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은 연애> 열여섯 번째 이야기
추웠다. 그냥 춥기만 한 밤이 아니었다. 땅이 얼었다. 게다가, 이 빙판길은 오르막길이다.
"으아앜!"
내가 소리를 질렀다. 빙판길에 미끄러졌기 때문이다. 1차에서 이미 만취한 혜원이는 넘어진 나를 보고 눈물을 글썽였다.
"왜? 왜? 넘어지는 거야? 너, 넘어지면 아프잖아..."
나를 위해 눈물 흘릴 시간에 내 손이나 잡아주면 좋으련만, 혜원이는 취한 몸으로 아슬아슬 균형을 잡으며 손등으로 흐르는 눈물, 콧물을 지 얼굴에 바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저건 나도 가끔 하는 짓이다. 따뜻하고 촉촉하다.
"어! 보경 씨 괜찮아요?"
길 건너, <36.5℃>의 사장님이 나의 팔을 잡아주었다. 생긴 것처럼 힘이 없어서 일어나는데 크게 도움되진 않았다. 되려 일어나려는 나에게 말려 넘어질 뻔한 것을 내가 잡아주었다. 어쩜, 팔뚝도 이리 가는지... 순간 겨울 코트 소맷자락 안이 비었나 싶어 놀랄 뻔했다.
"이랏샤이 마세!"
내가 <36.5℃> 사장님과 엎치락 뒤치락하는 사이에, 취한 혜원이는 <천하>에 먼저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주문은 따로 할 필요가 없었다. <천하>는 <36.5℃> 길 건너 ‘홍대 삼거리 포차’ 뒤편 골목에 있는 일본식 꼬치구이 이자카야다. <36.5℃> 사장님이 소개해 준 곳으로 1차는 <36.5℃>에서 2차는 <천하>에서 마시는 게 언젠가부터 고정 루틴이 되어 있었다.
본인도 <36.5℃>라는 Pub을 하면서 우리에게 다른 술집을 소개해 준 이유를 나는 대충 알고 있었다. 이 남자, 나한테 관심이 있다. 저번 주엔 '아마추어 증폭기'라는 인디 밴드의 CD를 선물해 주었는데, 그 의도는 본인의 음악 취향이 상당히 남다르고 유니크하며 이것을 나에게 어필하여 결과적으로 매력남으로 보이고 싶어서임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나는 까르르 웃으며 이 CD를 받았다고 좋아했고 이후, 그의 바람대로 그의 음악 취향을 높이 칭송해주었다. 그는 그 날 이 후로, 종종 술값을 받지 받았다. 사실, 이 CD의 노래를 들어보지도 않았다.
"왜? 왜 내가 좋아하는 토마토베이컨말이는 없어? 왜?"
혜원이가 다시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토마토베이컨말이가 보이지 않았다 때문이다. <천하>에 오면 항상 <36.5℃> 사장님이 알아서 메뉴를 주문하는데, 방금 꼬치 5종+모츠나베 세트만 딱 시키면서, 꼬치 5종에 명란가슴살 하나, 닭염통 하나,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닭껍질 세 개로 주문한 것이다. 세 종류 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고 특히 닭껍질은… 환장한다.
"사장님 나빠요!"
서빙을 하고 돌아서던 <천하> 사장님이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형, 아니야. 형한테 그러는 거 아니고 나, 나한테. 우리 토마토삽겸이랑 시사모구이도 더 주라."
"돈코츠라멘에 차슈도 추가요… 파, 마늘도 많이요."
오늘, 너무 추워 그런지 허기가 심하게 져 라멘이 땡겼다. 혜원이는 토마토베이컨말이를 계속 찾았고, <36.5℃> 사장님이 왜 토마토베이컨말이를 시키지 않았는지 설명해야 했다.
"혜원 씨, 원래 여기 토마토베이컨말이 없어요. 어제도 이러더니..."
"몰라... <36.5℃> 사장님도 승현이 오빠랑 똑같애. 나를... 나를 몰라. 내 진심을!"
