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은 연애> 열다섯 번째 이야기
문득 그림을 잘 그리고 싶었다.
“오빠, 어떻게 하면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어?”
“네가 왜?”
“아니… 일단 좀 말해 줘 봐.”
오빠는 내가 알고 있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일단 다섯 손가락 안에 포함되고, 경우에 따라선 Top3 안에도 들어간다. 또, 본인은 스스로 원탑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잘 그리는 사람들의 그림들을 조금 매만지고 정돈시켜 각자의 원탑으로 만들어주는 일개 디자이너였다. 여기서 디자이너란 예술가들에게 독촉이나 일 삼고, 컴퓨터가 다 알아서 하는 일들을 지켜보기나 하는 그런 사람을 말한다. 물론 모든 디자이너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대충 하고 와! 너 컴퓨터 바꿨다며, 금방금방 된다며?”
“아! 진짜! 이게 다 오빠때문이잖아. 지지난주에 넘기기로 한 걸 오늘 주면 어떻게 해!!”
모든 디자이너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이 오빠가 디자이너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맞다.
“나 이거 마감 맞추려면 꼼짝 못 해! 양심이 있으면 오빠가 먹을 거 사가 주고 우리 집으로 넘어와.”
“싫어. 나 오늘까지 작업하느냐고 피곤하단 말이야… 그리고 예매한 영화도 우리 동네잖아.”
“그러니까 누가 맘대로 예매하래?”
“너가 보고 싶은 영화라고 해서 예매한 거잖아? 너 때문에 한 거잖아!”
영화 ‘불한당’. 어제, 내가 압구정으로 넘어가 빨리 작업을 끝내 달라는 간절한 응원을 하며 보고 싶다고 한 영화가 맞다. 마침, 굴짬뽕이 먹고 싶었다며 바쁜 와중에도 압구정역 <현경>에 가던 오빠는 ‘불한당’이 재밌어 보인다고 했었고 나는 오빠와 나의 취향일치를 극찬하며 작업이 다 끝나면 꼭 보러 가자고 말했다. 여기서 작업이란 모든 작업공정을 말한다. 오빠의 공정만을 지칭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왜…?
“그러니까, 오빠 오늘까지 작업하느라 피곤하잖아. 영화는 다음에 보고 오늘은 좀 푹 쉬어. 알았지? 미안해, 응? 응? 미안하다구, 응?”
예매 취소하는 게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아느냐며 마지막까지 투덜거리던 오빠는 전화를 끊기 전, [우리 만화 연대]라는 곳을 알려주었다. 줄여서 [우, 만, 연]이라 불리는 곳은 합정역 근처였다. 오빠 말에 의하면 이 곳에서 누드크로키 수업을 한다고 했고, 집중적인 날 것 드로잉이 그림 실력을 향상시키는데 꽤 도움이 될 것이라 했다. 등록 후, 처음 크로키를 한 날, 생각보다 큰 에너지에 소모에 집 앞, <GS25>에 들러 맥주를 한 캔 깠다. 맥주가 꿀이었다. <GS25>의 알바생은 나에게 라임맛 츄파츕스를 서비스로 주었다.
누드크로키 수업에 선생님은 따로 없었고 서로 그림을 평가하는 시간도 없었다. 세 시간 동안 10분, 5분, 1분 시간을 정하고 모델님이 자유롭게 바꾸는 포즈를 자기 깜냥껏 그리기만 하면 시간이 순삭 됐다. 크로키 수업이 있는 요일이면 퇴근하기 몇 분 전부터 발을 동동 굴러 미리 시동을 걸었는데 지각을 하면 입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나는 한 번도 지각을 한 적이 없었다.
“맨날 맥주만 드세요?”
“아… 쫌 그런가?”
알바생이 물어보길래 말만 이렇게 하고 그냥 맥주만 샀다.
“그랬더니, 오늘은 레몬맛 츄파춥스를 공짜로 주더라고.”
맥주와 츄파춥스를 번갈아 먹으며 오빠에게 그 날 하루 일과를 신나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오빠를 꼬실 때도 하루 종일 뭘 했는지 떠들어 댔었다. 오빠 말로는 나중에 내 하루 일과가 궁금해져서 나와 사귀기로 마음먹은 거라고 했다.
“그림은 그릴만 해?”
“어! 너무 재밌어!”
“왜? 누드크로키라 좀 부담스러워할 줄 알았는데?”
“아니! 뭐가 부담스러워? 여자야 모… 남자는 모!”
“그래, 그럼 다행이구.”
누드 크로키는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누드모델님들은 패션모델과는 완전히 달랐다. 마르고 날씬한, 이쁘고 잘생긴 모델님들 보다 살집도 있고 체형이나 비율이 완벽하지 않은 분들을 그리는 게 훨씬 재밌었다. 물론 멋진 모델님들도 너무 좋았다. 단지… 너무 이쁜 모델님들은 내가 그렇게 못 그렸을 때 너무 티가 난다고나 할까?
