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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광 Feb 25. 2024

경주

<식은 연애> 서른한 번째 이야기



현승은 진지했다. 비록 눈은 풀렸지만.


“현동아, 너 어디 현 씨야?”

“네? 저 해주오 씬데요.”

“아니, 그거 말고, 너 현, 현이 어디 현 씨냐고?”

“현이 아니라 온데요. 저 해주오 씨라고요.”

“아니 현! 현! 어디 현 씨냐고?” 현승의 목소리가 커지다 못해 뒤집어졌다.

“그러니까 그게 해주 오 씨라고요.” 답답한 건 현동도 마찬가지다.

“아휴, 현동아 그만해. 일일이 대답 안 해줘도 돼. 저 언니 지금 취했잖아. 상대를 해주지 마.”

 

도연이 취할 데로 취한 현승을 현동으로부터 떼어냈다. 덕분에 뒤로 벌러덩 젖혀 앉은 현승은 벌게진 얼굴로 연신 콧방귀를 뿜더니 시원한 바람을 쐬겠다며 벽을 붙잡고 기는 듯 포차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모, 한 병 더 가져가요.” 도연이 이때다 싶어 잽싸게 새 소주병을 꺼내려는데 눈앞에 못 볼 꼴의 풍경이 펼쳐졌다.


“어?! 언니!! 현동아 현승 언니 잡아! 가서 빨리 잡으라고! 빨리!”

“왜요? 현승 누나 또 토해요?”

 

도연의 외침에 현동이 벌떡 일어섰다. 자정을 넘긴 시간. 망원 포차 밖 건너편, 영업이 끝난 동네 반찬 가게 앞 배수구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현승 보인다. 현승은 “우이쒸, 우이쒸.” 구시렁거리며 바지의 지퍼 고리를 잡았다 놓쳤다를 반복하다 마침내 지퍼 고리를 제대로 부여잡는 데 성공한다.


“아니! 야, 저 언니 바지 내린다. 현동아 잡아! 잡아야 돼! 저러다 진짜 싼다!”

 

현동이 다급하게 뛰어나간 도연의 뒤를 쫓았다. 현승 누나의 키는 170cm 남짓, 현동의 키와 비슷하다. 체중도 엇비슷한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런데 왜 힘은 더 센 거 같지? 두 명이 달라붙어도 고주망태 현승은 버겁다. 현동은 폭주하는 현승을 제압해 결국 화장실로 들여보낸 도연 누나가 새삼 대단해 보였다. 역시 도연 누나.


“현동아, 차 좀 가지고 와라. 집 앞에 있지? 저 언니 집에 보내야지 안 그러면 길바닥에서 뻗고 자겠다.”

“네? 그럼 누나는요?”

“나? 나는 알아서 잘 가지. 아, 맞다.” 갑자기 도연의 얼굴이 미안한 듯 난처해진다. “미안, 너 오늘 집에 간다고 했지?”

 

현승을 데려다 주라는 말에 동그래진 현동의 눈을 보고 나서야 도연은 아차 싶었다. 현동이 녀석 며칠 전부터 오늘 집에 갈 거라고 콧노래를 불렀었는데, 방금 전에도 녀석은 늦어도 어떻게든 출발할 거라며 현승 언니가 멱살을 붙잡고 술을 들이부으려 해도 단 한 방울 입술에 튀기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니 여태껏 붙잡은 것도 충분히 미안한데 망원동에서 현승 언니의 무악동까지 가자고 하는 것은 너무 염치없는 부탁이다.

 

“현동아, 내가 진짜 미안하다. 괜히 오늘 갈 애를 불러다가 이 꼴 저 꼴 고생까지 시키고, 여긴 내가 정리할 테니까 너는 어서 가 봐. 지금부터 가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겠다. 아니다. 지금이라도 들어가서 눈 좀 붙이고 아침에 일찍 가던지 너 편할 대로 해.” 도연은 아무 걱정 말라며 어딘가 섭섭해하는 현동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해요? 누나가 부르는데 당연히 나와야죠.”

 

서울의 H대 건축학과에 입학한 현동은 중학생 때부터 지낸 경주를 떠나 망원역 근처에 방을 얻어 자취를 시작했다. 떠나 올 때는 적어도 한 달에 두 번은 경주에 방문할 거라 약속했는데 완전한 착각이었다. 학교생활과 공부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사이사이 비는 시간에는 예상밖의 구멍이 숭숭 생기는 생활비를 위한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다. 그러다 최근 밤샘으로 점철된 기말 과제를 마무리하고 나서야 겨우 짬이 났다. 아니 짬을 낸 것이 다. 거의 석 달만이다. 현동은 오랜만에 먹을 집밥 생각에 내심 신이 났다.


망원동에서 시작된 혼자 사는 생활은 입시에 절어 있던 고등학교 때의 막연한 상상과 많이 달랐다. 스스로 끼니를 챙기는 일은 어릴 때부터 종종 하던 일이니 쉬울 줄 알았고 설거지도 자주 해왔던 일이니 쉽게 해낼 줄 알았다. 청소나 분리수거도 중학생 때부터 나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잔소리를 할 만큼 주도적으로 했으니 가뿐히 해낼 줄 알았다. 그러나 지켜보는 이 없고 서로 챙겨주는 이 없는 혼자 사는 생활에선 아차 하는 순간 예상밖의 전개가 펼쳐졌다.

사소한 티끌 같은 살림살이는 ‘피곤하다', 혹은 '귀찮다’라는 이유로 한 두 번만 미뤄도 삽시간에 거대한 태산이 되었다. 잠깐이면 해 낼 수 있는 작은 일들이 그 잠깐을 놓치면 온 하루를 꼬박 투자해야 할 큰 일들이 된다. 그렇게 우왕좌왕하는 사이 문득문득 그 틈새로 어떤 온기가 그리웠다. 매끼 입맛에 딱 맞는 간보다 조금씩 어긋나 불평을 늘어놓게 만들었던 짠맛이 그리웠다. 식사를 마치고 나면 서로 정리하기를 미뤄 옥신각신 했던 소란스러움이 그리웠다. 여름, 더운 선풍기 바람에도 그리웠던 온기다.


그런 현동이 기말과제에 빼앗긴 밀린 잠을 낮잠으로 보충하고 이른 저녁 경주로 막 출발하려는 찰나였다.


[현동아 대창전골이 부른다. 보글보글. 보글보글.]


마찬가지로 기말 과제를 끝낸 현승 누나와 도연 누나가 술을 달린다며 톡을 보내왔다. 막 떠나려던 현동은 차의 시동을 끄고 도연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현동아, 어디야?” 도연 누나의 목소리 너머 술에 절은 현승 누나의 포효 소리가 들린다. 이런, 도연 누나만 남겨놓고 그냥 떠날 수 없다.


“현동아, 그냥 가라니까.”


현승을 제압해 겨우 화장실로 들여보낸 도연은 마른세수를 하며 숨을 돌렸다. 엉거주춤 서 있는 현동을 보니 더 미안해진다.


“괜찮아요. 집에는 내일 가도 돼요.”

“네가 그러니까 더 미안해지잖아. 괜찮으니까 빨리 가. 저 언니 저러는 거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너는 그냥 가, 얼른.”