승현 오빠는 작년 말, 혜원에게 이별을 고한, 그녀의 전남친이다. 그 날부터 우리는 술이었다. 초반엔 이 집, 저 집 술집을 전전했는데 작년 크리스마스를 계기로 우리는 <36.5℃>에 정착했다. <밤과 음악 사이>에서 맥주와 찌개를 번갈아 마시고 나왔던 우리는, 사이좋게 화장실이 급했고, 급하게 찾아 들어간 곳이 <36.5℃>였다. <36.5℃>는 <밤·사> 옆 건물, 2층에 있었다. 크리스마스라 1층에 있는 모든 술집과 카페는 사람들로 바글바글 했고 화장실에 ‘화’ 자도 못 꺼내 보고 혜원이랑 서로의 손에 손톱자국이 날만큼 꾸욱 쥐었던 순간, <36.5℃>가 눈에 띄었다. 36.5℃라는 선명한 글씨 밑에 아마도 Pub이라고 쓰였을 필기체 간판을 보아하니 손님이 얼마 없을 술집 같았다. 게다가 간판이 A4용지 만했다. 예상은 적중했고 화장실은 깨끗했다. 그곳은 손님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크리스마스 캐럴도 나오지 않았다.
그 날의 사장님은 검정 스웨터에 검정 비니를 쓰고 스키니 진을 입고 있었다. 세상에, 허벅지가 내 종아리보다도 가늘었다. 결정적으로 분홍색 컨버스를 신고 있었는데 시접선만큼 한단 접은 스키니진 아래로 맨 살 발목이 보였다. 한 겨울에 덧신을 신은 건지 진짜 맨발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그 발목이 참 하얗고, 뒤꿈치에서 올라온 아킬레스건이 누가 엄지와 검지로 꾹 눌러놓은 듯 날카롭게 날이 서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 스타일 발목이다.
그 이후로 나와 혜원이는 매일 밤, <36.5℃>로 퇴근했다. 물론, 크리스마스 때처럼 손님도 거의 우리뿐이었다. 새해를 맞이하던 밤에는 꽤 다수의 일행이 오긴 왔지만 생맥 500 한 잔 씩만 마시고는 금방 나가버렸다. 자기들끼리 새해 카운트다운을 외치는데 술에 취한 내가 시끄럽다고, 조용히 해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36.5℃> 사장님도 나를 거들었다.
“왜 술집 이름을 삼십육쩜오도씨라고 한 거예요?”
“음… 그게 사람 체온이잖아? 정상 체온. 너무 차갑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딱 사람 체온. 그런 따뜻한 펍을 하고 싶어서… 그런 의미야.”
말하는 걸 듣고 바로 알았다. 아, 이 남자 허세가 좀 있구나.
그래도 “우와, 우리 사장님 멋있구나~”
가게 이름에 대해 물어봤던 날엔 ‘LA나쵸’라는 술안주를 서비스로 먹었다. 메뉴판에서 꽤 고가에 속하는 안주로… 맛은 없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2차로 가는 <천하>에 맛있는 게 다 있으니까.
“나… 승현이 오빠한테 전화 좀 하고 올게.”
혜원이가 벌떡 일어났다. 내가 먹으려고 시킨 라면을 혼자 거의 다 먹고 눈물이 진정된 혜원이는 목소리가 깔렸다. 이제 승현 오빠한테 전화해서 매달릴 차례다. 저 전화를 매일 밤, 받아주는 승현 오빠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혜원이랑 만날 때는 한 번도 대단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한 20분 정도 기다려 보고 혜원이 안 들어오면 우리도 그만 가요.”
나는 모츠나베를 바닥까지 박박 긁어먹으며 말했다. 역시, 미소 된장엔 대창이다. 이 맛있는 기름 맛을 <36.5℃> 사장님은 모른다. 그러니 그런 극세사 발목을 유지하겠지만…
20분만 기다려 보려던 계획은 닭껍질꼬치를 추가로 주문하고 소등심꼬치까지 주문하면서 어그러졌고 나와 <36.5℃> 사장님은 혜원이 없어 도쿠리 한 병을 더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은 언제나 그렇듯 내 몫이다. 1차를 많이 얻어먹었으니 2차는 내가 사는 게 옳다. 먹은 걸로 치자면 1차는 나와 혜원이가 거의 먹었고 2차도 나와 혜원이가 거의 먹었으므로 역시, 내가 사는 게 옳다. 그러데 세 번째! 택시비를 <36.5℃> 사장님이 계산하는 게… 이건 좀 아리까리하다.
