 이름이었다. 크리스 한.
"What?"
"I like Before Sunrise, too. so beautiful and so... beautiful."
저기 보이는 건물이 내가 묵는 호텔이라며 손으로 가리켰을 때, 댄이 영화 <비포 선라이즈>를 좋아한다며 수줍게 나에게 미소 지었다. 나도 아는 영화다. 에단 호크와 쥴리 델피가 파리와 비엔나 사이 기차에서 우연히 만나 꽁냥꽁냥 돌아다니다가 야외에서 하룻밤 자며 섹스를 하는 그런 영화다. 그러고 보니 댄이 에단 호크와 좀 닮아 보였다.
"I like that movie, too."
호텔 앞에 도착했다. 키가 큰 댄이 위에서 나를 내려다봤다. 내 눈을 빤히 쳐다보는데 그 눈이 내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툭툭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다 점점 그의 어깨가 구부정해지더니 그가 나에게 키스를 했다. 나는 가만히 서 있기 뭐해서 댄의 혀가 내 윗니와 아랫니 사이로 들어올 때 즈음, 양 손으로 댄의 얼굴을 감쌌다. 댄의 손이 내 뒤통수를 부여잡으려고 할 때, 감싼 손으로 그의 얼굴을 떼냈다.
"My life as a Reservoir dogs."
나의 베스트는 <저수지의 개들>이라고 강조 하려는게 내 인생은 저수지의 개 같다 고 말 해버렸다.
"What? Chirs?"
"I am sorry, Dan."
비포 선라이즈... 나도 정말 좋아하는 영화였는데 너무 아쉬웠다.
"Dan, I am so sorry. I want you to know something."
"Uhm... what's that?"
나는 댄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붙들고 말을 이어갔다.
"I am beelding, now. middle of legs."
"Oh my god, you ok?? when did you get hurt?"
"Hurt? oh no! no! wrong my mistake... uhm... oh bleeding inside legs. like pee! you got it?"
"What?"
"Bleeding like pee. once a month! understand ok?"
"Oh, period... you mean... you are being on period?... now."
"Period? Yes!"
생리가 영어로 Period였나 보다. 피리어드. 하나 배웠다. 이제 댄의 얼굴을 놔주었다.
"So... Chris?"
댄이 내 이름을 부르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작은 얼굴이 멀어지니 더 작아졌다. 생리를 설명하느라 오줌 이야기를 꺼냈더니 진짜 어떻게 참았는지 놀랄 만큼 오줌이 마렵기 시작했다. 빨리 호텔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댄이 눈치가 아주 없는 건 아닌 듯 앞 서 천천히 말하던 것과 달리 굿나잇 인사를 아주 빠른 속도로 해주었다.
"Oh, I need to go, now. so... good night. uhm...."
"Yes. Thank you. Good bye."
정말 전력을 다해 오줌을 참으며 댄을 보냈다. 연락처와 이메일은 이미 맥주를 마시며 공유해서 인사만 하면 됐다. 인사를 하고 뒤 한 번 안 돌아보고 걸어가는 댄을 끝까지 지켜봤다. 프런티어 직원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바로 방키를 내주었다. 오랜 시간 갈지 못했던 생리대는 한계치에 도달해 있었고 놀랄 만큼 마려웠던 오줌은 정말 끝도 없이 나왔다. 빈 속이 되니 허탈해져서 내일 아침, 공짜로 먹는 호텔 조식이 너무 기다려졌다.
다음 날, 일찍 일어나서 호텔 컴퓨터로 남자 친구에게 끌레르몽 페랑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 주었다. 사진을 본 남자 친구로부터 문자가 왔다.
-너! 거짓말했지?-
-ㅇㅇ? 뭔소리냨?-
-프랑스 간 거 뻥이지? 프랑스라고 하고 어디 숨어 있는 거?-
-뭐래? 도랏?-
-무슨 강원도 산골, 기슭에서 찍은 것 같은 풍경임.ㅋ-
-뭐야? 건물이랑 옆에 외쿡인도 있구만!!!!!!! 외국 남자애 안 보임?-
근데, 내가 봐도 트램에서 찍은 사진 빼고는 산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은 죄다 강원도 같았다. 배경에 외국인들이 왔다 갔다 하고 내 옆에 외국인이 서있어도, 유럽식 건물이 보여도 한 번 강원도로 보이니 계속 강원도처럼 보였다. 내가 참 사진을 못 찍는가 보다 반성을 했다. 아직 여행이 한참 남았고 만회할 기회는 더 있었다.
끌레르몽 페랑. by 옥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