“저 진짜 괜찮다니까요. 누나 말대로 내일 일찍 가면 되니까 일단 저 누나부터 처리해요. 지금은 늦어서 택시 잡기도 힘들어요. 특히 저 누나 데리고는 더 힘들 거예요. 택시 못 잡아, 나 같아도 안 태워줘.”

 

눈이 반쯤 감긴, 여전히 동공이 풀린 현승이 비틀비틀 화장실에서 걸어 나오는 게 보인다. 나오기 전 얼굴에 찬물을 튕기고 휴지로 닦았나 보다. 이마며 광대 위에 젖은 휴지 조각이 나풀거리며 붙어 있다.

 

“아이고, 이 미친 언니야. 이제 와서 깨 보겠다고 세수라도 한 거니? 얼굴에는 뭘 묻히고 온 거야?”

 

도연은 현승을 붙잡고 엄마 원숭이가 아기 원숭이 이 잡아 주 듯 얼굴의 휴지 조각들을 하나하나 떼어냈다. 의도치 않게 간혹 얼굴을 꼬집기도 했지만 현승은 아무것도 못 느끼는 양 얌전했다. 이내 곧 잠들 것 같이 눈까지 끔뻑인다.


“맙소사, 이 누나 아주 잘 거 같은데요. 누나 잠깐만 기다려요. 제가 지금 가서 빨리 차 가지고 올게요.”

“현동아 아니라니까. 너는 그냥 가라고.”

“누나! 저 금방 와요. 그러니까 어디 가지 말고 여기 딱 있어요. 꼭이요!”


현동의 빠른 걸음에 점점 속력이 붙어 이내 전력질주로 달리기 시작하자 현승이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뭐야? 도연아! 현동이 도망간다! 잡아야지, 뭐 해? 현동이 잡자!”

“미친 언니야, 미치더라도 좀 곱게 미치자.”


도연에게 기대 있던 현승이 현동을 잡아야 한다며 허공을 향해 팔을 허우적거리자 도연이 그대로 현승의 목을 감아 헤드락을 걸었다. 현승은 빠져나가고 싶어 몸부림을 쳤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고 그대로 도연의 품에 안겨 눈을 감았다. 도연은 현승의 등을 세게 치려다 큰 한숨과 함께 도로 거두었다.


“그래. 차라리 그냥 잠을 자라. 그게 우리를 돕는 거다.”


현승의 고개가 도연의 어깨로 툭 떨어진다.

 

 

**********

 

 

누군가 방 한가운데 홀로 누워 있다. 현승이다. 이불을 오른 다리로 휘감고 대자로 뻗은 채 미동 없이 한참을 꿈쩍 않던 현승은 이윽고 고개를 조금씩 움직이며 한동안 감겨 있던 왼쪽 눈, 오른쪽 눈을 같이 또 번갈아 가며 움찔거렸다. 쉽게 뜨이지 않던 눈은 수차례 움찔거린 끝에야 겨우 실눈이 떠져 창문에 드리워진 커튼 사이로 새들어오는 얕은 빛을 볼 수 있었다. 어둑어둑한 애매한 빛 속에서 현승은 희미하게 보이는 가구의 실루엣을 확인했다. 영 낯선 것이 자신의 방은 아니다. 확실히 아니다. 여기에 확신을 더해 주는 냄새. “콜록콜록” 그러고 보니 잠결에 기침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현승은 곯아떨어진 중 간간히 들었던 기침소리가 자신의 기침소리였다는 걸 깨달았다. 아, 여기 냄새가 너무 맵다.


“콜록콜록, 아오 머리야. 아웅, 여긴 어디야?”

 

잠에서 서서히 깨어나는 현승은 기침이 나올 때마다 배가 움찔거렸고 배가 움찔거릴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머리가 지끈거릴 때마다 눈이 공간의 밝기에 익숙해졌고 시야가 구별될 때마다 여기는 어딘지 궁금증만 더해져 갔다. 그리고 “물, 물... 무울!” 목이 말랐다.


“언니 일어났어?”

 

아는 목소리. 도연이다. 방 밖에서 현승을 부르는 도연의 목소리가 들린다. 다행이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납치되어 온 건 아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이곳은 낯선 공간이고 분명 도연의 집도 아니지만 일단은 안심이다.


“무울… 물, 물. 무울!”

“뭐라고 그러는 거야? 일어나긴 일어난 거야?”


물을 찾는 목소리를 쥐어짰지만 도연에겐 잘 들리지 않나 보다.


“일어났으면 일어나면 되지, 일어나지는 않고 뭐라고 꿍얼거리는 거야?”


방문이 벌컥 열리고 도연이 고개만 쑥 내밀었다. 그 너머로 밝은 빛이 뭉탱이로 쏟아져 들어오니 현승은 절로 오만상을 찌푸리며 공벌레처럼 몸을 둥글게 말았다.


“으! 닫아, 닫아! 닫아 달라고!”

 

현승의 괴로워하는 소리에 도연이 한 발짝 물러나길래 문을 닫는가 싶어 현승이 잔뜩 웅크린 긴장을 풀려는 찰나 문이 완전히 개방됐다.


“이 언니가 진짜! 이제 그만 자고 일어나!”

 

현승은 순간 도연이 순간이동을 한 줄 알았다. 분명 열린 문 너머에 있었는데 어느새 다가와 앉아 현승의 등짝을 찰싹찰싹 때리고 있으니 말이다.


“이제,” 찰싹. “그만 좀.” 찰싹. “일어나라.” 찰싹. “좀!”

 

현승은 도연의 매운 손바닥세례에도 굴하지 않고 쏟아지는 밝은 빛을 피해 버둥거리며 이불을 뒤집어쓰려고 애썼다. 그러나 오른발에 단단히 감긴 이불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현승 누나, 괜찮으면 이제 일어나세요. 해가 중천이에요.”

“응? 누구? 현동이야?”

 

열린 문 너머로 현동의 목소리도 들린다. 기대하지 못했던 익숙한 목소리에 비로소 현승의 버둥거림이 잦아든다.


“네, 저 현동이에요. 누나, 빨리 일어나세요. 저희 다 누나 기다렸단 말이에요. 빨리 나와요.”

“뭐를? 왜? 뭐 때문에 나를 기다려?”

 

현승은 얼굴을 조금씩 펴 빛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제야 방안의 풍경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주로 공중파 아침 드라마나 주말드라마에서 본 것 같은, 부자는 아니지만 나름 화목한 주인공의 가족이 모여사는 오래된 단독 주택 스타일 가구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한쪽 벽을 메운 서로 다른 색과 디자인의 오래된 장식장들은 구불구불한 로코코 양식의 조각들이 덧대어져 있었는데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도포 되었을 마감재의 번쩍이는 광 대신 모서리부터 닳아 올랐을 고운 반질반질함만이 남아 있었다. 그 안은 열어봐야 알겠지만 추측건대 각종 잡동사니나 안 입는 옷을 보관해 놓았을 것이 분명하다. 장식장과 벽 사이, 장식장과 천장 사이에는 라면 박스, 운동화 박스 등 각종 박스들이 테트리스 블록 쌓아 올리 듯 메꿔져 있었고 맞은편 벽에는 빽빽하게 쌓아 올라간 오래된 책들이 서로 기대어 쓰러지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오래된 것들은 가장 오래돼 보이는 왕년엔 고왔을 빛바랜 꽃무늬 벽지가 아우르고 있었다. 그리고 문제의 매운 냄새.