“뭐야? 이 여자 가슴이 어떻게 이렇게 커?”
어느 날, 오빠가 내가 그린 그림을 평가했다.
“어떻게 다리가 이렇게 돼? 데생이 하나도 안 맞잖아? 목도 이상하다.”
오빠가 소개해 준 곳에서 재밌게 그린 그림을 자랑하고자 압구정동까지 스케치북을 가져갔던 날, 오빠로부터 들은 말들은 다 맞았다. 내 기억 속에도 이 모델님의 가슴은 그림보다 작은 것 같았고 다리가 이렇게 꼬이는 것은 말이 안 됐다. 목은 툭 꺾여 있었다.
“너! 가슴 작다고 그림으로 대신 푸는구나.”
“뭔 소리야?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그림이란 게 다 그래. 봐 봐, 목도 길어지고, 다리도 길게 그렸잖아. 그러니까 이렇게 꼬이지.”
“… 그, 그럼 이건! 이건 뭐라고 할 껀데?”
나는 남자 모델님 그림을 들이밀었다. 직접 선곡한 음악에 맞추어 무용하듯 포즈를 바꾸던 모델님이었다. 쉬는 시간에는 황금색 가운을 여미고 본인의 그림을 말없이 둘러보던 분이셨다.
“훗, 너 좀 밝힌다?”
“뭘 밝혀? 내가?”
“야, 너무 크게 그렸잖아. 어휴… 너 심하다!”
“아니! 왜 말이 다 그쪽으로 가?”
“이해해, 충분히 이해해.”
집 앞, 경복궁역에 내려 매번 들르는 <GS25>에 또 들렀다. 맥주를 사는데 오랜만에 열이 확 받았다. 집에 뭘 쌓아놓는 걸 좋아하지 않아 캔맥주를 한 개씩 깨작이며 사 왔는데, 오늘은 세 캔을 샀다. 계산대에 스케치북과 맥주 세 캔을 올려놓고 나니, 포카칩도 먹고 싶어 졌다. 오리지널과 어니언 사이에서 고민할 뻔했지만 금방 정신을 차리고 각 한 봉지씩 들었다. 그리고 양파링도 들었다. 오늘은 알바생으로부터 공짜 츄파츕스는 없을 것 같았다.
“저기… 죄송한데요...”
“네?”
“… 제가 스케치북을 조금 봐버렸어요.”
“네에?”
츄파츕스를 공짜로 주던 그 알바생이 사과의 말을 전해 왔고 왜 사과를 했는지 그 이유도 바로 고백했다.
“아… 괜찮아요.”
“그림을… 엄청 잘 그리세요. 부러워요.”
18살, 이 어린 소년은 애니메이션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너무 진지하게 말해서 대학 가서 전공하라는 쉬운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미술대학을 졸업했을 뿐 미술을 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지금도 스케치북을 들고 왔가갔다 하기만 할 뿐이다.
“애니메이션은 일본이 유명하다고 하니까 돈 모아서 일본으로 유학 가고 싶어요!”
“아니야! 병신아! 미국이 유명하다니까!!”
항상 놀러 와 있던 소년의 친구는 계산대 구석에서 핸드폰 게임을 하다 말고 강력하게 자신의 의견을 주장했다.
“그렇죠? 애니메이션 미국이죠? 디즈니! 토이스토리!”
“아… 미국도 유명하죠?!”
“거 봐! 이 새끼야! 미국 이래잖아, 선생님이.”
“시끄러! 짜져 있어! 너 목소리 존나 커서 선생님 놀라시잖아!”
아… 갑자기 나는 이 소년들의 선생님이 되었다.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말아달라 말하려는 타이밍은 번번이 놓쳤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그렇게 그림을 잘 그려요?”
“아… 응?”
“그림 너무 멋있으세요. 유명한 화가 같으세요. 옛날 화가! 피카소 같은!”
“네? 응?”
피카소도 어릴 때 그린 인체 데생은 상당히 사실적이라고 했었다는데, ‘이 친구가 그걸 아는 걸까?’ 싶었다. 한참 어린애였고 학교 공부도 그닥... 영리해 보이지 않았다. 어려운 대답을 해주면 이해 못 할 애 같았다.
“음… 여기 누드크로키 그리는데 합정역 쪽인데 여기서라도 연습을 해 보면 어떨까… 요?”
“우와! 그림 한 개도 못 그리는데 갈 수 있어요?”
“맞아요! 이 새끼 그림도 개 못 그려서 모델들이 싫어하면 어떻게 돼요?”
“아니에요! 나도 엄청 못 그리는데, 그런 거 신경 안 써도 돼요.”
