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은 연애> 열일곱 번째 이야기
점심으로 ‘베트남 쌀국수’를 먹었다. 나는 꼬막 비빔밥이 먹고 싶었지만 나에게 선택권은 없다. 이 회사의 ‘여왕벌’ 인 제일 나이 많은 언니가 오늘 점심엔 ‘쌀국수’가 먹고 싶다고 했고 그럼 그 밑, 나를 포함한 ‘벌떼들’은 ‘쌀국수’를 먹어야 한다. 그리고 ‘쌀국수’ 먹는 내내 ‘여왕벌’의 남편 자랑질을 들어야 한다.
어젠 ‘여왕벌’ 신랑이 다가오는 여름휴가 때 베트남으로 놀러 가자고 했다는데… 신기하게도 이 자랑질엔 과거형이 없다. 항상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기약하는 일만 있을 뿐이었다. 멀게는 몇 달 후, 가깝게는 오늘 밤. ‘여왕벌’은 오늘 저녁엔 신랑과 영화를 보고 외식을 할 거라고 했다. 다른 ‘벌떼들’이 쏘서윗 하다며 부러워했다. 이래 놓고 내일 ‘여왕벌’이 지난밤 집에서 해 먹은 ‘동태탕’이 맛있었다며 네들도 해 먹으라고 하면 그냥 ‘동태’ 이야기만 할 것이다. 영화와 외식 이야기를 물어볼 사람은 ‘벌떼들’ 중엔 없다.
“어디 가? 또 거기 가?”
“아, 네.”
‘쌀국수’를 꾸역꾸역 먹고 남는 시간 커피를 마시기 위해 ‘벌떼들’ 무리에서 잠시 떨어지겠다고 했다. 다른 이들은 산책을 가거나, 아님 회사 휴게실에서 남은 수다를 마저 떨거나 낮잠을 자면서 시간을 보낸다. 나만 거기라 불리는 이 카페로 도망간다.
“거기 사장님 이상해서 가지 말라니까.”
‘여왕벌’이 3일에 한 번 꼴로 매일 이 카페로 가는 나에게 태클을 건다. 첨엔 갈 때마다 걸던 태클을 3일에 한 번으로 줄였으니 많이 나아진 거다.
태클을 건 이유는…
“안됩니다. 오신 손님 수대로 주문해주셔야 합니다.”
라는 사장님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내가 이 카페를 발견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벌떼들’에게 어색한 핑계를 둘러대며 식사 후에 혼자 커피를 마시러 가겠다고 하니 ‘여왕벌’이 다른 벌들을 우르르 몰고 따라왔다. 얼마나 좋은데 가는지 구경해야 겠다고. 그들은 이런 식으로 커피를 사 마시면 한 달에 얼마를 낭비하게 되는지 열심히 계산하며 나를 쫓아왔다. 그리고 카페 안으로 들어설 즈음, ‘여왕벌’ 최측근 중 한 명이 나때문에 가는 것이니 나더러 마실 거를 쏘라며 큰 소리로 외쳤다. ‘여왕벌’은 매우 타당하다며 허락했고, 내 생각을 물어보는 ‘벌’은 없었다.
나는 딱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라는 얼굴로 내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며 ‘벌떼들’의 주문을 기다렸다. ‘여왕벌과 벌떼들’은 메뉴판을 열심히 보며 음료를 고르는 대신 ‘라떼는 어디 가면 맛있다’, ‘아니다. 옆 동네, 거기 가야 더 맛있다’ 혹은 ‘우리 동네 어디 카페는 ‘수제 과일청’을 쓰는데 거기가 맛있다’ 등등… ‘벌떼들’은 ‘여왕벌’에게 서로 더 좋은 카페를 알고 있다며 어필하기에 바빴다.
“벽에 뭐 이렇게 걸어 놓은 게 많아? 뭐, 되게 여기도 유명한 가봐?”