“콜록, 콜록. 생각보다 냄새가 더 맵네.” 도연이도 매운 공기에 기침을 한다.

“내 말이, 콜록. 도연아 이 냄새 뭐야? 여기 어디냐고?”

 

기침 때문에 잠시 현승의 등짝을 후드려 패던 걸 멈췄던 도연이 지금까진 때린 건 연습이었던 것처럼 더 세게 등을 후려쳤다.


“아!!”

“뭐긴 뭐야? 고추 냄새지!”

“뭐? 고추 냄새? 그럼 다른 방에서 재웠어야지. 왜 나만 여기 놔둔 거야?” 현승이 불평을 토로했다.

“왜겠어? 언니가 죽어도 이 방 들어가서 잘 거라고 기어들어 왔잖아! 그러면서 맵다고 투덜거려?”

 

상황파악이 안 돼 어리둥절해하는 현승과 그런 현승의 멱살을 쥐고 흔드는 도연을 현동이 또 부른다.


“누나들, 진정하고 이제 그만 나오면 안 돼요?”

 

도연의 눈빛에서 계속 이불과 엉켜 누워 있다간 등짝에 큰 화를 입히겠다는 무언의 협박을 읽어낸 현승은 겨우 몸을 일으켜 방 밖으로 나섰다. 거실은 누워 있던 어둑한 방과는 달리 작은 마당이 보이는 창으로 들어오는 자연광으로 매우 밝았다.

마당에는 빤닥빤닥한 붉은 고추가 햇빛에 바짝 말라가고 있다. 채광이 좋은 남향집이다. 벽은 두껍고 천장은 낮으며 웨인스 코팅된 방문과 걸레받이, 장식적인 천장 몰딩이 오래된 체리목인 것이 최소 시공한 지 25년은 돼 보인다. 곳곳에는 집주인이 직접 짠듯한 크로셰 장식이 놓여 있다. 오래됐지만 낡지 않은 맨질맨질하고 따뜻한 집이다. 팔려고 지은 집이 아닌 살려고 지은 매일 사랑받은 집이다.


“누나들 빨리 오세요. 국 식는다고요. 누나 빨리요.”

“어딜 따라와. 언니는 가서 씻고 와!”

“아, 현승이 누나 화장실에 누나 쓰라고 새 칫솔 꺼내 놨어요. 그거 쓰면 되니까 먼저 씻고 오세요.”


현동이 녀석, 언제는 빨리 먹으러 오라고 재촉하더니 도연이가 씻으라니까 빨리 씻으라고 말 바꾸는 거 봐. 현승은  못마땅한 얼굴이 되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입김을 뿜어봤다. 입김에서 풍기는 덥고 달큼한 알코올 냄새. 아, 다시 취할 것 같다.


“나 빨리 씻고 올게. 내 밥 남겨줘.”

“알았으니까 대충 씻지 말고 제대로 씻어야 돼.”

“응.”

“말로만 그러지 말고 좀. 알았지?”


'응'이라고 했지만 아무도 보는 이 없으니 물만 묻히고 후다닥 나온 현승은 도연을 따라나섰던 기억을 더듬어 부엌으로 들어섰다. 부엌은 오래된 거실과 대비되는 하얀 싱크대가 빛나는 새 냄새나는 공간이었다. 물과 불이 함께 한 세월을 노후된 집기들이 이기지 못해 이 공간만 새로 리모델링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리가 덧대어진 오래된 식탁은 살아남았고 위에는 정갈한 북엇국 백반 3인분이 보기 좋게 차려져 있었다.


“도연이 누나 아침에 먹었던 국 한 번 더 덥혔는데 괜찮죠?”

“그럼. 그땐 나도 제정신이 아니어서 제대로 못 먹었어. 더 먹어서 더 좋아.”

“한 번 더 끓인 거라 좀 짤수도 있어요.”

“애는 아침에도 짤까 봐 걱정하더니 지금 또 그러네. 짜긴 뭐가 짜? 맛있기만 한데.”

“아니, 저는 그래도 혹시나 해서...”


현동의 염려와 달리 도연은 국을 반겼다. 그리고 현승은 더 반겼다. 미친 듯이  자극적인 밥냄새에 강한 허기짐이 밀려온 현승은 허겁지겁 밥과 국을 입에 밀어 넣었다.


“이야, 이거 북엇국 죽인다.”

“누나, 천천히 먹어요. 그러다 얹히면 어떡하려고. 지금 속이 말이 아닐 텐데.”

“냅둬라. 그렇게 토해댔으니 어제 아무것도 안 먹은 거나 다름없어. 저렇게 배고파하는 게 당연하지.”


도연은 말로는 신경 쓰지 말라면서도 염려는 되는지 물이 담긴 컵을 현승 손이 닿는 곳에 쓱 밀어주었다.


“도연, 고마워. 그런데 내 핸드폰이 안 보인다. 지금 몇 시야?”

현승은 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궁금해했다.

“언니 핸드폰 충전 중이다. 지금 오후 2시도 넘었어!”

“오, 어쩐지 해가 높더라. 우와! 이 연근 뭐냐? 나 연근 안 좋아하는데 이건 진짜 맛있다.”

“맞아. 연근 맛있더라.”

“어, 도연이 누나 연근 맛있어요? 서울 갈 때 싸달라고 해야겠다.”

현승은 무아지경이 되어 먹는다.

“이건 무슨 나물이지? 시래기 무침인가? 이것도 진짜 맛있다.”

“그치? 나도 그 시래기 무침 맛있더라.”

“그래요? 그럼 이것도 싸달라고 해야지.”

“그런데 여기는 어디야?”

“경주. 현동이 집이야.”

“아, 그래? 여기가 현동이 집이야? 음, 아닌데 현동이 집은 방앗간쌀롱 옆 선우빌라 201호잖아. 현동아 나 모르게 이사했어? 여기 원룸이 아닌데, 무슨 셰어 하우스인가? 뭐 이런들 어떠하리, 어딘들 어떠하리."

이것저것 맛있다고 연발하는 걸신들린 현승은 북엇국을 그릇째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거 북엇국 진짜 예술이다. 나 더 먹고 싶어.”

“도연이 누나는요?”

“글쎄... 나도 좀 더 먹을까?”


마침 도연도 북엇국을 비웠길래 현동이 도연의 빈 그릇을 먼저 챙기자 현승이 현동을 붙잡는다.


“현동이 스톱! 잠깐!”


현승의 분위기가 몹시 심각하다.


“왜 언니 국부터 안 챙겨서 섭섭해?”

“아니 그게 아니라 도연이 너 말이야. 방금 뭐라고 그랬어?”

“뭐? 북엇국 좀 더 먹을까? 이거?”

“그게 아니라 방금 아까 한 말. 뭐라고 했냐고?"

"그러니까 뭐? 반찬 맛있다고?"

"아니! 경주? 경주라고 했지?”


식욕에만 빠졌던 현승의 청각정보 처리가 이제야 됐나 보다.


“경주라고? 여기가 경주야? 그러면 내가 지금 경주에 있는 거야? 왜? 여기 현동이 집이라며 도대체 왜?”

정보 처리가 끝난 현승은 뇌정지가 올 것 같았다. 현승은 말없이 도연, 현동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젓가락 든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왜? 왜 밥 먹다 말고 왜 놀라는 건데?”

