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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통

<식은 연애> 열 번째 이야기

by 옥광



저녁으로 먹은 바지락 칼국수를 반주 삼아 소주를 각 2병씩 마셨다. 이 정도는 마셔야 나중에 '아차' 싶었을 때 변명거리로 사용할 수 있다.


지금, 이 남자와는 오후에 삼성동 코엑스에서 하는 '모터쇼'를 구경하고 쭉 같이 있었다. 단 둘이서 말이다. 어젯밤, 이 남자는 느닷없이 내일 뭐 하냐고 전화를 걸어 물어왔고 나는 오후에는 모두 공강이었지만 오후에 교양 수업이 하나 있다고 뻥을 치고 늦은 오후로 약속 시간을 잡았다. 그리고 오늘 아침, 약속 확인 문자를 하며 겸사겸사 만나서 뭐 할 거냐고 물어보니 '모터쇼'를 보러 가자고, 티켓이 있다고 했다. 나는 오늘 가면 '모터쇼'는 처음 가보는 거라며 좋다고 웃는 이모티콘을 여러 개 날렸다. 그렇다고 내가 '자동차'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다. 관심은 1도 없다.


처음 가 본 '모터쇼'는 생각보다 화려했고 흥미로웠다. 운전면허가 없는 나도 탐이 날 만큼 '콘셉트카'라 불리는 차들은 멋졌다. 먼저 가자고 했던 이 남자보다 내가 더 열심히 사람들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내 고개가 이리 돌아가고 저리 돌아갔다. 생각보다 구경 욕심이 마구 생겨서 오후에 수업이 있다고 뻥 친 게 약간 후회가 될 정도였다. 더 일찍 왔다면 더 많이 볼 수 있었을 텐데.


오늘 전시가 끝날 때까지 다 보고 싶었는데 이 남자가 먼저 배가 고프다고 저녁을 먹으러 나가자고 했다. 나는 '모터쇼'장을 누비며 벤티 사이즈 스무디를 먹어서 그런지 그렇게 허기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 남자에게 나도 배가 고프다고 말했다. 남자는 강남역에 죽여주는 바지락 칼국수집이 있다며 나를 여기로 데리고 왔고 나는 뜨거운 국물엔 소주가 땡긴다며 소주를 시켰다.


2층 칼국수집 계단은 올라갈 땐 몰랐는데 내려올 땐 꽤 가파른 계단이 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내려오다 앞으로 고꾸라질 뻔하다 뒤로 주저앉아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야!" 꼬리뼈가 아팠다.


나보다 앞서 계단을 내려가던 이 남자는 내 넘어지는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봤고 꼬리뼈가 아파 쉽게 일어나지 못하는 나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나는 이 손을 잡고서 겨우 일어났고 이 후로 계속 이 손을 놓지 않았다. 길을 걷던 도중 이 남자는 내 손이 차다며 자신의 코트 호주머니에 내 손을 넣었다. 그 바람에 어깨를 붙이고 걸어야만 했다. 둘 다 술 냄새가 장난 아니었다.


바지락 칼국수집은 강남역에서 양재역 넘어가는 사이 골목 안에 있었다. 대충 가늠해 봤을 때 소주 2병이면 꽤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남자는 맥주를 더 마시자며


"노래방 갈래? 너 노래 부르는 거 좋아하잖아?"

"... 그래!"


바로 근처에 있는 건물 노래방 지하로 내려갔고 '카스'를 세 캔 사서 안내받은 룸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두 명뿐이라 그런지 안내받은 룸은 정말 비좁았다. 청소에 사용할 대걸레, 휴지 같은 것들을 두는 비품실로 사용하면 딱일 크기의 방이었는데 거기에 노래방 기계까지 자리 잡고 있으니 자동으로 우리는 붙어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벽에는 복도를 내다볼 수 있는 창이 없었다. 문에는 작은 창이 있긴 했지만 그 위에 옷을 걸어놓는 옷걸이가 있어서 이 남자가 자신의 코트를 걸어 놓아 그 작은 창을 막았다.


"오 예! 다음 거 뭐 부를지 생각났다!"


세 곡 내리 나만 노래를 불렀고 남자는 맥주를 마셨다. 나는 세 번째 노래 간주가 나올 동안 다음 노래를 예약하려고 그 비좁은 자리에서 일어나 노래방 책을 향해 팔을 뻗다가 또 엉덩방아 찧듯 주저앉았다. 이번엔 이 남자의 무릎이었다.


