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은 연애> 아홉 번째 이야기
압구정 3번 출구로 올라가면 <현경>이라는 중국 요릿집이 있다. 짬뽕이 유명한 곳이다. 나는 <현경>을 두고 그 옆 건물, <사월의 보리밥>과 어딜 가면 좋을지 자주 고민했다. 다행히 지금은 둘 다 땡기지 않았고 앞으로 이 고민을 못 할지도 모른다. 계속하길 바라는 고민거리를 뒤로 두고 길을 따라 더 올라가면 압구정 CGV, 그 이전에 <씨네 플러스>라는 극장이 있던 건물에 <정글짐>이라는 '빵집'이 있다. <정글짐>에서는 아침 9시부터 11시 반까지 '빵 뷔페'를 한다. 여느 때 같으면 나는 여길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아침 9시 되기 10분 전이다.
걸어서 10분 거리 '오빠네 집'에서 잠을 잔 다음 날 아침, 부리나케 나와 도착해도 늦잠 때문에 10시를 넘기기 일쑤였는데, 광화문 내 집에서 왔는데도 <정글짐> 앞에 9시 이전에 도착하다니, 처음이었다. 이제 10분만 기다리면 완벽하게 꽉 찬 '빵 뷔페'를 볼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들어갈 수 없었다. 지금 목적지는 '오빠네 집'이다. 오빠는 토요일에도 약속이 없으면 출근을 했는데 주말엔 9시쯤 집을 나선다. 나는 서둘러야만 했다.
<정글짐> 건물 바로 뒷골목으로 꺾어져 들어가 다시 '강남 을지병원 사거리'쪽으로 올라가다 <개나리 마트>를 끼고 왼쪽으로 가면 보이는 5층짜리 빌라에 '오빠네 집'이 있다. 오빠네 집은 4층이다. 나는 5층에서부터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못하고 계단으로 헐레벌떡 올라갔다.
'띵! 똥!', '띵! 똥!', '띵똥! 띵똥!'
"..."
벨을 여러 번 눌렀지만... 아무 기척이 없었다. 조용했다. 현관문의 초인종 떨림이 멈출 때 즈음 조심스럽게 귀를 가져다 대보았다. 쇠로 된 문은 차가웠고 귀가 시렸지만 꽤 오랫동안 머리를 붙이고 있었다.
안에서 소리가 들리기를 바라는 나는 반대로 복도에 내가 움직이는 소리가 안 나도록 노력했다. 나는 복도에 소리가 울리는걸 원치 않았다. 정말 원치 않았는데...
'꼬르륵' 그리고 연 이어서
'꼬로로르으윽!'
배에서 소리가 났다. 이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생각해보니 나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집에서 튀어나왔다. 그래서 옷도 어제 입은 그대로였다. 당연히 세수도 안 했고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 그제야 침을 삼켰는데 '꼬르륵'소리보다 더 크게 복도를 울렸다.
'꿀! 꺽!'
여기서 <썬샤인 호텔> 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북창동 순두부집>이 있는데 순두부에 날달걀 한개를 톡 넣고 해장을 하고 싶었지만... 그냥 <개나리 마트>로 갔다. '몽셀통통' 두 박스와 '양파링' 한 봉지를 샀다. 입에선 아직도 어제 마신 술맛이 났다. <개나리 마트> 이모에게 술냄새를 풍길 까 입을 꾹 닫고 고개만 끄덕여 인사를 하고 나왔다.
이미 시간은 아침 10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혹시나 벨을 한 번 더 눌러봤지만 역시 벨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오빠 집 안에는 계속 아무도 없었다. 나는 '몽쉘통통' 박스에서 '통통'이들을 다 빼내고 박스를 방석삼아 오빠네 현관 앞, 바닥에 주저앉았다. 단짠단짠으로 '양파링'과 '통통'이를 번갈아 먹으며 어젯밤, 오빠가 보낸 문자를 봤다.