두 사람, 동시에 당황해한다.

“너네... 혹시 날 납치 한 거야? 설마... 이렇게 잘 먹여놓고 내 장기라도 노리는 건가!”

“이 바보가 지금 뭐라는 거야? 현동이 고향집이 경주잖아!”

도연은 깊은 빡침의 사자후를 외쳤고 현승은 자신의 늦은 깨달음에 탄식했다.

“아? 아... 현동이... 고향...”

“이 언니가 진짜. 뚫린 입에서 나오면 다 말인 줄 아나!”


현승은 아차 싶었다. 도연이가 작정하고 씩씩 거릴 때는 자중해야 한다. 술에 취한 현승은 못 하는 일이지만 술이 깬 현승은 할 수 있다. 이럴 땐 얌전히 꼬리를 내려야 한다.


“하긴... 내가 너희들을 납치하면 납치했지... 네들이 그럴 애들은 아니지. 미안. 방금 한 말은 진심 미안. 그렇지만 그래도 내가 왜 현동이 고향집에 있는... 거야?”

씩씩거리는 도연 대신 현동이 조심 스레 나섰다.

“아이고 누나, 정말 아무것도 기억 안 나요?”

“음, 그게... 음... 나 필름이 끊겼나 봐.”


현승은 요 근래 매일 술이었다. 하루 24시간을 온전히 기말과제에만 치이는 게 너무 지루하고 억울해서 어떻게든 술을 찾아 마셨다. 그렇게 마셔대니 가끔 필름이 끊겼던 것도 같지만... 뭐 괜찮았다. 그 시간의 대부분을 잠으로 보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냥 자고 일어났더니 갑자기 경주라고? 어젯밤엔 망원동에 있었는데. 그리고 분명히 지난 새벽에... 새벽? 새벽이라… 현승의 얼굴이 턱이 빠진 것처럼 굳었다. 지난 새벽에 잠만 잔 것 같진 않다. 잠깐 자다 일어난 것도 같은데 그래서 문을 열고... 현승은 불현듯 자신이 한 짓이 생각났다.


“빵!”

“뭐?”

“빵!”

“빠앙?”

“그래! 빵! 내 빵!"


현승이 고개를 휘두르며 빵을 찾는다.


“빵! 내 빵 어딨어? 도연아, 내 빵.”

“와우, 언니, 그 빵집은 기억이 나나 봐?”


새벽이었던 것 같다. 아니 이른 아침인가? 현승은 어느 차 뒷좌석에 널브러져 있었는데, 그냥 그렇게 얌전히만 있었는데 어느 순간 차가 스르르 멈췄고 그때 게슴츠레 눈을 떠 보니 막 영업 준비를 시작하는 어느 빵집이 보였다.

‘빠바’나 ‘뚜쥬’ 같은 프랜차이즈가 아닌 평범한 동네 빵집인 것 같았는데 빵집의 주인이자 베이커로 보이는 아저씨가 엄청 있어 보이는 주방용 장갑을 끼고 오븐에 빵 구울 때 쓰는 시커멓고 긴 쟁반을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커먼 쟁반에선 하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방금 만들어진 건 다 맛있다.” 현승이 굳게 믿고 있는 명언이다. 그러니 지금 저기 저 빵들은 그게 무슨 빵이든 간에 맛이 없고 싶어도 없을 수가 없다.

현승은 나비처럼 조용히 벌처럼 빠르게 차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대로 빵까지 직진했다. 다른 건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빵집 아저씨는 사람으로 보이는 형체가 갑자기 달려들자 흠칫 놀라면서도 침착하게 쟁반을 높이 들어 올렸다. 술에 취한 현승은 그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기에 손 끝에 빵 부스러기 하나 못 건드리고 아저씨 앞에 넙죽 엎드린 꼴이 되었다. 이렇게 포기할 순 없다. 가까이 오니 따뜻하고 고소한 빵 내가 진동한다. 술에도 취했으니 빵이라고 못 취할까.


“빵이요… 아저씨 사장님… 저 빵이 먹고 싶어요. 꼭 좀 먹게 해 주세요. 저는 빵이 너무 먹고 싶어요.”

 

현승은 슬램덩크 속 정대만처럼 눈물을 흘렸다. 아저씨는 눈에는 웬 미친 사람이 빵이 먹고 싶다며 우는 것으로 보였을 거다. 음, 여기까지. 현승의 기억은 딱 여기까지다. 그다음 기억에선 다시 차 안이다. 어떻게 돌아왔는지는 기억에 없다. 확실한 건 돌아온 차 안에서 현승은 매우 만족스러웠다는 거다. 다시 차 안에 널브러졌을 때 배 위에 막 오븐에서 꺼낸 따뜻한 빵봉지가 놓여 있었다. 분명히 놓여 있었다. 그 맛있었던 냄새가 너무나도 강렬하다.


“빵! 그 빵 어딨어? 맛있는 냄새빵.”

“와, 미치겠다. 그만 빵빵 거려. 그 빵 저기 있잖아.”

 

어이 털린 도연이 고갯짓을 하자 현동이 식탁 구석을 가리킨다. 희미한 기억 속의 빵봉지. 그 고소했던 냄새의 빵들이 식빵이었구나. 그런데 식빵 상태가 영... 누가 마구 주물러 댄 것 같이 떡이 되어 있었다.


“빵이… 빵… 상태가 왜 저래?”

“상태? 저 상태가 왜 저러냐고? 언니잖아. 언니가 막 소중하네 어쩌네 하면서 쪼물 딱 거려서 그런 거잖아.”

“내가? 내가 소중한 빵을 저렇게 만들었다고?”

현승은 현동이 북엇국을 새로 담아줬는데도 떡이 된 빵만을 슬프게 바라봤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도연의 목에 핏대가 선다.

“저 빵이 문제가 아니야. 우리 경찰서까지 갈 뻔했다고!”

“뭐? 경찰서? 진짜?”


현승은 불안해졌다. 뇌를 쥐어짜 봤지만 빵 외에는 그 무엇도 생각나는 게 없다. 경찰이 와야 할 만큼 험악한 상황이란 게 뭐였을까? 빵집 아저씨 얼굴도 기억 안 난다. 빵 말고 다른 일이 있었던 건가? 분명 이 상황이 꼬리만 얌전히 내린다고 해결될 상황이 아니다. 어차피 넘어야 할 산이라면 최대한 늦게 넘어가고 싶다. 도연이 무섭지만 산 너머의 진실이 더 무서울 것 같아 현승은 소원했다. '저 좀 구해주세요! 제발 산과 산 사이로 돌아가게 해 주세요!'


“아이고, 뭐 해? 소란스러운 거 보니까 다들 일어났나 보네?”

“어? 할머님 다녀오셨어요.”

“왜 할머니만 왔나? 할아버지는?”

 

현승에게 생소한 어느 목소리가 점점 열과 화가 닳아 오르던 도연이의 말을 끊었다. 구세주다. 맥락상 현동의 할머니로 추정되는 분이 양손에 찬거리를 잔뜩 들고 나타났다. 키가 현승의 어깨만큼은 오려나 작고 동글동글하게 생기신 많이 귀여운 희고 짧은 단발머리가 꼭 이 집처럼 반질반질하고 고운 분이다.


“식사하고 있었구나. 국은 괜찮아? 현동이가 아까도 좀 짠 거 같다고 투덜거리던데.”