혜원이는 언젠가부터 승현 오빠에게 전화를 하다 그대로 승현 오빠에게 가버리는 날이 많아졌다. 거기서 더 울고불고 매달렸다가 매번 차여서 오는 것이다. 처음엔 걱정도 되고 무엇보다 이걸 다 받아주는 승현 오빠가 괘씸해서 며칠 전, 혜원이를 붙잡았다. 그리고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아… 나는 덩치만 컸지. 속 빈 강정이구나!’
혜원이는 나보다 키도 작고 훨씬 말랐는데 힘으로 나를 이겼다. 그래서 나는 멀어지는 혜원이 뒷모습을 보며 크게 불안하지 않았다. 다행히 승현 오빠 집은 여기서 걸어 10분 거리다.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36.5℃> 사장님이 나를 위한 택시를 잡고 있다. 오늘은 회색 모직코트에 노란 비니를 쓰고 있다. 예쁜 레몬색이라 뒤에서 보면 멜론만 한 큼지막한 레몬을 보는 것 같았다. 빳빳한 인디고진은 일부러 한 뼘을 접어 올리고 카멜색 모카신을 신고 있었는데 오늘도 날렵한 발목을 뽐내고 있다. 하얗고 날카로운 발목이다. 삼거리 포차 앞에서 레몬 머리는 열심히 택시를 찾았고 얼마 안 가 나는 레몬 머리와 택시에 나란히 앉게 되었다.
“어제는 아보카도 색이었는데, 오빠는 비니가 몇 개에요?”
“나? 안 세어봐서 모르지. 세 볼까? 궁금해?”
“아니, 내가 볼 때마다 세줄게요. 오빠 비니 다 볼 때까진 같이 놉시다.”
<36.5℃> 사장님은 흔쾌히 승낙하며 나를 따라 내렸다. 사장님 집은 망원동인데...
내가 사는 곳은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뒤편, 오피스텔 건물이다. 홍대에서 고가를 타고 금호터널을 통해 오면 정확하게 건물 앞에 내릴 수 있었다. 택시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길엔 환한 건물 1층과 환한 엘리베이터만이 있을 뿐이었다. 걸어 들어가야 할 낭만적이고 미로 같은, 어둑어둑한 골목은 없었다. <36.5℃> 사장님은 매 번 나를 따라 택시를 타고 내렸다. 계산을 하고 나면 우리가 타고 온 택시는 쿨하게 돌려보낸다. 어차피 자기가 계산할 거면 나만 내려주고 다시 타고 가는 게 효율적일 텐데, 뭐 하는 짓인지 대충 알고는 있지만 호응해주긴 싫었다.
“아, 이상하다. 왜 배가 고프지? 혹시… 집에 라면 있니?”
“라면? 없는데요. 집에서 설거지거리 만드는 거 싫어해요.”
“어! 나 설거지 잘하는데.”
“아… 싱크대가 젖는 게 싫어요. 저는 건식 싱크대를 지향합니다.”
“…”
“저기 택시 온다. 내일 봐요!!”
나는 매일 아침, 9시까지 양재동으로 출근을 한다. 간혹 예쁜 발목이 탐날 때도 있었지만, 허세는 있고 눈치가 없는 예쁜 발목은 겨우내 좀 더 이른 시간에 광화문에 도착하는 수를 낼 줄은 몰랐다.
예쁜 발목, <36.5℃> 사장님은 밝은 베이지색 맥코트에 세인트제임스 메르디앙 네이비/에크루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밝은 오렌지색 비니에 아메티지 스타일의 통 큰 카키색 배기바지를 입었는데 발목을 보여주진 않았다. 왜인지 추운 겨울엔 그렇게 발목을 노출시켰으면서 따뜻한 봄이 스멀스멀 오기 시작하자 닥터마틴 워커를 신기 시작했다. 컨버스도 하이탑으로 신었다.
