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은 연애> 서른한 번째 이야기
“목원님은 인생 영화가 뭐예요?”
“네? 인생 영화요?”
“네. 목원님의 인생 영화.”
“음…”
인생 영화라는 단어에 목원의 눈살을 찌푸려진다. 내뱉는 ‘음’ 소리의 길이만큼 그의 양미간이 점점 모이고 원래도 깊었던 눈이 더 깊어졌다. 반대로 볼에는 바람을 빵빵하게 넣는다. 바람이 윗입술과 윗잇몸 사이까지 차올라 인중이 한껏 들리고 덩달아 코끝까지 들렸다. 목원은 있는 힘껏 자신의 얼굴을 못생기게 만들었다.
“소정님, 인생 영화란 건… 뭘까요?”
드디어 얼굴에서 바람을 뺀 목원이 되물었다.
“네? 그러니까 인생 영화란 게 뭐냐면… 목원님 취향이요. 그냥… 목원님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제일 최고로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영화? 아니면 제일 좋아하는 영화, 아니면 목원님한테 제일 큰 영향을 준 영화? 뭐 그런 거… 요? 아니 저는 목원님이 워낙 영화를 좋아하시니까 궁금해서.”
“그렇다면… 질문이 너무 포괄적인 거 아닌가요?”
“네? 포괄적이요?”
“… 인생 영화의 숨겨진 뜻이 그렇게 다양하다면.”
“숨겨진 뜻이요?”
“네. 숨겨진 뜻, 의미요. 그러니 제가 대답할 수 있으려면 정확하게 소정님이 어떤 게 궁금한 건지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제일 최고인 영화가 궁금한 건가요? 아니면 훌륭한 영화가 궁금한 건가요? 최고라고 해서 혹은 최고라고 불린다고 해서 그게 곧 훌륭하다는 뜻은 아니니까 이 두 개는 나눠야겠죠?”
“네, 네.”
“자, 그런데 최고의 영화, 훌륭한 영화, 제일 좋아하는 영화와 가장 큰 영향을 준 영화가 모두 같은 영화, 한 영화가 되는 건 어려운 일일 거예요. 그렇죠? 물론 누군가에겐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저는 그러지 않거든요. 각자 뜻하는 바가 다르니 이 중에 어떤 것인가에 따라서 저의 영화는 달라질 거예요.”
“그, 그렇죠. 뭐, 굳이, 그렇게 따지자면…”
“그러니 소정씨가 인생 영화라고 물어보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최고의 영화인지, 아니면 훌륭한 영화인지, 아니면 제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인지, 그것도 아니면 제가 가장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영화인 건지, 그걸 알아야 거기서부터 생각을 시작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네? 생각을… 시작할 수 있다고요?”
“네. 그것도 일단 시작이 그런 거고요. 사실 그 시작점 만으로는 부족하죠. 당장 후보군에 오르는 영화들만 해도 여러 편일 테고. 그리고 그다음 조건을 물어볼 수도 있고. 이 문제를 쉽게 답할 수 없는 것이 이 중에 하나를 골라서… 예를 들어 제일 좋아하는 영화라고 가정한 후 대답하려고 해도 제가 어제 좋아한 영화와 오늘 좋아하는 영화가 달라질 수도 있고, 또 내일 새로운 영화를 발견해서 마음에 들어 할 수도 있거든요. 그걸 ‘최근 3년 전에서 오늘 이 시각까지 본 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영화’라는 단서를 붙인다고 해도 좋아한다는 것이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수 있잖아요. 제가 중학교 때 좋아했던 영화만 해도, 그 시절엔 감정의 진폭이 매우 커서 좋아하는 영화가 수시로 바뀌었거든요. 볼 때마다 업데이트되었던 시절도 있었으니까요. 좋아한다는 건 일종의 감정이고 그 감정을 채워주는 혹은 그 감정에 부합되는 영화를 보면 그 각각의 순간엔 그 각각의 영화가 좋아졌으니까요.”
“아… 그게 그렇게 될 수 있구나…”
“그리고 좋아한다는 것이 어떤 건인지 생각해 볼 필요도 있겠죠.”
‘홉 주고 가마니로 받는다.’ 소정은 그저 인생 영화가 무엇인지 짧은 질문 하나만 던졌을 뿐인데 돌아오는 답은 쓰나미다. 머리가 아주 어질어질하다.
