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은 연애> 서른두 번째 이야기
현승은 진지했다. 비록 눈은 풀렸지만.
“현동아, 너 어디 현 씨야?”
“네? 저 해주오 씬데요.”
“아니, 그거 말고, 너 현, 현이 어디 현 씨냐고?”
“현이 아니라 온데요. 저 해주오 씨라고요.”
“아니 현! 현! 어디 현 씨냐고?” 현승의 목소리가 커지다 못해 뒤집어졌다.
“그러니까 그게 해주 오 씨라고요.” 답답한 건 현동도 마찬가지다.
“아휴, 현동아 그만해. 일일이 대답 안 해줘도 돼. 저 언니 지금 취했잖아. 상대를 해주지 마.”
도연이 취할 데로 취한 현승을 현동으로부터 떼어냈다. 덕분에 뒤로 벌러덩 젖혀 앉은 현승은 벌게진 얼굴로 연신 콧방귀를 뿜더니 시원한 바람을 쐬겠다며 벽을 붙잡고 기는 듯 포차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모, 한 병 더 가져가요.” 도연이 이때다 싶어 잽싸게 새 소주병을 꺼내려는데 눈앞에 못 볼 꼴의 풍경이 펼쳐졌다.
“어?! 언니!! 현동아 현승 언니 잡아! 가서 빨리 잡으라고! 빨리!”
“왜요? 현승 누나 또 토해요?”
도연의 외침에 현동이 벌떡 일어섰다. 자정을 넘긴 시간. 망원 포차 밖 건너편, 영업이 끝난 동네 반찬 가게 앞 배수구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현승 보인다. 현승은 “우이쒸, 우이쒸.” 구시렁거리며 바지의 지퍼 고리를 잡았다 놓쳤다를 반복하다 마침내 지퍼 고리를 제대로 부여잡는 데 성공한다.
“아니! 야, 저 언니 바지 내린다. 현동아 잡아! 잡아야 돼! 저러다 진짜 싼다!”
현동이 다급하게 뛰어나간 도연의 뒤를 쫓았다. 현승 누나의 키는 170cm 남짓, 현동의 키와 비슷하다. 체중도 엇비슷한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런데 왜 힘은 더 센 거 같지? 두 명이 달라붙어도 고주망태 현승은 버겁다. 현동은 폭주하는 현승을 제압해 결국 화장실로 들여보낸 도연 누나가 새삼 대단해 보였다. 역시 도연 누나.
“현동아, 차 좀 가지고 와라. 집 앞에 있지? 저 언니 집에 보내야지 안 그러면 길바닥에서 뻗고 자겠다.”
“네? 그럼 누나는요?”
“나? 나는 알아서 잘 가지. 아, 맞다.” 갑자기 도연의 얼굴이 미안한 듯 난처해진다. “미안, 너 오늘 집에 간다고 했지?”
현승을 데려다 주라는 말에 동그래진 현동의 눈을 보고 나서야 도연은 아차 싶었다. 현동이 녀석 며칠 전부터 오늘 집에 갈 거라고 콧노래를 불렀었는데, 방금 전에도 녀석은 늦어도 어떻게든 출발할 거라며 현승 언니가 멱살을 붙잡고 술을 들이부으려 해도 단 한 방울 입술에 튀기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니 여태껏 붙잡은 것도 충분히 미안한데 망원동에서 현승 언니의 무악동까지 가자고 하는 것은 너무 염치없는 부탁이다.
“현동아, 내가 진짜 미안하다. 괜히 오늘 갈 애를 불러다가 이 꼴 저 꼴 고생까지 시키고, 여긴 내가 정리할 테니까 너는 어서 가 봐. 지금부터 가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겠다. 아니다. 지금이라도 들어가서 눈 좀 붙이고 아침에 일찍 가던지 너 편할 대로 해.” 도연은 아무 걱정 말라며 어딘가 섭섭해하는 현동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해요? 누나가 부르는데 당연히 나와야죠.”