소년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선생님, 그림이 그! 게! 못 그리는 그림이… 에… 요?”
“어머! 그럼요! 거기 가면 진짜 잘 그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아차 싶었다. 소년의 친구는 거 보라며 너는 안 된다고 구박했고, 소년은 망연자실하여 어깨가 축 처졌다. 그리고 나는 일종의 확인사살까지 해버렸다.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고! 용기를 갖고! 여기 세 달에 10만 원 밖에 안 해요!”
“십… 십만 원이요?”
소년은 낮에는 갈빗집에서 알바를 해야 한다며 말을 얼버무렸다. 나는 어깨를 움찔 거리며 뭔가 수습하고 싶었는데 맘대로 안됐다.
“얘가… 미술학원을 알아봤는데 다 개! 아니 너무 비싸더라고요.”
“아… 아니, 다 그렇게 비싸지 않은…”
내가 미술학원들을 위한 변명을 대신해 줄 수는 없었다.
망연자실한 이 소년은 친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연습장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내 스케치북을 봤으니 보여주는 게 맞다면서 유럽 풍경 사진이 표지인 스프링 노트를 펼쳤다. 줄이 그어진 종이에 그림이 있었다. 만화 원피스와 은혼, 페어리테일을 주로 따라 그린 그림들이었다. 볼펜으로 덧 그리고 덧 그리고 덧그려서 어느 페이지는 닳고 닳아 구멍이 뚫려 있었다.
“너무 잘 그린다. 정말 잘 그렸다.”
객관적으로… 못 그린 그림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뭔가 만회하고 싶었고 입에 발린 칭찬을 마구 남발했다. 내 칭찬에 소년의 축 처진 어깨가 다시 솟아오르진 않았지만, 대신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고 콧구멍을 벌름 거리는 건 볼 수 있었다. 나는 그제야 안심이 되어 계산을 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츄파츕스도 받았다. 알고 보니 소년이 주는 츄파츕스는 편의점에서 파는 게 아니라 소년의 친구가 알바하는 PC방에서 몰래 쌔벼 오는 거였다.
“그렇다니까? 어떤 보상심리 같은 건 가봐. PC방에서 하는 고생에 대한 어떤 그런 거?”
“그래? 너 좀 실망한 건 아니고?”
“뭐가? 내가 뭘 실망해야 돼? 오빠?”
집에 와서 오빠에게 그간 받은 공짜 츄파춥스의 미스터리를 설명해주고 나니, 나는 하지도 않은 실망에 대해서 설명해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왜? 너 그동안 그 알바생이 너 좋아했다고 생각한 거 아니야?”
“응? 아닌데? 걔네 되게 어려. 18살인가 그래. 편의점 사장님이 말해준 거야. 내가 말 안 했었어?”
“나이가 뭐가 중요해? 18살이면 알 거 다 알아.”
“뭘 알 걸 다 알아? 알아도 뭐?”
“너… 솔직히 스케치북도 일부러 보라고 올려둔 거 아니야? 그 애더러 보라고 그런 거 아니냐고?”
씨발! 내 입이 욕을 중얼거렸다. 다행히 오빠가 듣진 못 했다.
“너, 은근히 그 알바생 애가 너 쫓아 나오는 거 기대했지?”
“씨발, 뭐?”
이번엔 좀 크게 중얼거려서 오빠가 들어버렸다.
“야! 박보경! 너 뭐라고 그랬어, 지금?”
“어! 내가 미안… 말이 헛 나 온 거야. 미안해. 근데… 오빠가 말이 좀… 심한 거 같아서.”
“내가 뭐 말이 심해? 네가 갑자기 예민한 거야! 욕을 왜 해? 사람 없어 보이게!”
“…”
“너는 너 기분 안 좋아지면 농담도 못 하게 하더라? 아까 그림 때문에 그러지, 너?”
내가 지금 기분이 안 좋아진 건 맞는데, ‘갑자기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가 되었다. 오빠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아진 건데 기분이 안 좋아서 오빠 말에 토를 다는 거라고 하다니.
“오빠… 미안… 내가 또 왜 그랬지? 미안해. 미안해, 오빠.”
한참을 미안하다고 말하고 나니 오빠는 자기나 되니까 사과를 받아주는 거라며 엄청난 생색을 냈다.
나는 맥주 세 캔을 다 마시고 과자 세 봉지를 다 먹어버렸다. 다음 날, 회사에 당일 연차를 내고 하루 종일 잠만 잤다. 하루 종일 잠을 잔 후, 오빠에게 전화하던 시간이 됐을 때 전화하지 않았다. 전화기 전원도 꺼 놓았다. 전원을 꺼 놓기 전에 영화 ‘불한당’을 예매했는데, 한 장만 했다.
누드 크로키. by 옥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