‘여왕벌’이 입을 뗐다. ‘벌떼들’이 ‘여왕벌’ 말 한마디에 일제히 벽에 걸린 종이들을 한 번 보고 사장님을 쳐다봤다. 사장님은 짧고 무겁게 ‘바리스타 자격증’이 라고 대답했다. 질문에 비해 돌아오는 대답이 건조하자 ‘여왕벌과 벌떼들’은 갑자기 음료를 골랐다. 뭔가 텐션이 떨어진 그들은 나를 위하는 척 5명이서 비싼(?) 걸로 3잔을 주문했고 사장님은 거절했다.
“아잉, 왜? 방금 밥 먹고 와서 배불러서 그런 건데… 호호홍. 좀 해주지? 호호홍.”
웬 일로 ‘여왕벌’이 아양을 떨었다. 자기가 돈 쓸 것도 아니면서.
“안됩니다.”
사장님은 단칼에 거절했고 카페에 온 손님 머릿수대로 주문해 달라고 한 번 더 강조했다. ‘벌떼들’은 흥분해서 윙윙거리기 시작했고 그대로 날아 올라 나가버렸다. 나도 나오라고 부르는데 마침 내 카드를 들고 있던 사장님이 내 아메리카노 한 잔을 결제해버렸다. 사장님 땡큐!
“어?! 안녕하세요.”
오늘도 평상시처럼 혼자 빠져나와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는데 하나가 들어왔다. 하나는 지난달에 새로 입사한 친구인데, 그냥 친구가 아니고 나보다 10살 어린 친구다. ‘여왕벌’은 나보다 10살이 많고 나머지 ‘벌떼들’은 나와 ‘여왕벌’ 사이에 있다. 나는 ‘벌떼들’ 사이에선 막내고 하나의 무리에 가면 꼰대가 된다.
“어, 뭐 마시려구?”
“애들이 아이스크림 사 먹는 다길래 저는 ‘아바라’ 먹으려구요.”
“아… 그러고 보니까…”
‘아인슈페너’가 생각났다.
“사장님, 여긴 ‘아인슈페너’ 없어요? 요새 딴 데는 많이 팔던데?”
이전에는 주로 비엔나커피라고 불린 ‘아인슈페너’는 ‘아메리카노’ 위에 하얀 휘핑크림을 듬뿍 얹은 커피로, '말 한 마리가 끄는 마차'라는 뜻의 독일어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이런 건 잘 모르겠고 SNS ‘카페 감성샷’에 자주 보이는 커피 메뉴란 것만 잘 안다. 남의 SNS에서 보고 맛있어 보인다고 생각했었다.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아이스 바닐라라테’ 나왔습니다.”
주문한 음료를 건넨 사장님의 미간이 진지해져 있었다.
“그것보단… ‘에스프레소 콘 파냐’를 드셔 보세요. ‘아인슈페너’는 저는 그닥…”
“’에스프레소 콘 파냐’는 뭔데요?”
“’에스프레소’에 휘핑크림을 올리는 건데, 그게 ‘에스프레소’의 쓴맛을 잘 잡아줘서 맛이 훨씬 조화롭죠. 아마 입맛에 훨씬 맞으실 거예요. 주로 ‘에스프레소’ 입문자에게 많이 권하기도 합니다.”
“아…”
메뉴판을 쭉 훑어봤다. ‘에스프레소’라는 단어는 보이지 않았다.
“내일 해 드릴게요.”
“정말요? 우와, 고맙습니다.”
세상에 나를 위해 메뉴에도 없는 음료를 특별히 제조해준다니.
“언니, 저 먼저 갈게요.”
“응, 잘 가.”
그는 약속을 지켰다. ‘에스프레소 콘 파냐’는 먹을 만했다. 사장님은 원하면 위에 올린 휘핑크림과 에스프레소를 섞어 마셔도 되지만 개인적으론 섞지 말고 단맛, 쓴맛 따로따로 느껴보는 걸 권장한다고 했다.
“어, 언니? 그게 뭐예요?”
오늘도 ‘에스프레소 콘 파냐’를 받아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하나가 들어왔다.