서울의 H대 건축학과에 입학한 현동은 중학생 때부터 지낸 경주를 떠나 망원역 근처에 방을 얻어 자취를 시작했다. 떠나 올 때는 적어도 한 달에 두 번은 경주에 방문할 거라 약속했는데 완전한 착각이었다. 학교생활과 공부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사이사이 비는 시간에는 예상밖의 구멍이 숭숭 생기는 생활비를 위한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다. 그러다 최근 밤샘으로 점철된 기말 과제를 마무리하고 나서야 겨우 짬이 났다. 아니 짬을 낸 것이 다. 거의 석 달만이다. 현동은 오랜만에 먹을 집밥 생각에 내심 신이 났다.
망원동에서 시작된 혼자 사는 생활은 입시에 절어 있던 고등학교 때의 막연한 상상과 많이 달랐다. 스스로 끼니를 챙기는 일은 어릴 때부터 종종 하던 일이니 쉬울 줄 알았고 설거지도 자주 해왔던 일이니 쉽게 해낼 줄 알았다. 청소나 분리수거도 중학생 때부터 나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잔소리를 할 만큼 주도적으로 했으니 가뿐히 해낼 줄 알았다. 그러나 지켜보는 이 없고 서로 챙겨주는 이 없는 혼자 사는 생활에선 아차 하는 순간 예상밖의 전개가 펼쳐졌다.
사소한 티끌 같은 살림살이는 ‘피곤하다', 혹은 '귀찮다’라는 이유로 한 두 번만 미뤄도 삽시간에 거대한 태산이 되었다. 잠깐이면 해 낼 수 있는 작은 일들이 그 잠깐을 놓치면 온 하루를 꼬박 투자해야 할 큰 일들이 된다. 그렇게 우왕좌왕하는 사이 문득문득 그 틈새로 어떤 온기가 그리웠다. 매끼 입맛에 딱 맞는 간보다 조금씩 어긋나 불평을 늘어놓게 만들었던 짠맛이 그리웠다. 식사를 마치고 나면 서로 정리하기를 미뤄 옥신각신 했던 소란스러움이 그리웠다. 여름, 더운 선풍기 바람에도 그리웠던 온기다.
그런 현동이 기말과제에 빼앗긴 밀린 잠을 낮잠으로 보충하고 이른 저녁 경주로 막 출발하려는 찰나였다.
[현동아 대창전골이 부른다. 보글보글. 보글보글.]
마찬가지로 기말 과제를 끝낸 현승 누나와 도연 누나가 술을 달린다며 톡을 보내왔다. 막 떠나려던 현동은 차의 시동을 끄고 도연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현동아, 어디야?” 도연 누나의 목소리 너머 술에 절은 현승 누나의 포효 소리가 들린다. 이런, 도연 누나만 남겨놓고 그냥 떠날 수 없다.
“현동아, 그냥 가라니까.”
현승을 제압해 겨우 화장실로 들여보낸 도연은 마른세수를 하며 숨을 돌렸다. 엉거주춤 서 있는 현동을 보니 더 미안해진다.
“괜찮아요. 집에는 내일 가도 돼요.”
“네가 그러니까 더 미안해지잖아. 괜찮으니까 빨리 가. 저 언니 저러는 거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너는 그냥 가, 얼른.”
“저 진짜 괜찮다니까요. 누나 말대로 내일 일찍 가면 되니까 일단 저 누나부터 처리해요. 지금은 늦어서 택시 잡기도 힘들어요. 특히 저 누나 데리고는 더 힘들 거예요. 택시 못 잡아, 나 같아도 안 태워줘.”
눈이 반쯤 감긴, 여전히 동공이 풀린 현승이 비틀비틀 화장실에서 걸어 나오는 게 보인다. 나오기 전 얼굴에 찬물을 튕기고 휴지로 닦았나 보다. 이마며 광대 위에 젖은 휴지 조각이 나풀거리며 붙어 있다.
“아이고, 이 미친 언니야. 이제 와서 깨 보겠다고 세수라도 한 거니? 얼굴에는 뭘 묻히고 온 거야?”