-이제 그만 하자.-
문자 내용이 ‘~하자’로 끝나서 마치 내 동의를 바라는 것 같지만 아니다. 명령조에 가깝다. 오빠가 말하는 '그만 하자'는 유독 그렇다. 나는 아직 이 연애를 끝낼 마음이 없는데, 그는 끝내라고 요구한다. 그는 이전에도 내 동의와 상관없이 끝내기로 여러 번 결정을 내렸었지만 형식적으로 나도 같은 결정을 내린 합의를 도출하기를 원했다.
“이제 그만 하자고 쫌!”
한 달 전쯤, 내 동의를 구하던 오빠는 엄청 짜증이 나 있었다. 그 날, 나는 사귀는 것도 같이 시작했으니 끝내는 것도 같이 해야 하는 게 옳다며 그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리고 가까스로 누르고 있던 울음보를 터트렸다. 터트리고 나서야 이 눈물의 약발 없음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미 이런 상황을 여러 번 경험 한 그는 울지 말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울 테면 울어봐라 식으로 나를 내버려 두었다. 오빠는 침묵했고 나는 말없이 울기만 해야 했다. 이러다 눈물이 멈출 것 같아 곤란해졌다.
‘어떻게 하면 더 슬퍼지더라!’
그렇게 울면서 오빠 눈치만 보다 우는 소리만 내며 신발을 신고 현관문 밖으로 나갔다. 12시를 넘긴 새벽에 가까운 밤이어서 그런지 복도는 고요했다. 센서등도 고장인지 깜깜했다. 나는 현관문에서 몇 발자국 떼지도 않고 그대로 주저앉아 울었다. 더 큰 소리로 울었고 이 소리는 복도를 시끄럽게 만들었다. 다른 집 현관문에서 인기척이 나려고 할 무렵, 오빠가 문을 열어 주었고 나를 다시 집 안으로 불러들였다.
더 이전에는 울면서 이런저런 말을 다 뱉었다. “내가 더 잘할게.”, ”내가 뭘 잘못한 거야?” 그러면 그는 아니라고 너는 잘못한 거 없다면서 우는 나를 달래주었다. 그러다 내 눈물이 진정되면 잘못 한 건 없는데 몇 가지만 고쳐달라면서 숙제를 내주었다. 나는 당연히 다 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 했지만 길어야 한 달이었다. 그 한 달 동안 한 게 '친구들이랑 술 밤새워 안 마시기', '오빠가 전화하면 잘 받기', '술에 취해서 길에서 잠들지 않기' 뭐 이 비슷한 것들이었다. 한 달 정도 잘 지키면 오빠는 다시 예전처럼 잘해 주었고 그러면 나는 숙제를 안 했다.
이게 몇 번 반복되니 울면서 매달려도 그는 나를 잘 믿어주질 않았다.
“너는 또 그럴 거잖아.”
어제는 숙제를 다시 시작한 지 3주가 조금 넘은 날이었다. 몇 주 넘게 못 본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났고, 반가운 마음에 술을 쭉 쭉 들이킨 나는 마침 걸려온 오빠의 전화를 반갑게 받았다가 엉 엉 울었다. 자리에 있던 친구들은 모두 내 눈물을 멈추기 위해 한 마디씩 건넸지만 수화기 너머 오빠는 조용했다. 나는 술에 취한 체 오빠한테 가봐야 한다며 술 집 밖으로 나왔다. 밖은 추웠고 한 번 녹았던 눈이 길에 맨질맨질 얼어붙어 있었다. 미끄러워서 그런지 술 집 건너편 쌀 집 앞에 줄줄이 세워져 있던 화분을 향해 넘어졌다. 내 가방이며 코트를 들고 쫓아 나온 친구들이 넘어진 나를 추스려 다시 술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내가 그 쌀 집 앞을 지나는 시간은 항상 영업을 안 하는 시간이어서 사장님 얼굴을 본 적은 없다. 그래도 사장님한테 많이 미안하다. 그 화분들한테는 일전에 토를 해 놓은 적도 있는데...