“웬일? 엄청 귀여워. 언니, 이거 사진 찍어도 돼요?”
“그럼, 그럼.”
짙은 초록색 에스프레소 잔 위로 올라온 새하얀 휘핑크림은 꽤 근사한 감성샷을 만들어냈다.
“우와, 이거 너무 예쁘다.”
“너도 마셔 봐. 맛있어.”
“아우, 아니요. 저는 오늘은 ‘얼죽아’에요. 술이 좀 덜 깨서…”
어제 하나 무리들끼리 술을 한잔 한 것 같았다. 점심 먹는 내내 ‘여왕벌과 벌떼들’이 젊은 애들끼리만 술 마신다고 윙윙거렸었다. 정말 시끄러웠다.
“사장님은 술 좀 하세요?”
나는 하나가 주문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위해 잔에 얼음을 담는 사장님한테 주량을 물어봤다.
“아, 그냥 남들 마시는 정도로만… 사실 술 잘 못해요. 하, 하.”
“에이! 거짓말!”
진짜 거짓말이었다. 내가 주로 앉아 있는 자리는 카페 구석, 사각지대다. 며칠 전 카페로 사장님의 친구가 놀러 왔었는데 홀에 손님이 나뿐이었다. 그 날, 사장님은 내가 잘 안 보여서 그랬는지 지난밤 지인들과 마신 소주 네 병에 대해 친구와 매우 편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네 병중 세 병은 사장님이 다 마셨다며 엄청 으시댔고 친구는 짜식 아직 안 죽었다며 감탄해 댔다. 나는 일단 모르는 척 입을 다물어 사장님의 거짓말을 지켜주었다. 카페 밖, ‘여왕벌과 벌떼들’이 사장님과 웃고 떠드는 나와 하나를 흘낏흘낏 보며 지나가는 게 보였다.
점심시간에 혼자 카페에 앉아서 하는 일은 별 거 없다. 웹툰을 보거나 연예뉴스나 최신 뉴스를 보는, 핸드폰 뒤적거리는 일이 다다. 의외로 집에서 하기 어려운 일이다. 회사에서 퇴근을 하면 집으로 다시 육아 출근을 한다. 항상 아이가 잠든 후에 영화도 보고 책도 보려는 계획을 세우지만 대부분 실패 한다. 아이와 엇비슷하게 잠들거나 아이보다 먼저 잠드는 일이 부지기수다. 그러니 이 혼자만의 시간이 꽤 소중했다.
“저기… 그런데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나이를 물어봐도 될까요?”
어느 날, 사장님이 주문한 ‘에스프레소 콘 파냐’를 기다리던 나에게 나이를 물어봤고 그 날은 자연스레 구석 자리에서 카운터 앞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 왜요?”
“아니, 그게… 얼굴로만 보면 저보다 아랜 거 같은데… 그런데 또 대화하시는 걸 언뜻 들어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혹시라도 나중에 실수할까 봐…”
“에이 그게 뭐예요. 그러는 사장님은 몇 살인데요?”
나는 사장님 나이를 물어보며 괜히 얼굴이 빨개졌다.
“네? 정말? 그럼 사장님이 저보다 어린데.”
사장님은 나보다 7살이 어렸다. 맙소사! 최소 내 또래이거나 오빠인줄 알았는데.
“아니, 말도 안 돼! 저보다 누나시라구요?”
“네! 내가 많이 누나예요.”
가까스로 닳아 오른 얼굴을 진정시킬 때, ‘핸드폰’ 벨이 울렸다. 화면을 보니 ‘아이 아빠’였다. 바로 부재중으로 돌렸다.
“요새는 스팸이 너무 자주 와요.”