도연은 현승을 붙잡고 엄마 원숭이가 아기 원숭이 이 잡아 주 듯 얼굴의 휴지 조각들을 하나하나 떼어냈다. 의도치 않게 간혹 얼굴을 꼬집기도 했지만 현승은 아무것도 못 느끼는 양 얌전했다. 이내 곧 잠들 것 같이 눈까지 끔뻑인다.
“맙소사, 이 누나 아주 잘 거 같은데요. 누나 잠깐만 기다려요. 제가 지금 가서 빨리 차 가지고 올게요.”
“현동아 아니라니까. 너는 그냥 가라고.”
“누나! 저 금방 와요. 그러니까 어디 가지 말고 여기 딱 있어요. 꼭이요!”
현동의 빠른 걸음에 점점 속력이 붙어 이내 전력질주로 달리기 시작하자 현승이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뭐야? 도연아! 현동이 도망간다! 잡아야지, 뭐 해? 현동이 잡자!”
“미친 언니야, 미치더라도 좀 곱게 미치자.”
도연에게 기대 있던 현승이 현동을 잡아야 한다며 허공을 향해 팔을 허우적거리자 도연이 그대로 현승의 목을 감아 헤드락을 걸었다. 현승은 빠져나가고 싶어 몸부림을 쳤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고 그대로 도연의 품에 안겨 눈을 감았다. 도연은 현승의 등을 세게 치려다 큰 한숨과 함께 도로 거두었다.
“그래. 차라리 그냥 잠을 자라. 그게 우리를 돕는 거다.”
현승의 고개가 도연의 어깨로 툭 떨어진다.
**********
누군가 방 한가운데 홀로 누워 있다. 현승이다. 이불을 오른 다리로 휘감고 대자로 뻗은 채 미동 없이 한참을 꿈쩍 않던 현승은 이윽고 고개를 조금씩 움직이며 한동안 감겨 있던 왼쪽 눈, 오른쪽 눈을 같이 또 번갈아 가며 움찔거렸다. 쉽게 뜨이지 않던 눈은 수차례 움찔거린 끝에야 겨우 실눈이 떠져 창문에 드리워진 커튼 사이로 새들어오는 얕은 빛을 볼 수 있었다. 어둑어둑한 애매한 빛 속에서 현승은 희미하게 보이는 가구의 실루엣을 확인했다. 영 낯선 것이 자신의 방은 아니다. 확실히 아니다. 여기에 확신을 더해 주는 냄새. “콜록콜록” 그러고 보니 잠결에 기침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현승은 곯아떨어진 중 간간히 들었던 기침소리가 자신의 기침소리였다는 걸 깨달았다. 아, 여기 냄새가 너무 맵다.
“콜록콜록, 아오 머리야. 아웅, 여긴 어디야?”
잠에서 서서히 깨어나는 현승은 기침이 나올 때마다 배가 움찔거렸고 배가 움찔거릴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머리가 지끈거릴 때마다 눈이 공간의 밝기에 익숙해졌고 시야가 구별될 때마다 여기는 어딘지 궁금증만 더해져 갔다. 그리고 “물, 물... 무울!” 목이 말랐다.
“언니 일어났어?”
아는 목소리. 도연이다. 방 밖에서 현승을 부르는 도연의 목소리가 들린다. 다행이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납치되어 온 건 아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이곳은 낯선 공간이고 분명 도연의 집도 아니지만 일단은 안심이다.
“무울… 물, 물. 무울!”
“뭐라고 그러는 거야? 일어나긴 일어난 거야?”
물을 찾는 목소리를 쥐어짰지만 도연에겐 잘 들리지 않나 보다.
“일어났으면 일어나면 되지, 일어나지는 않고 뭐라고 꿍얼거리는 거야?”
방문이 벌컥 열리고 도연이 고개만 쑥 내밀었다. 그 너머로 밝은 빛이 뭉탱이로 쏟아져 들어오니 현승은 절로 오만상을 찌푸리며 공벌레처럼 몸을 둥글게 말았다.
“으! 닫아, 닫아! 닫아 달라고!”