“어?! 벚꽃이 피려나 보다.”
나나 혜원이나 겨우내 벚꽃인 줄도 몰랐던 가로수에 끄트머리가 하얗게 비집어진 꽃봉오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해마다 이 나무가 벚꽃나무라는 걸 깨닫는다. 매년 새롭다.
“어머, 이게 벚꽃나무였어요?”
작년처럼 이게 벚꽃나무였냐며 모르는 척하는 것도 새롭다. 봄이 오고 있다.
“나 이제 승현이 오빠 안 만나, 끝났어.”
“응, 안 믿어.”
“흥, 믿지 말아라.”
“응!”
<36.5℃> 사장님은 가게를 정리하고 곧 쫓아온다며 먼저 가 있으라고 했다. 사장님을 기다리며 간단하게 ‘초고등어회’에 도쿠리 한 병을 주거니 받거니 마시고 있었다.
“나 이거 너무 맛있어! 어떻게 비린 듯 맛있지?”
“승현이 오빠 빚이 있었다.”
“뭐?”
“빚이… 있었다고, 꽤 많이.”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 그 오빠의 그렌져가 보이지 않았었다.
“나, 그 빚을 함께 갚아나가고 싶었는데…”
“미쳤냐? 뭘 같이 갚아나가? 왜? 너 왜 그래?”
“뭘? 내 맘이지! 암튼, 나는 그러고 싶었는데… 그 오빠, 이미 다른 여자랑 갚아 나가고 있더라고.”
“뭐?”
“작년 초부터…”
”뭐?”
“내가 참 눈치도 없이…”
내가 아는 정승현 오빠는… 적당히 운동 안 한 쳐진 몸매에, 적당히 로션 안 바른 튼 피부에, 적당히 같은 옷만 돌려 입는 남자였다. 그나마 그렌져 차부심만 강했다. 그냥 이래저래 내 눈엔 정말 갑갑한 사람이었다. 혜원이가 왜 그렇게 허우적거리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는데, 더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참, 나. 다른 여자라니… 확 그냥!”
“… 너는? 너는 어제 어땠어?”
“어제 뭐?”
“죽을래?”
어제, <36.5℃> 사장님은 하얀 면 티 위로 라이더 재킷을 입었다. 빛바랜 밝은 청바지에 쨍한 파란색 비니를 쓴 사장님은 간만에 흰색컨버스를 신고 있었다. 로우탑이었다. 반가운 예쁜 발목!
“너… 변태야.”
“아, 그냥 좀 들어 봐.”
봄이지만 밤엔 아직 쌀쌀했다. 손이 시렸던 나는 찬 내 손을 사장님 겨드랑이 사이에 비집어 넣었다. 내 손을 녹여보겠다며 팔뚝에 힘을 주는데 느껴지는 근육은 별로 없었다.
“오빠!”
“응?”
“우리 집에 라면 없는데.”
“아… 응?”
“라면 안 먹고 싶어요? 오늘은?”
바로 옆 건물에 GS25 편의점이 있었다.
“거기 가서 라면을 사가 주고 올라오라고 시켰지. 나는 먼저 올라가서 집 좀 치울라고.”
“오… 겨우 내내 그렇게 간만 보더니 이제 좀 진전이 있었구만.”
“흠…”
<36.5℃> 사장님은 그 와중에 5개짜리 한 묶음 1+1을 사 들고 올라왔다. 급하게 왔는지 콧 등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그래서 몇 개나 끓여 먹었나?”
“… 한 개도… 한 개도 안 끓여 먹었어. 어제 사 온 거, 지금 집에 그대로 있어.”
혜원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콧구멍도 같이 커졌다.