“아니에요. 할머니 너무 맛있었어요. 진짜 최고.”

반옥타브 올라간 긍정적인 도연의 목소리에 현승도 깊은 공감의 추임새를 보냈다. 더불어 넘어야 할 산으로부터 몇 발자국 뒷걸음질 친 것 같아 안도의 한 숨을 내 쉬었다.

“히유~”

“어머, 내 아들의 숨겨놓은 딸도 잘 잤어?

“네?”

“그 방이 우리 고추 널어놨던 방이라 자는데 매웠을 텐데 자다가 기침 안 했어?”

“아... 그 매운... 기침... 

현승은 취한 자신이 다짜고짜 그 방에 쳐들어가 드러눕는 걸 이 할머니가 다 보셨을 거라 생각하니 한 없는 부끄러워졌다. 그러나 이제 와서 뭘 어쩌겠는가.

“하하, 전혀요. 저 완전 꿀잠 잤습니다. 괜찮습니다. 저 매운 거 좋아해요.”


현승은 열심히 웃어 보였다. 그리고 한편으론 어리둥절했다. 왜 현동이 할머니가 자신에게 아들의 숨겨놓은 딸이라고 말하는 걸까? 아빠한테 숨겨 놓은 어머니가 계셨나? 평택의 친할머니, 오산의 외할머니를 생각하며 도연과 현동에게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그 둘은 할머니의 찬거리를 받아 드느라 현승을 철저히 외면했다. 뭐지? 혹시 이거 또 다른 넘어야 할 산인 건가?


“그런데 숨겨 놓은 딸은 무슨...?”

“어머, 기억 안 나? 나한테 그렇게 크게 큰 절을 했으면서 정말 기억이 안 나?”

“네?”

 

찰랑거리는 짧은 단발머리 아래 장난기 가득한 얼굴의 할머니가 방긋 웃어 보인다.


“호호호, 아가씨가 어디 현 씨라고?”

“아 저, 나주 최 씨…”

“아니, 호호호, 현. 현이 어디 현 씨냐고?”

“그게 현은 빛날 현인데... 아마 현동이도 빛날 현, 이것도 어디 현이냐고 하나요? 아니 아...”

현승은 할머니 앞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알 것 같아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래, 우리 현동이랑 같은 현이 맞네. 우리 아들이 나도 모르게 내 손녀딸을 숨겨 놨지 뭐야. 이제라도 나타나 줘서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 고마워요, 고마워. 호호호.”

웃어 넘겨주는 할머니 덕에 이 산이 아주 험해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산은 산이다.

“네? 제가... 그렇다면 그게 제정신으로 그런 게 분명히 아닐 거고요. 그렇다고 고의로 그런 것도 아니고… 제가 그러니까 술에 취해서 현동이를 놀린 거라고 보시면 그것도 또 안 되고. 왜냐면 제가 그…”

횡설수설 현승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아, 할머니 그만해라. 누나 그만 놀려라.”

 

현동은 할머니를 말리면서도 내심 이 상황이 꼬신 지 싱글벙글 웃는다. 현승도 따라 웃을 뻔했으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도연이의 눈빛이 느껴져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끌어내렸다.


“그래서 우리 손녀딸은 경주 구경도 하고 갈 거야?”

“네?”

“왜? 명색이 현동이 누난데 경주에 한 번도 안 와 본 게 억울하다며 그래서 현동이 쫓아 여기까지 온 거라고 그랬잖아. 우리한테 인사도 드리고, 호호호.”

“네에?”


현승은 술에 취한 자신이 경주까지 끌려 온 줄 알았는데 자신이 앞장서서 오자고 한 건가 싶어 속이 탔다. 즐거운 할머니와 같은 박자로 긍정의 고개를 끄덕이는 도연과 현동을 번갈아 보고 있자니 현승은 깊은 번뇌가 밀려온다. 정말, 어제의 최현승, 무슨 짓을 벌인 거냐!

 

“그런데 정말 경주 안 와봤어? 고등학교 때 웬만하면 수학여행으로 다 다녀가던데.”

“아... 저 그게... 와보긴 와 봤는데요. 불국사랑 석굴암 같은 데 다 가보긴 했는데 기억도 잘 안 나고... 거기 어디냐 첨성대에서 앞에서 찍은 사진도 있긴 있는데 그것도 그냥 사진만 있고. 또 거기 무슨 왕릉도 가보긴 했던 것 같은데...”

상황이 어색하니 현승의 입에선 TMI 남발이다.

“호호호, 경주 사는 나보다 더 많이 가 봤네.”

“하하하하, 그, 그런 가요?”


할머니는 현승의 정신없는 대답 속에서도 장 봐온 찬거리는 빈틈없이 착착 정리했다.


“할머니 진짜 안 거들어줘도 돼?”

“그럼, 집에 손님을 모셔왔으면 너는 손님 접대를 해야지. 너 온다고 미리 다 준비해 둬서 지금은 크게 할 것도 없어. 먹었으면 거실 나가서 좀 쉬어. 커피도 한 잔씩 하고. 제성 씨가 케이크 사 온다고 했으니까 제성 씨 오면 거하게 생일파티나 하자. 호호호.”


크게 할 것도 없다기엔 할머니가 정리시킨 찬거리가 싱크대 한 가득이다. 그래도 기분은 좋아 보이시는 게 작은 산 하나는 넘은 것 같아 현승의 마음이 처음만큼 불편하진 않았다.


'그래, 우리 세 사람, 옷 멀쩡하게 입고서 사지 멀쩡하게 살아 있잖아. 그거면 됐지! 흠... 제발 그거면 돼라.'

  

할머니가 어서 쉬라며 세 사람을 거실 밖으로 몰아낸다. 작지만 힘이 장사다. 얼떨결에 떠 밀려 나온 현승은 소파에 엉거주춤 걸터앉아 도연의 옆구리를 잡아당겼다. 자꾸 말 걸면 불리할 걸 알지만 궁금한 게 생겼으니 어쩌겠나, 물어는 봐야지.


“도연아.”

“왜?”

“제성 씨? 제성 씨가 누구야?”

“언니. 기억 안 나?”

현승이 기억이 안 나는 게 어디 제성 씨 하나뿐이겠는가 싶어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니 도연은 일단 꾹 참고 알려준다.

“으이그! 현동이 할아버지잖아.”

“아... 뭐야, 현동이 할머니 할아버지 이름으로 불러줘? 너무 로맨틱하다.”

“진짜 어이가 없네. 언니가 오늘 새벽에도 지금이랑 똑같이 말했거든. 두 분 보면서 로맨틱하다고. 하긴 기억을 못 하지. 기억을 못 해.”

“...”


현승은 서울에서 경주까지 순간이동을 한 이 상황이 머리로는 복잡했지만 느낌적으로는... 이제는… 그저 그랬다. 뭐, 어쩌겠는가, 이미 엎질러진 물. 현승은 엎질러진 물을 머릿속에 그리며 '몸이 편해야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명언에 따라 몸을 슬며시 뉘었다.  


“순녕 씨, 저 왔어요.”

“어, 할아버지 오셨어요?”

“오! 십원빵이다.”


슬그머니 누우려는 현승의 꼴을 참지 못한 도연이 멱살잡이를 하려는 찰나 순녕 씨를 찾는 할아버지가 들어왔다. 제성 씨. 현동이 할아버지다. 그럼, 순녕 씨는 할머니겠구나.