이 남자 이번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도록 돕지 않았다. 반대로 내 허리를 붙잡고 계속 주저앉아 있도록 도왔다. 덕분에 우리는 키스를 할 수 있었다. 괜찮았다. 키스를 꽤나 잘했다. 지난번엔 내가 너무 취해 있어서 정말 이 남자가 잘 한 건지 그냥 내가 취해서 그렇게 느낀 건지 아사모사했는데 이번에 확실히 확인했다. 이 남자 키스하는 건 합격이다. 정신없이 키스를 하며 이 남자 손이 내 등 맨 살을 더듬으려 할 때쯤, 나오던 노래가 끝나고 이번 노래의 점수가 나왔다. 89점이라니... 역시 노래방 점수는 믿을게 못 된다.


"으앜! 이게 뭐야?"


갑자기 내 머리카락이 차가웠다. 앉아 있기도 좁은 룸에 남자가 나를 눕혀보려다 맥주를 쏟았다. 한 캔을 거의 비운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내 머리카락에 이어 맥주가 목을 타고 내려와 어깨까지 젖어들고 있었다. 잠시 머쓱한 시간이 흘렀다.


"야~ 우리 나갈래?"


내 머리카락이며 어깨를 손으로 털던 이 남자는 갑자기 밖으로 나갈 것을 제안했다. 아직 이제 겨우 세곡 부른 건데 나가자니 돈이 아까웠지만 나는 좋다고 수락했다. 남은 맥주 두 캔은 내가 챙겨 호주머니에 넣었다.


"우리 어디 가?"


바깥공기가 차가워서 그런지 젖은 어깨는 찝찝하고 머리카락은 더 차가워졌다. 빨리 어딘가 들어가고 싶었다. 강남역과 양재역 사이에는 들어갈 곳이 정말 많았다. 모텔이 천지였다. 압구정역에 있는 성형외과 밀집도에 맞먹었다. 이 정도 술기운이면 이제 정말 충분하다 싶었다. 게다가 슬금슬금 맥주에 머리카락이 탈색되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됐다.


이 남자는 내가 젖어서 추울 거라며 코트를 벗어주진 않았다. 대신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 걸었다. 솔직히 이렇게 걷는 걸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어깨에 두른 팔은 은근히 무겁고 또 목을 앞으로 빼는 거북목 자세를 만들어서 나중에 승모근 있는 데가 뭉친다. 그렇지만 일단 견디고 있었다.


"너는 괜찮니?"


설마 내 승모근을 걱정해 주는 건 아닐 텐데...


"응? 뭐가요?"


어깨에 두른 남자의 팔 때문에 더 거북이처럼 목을 빼서 고개를 들어 이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잔뜩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뭔가 고통을 호소하는 얼굴이다.


"아... 이거 참... 소주에 맥주를 섞어 마셔서 그런지... 아우! 머리가 아프다."


이 남자는 말을 하면서 미간을 더 찌푸렸다. 아예 눈을 감아 버린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뭐? 노래방??"

"응??"

"거기서 맥주는 거의 못 마시지 않았어? 다 나한테 쏟았잖아."

"아니야, 아니야. 많이 마셨어. 네가 그냥 그렇게 느끼는 거야."

"응? 그래?"

"그래서 내가 말이야... 머리가 너무 아파서 그러는데 우리 여기 들어가서 좀 쉴래? 응? 어때?"


마침, 어느 모텔 앞이었는데 이 남자가 여길 들어가자고 한다. 나는 지난번에 와 본 곳이었다. 침대도 깨끗하고 꽤 좋은 곳이었는데 다만 욕실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밖에서 보인다는 게 문제였다. 그래도 여기까진 그려려니 하겠는데 볼일 보는 변기까지 밖에서 보인다는 게 걸렸다. 그래서 또 오지 말아야지 한 모텔이었다.


"그래서 지금 머리가 아파서 여길 들어가자고? 정말?"

"아니 왜? 싫으니?"

"아니... 그냥... 음... 안 되는 건 아닌데..."

"아니 오빠가 정말 두통이 심해서 그래. 지금? 잠깐만 들어가서 쉬자. 응?"


이 남자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이렇게 보니까 엄청 못생겼네.'


꽤 준수한 얼굴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의 얼굴은 준수하고 거리가 멀었다. 그냥 못 생겼다. 못 생겼을 뿐만 아니라 엄청 눈치가 없는 사람이었다. 모텔에는 노래방에 들어가기 전부터 가고 싶었는데... 모텔은 이미 코엑스에서부터, 아니 어젯밤 약속을 잡을 때부터 염두에 둔 일이었다. 그래서 이 남자가 계속 꾸물거리면 내가 먼저 제안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촌스럽게 '두통' 핑계를 대다니... 맥주에 머리카락이 젖은 나도 촌스럽게 샴푸 하고 싶다는 핑계는 대지 않고 있는데... 나는 기가 막혔다.