현승의 괴로워하는 소리에 도연이 한 발짝 물러나길래 문을 닫는가 싶어 현승이 잔뜩 웅크린 긴장을 풀려는 찰나 문이 완전히 개방됐다.
“이 언니가 진짜! 이제 그만 자고 일어나!”
현승은 순간 도연이 순간이동을 한 줄 알았다. 분명 열린 문 너머에 있었는데 어느새 다가와 앉아 현승의 등짝을 찰싹찰싹 때리고 있으니 말이다.
“이제,” 찰싹. “그만 좀.” 찰싹. “일어나라.” 찰싹. “좀!”
현승은 도연의 매운 손바닥세례에도 굴하지 않고 쏟아지는 밝은 빛을 피해 버둥거리며 이불을 뒤집어쓰려고 애썼다. 그러나 오른발에 단단히 감긴 이불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현승 누나, 괜찮으면 이제 일어나세요. 해가 중천이에요.”
“응? 누구? 현동이야?”
열린 문 너머로 현동의 목소리도 들린다. 기대하지 못했던 익숙한 목소리에 비로소 현승의 버둥거림이 잦아든다.
“네, 저 현동이에요. 누나, 빨리 일어나세요. 저희 다 누나 기다렸단 말이에요. 빨리 나와요.”
“뭐를? 왜? 뭐 때문에 나를 기다려?”
현승은 얼굴을 조금씩 펴 빛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제야 방안의 풍경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주로 공중파 아침 드라마나 주말드라마에서 본 것 같은, 부자는 아니지만 나름 화목한 주인공의 가족이 모여사는 오래된 단독 주택 스타일 가구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한쪽 벽을 메운 서로 다른 색과 디자인의 오래된 장식장들은 구불구불한 로코코 양식의 조각들이 덧대어져 있었는데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도포 되었을 마감재의 번쩍이는 광 대신 모서리부터 닳아 올랐을 고운 반질반질함만이 남아 있었다. 그 안은 열어봐야 알겠지만 추측건대 각종 잡동사니나 안 입는 옷을 보관해 놓았을 것이 분명하다. 장식장과 벽 사이, 장식장과 천장 사이에는 라면 박스, 운동화 박스 등 각종 박스들이 테트리스 블록 쌓아 올리 듯 메꿔져 있었고 맞은편 벽에는 빽빽하게 쌓아 올라간 오래된 책들이 서로 기대어 쓰러지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오래된 것들은 가장 오래돼 보이는 왕년엔 고왔을 빛바랜 꽃무늬 벽지가 아우르고 있었다. 그리고 문제의 매운 냄새.
“콜록, 콜록. 생각보다 냄새가 더 맵네.” 도연이도 매운 공기에 기침을 한다.
“내 말이, 콜록. 도연아 이 냄새 뭐야? 여기 어디냐고?”
기침 때문에 잠시 현승의 등짝을 후드려 패던 걸 멈췄던 도연이 지금까진 때린 건 연습이었던 것처럼 더 세게 등을 후려쳤다.
“아!!”
“뭐긴 뭐야? 고추 냄새지!”
“뭐? 고추 냄새? 그럼 다른 방에서 재웠어야지. 왜 나만 여기 놔둔 거야?” 현승이 불평을 토로했다.
“왜겠어? 언니가 죽어도 이 방 들어가서 잘 거라고 기어들어 왔잖아! 그러면서 맵다고 투덜거려?”
상황파악이 안 돼 어리둥절해하는 현승과 그런 현승의 멱살을 쥐고 흔드는 도연을 현동이 또 부른다.
“누나들, 진정하고 이제 그만 나오면 안 돼요?”
도연의 눈빛에서 계속 이불과 엉켜 누워 있다간 등짝에 큰 화를 입히겠다는 무언의 협박을 읽어낸 현승은 겨우 몸을 일으켜 방 밖으로 나섰다. 거실은 누워 있던 어둑한 방과는 달리 작은 마당이 보이는 창으로 들어오는 자연광으로 매우 밝았다.