‘아이 아빠’는 밖에 나가면 전화를 잘 안 하는 인간이다. 퇴근 후 전화 건 이유를 물어봤더니 잘못 누른 거라고 했다. 그럼 그렇지. 이 후로 나는 구석자리에서 카운터 앞자리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사장님은 ‘디저트 맛집’에 대해 꽤 많이 알고 있었다. 디저트 메뉴라곤 코스트코에서 사 오는 듯한 과자만 보이길래 내 SNS에 먹어보려고 킵 해놓은 마카롱이나 다쿠아즈, 까눌레를 보여줬더니 사장님은 기다렸다는 듯 ‘디저트 맛집’에 대해 줄줄이 읊었다. 내가 킵 해놓은 곳과 꽤 많이 겹쳐 있었다.
이 후로 월요일에는 주말에 다녀왔다며 마카롱이나 작은 파운드케이크를 하나씩 몰래 주기 시작했다. ‘서비스 디저트’ 임에도 불구하고 제법 근사한 접시에 플레이팅 해서 주었고 가끔 들르던 하나는 이걸 보고 예쁘다며 내 ‘에스프레소 콘 파냐’와 함께 사진을 찍어갔다. 선반에는 ‘에스프레소’ 잔의 개수가 더 늘어 있었는데, 여전히 에스프레소 관련 메뉴가 메뉴판에 적혀 있진 않았다.
“도넛 좋아하세요?”
“도넛? 노티드?”
“역시, 아시는구나, 하하.”
어느 날, 사장님이 노티드 도넛을 박스 째 꺼내 보였다. 하얀 우유크림도넛부터 앙버터도넛까지 종류별로 들어 있었다. SNS에서 남이 올려놓은 인증샷으로만 보던 걸 실물로 영접한 것은 처음이었다. 도넛이 여러 개라 혼자 있었으면 부담스러웠을 텐데 마침 하나가 카페에 들어왔다.
“우와! 대박!”
하나도 노티드 도넛을 보고 눈이 커졌다.
“언니, 저 하나만 먹어봐도 돼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헤헤.”
“아니, 사장님이 언니 먹으라고 준 건데… 너무 맛있겠당.”
얼핏 사장님을 봤더니 사장님은 커피를 내리느라 뒤돌아 서 있었다. 나는 하나에게 한 개 먹으라고 했고 하나는 우유크림도넛 한 개를 조심스레 들었다. 곧 주문한 ‘아메리카노’가 나오자 하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나갔다. 카페에는 사장님과 단 둘이 남게 되었다.
사실, 요 며칠 전부터 조금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애 있는 유부녀라는 걸 눈치로 알고 있었을 텐데도 친절이 점점 과해져 갔다. 나는 사장님이 주는 디저트를 맛있게 먹기 위해 점심에 먹는 밥을 조금씩 남겨야 했고 이걸 두고 ‘여왕벌과 벌떼들’은 애엄마가 웬 다이어트를 하냐며 면전에 대고 수군댔다.
“여긴 일산까지 가야 먹을 수 있네요.”
사장님이 까눌레를 파는 디저트 카페를 보여주었다.
“그렇네. 너무 멀다. 주말에 큰 맘먹고 가야겠는데…”
행여나 사장님이 주말에 같이 가자고 할까 봐 나는 약간의 긴장까지 하게 됐다. 마침 하나가 카페 앞을 지나가는 게 보였다.
“하나야, 이거 봐봐.”
어색한 분위기를 깨보고자 하나를 불렀는데 하필 하나 손에 다른 카페에서 산 ‘아모라’가 들려 있었다. 그대로 하나를 보내고 돌아와 회사가 너무 바쁘다며 투덜거려 일산의 디저트 카페 이야기를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사장님이 주는 관심에 거리를 둬야 하나 생각되면서도 한편으론 사장님이 섭섭해할까 걱정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장님이 카페를 그만둔다고 했다.
“아니, 왜요?”
“그게… 좀 크게 해 보려고, 여긴 원래 거쳐가는 곳이었거든요.”
사장님은 작은 카페가 아닌 커피 체인을 제대로 해보고 싶어 공부도 많이 해왔으며 이제 때가 된 것 같아 여기를 정리하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이 말을 들으니 그동안 서비스로 주었던 디저트들이 아마 공부 차원에서 사 왔던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마음의 짐이 덜어졌다.