지난밤, 내 눈은 지금의 혜원이 눈 보다 더 커졌었다. 분위기는 좋았다. 예상한 대로 사장님은 매우 스키니 한 몸매의 소유자였다. 괜찮았다. 내가 포동포동하니까. 벗어놓은 옷들도 산발적으로 집어던지지 않고 한 곳에 얌전하게 놓는 것도 좋았다. 속옷 빨래도 나보다 잘하는 것 같았다. 문제는… 마지막으로 벗은 비니였다. 팬티와 달리 비니는 사장님이 직접 벗었는데…
“너! <장미의 이름으로> 영화 기억 나? 우리 학교 다닐 때 봤던 거? 수도승 나오는?”
“뭐? 혓바닥 시커메지는 거? 옛날 영화?”
“응. 그거.”
비니 안에 M자형 이마가 숨어 있었다. 거기에 1+1으로 정수리까지 비어 있었다. <장미의 이름으로>에 나오는 크리스천 베일 수도승처럼… 왜 팬티보다 비니를… 왜 비니를 제일 나중에 벗겼을까… 잠깐 동안, 비니는 놔둘걸 생각도 했지만 다 벗고 비니만 놔두는 것도 이상했다.
“뭐야!! 진짜야? 그래서 어머!! 그런 거였어?”
<36.5℃> 사장님은 오늘따라 정리하는 게 오래 걸린다. 도쿠리 한 병을 더 주문했다.
“그래도… 쩜오도 오빠는 그 어떤, 기승전결은 있었을 거 아니야?”
“흠… 뭐… 그렇지.”
“그럼 됐지 머… 크크크크 크 아 웃겨! 크크크”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사람이 지나치게 초지일관 해. 지나치게!”
“왜?”
“나 키 좀 자란 거 같지 않아?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정수리만 콩콩콩. 기승전결이 초지일관이야.”
“쩜오도 오빠가 좀 고지식한 면이 있지. 안 그런 척하면서.”
“나… 오늘 아침에 출근하는데 하나도 안 피곤했어. 전날 밤에 아무것도 안 하고 숙면 한 줄. 배도 안 고프더라.”
도쿠리를 두 병째 비울 때 즈음, <36.5℃> 사장님이 왔다. 짙은 네이비색 비니를 쓰고 있었는데 콧등뿐만 아니라 이마에도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확실히 날이 풀리긴 풀렸나 보다. 더워 보였다. 그래도 그의 비니를 지켜주고 싶었다.
“오빠! 오늘은 드디어 혜원이가 진상짓을 그만두겠데요!”
“어? 어. 진짜? 그래. 잘 생각했어요.”
그래서 사장님은 망원동 집으로 바로 보내고 오늘은 혜원이와 택시를 타고 우리 집으로 갔다. 집에서 혜원이가 끓여 준 라면에 딱 소주 반 컵씩만 마시고 자기로 했다.
“그래도 쩜오도 오빠는 기승전결은 있었다고 했잖아.”
“그치, 초지일관기승전결. 왜?”
“승현이 오빠는… 그냥 기결이었어. 기결. 기결. 기결.”
라면을 한 젓가락 입에 넣으려는 순간이었는데 ‘기결’이라는 단어에 놀라 타이밍을 놓쳤다. 라면이 젓가락 사이로 후두둑 떨어졌다.
“너… 그러니까 도대체, 어떻게, 왜 만난 거야? 그 인간!”
“뭘, 어떻게 만나… 좋아서 만났지… 네가 못 느끼는 그 오빠의 킬포가 있어…”
나는 사실 그 인간의 킬포가 기승전결 안에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니! 점점 알아갈수록 미궁 속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대신 확실 한 건!
“야! 윤혜원! 그래도 내가 너 찐 사랑이었다는 건, 이제 인정해 줄게.”
“네가 뭔데 인정해?”
“아무튼! 나는 네 사랑이 그냥 그런 진상짓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기결을 보듬으려 했다니, 찐이었어! 아름답다!”
“놀리지 마… 나 또 눈물 나려고 그래…”
그날 밤, 가까스로 화제를 전환해서 혜원이의 눈물 없이 잠이 들었다. 비니의 수는 셀 만큼 셌다. 당분간 회사에 회식이 많아질 것 같아 <36.5>에 술마시러 가긴 어려울 것 같다. 회사 생활 열심히 해야지.
꽃 피는 봄이 와도. by 옥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