아까부터 여러 번 오빠 핸드폰에 전화를 걸었다. 오빠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뚜르르' 울리던 신호음은 어느 순간부터 핸드폰이 꺼져 있다는 변명 같은 ARS로 바뀌었다. 몇 번만 더 하면 부재중 전화 100통을 찍을 터였다. '양파링'을 다 먹었다. '몽셀통통' 두 박스 분도 다 먹었다. 그래도 허기가 진다. 점심 먹을 때가 지난 시간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정글짐>에서 그냥 '빵 뷔페' 먹고 오는 건데...'
복도가 차서 그런지 콧물이 자꾸 흘러 계속 옷소매로 닦았더니 콧구멍 주변, 인중이 헐어서 따가웠다.
'만화책 같은 거라도 챙겨 올걸...'
점점 심심해지기 시작했다. 핸드폰 게임도 지겨워졌다. 오빠는 집 안에 없는 게 확실했고 뭔가 결정을 내려야 했다. 밖에 나가서 제대로 해장을 하고 시간을 때우다가 저녁에 다시 오빠 집에 오는 게 낫지 싶었다. 이럴 때 오빠가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을지병원 사거리' 건너편, <더 큰집 설렁탕>을 가봐도 괜찮을 것 같았지만 나는 그냥 <개나리 마트>로 갔다. 오빠가 언제 집으로 돌아올진 모르겠지만 왠지 그 길목에 있고 싶었다.
<개나리 마트>에서 대충 '컵라면'으로 때우고 몸 좀 녹이다가 과자 몇 봉지를 마트 바구니에 담았다. 계산을 하는데 콧물이 계속 훌쩍훌쩍 나서 소매로 닦느라 지갑을 더디게 찾았다. 손님이 없어서 그런지 내가 모르는 주말 드라마 재방송을 보던 마트 이모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헐어서 빨개진 내 코 밑을 신경 썼다.
"아휴~ 코 밑이 왜 그래? 다 헐었네!!"
"네~ 그러게요..."
"뭐야? 연고 바를까? 이거 이거 후시딘 바르자."
"아! 아니 괜찮아요..."
괜찮다고 했지만 마트 이모는 코 밑이 헐었다고 할 때부터 후시딘 뚜껑을 돌려 열고 있었다. 코 밑이 번질번질해졌다.
"오늘은 오빠랑 안 왔네?"
"네..."
"근데 얼굴이 왜 이렇게 상했어? 응?"
"..."
"아! 밥을 안 먹어서 그래. 밥을! 이게 뭐 계속 과자만 먹고! 밥을 먹어야지..."
"..."
<위이잉> 이때, 내 핸드폰으로 문자가 왔다.
-먹고 난 쓰레기는 좀 치워라. 그리고 이제 그만해!-
"점심 먹을 때가 지났는데 밥 먹어, 밥. 응? 밥을 먹어."
한 번 터진 마트 이모의 밥 잔소리는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오빠는 더 이상 내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 나는 짜증이 확 났다.
"밥 먹을 거예요!!! 먹으면 되잖아요!! 밥!"
짜증이 난 나는 마트 이모에게 밥을 먹겠다고 큰 소리를 쳤는데 그리고,
"으어어엉! 밥 먹을 거라고요... 밥 으어엉~!"
동시에 울음보가 터졌다.
나는 엉엉 울면서 계산을 했다. 눈물 콧물 닦느라 아까 마트 이모가 발라준 후시딘이 손에 묻었고 다시 그 후시딘이 내가 내민 신용카드에 묻어서 카드가 번질번질 해졌다. 계산을 끝낸 마트 이모는 알아서 영수증까지 버려주고 이모가 앉아 있던 전기장판 한 뼘을 내주었다.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나는 전기장판에 앉아서 마트 이모한테 김밥 한 줄을 더 샀다. 이모는 김밥을 따뜻하게 데워서 나에게 건네줬다. 우느라 무슨 방법으로 데웠는지는 못 봤지만 김밥이 정말 따뜻했다. 마트 이모는 옆에 앉아서 아까 보던 주말 드라마를 계속 봤다. 계속 엉 엉 울면서 김밥을 우걱우걱 먹었다. 엉덩이에 닿은 전기장판이 너무 뜨끈뜨끈했서 오빠가 집에 왔다는 걸 알았는데도 일어나지 못했다.
개나리 마트. by 옥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