“원두 걱정은 하지 마세요. 여기 새로 맡으실 분들이 원두는 안 바꿀 거라고 약속했거든요.”
“네… 그럼, 저 ‘에스프레소 콘 파냐’ 이제 못 먹는 거예요?”
“하하, 그건 아마 물어보셔야 할 것 같아요.”
원두를 걱정한 적은 없었다. 커피를 매일 마신다고 해서 커피 맛을 아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저기… 뭐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그냥 물어보면 될 것을 물어보면 되냐고 물어보는 것은 무엇일지… 덜컥 긴장됐다. 만약 내 연락처를 물어보는 거라면 그냥 쿨하게 알려주는 게 나으려나 고민됐고 카페에는 정적이 흘렀다.
“언니!”
하나가 들어왔다. 고맙게도 정적을 깨준 하나는 당이 떨어졌다며 ‘아바라’에 샷을 추가해 주문했다. 하나는 요즘 ‘여왕벌과 벌떼들’의 간섭에 시달리고 있었다. 지난번, 전체 회식 때 2차를 안 간다는 하나를 남자 직원들이 전부 붙잡은 일이 있었다. 나는 집에 일이 있어 1차만 끝내고 빠져나오며 이 광경을 보았는데 그 너머로 입을 삐죽이던 ‘벌떼들’이 그 날 이 후로 하나가 입고 오는 옷이며 바르고 오는 화장품에 대해 사사건건 참견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당이 떨어질 만도 하다.
“네? 뭐라구요?”
하나가 옆에서 어리둥절해했다.
“아니, 혹시 못 뵙게 되면 어떡하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자주 오시진 않으니까, 혹시 하… 나씨…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 해서요.”
하나의 ‘아바라샷추가’ 주문에 사장님은 계산 대신 하나의 연락처를 물어봤고 나는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했다.
“오늘도 안 오시는 줄 알고 여기 언니한테 물어보려고 했었는데... 그게 그러니까… 제가 평소부터 아니 전부터 느끼고 있었는데 제가 하나씨한테 관심이…”
“어머! 저 만나는 사람 있어요!”
“응? 너 사귀는 사람 있어?”
하나는 사장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대답했다. 나는 몹시 빨개진 얼굴로 놀랬다.
“그래서 연락처 알려드리기 좀 그래요. 죄송해요.”
하나는 얼굴빛 하나 안 변하고 별 일 아니라는 듯 예의 바르게 사장님을 거절했다. 나는 얼굴이 타는 것 같았다.
“언니, 괜찮아요? 열나요?”
“응? 뭐라구?”
얼굴이 빨개진 나는 하나가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동안 무슨 실수 한 건 없는지 생각하느라 바빴는데 마음만 바쁠 뿐 정작 머릿속은 멍했다. 확실한 건, 지금 사장님은 하나보다도 더 나한테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저기… 그런데 제 ‘아바라’는…?”
얼핏 보니 사장님 얼굴도 벌게져 있었다. 뭔가 쓸데없이 사장님과 동병상련의 느낌이 들었다. 사장님은 침을 흘리지도 않으면서 ‘스읍, 스읍’ 소리를 내며 손을 내밀었고 하나는 사장님께 카드를 내밀었다. 아직 빨개진 얼굴은 진정되진 않았지만 나는 하나를 말렸다.
“하나야, 잠깐만! 오늘은 내가 사줄게.”
“네? 언니가 왜요?”
“아니야, 내가 지금까지 너한테 산 적이 없었잖아. 오늘 내가 사줄게.”
나는 내 카드를 내밀었고 사장님은 말없이 하나한테 뻗었던 손을 나한테 뻗었다.
“그럼 오늘도 도장은 여기 언니 쿠폰에 찍어 드릴… 까요?”
“네! 오늘은 더 당연히 그렇게 해주셔야죠.”