"왜? 나 못 믿어? 괜찮아. 들어가서 잠깐 쉬자. 응?"


말을 하면서 이 남자는 걷던 방향을 모텔 쪽으로 향하게 나를 당겼다.


"아! 오빠가 머리가 진짜 아프다."


이 못 생긴 멍청이는 내 머리카락 핑계를 빈말로라도 꺼낼 센스도 없나 보다.


“그러고보니... 오빠. 나도 좀 머리가 아픈것 같네?!”


'아차' 싶을 때 써먹으려고 마셔둔 일종의 보험 같은 소주 2병이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다. 키스는 괜찮았지만 혹시나 키스만 괜찮았을 경우를 대비해 없던 일로, 술 먹고 실수 한거로 하려고 마셔둔 건데... 어쨌든 마셔두길 잘했다.


"아... 나도 머리가 좀 아파. 나는 집에 가고 싶다. 오늘 너무 많이 마셨나 봐"

"아니 왜?"


그의 눈이 놀랬다. 눈이 놀라니 아프다며 주름졌던 미간이 쫙 펴졌다.


"네가 뭘 많이 마셔? 평소에도 오늘만큼 마시잖아?!"

"아아아... 아니야! 무슨 소리야? 너무 많이 마셨어! 집에 가고 싶어. 속도 좀 안 좋고."

"아니 왜? 칼국수가? 바지락이? 나 엄지 손가락 잘 따는데, 들어가서 오빠가 따 줄게. 가자!"

"뭐? 바늘은 있어?"

"응? 아니 저기... 아 저기 카운터에..."

"아니 아니! 나는 집에 갈래!! 소주 2병! 과음! 두통이 너무 씨게 왔어!"

"야! 아니 왜? 그러는 게 어딨어?"

"아니 두통이 왜? 뭐? 암튼 나는 가! 갈게! 오빠는 좀 쉬어. 얼굴이 썩었네."


때 마침, 택시가 지나가 주면 좋을 텐데, 모텔이 즐비한 골목으로 들어오는 택시는 보이지 않았다. 후다닥 큰길로 나갔고 다행히 어이없고 센스 없는 못 생긴 멍청이는 쫓아오지 않았다.


"아저씨, 압구정역 썬샤인 호텔 쪽으로 가 주세요."


대로변 꽤 많은 경쟁자들 사이에 운 좋게 내 앞에서 손님을 내리는 택시가 멈췄다. 나는 기분 좋게 택시를 탔고 짧은 거리를 가야 하는 아저씨는 낯빛이 안 좋아 보였다. 뭐, 어쩌라고. 목적지에 전화를 걸었다.


"오빠야? 난데~ 응! 나 머리가 아파가 주고 오늘 술자리 중간에 그냥 나왔어. 응? 그냥 편두통."


순간 진짜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골목 안으로 들어가기 싫어하는 택시 아저씨를 간신히 설득해서 썬샤인 호텔 골목 안, 남자 친구가 사는 빌라 건물 앞까지 들어가 내렸다. 오빠는 안 자고 영화를 보고 있었다.


"아우! 술냄새! 지금이 몇 시니? 정말!"

"미안... 그래도 끝까진 안 갔잖아. 헤헤헤~"

"그래그래, 자랑이다. 두통은 좀 어때? 타이레놀 줄까?"


남자 친구가 나를 꼭 안아주며 물었다.


"으음~ 아니야. 술 먹었잖아. 한 숨 자면 아침엔 괜찮아질 거야."

"그래? 그럼, 나는 마저 영화 본다. 너는?"

"응~ 난 지금 잘래. 너무 졸려. 헤헤~"


오빠는 거실 TV 쪽으로 갔다. TV 화면에는 오빠가 보던 영화가 일시 정지되어 있었다. 나는 화장실에 가서 볼 일을 봤다. 오늘 먹은 술이 다 오줌으로 나오는 것 같았다.


"너! 이 맥주는 뭐야?"


변기에 앉아 있는 나에게 오빠는 내 잠바 호주머니에 든 맥주가 뭐냐고 물어봤다.


"응? 그거 어쩌다 챙긴 거야~"


추운데 밖에 있다 들어와서 그런지 눈이 가물가물 감겼다.


"아! 오빠!!! 그거 냉장고에 넣어줘~"

"아~ 응! 안 그래도 넣어놨다.”


침대에 누우니 오빠가 보는 영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일단, 언어는 영어고. 나는 무슨 영화인지 알 것도 같아서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숙면이었다.











두통. by 옥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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