마당에는 빤닥빤닥한 붉은 고추가 햇빛에 바짝 말라가고 있다. 채광이 좋은 남향집이다. 벽은 두껍고 천장은 낮으며 웨인스 코팅된 방문과 걸레받이, 장식적인 천장 몰딩이 오래된 체리목인 것이 최소 시공한 지 25년은 돼 보인다. 곳곳에는 집주인이 직접 짠듯한 크로셰 장식이 놓여 있다. 오래됐지만 낡지 않은 맨질맨질하고 따뜻한 집이다. 팔려고 지은 집이 아닌 살려고 지은 매일 사랑받은 집이다.
“누나들 빨리 오세요. 국 식는다고요. 누나 빨리요.”
“어딜 따라와. 언니는 가서 씻고 와!”
“아, 현승이 누나 화장실에 누나 쓰라고 새 칫솔 꺼내 놨어요. 그거 쓰면 되니까 먼저 씻고 오세요.”
현동이 녀석, 언제는 빨리 먹으러 오라고 재촉하더니 도연이가 씻으라니까 빨리 씻으라고 말 바꾸는 거 봐. 현승은 못마땅한 얼굴이 되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입김을 뿜어봤다. 입김에서 풍기는 덥고 달큼한 알코올 냄새. 아, 다시 취할 것 같다.
“나 빨리 씻고 올게. 내 밥 남겨줘.”
“알았으니까 대충 씻지 말고 제대로 씻어야 돼.”
“응.”
“말로만 그러지 말고 좀. 알았지?”
'응'이라고 했지만 아무도 보는 이 없으니 물만 묻히고 후다닥 나온 현승은 도연을 따라나섰던 기억을 더듬어 부엌으로 들어섰다. 부엌은 오래된 거실과 대비되는 하얀 싱크대가 빛나는 새 냄새나는 공간이었다. 물과 불이 함께 한 세월을 노후된 집기들이 이기지 못해 이 공간만 새로 리모델링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리가 덧대어진 오래된 식탁은 살아남았고 위에는 정갈한 북엇국 백반 3인분이 보기 좋게 차려져 있었다.
“도연이 누나 아침에 먹었던 국 한 번 더 덥혔는데 괜찮죠?”
“그럼. 그땐 나도 제정신이 아니어서 제대로 못 먹었어. 더 먹어서 더 좋아.”
“한 번 더 끓인 거라 좀 짤수도 있어요.”
“애는 아침에도 짤까 봐 걱정하더니 지금 또 그러네. 짜긴 뭐가 짜? 맛있기만 한데.”
“아니, 저는 그래도 혹시나 해서...”
현동의 염려와 달리 도연은 국을 반겼다. 그리고 현승은 더 반겼다. 미친 듯이 자극적인 밥냄새에 강한 허기짐이 밀려온 현승은 허겁지겁 밥과 국을 입에 밀어 넣었다.
“이야, 이거 북엇국 죽인다.”
“누나, 천천히 먹어요. 그러다 얹히면 어떡하려고. 지금 속이 말이 아닐 텐데.”
“냅둬라. 그렇게 토해댔으니 어제 아무것도 안 먹은 거나 다름없어. 저렇게 배고파하는 게 당연하지.”
도연은 말로는 신경 쓰지 말라면서도 염려는 되는지 물이 담긴 컵을 현승 손이 닿는 곳에 쓱 밀어주었다.
“도연, 고마워. 그런데 내 핸드폰이 안 보인다. 지금 몇 시야?”
현승은 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궁금해했다.
“언니 핸드폰 충전 중이다. 지금 오후 2시도 넘었어!”
“오, 어쩐지 해가 높더라. 우와! 이 연근 뭐냐? 나 연근 안 좋아하는데 이건 진짜 맛있다.”
“맞아. 연근 맛있더라.”
“어, 도연이 누나 연근 맛있어요? 서울 갈 때 싸달라고 해야겠다.”
현승은 무아지경이 되어 먹는다.
“이건 무슨 나물이지? 시래기 무침인가? 이것도 진짜 맛있다.”
“그치? 나도 그 시래기 무침 맛있더라.”