다람쥐 같았던 순녕 씨와 달리 곰같이 큰 사람이 집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온다. 한 손에는 할머니가 양손에 들고 온 것만큼의 찬거리가 들려 있었고 다른 손에는 커다란 케이크 상자와 큰 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 겨드랑이에 십원빵 봉지를 끼고 있다. 현동은 쪼르르 달려가 십원빵 봉지부터 건네받는다.

 

“어? 나도 몰랐던 내 아들의 숨겨놓은 딸도 일어났네? 잘 잤어? 아침은 먹었고?”

“그럼요. 아침도 맛있게 먹고. 잠도 잘 잤습니다. 매운 것도 괜찮습니다.”


현승은 숨겨놓은 딸에도 적응했고 매운 방에도 적응했다. 이미 한 번 넘었던 산, 이 정도 산은 후딱후딱 넘길 수 있다. 그러니 눈앞의 제성 씨, 현승의 머릿속에선 처음 뵙는 분이지만 느낌적으론 친근하다.


“할아버지. 무슨 케이크를 이렇게 큰 걸 사 왔어? 이 빵들은 또 뭐고?”

현동이 할아버지의 짐을 덜어준다.

“아 그거 빵씨가 싸비스라고 줬어.”

할아버지는 꽉 찬 빵봉투에서 크림빵과 팥빵을 몇 개 꺼냈다.

“그리고 이 식빵은 우리 집에 자기네 식빵이 먹고 싶다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던 학생이 있다고. 암만 생각해도 그 학생이 자꾸 눈에 밟힌다면서 이렇게 잔뜩 넣어 주더라고. 입 심심하면 원 없이 뜯어먹어. 하하하.”

제성 씨는 제일 안쪽에 있던 폭신폭신한 식빵을 제일 소중하게 꺼내주시고선 부엌의 순녕 씨에게 다정한 발걸음을 옮겼다.


소파에 눕고 싶은걸 간신히 참아내던 현승은 넘은 산이 다 넘은 게 아닌 것 같아 고개를 푹 숙여 도연에게 속삭였다.


“도연아, 저거 내 이야기야? 그 빵집 아저씨가 현동이 할아버지랑 아는 사이야?”

“아휴... 그래. 그 빵집 현동이네 단골이래. 언니 그때 현동이 아니었으면 그때도 경찰에 잡혀가는 거였어. 알아?”

“음... 그래.”


이제 현승은 경찰이란 말에도 크게 동요되지 않는다. 뭐, 결과적으로 안 붙잡혀 갔으면 된 거 아닌가? 나중에 현동이한테 술이나 거하게 사주면 되지.

현승의 몸이 자꾸 옆으로 기운다. 역시 몸이 편해야 마음이 편하...


“어라? 어딜 슬금슬금 누워? 똑바로 앉아라!”

도연이 현승을 편하게 두지 않는다.

“아 왜, 좀 편하게 있자. 나 너무 힘들단 말이야. 밤새 잠만 잤을 텐데 왜 이렇게 피곤한 거야.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너무 피곤하단 말이야.”

“뭐? 잠만 자?”

“왜? 빵? 빵은 여기, 경주 다 와서 벌어진 일이잖아. 그럼 그전엔 잠만 잤겠지.”

“…”

 

도연이 입을 꾹 다물었다. 등을 풀 스윙으로 때리려는지 오른손을 있는 힘껏 치켜올린다. 저 손에 맞으면 아프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아플 것이다. 심상치 않은 준비자세에 본능적으로 쫄은 현승이 반사적으로 도연의 팔을 붙잡는다.


“도연아, 제발 진정하고 말로 해. 뭐가 다른 게 있어?”  


어라, 일촉즉발의 상황에 훅 들어오는 맛있는 냄새. 십원빵. 이번엔 십원빵이 현승을 살려주려나 보다.


“에이 누나 기분 좋은 날 왜 그러세요. 그러지 말고 이거 먹어봐요. 보기보다 맛있어요.”


현동이가 따끈따끈한 십원빵을 도연과 현승 사이로 쏙 내밀었다. 초등학생 손바닥만 한 십 원짜리가 막대기에 꽂힌 채 모락모락 김을 올리고 있다. 그런데 현동이가 십원빵을 저렇게 좋아했었나? 학교 앞에서 십원빵 먹는 걸 본 적이 없는데. 얼굴에 웃음꽃이 한가득이다. 그러고 보니 현동이 녀석 아까 일어나 처음 봤을 때부터 쭈욱 싱글벙글이었다.

첨엔 자기 집이라 그런가 했는데 이제 보니 자기 생일이라서 그런 건가? 많은 것이 수상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도연이다. 현승은 십원빵을 얼른 받아 들고 도연을 살폈다. 도연의 손에도 따끈한 공기가 서린 십원빵이 들려있다. 현승은 뜨거운 빵을 대충 불고 얼른 물었다. 도연아 너도 빨리 먹어 봐. 맛있는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단다.


“호더더~ 호더더~ 이더 데데 마이는데 뜨더따(이거 되게 맛있는데 뜨겁다). 호더더~”


현승의 호들갑에 도연도 호호 불어가며 조심스레 한입 베어 물어 치즈가 끊어질 때까지 쭉쭉 잡아당겼다. 바삭 거리면서 촉촉한 달콤한 빵껍질 안에 맛있게 짭짤한 부드러운 치즈가 가득했다. 오! 진실의 미간! 역시 이미 아는 맛이 무섭다.


“생긴 것보다 더 맛있다. 학교 앞에서 애들 사 먹는 거 볼 때는 그저 그럴 줄 알았는데 진짜 맛있네. 서울 가면 또 사 먹어야겠다.”

“어 도연이 누나, 같이 사 먹어요.”

“호더더더~ 도어이 어어 아 머어바써?”

“진짜 뭐라는 거야? 언니는 똑바로 말해.”


현승은 들숨 날숨을 이용해 입안의 십원빵을 진정시키고 다시 말했다.


“도연이 너 십원 빵 안 먹어 봤어?” 현승은 아무 말하지 말고 십원빵만 먹어야 했다. 그러나...

우와, 너 나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냐?” 최소한 이쯤에서 입을 다물어야 했다.

“봐라, 경주 오길 잘했지. 그치? 나한테 고맙지?” 현승은 산이 아니라 선을 넘었다.


“뭐? 지금 뭐라는 거야? 진짜 말 다 했어?” 원래도 플랫 한 도연의 목소리가 거의 한옥타브 반이 다운 됐다. 그 파장은 현승의 동공에 거대한 지진을 일으켰다.


“왜, 왜 그러는데?”

“언니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사지 멀쩡한 거 어떻게 보면 완전 기적이야. 우리가 언니 때문에 어떤 고생을 했는지 몰라? 아, 기억이 안 나지?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언니가 자기한테 고마워하라는 말을 해?”

“도, 도연아, 뭔지 모르지만 일단 진정하고 미안해. 그래, 내가 사과할게. 진짜 미안해. 그래도 오늘 현동이 생일이잖아. 혼낼 때 혼내더라도 서울 가서, 아니 최소한 현동이 생일 파티 하고 그러고 나서 혼내면 안 될까? 할머니, 할아버지도 현동이 친구 왔다고 저렇게 좋아하시잖아. 아마 현동이 생일이라고 친구 온 거 오늘이 처음일걸?”