사장님이 내 쿠폰에 도장을 찍어줬다. 하나는 음료를 사 마실 때마다 자주 오지 않는다며 쿠폰을 만들지 않았고 대신 내 쿠폰에 도장을 찍어주곤 했었다. 그러고 보니 음료를 구매할 때마다 사장님이 알아서 도장을 찍어줘서 신경을 안 쓰고 있었는데 쿠폰에는 내 이름과 핸드폰 번호가 적혀 있었다. 사장님은 이미 내 연락처를 알고 있었다. 오늘 하나에게 사 준 음료 도장까지 찍힌걸 보니 다음번 음료는 공짜다.
“사실, 저 사장님 예전부터 쫌 그랬어요.”
오늘은 하나를 따라 카페를 일찍 나왔다.
“그, 그래?”
“제 SNS에 댓글 남기고 그러더라구요. 가끔, DM도 보내고.”
“진짜? 진짜 그랬어? 저 사장님이?”
“네, 그랬다니까요.”
하나는 사장님이 카페로 사 오던 ‘서비스 디저트’가 자기가 SNS에 먹고 싶다고 올리던 디저트랑 너무 겹칠 때가 많아서 좀 무섭기까지 했다고 했다. 충분히… 무서울 만한 일이구나.
“그럼… 남자 친구는 진짜가 아니라…?”
“진짜 만나는 친구 있어요. SNS에 사진 다 있는데. 그런데도 저런다니까요. 오글거리는 태그를 안 달아서 그런가, 아님 진짜 눈치가 없는 건가…”
“아… 이런…”
눈치는 나도 없었다.
“언니, 저 남자 친구 이야기는 회사에는 저기… 비밀로 해주실 수 있으세요? 뭐 대단한 것도 아니지만.”
“아휴, 그럼 그럼. 말 안 해.”
대단한 일이 아닌 게 맞지만 ‘여왕벌과 벌떼들’은 이 대단하지 않은 일로 충분히 윙윙거릴게 분명했다. 참견하고도 넘쳐 결혼 계획에 자녀 계획까지 세울 사람들이다.
“아무튼 다행이다. 저 사장님 그만둬서.”
사장님이 운영하는 이 카페는 다음 주부터 다음 사장님을 위한 인테리어에 들어갔고 일주일 동안 문을 닫았다. 나는 이 일주일 동안 회사에서 좀 떨어진 스타벅스까지 갔다. 사람들이 많아 앉을자리도 마땅치 않았지만 그래도 거기까지 갔다. ‘벌떼들’은 스타벅스로 가는 나를 무슨 재벌 상속녀쯤 되는 사람으로 취급했다.
“앗! ‘아인슈페너’!!”
일주일 후, 하나 또래의 젊은 여자 사장님이 오픈 한 카페 메뉴에 ‘아인슈페너’가 보였다.
“아, 네, ‘아인슈페너’ 드릴까요?”
“하나야, 너는?”
“어, 저는 그냥 ‘아메리카노’ 요.”
“왜 내가 사 줄게. ‘아인슈페너’ 마시자.”
“아니에요. 오늘은 ‘아메리카노’ 요.”
드디어 SNS로만 보던 ‘아인슈페너’를 맛봤다. 잔뜩 기대하고 맛봤음에도 맛있어서 깜짝 놀랐다.
“어? 원두가 바뀌었네요? 옛날 맛이 아니야.”
‘아메리카노’를 맛 본 하나가 원두가 바뀌었다고 말했다.
“네… 이전 사장님이 쓰던 게 맛 대비 단가가 안 맞아서… 그렇게 됐어요. 맛이 어떻게, 괜찮으세요?”
나는 무조건 맛있다고 대답했고 하나는 조금 작은 소리로,
“훨씬 괜찮아요. 이전 거 너무 탄 맛만 나고 별로였어요.”
라고 대답했다.
아… 나는 정말 아는 게 없구나.
아는 게 없는 나는 새로 온 사장님에 대해 점심 먹는 내내 꼬치꼬치 캐묻는 '여왕벌과 벌떼들'에게 아무것도 모른다고 대답해 줬다. 몰라도 모르고 알아도 모른다.
에스프레소 콘 파냐. by 옥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