“그래요? 그럼 이것도 싸달라고 해야지.”
“그런데 여기는 어디야?”
“경주. 현동이 집이야.”
“아, 그래? 여기가 현동이 집이야? 음, 아닌데 현동이 집은 방앗간쌀롱 옆 선우빌라 201호잖아. 현동아 나 모르게 이사했어? 여기 원룸이 아닌데, 무슨 셰어 하우스인가? 뭐 이런들 어떠하리, 어딘들 어떠하리."
이것저것 맛있다고 연발하는 걸신들린 현승은 북엇국을 그릇째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거 북엇국 진짜 예술이다. 나 더 먹고 싶어.”
“도연이 누나는요?”
“글쎄... 나도 좀 더 먹을까?”
마침 도연도 북엇국을 비웠길래 현동이 도연의 빈 그릇을 먼저 챙기자 현승이 현동을 붙잡는다.
“현동이 스톱! 잠깐!”
현승의 분위기가 몹시 심각하다.
“왜 언니 국부터 안 챙겨서 섭섭해?”
“아니 그게 아니라 도연이 너 말이야. 방금 뭐라고 그랬어?”
“뭐? 북엇국 좀 더 먹을까? 이거?”
“그게 아니라 방금 아까 한 말. 뭐라고 했냐고?"
"그러니까 뭐? 반찬 맛있다고?"
"아니! 경주? 경주라고 했어?”
식욕에만 빠졌던 현승의 청각정보 처리가 이제야 됐나 보다.
“경주라고? 여기가 경주야? 그러면 내가 지금 경주에 있는 거야? 왜? 여기 현동이 집이라며 도대체 왜?”
정보 처리가 끝난 현승은 뇌정지가 올 것 같았다. 현승은 말없이 도연, 현동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젓가락 든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왜? 왜 밥 먹다 말고 왜 놀라는 건데?”
두 사람, 동시에 당황해한다.
“너네... 혹시 날 납치 한 거야? 설마... 이렇게 잘 먹여놓고 내 장기라도 노리는 건가!”
“이 바보가 지금 뭐라는 거야? 현동이 고향집이 경주잖아!”
도연은 깊은 빡침의 사자후를 외쳤고 현승은 자신의 늦은 깨달음에 탄식했다.
“아? 아... 현동이... 고향...”
“이 언니가 진짜. 뚫린 입에서 나오면 다 말인 줄 아나!”
현승은 아차 싶었다. 도연이가 작정하고 씩씩 거릴 때는 자중해야 한다. 술에 취한 현승은 못 하는 일이지만 술이 깬 현승은 할 수 있다. 이럴 땐 얌전히 꼬리를 내려야 한다.
“하긴... 내가 너희들을 납치하면 납치했지... 네들이 그럴 애들은 아니지. 미안. 방금 한 말은 진심 미안. 그렇지만 그래도 내가 왜 현동이 고향집에 있는... 거야?”
씩씩거리는 도연 대신 현동이 조심 스레 나섰다.
“아이고 누나, 정말 아무것도 기억 안 나요?”
“음, 그게... 음... 나 필름이 끊겼나 봐.”
현승은 요 근래 매일 술이었다. 하루 24시간을 온전히 기말과제에만 치이는 게 너무 지루하고 억울해서 어떻게든 술을 찾아 마셨다. 그렇게 마셔대니 가끔 필름이 끊겼던 것도 같지만... 뭐 괜찮았다. 그 시간의 대부분을 잠으로 보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냥 자고 일어났더니 갑자기 경주라고? 어젯밤엔 망원동에 있었는데. 그리고 분명히 지난 새벽에... 새벽? 새벽이라… 현승의 얼굴이 턱이 빠진 것처럼 굳었다. 지난 새벽에 잠만 잔 것 같진 않다. 잠깐 자다 일어난 것도 같은데 그래서 문을 열고... 현승은 불현듯 자신이 한 짓이 생각났다.
“빵!”
“뭐?”
“빵!”
“빠앙?”
“그래! 빵! 내 빵!"
To be continued...
경주(1). by 옥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