 

현승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불쌍한 표정을 짜내어 도연에게 읍소했다. 그게 먹혔을까? 화가 오르려던 도연의 얼굴이 차분해진다. 아니 무언가 정보 처리를 하는 얼굴인데.


“가만 그러고 보니... 언니 수상해. 오늘이 현동이 생일인 거 이미 알고 있는 눈친데 언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나는 오늘이 현동이 생일인 거 여기 오는 길에 처음 들었거든. 언니 술 때문에 필름 끊겼다는 거 다 뻥이지? 언니는 지난밤 언니의 만행을 다 기억하고 있는 거지?”


도연의 추리에는 제법 설득력이 있었지만 틀렸다. 현승은 억울하다.


“아니야. 나 정말 아무 기억도 없어. 나야말로 묻고 싶다. 오늘 현동이 생일이라는 거 도연이 네가 왜 몰라? 우리 OT 가서 현동이한테 들었잖아. 현동이가 목놓아 울면서 말했던 자기 생일이 오늘이잖아.”

“뭐?”

“네? 제가요?”

“뭐야? 현동이 너도 기억 안 나? 정말?”


두 사람은 그럴 리가 없다며 서로를 쳐다봤다. 현승은 더 깊은 억울함이 솟아올랐다.


“우리 OT 갔을 때 현동이 너 선배들이 주는 술 거절 못하고 다 받아 마셨잖아. 그랬지?”

“… 네.”

“그때 네가 그거 다 받아마시고 완전히 맛 가서 눈물, 콧물 콸콸 쏟아가며 엉엉 울었던 거 기억 안 나?”

“네? 진짜요? 제가 울었어요?”

“우와, 나는 네가 창피해서 말 안 하는 줄 알고 일부러 같이 모르는 척 입 다물고 있어 준 건데 진짜 별 일이 없었는 줄 아네. 너 그때 엄청 진상이었어. 자기 존나 불쌍한 애라고 친구도 없어서 친구들이랑 생일파티도 해 본 적 없다고, 친구 집에 놀러 간 적도 없고 누구 데려 온 적도 없다고, 그것 때문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걱정한다고 얼마나 울었는데.”

“에이... 제가요?”

“네! 네가요!”

“언니 무슨 소리야? 나도 현동이 그랬던 거 기억 안 나는데.”

“어라, 임도연. 네가 또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너는 현동이 우는 거 슬프다고 옆에서 살풀이 췄잖아. 슬프면 나오는 무브먼트라고 어쩌고 저쩌고 취해가지고... 우와, 내가 너도 아무 말 안 해서 같이 말을 안 꺼냈더니 너도 그게 필름이 끊긴 거였어? 창피해서 그랬던 게 아니라 여태껏 기억이 안 나는 거였어?”


저절로 어금니에 힘이 들어가 입을 꽉 다문 도연은 그럴 리 없다는 단호함을 유지하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이마에 식은땀이 흐른다.


“말도 안 돼!”

“뭐가? 왜 말이 안 돼?”

“언니는, 언니는 그때 멀쩡했어? 그런 걸 왜 언니만 기억하는데?”

“나? 내가 왜 멀쩡했냐고?”


현승은 지지부진한 설명 대신 도연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어 쌍꺼풀이 잘 보이도록 두 눈을 깜빡였다. 이 쌍꺼풀로 말할 거 같으면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1년 만에 대입에 성공한 기특한 자신에게 스스로 준 선물이었다. 그래서 실밥도 안 푼, 피멍이 든 부은 눈으로 당당하게 OT에 따라갔다. 그러니 혼자만 술 한 방울 입에 안 댔고 멀쩡했을 수밖에.

 

“맞다. 그때 언니 눈.”

“그래, 수술하길 정말 잘했지? 너무 자연스럽고 예쁘잖아.”

“알았으니까 그만 깜빡여. 정신 사납다고 그만하라고. 하, 진짜 현동이가 그랬다고?”

“응, 너는 춤추고.”

“뭐야? 그 말 좀 하지 마.”

“뭐, 굳이 하지 말아 달라 하신다면... 뉘에, 뉘에.”


현승은 쫄은 자에서 당당한 자가 되었다. 혼자서만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줄 알았는데 두 사람도 같이 내려온 것 같으니 굽은 등이 절로 펴졌다.


“아무튼 현동이가 진짜 장난 아니었어. 옷소매로 콧물을 막 닦아가면서 자기 엄마, 아빠는 어릴 때 사고로 돌아가셨고 이후엔 이모네 집에 얹혀살았다고 하면서 울고. 그 이모네도 사업이 부도 났댔나? 암튼 형편이 어려워져서 나가라 그랬다고 울고.”

“저기... 혹시나 하는 말인데 절대로 쫓아내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그때 우리 이모네가 진짜 어려워져 가지고 지금도 엄청 미안해하세요.”

“어어, 그래 알았어. 아무튼 중2 때? 그때 지금 할머니, 할아버지네로 왔다고 했지? 그렇지 현동아?”

“우와... 네. 다 맞아요. 그런데 누나 기억력 엄청 좋네요.”


현동은 자신의 과거사를 제법 정확하게 줄줄 읊는 현승의 기억력에 크게 감탄했다. 비록 직접 말 한 기억은 없지만 저 정도 정확도면 직접 말한 게 맞을 것이다.

현승 누나 의리 있다는 거야 원래 알았지만 입까지 무겁다는 건 새삼 깨닫는다. 가끔 선배들이 잡는 이유 없는 군기도 현승 누나 덕에 가뿐히 넘길 수 있었는데 그것도 다 누나가 일부러 신경 써 준 건가 싶다.


“그전에도 할머니 할아버지는 가끔 봬서 완전히 처음 본 건 아니라고 했어, 그치? 아무튼 그렇게 돼서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잘해드려야 된다고 할 때는 더 크게 대성통곡을 하는데, 이야 진짜 가관이었어.”

현승은 말하면서 고개까지 절레절레 저었다. 

“네가 엄청 구슬프게 우는데 내가 맨 정신에도 따라 울 뻔했잖아. 그런데 왜 안 따라 울었는 줄 알아?”

“아, 왜 안 따라 울었는데요?”

“크크크, 왜겠어. 살풀이 추는 도연이 때문이지.”

“언니!”

“아, 미안미안. 크크크, 아무튼 너네 그 방에 나만 있었던 걸 다행으로 여겨야 돼.”

“아… 그렇네요. 정말 다행이에요. 아야!”


도연이 다행이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현동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오현동. 뭐가 다행이야?”

“아니, 그냥 다행이 다행이라서... 다행인 게... 그래도 현승이 누나가 입도 무겁고... 또...”

“오현동 너 지금 보니까 은근 사연팔이남이었다. 어제 나한테 고백할 때 이런 이야기 처음 말 하는 거라며? ”

“아니에요! 누나 그건 진짜 맞아요! 제가 기억을 못 해서 그런 거지. 진짜! 저는 제 입장에선 그러니까 저의 기억, 그 과거 속에선, 제 인생을 통틀어 누나한테 처음 말 한 거예요.”


현동은 무슨 책을 잡혔길래 저렇게 오두방정 변명을 늘어놓나 싶었지만 뭐 다 괜찮다.

‘그래 나만 그런 게 아니야. 지금도 봐, 얘네도 술 마시고 기억 못 하잖아. 역시 사람은 다 똑같다! 하하하하하!’

여유를 찾은 현승은 십원빵이 더 먹고 싶어졌다.


“현동아, 십원빵 더 없어? 더 먹고 싶은데.”

“아, 제가 가서 가져올게요. 도연이 누나는요?”

“으음, 현동아 아니야. 도연이 너도 더 먹을 거지?”


OT때라면 반년도 더 전 이야기다. 도연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의 살풀이가 생각이 안 나 괴로웠고 다른 한편으론 잃어버린 기억 속 그때의 살풀이가 생각이 날까 봐 또 괴로웠다.

부엌에선 의기양양하기까지 한 현승의 목소리가 들린다.


“할머니, 할아버지 오늘 만난 손녀딸이 십원빵을 또 먹고 싶어요.”


현동은 도연의 어두워진 얼굴이 신경 쓰여 조심스레 도연의 손을 꼭 쥐었다. 자신을 위한 살풀이를 춰줬다는 말까지 들으니 도연이 더 사랑스러워 보인다.

현승은 콧노래가 절로 나올 만큼 기분 좋게 양손에 십원빵을 하나씩 들고서 돌아왔다. 할아버지가 치즈가 녹으라고 더 뜨겁게 데워줬으니 아까만큼, 아니 아까보다 더 맛있을 것이다.


“너네 왜 손잡고 있어?”


방금 전까지 들리던 현승의 콧노래는 임도연과 오현동이 다정하게 손 잡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뚝 끊겼다. 몹시 생경하다. 이 정도 놀라는 반응을 보였으면 잡은 손을 놓을 만도 한데 두 사람 얼굴은 계면쩍어하면서도 잡은 손을 더 잡는다.


“손깍지? 너네 왜 손깍지를 껴? 그건 사귀는 사람들끼리 하는 짓이야.”

“응, 알아. 그러니까 잡는 거야.”


“그러니까 잡는다고? 어라, 너네 웃어? 도연아 너 웃는 거야, 그런 거야?”

도연은 입을 앙 물어 올라가는 입꼬리는 잡을 수 있었지만 웃는 눈만큼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와, 진짜 섭섭하다. 차라리 내 장기를 팔겠다고 해. 어떻게 둘이 사귀는 걸 나한테 숨겼냐?”

“무슨 말도 안 되는 장기팔이 소리야. 특별히 숨길 마음은 없었어. 그러니까 이러고 있지.”

“그래, 아까 도연이 네가 현동이 고백 어쩌고 할 때 뭔가 이상 했어. 맙소사, 언제부터야? 도대체 언제부터냐고?”

“… 음, 어젯밤부터.”


어젯밤이라니. 현승의 기억엔 없는 밤이다. 하필 사랑하는 두 친구의 역사적인 순간 바로 그 어젯밤이라니. 현승은 오늘 처음 스스로에게 섭섭했다.


“그러니까 너희들. 내가 잠든 사이에 사귀기로 한 거야?”

“뭐? “

“왜?”

“언니를 깨우긴 뭘 깨워. 언니는 차라리 자주는 게 우리를 도와주는 거였다니까. 지금 우리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돼. 우리가 어쩌다 사귀게 됐는데. 이거 다 언니 때문이라고.”

“그래, 그러니까 내가 잠든 사이에.”

“정확하게는 '언니가 잠든 사이에'가 아니고 '언니가 취한 사이에' 거든.”

“취, 취한 사이… 아무튼 다 내 덕이란 말이지?”

“언니, 말을 자꾸 이상하게 하는데 우리 이렇게 사지 멀쩡하게 있는 거 완전 기적이야. 특히 어제. 서울에서 여기까지 죽을 고비를 몇 번을 넘겼는데. 내가 정말 그 휴게소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진짜!”

도연은 갑자기 울컥할 것 같아 말을 멈췄다.

“누나, 괜찮아요?”

“응, 괜찮아. 아무튼 그러다 보니 어떤 뜨거운 동지애 같은 게 생겨났다고나 할까? 진짜 그 전쟁터에서 피어난 전우애 알지? 그러니까 다 언니 때문이라고. 그 전쟁터를 다 언니가 만들었거든.”

“아니, 누나 저는 아니에요. 동지애가 아니고 그전부터... 저 어제 누나한테 말한 거 다 진심이라고요.”

“알아, 알아. 나도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야.”

 

도연의 얼굴에 따듯한 봄날과 살벌한 혹한기가 번갈아 가며 나타난다. 현승은 갑자기 서글퍼졌다.


“그럼, 네들 앞으로 나랑은 안 놀아 주겠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니, 네들 사귀면 또 둘만의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내가 멀리해줘야 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무슨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해.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고 언니는 술이나 끊어. 술만 끊으면 앞으로도 원 없이 놀아줄게.”

“술을? 왜? 놀아준다며, 그런데 술을 끊으면 뭐 하고 놀아?”

“아니, 이 언니가 지금까지 무슨 소리를 들은 거야? 우리 어제 진짜로 죽을 뻔했다니까. 진짜 휴게소 이야기 해 줘?”


이것은 잔인한 딜레마다. 술과 사랑하는 친구들을 저울질할 것을 강요당하다니.


“도연아, 십원빵 더 먹자.”

“십원빵 타령 그만하고. 술 끊을 거야, 안 끊을 거야? 끊을 거지? 약속하는 거지? 진짜 언니 위해서 하는 말이야. 이러다 뭔 사달이라도 날까 봐 걱정이라고.”


현승은 대답 대신 들고 있던 십원빵을 말하는 도연의 입에 쑥 넣었다. 도연이 갑작스레 들어온 십원빵을 씹는 사이 다른 손의 십원빵은 현동에게 넘겼다. 그리고 부엌으로 쪼르르 갔다. 십원빵이 그렇게나 좋은가? 투스텝을 걷는 발걸음에서 신남이 묻어난다.


“할머니 역시 원조는 뭐가 달라도 다르네요. 십원빵은 역시 경주가 최고예요.”

“어머, 십원빵 원조가 경주였어? 제성 씨도 알았어?”

“나도 몰랐지. 그냥 젊은 애들이 좋아한다길래 사 와 본 건데 잘 됐구먼.”

“역시 우리 할아버지 센스가 만점이십니다! 제가 서울 강남, 강북, 강동, 강서, 월미도 십원빵 다 먹어 봤는데 여기 할아버지의 경주가 최고예요.”

“아이고, 나도 우리 손녀딸이 최고예요.”

 

현승은 기뻤다. 가장 아끼는 두 사람이 드디어 사귄다니. 더군다나 두 자매의 막내딸인 현승의 친동생 같은 현동이의 생일이 그들의 1일이다.

서로를 향한 두 사람의 마음을 진작에 눈치챘던 현승은 둘이 언제쯤 사귀려나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판을 깔아줘도 속마음을 쉽게 드러내지 않으니 보기에 참으로 답답했다. 그러니 가끔은, 아니 종종 어제처럼 너무 마음만 앞서 술이 과한 날도 있었지만 이제 뭐 다 괜찮다. 돌아 돌아 경주까지 와 결국 이런 날을 맞이하지 않았는가.


현승의 경주는 오늘부터다.











경주. by 옥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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