“음… 소정님은 가장 좋아하는 안주가 뭐예요?”
쓰나미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갑자기 안주 질문이 훅 들어온다.
“안주? 술안주요?”
“네.”
“그건… 안주니까 무슨 술을 마시느냐에 따라서… 바뀌는 건데.”
“무슨 술을 마시느냐… 그럼 술은요? 무슨 술을 가장 좋아하세요?”
“아, 그거야 말로 뭐 그날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하거나 같이 마시는 사람들 분위기, 혹은 술을 찾게 된 이유라던가, 가끔은 반대로 어떤 안주가 먹고 싶어서 술을 찾을 때도 있긴 하지만. 요새는 동동주나 막걸리가 좋긴 하지만 가끔은 맥주가 땡길 때도 있고…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아주 가끔은 소주 생각이 날 때도 있고… 와인도 그래요. 와인만 해도 종류가 너무 많아서… 아?!”
목원이 양 입꼬리를 올리고 양 눈꼬리를 내리면서 얼굴을 찡그리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목원님 저 약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요.”
“네. 물론 완전히 같은 맥락으로 볼 수는 없겠지만 저한테는 상당 부분 그와 유사한 맥락이 있다고 볼 수 있거든요. 그래서…”
“잠깐, 그럼 제가 질문을 바꿔 볼게요.”
계속 말하려던 목원은 질문을 바꾸겠다는 소정의 말에 바로 입을 닫았다. 소정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단서를 붙여 질문을 던졌다.
“자, 목원님이 중학교 때 본 영화 중에 아직도 문득문득 생각나는 영화는? 단 청소년관람불가! 물론 여러 개여도 상관없습니다만.”
목원의 눈이 반짝 빛난다. 질문을 한 소정의 눈도 빛났다. 경우에 따라 짓궂은 질문이 될 수 있음에도 소정의 얼굴엔 신남이 번졌고 목원의 얼굴엔 진지함이 감돌았다. 목원은 잠시 콧구멍을 벌룸거리고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TV 퀴즈쇼’에 나오는 게스트가 된 것처럼 물음에 답 할 단어를 고르고 소리가 없는 마음속 부저를 누른 후 답을 말했다.
“‘스타쉽 트루퍼스’!”
“오! 폴 버호벤 ‘스타쉽 트루퍼스’?”
소정은 드디어 단답을, 어떤 한 영화의 제대로 된 제목을 얻은 것에 기쁨을 느꼈다. 그리고 잠시 멈칫했다. ‘스타쉽 트루퍼스’가 청불이었던가? 소정은 대학생이 된 후에 이 영화를 봤다. 이 영화가 많이 잔인했었나? 기억을 더듬어보니 19금 장면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그게 청소년들에게 관람을 허락하지 않을 만큼 야했던가? 소정은 이 영화의 인상적이었던 씬 몇 군데가 떠올랐다. 목원이 이 씬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져 물어보고 싶어졌다. 그러나 아쉽게도 대답을 듣진 못 했다.
“뭐야? 둘이서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해?”
최수진님이다. 그녀가 휴게실로 불쑥 들어왔다. 점심으로 마제소바가 땡긴다던 수진은 소정에게 같이 먹으러 가자고 했었지만 소정은 오늘 도시락을 챙겨 와서 같이 갈 수 없었다. 수진이 목표한 대로 마제소바를 먹으러 갔다면 분명 회사 근처 S일본라면 집으로 향했을 텐데 그 집은 평소 웨이팅이 길기로 악명이 높다. 점심시간이 끝나려면 아직 30분 정도 더 있어야 하는데 벌써 돌아오다니. 오늘은 웨이팅이 짧았나? 수진은 소정 옆자리의 의자를 빼더니 배가 부르다며 털썩 앉는다.
“‘스타쉽 트루퍼스’가 왜?”
“아, 수진님도 이 영화 보셨어요?”
“그럼, 그런데 그게 왜?”
이 타이밍에 목원은 아무 말없이 조용히 일어나더니 캡슐 커피를 내리기 시작한다. ‘스타쉽 트루퍼스’에 관해선 위치 변화를 가지지 않은 소정이 설명을 이어갔다.
“아, 제가 좀 아까 목원님한테 인생 영화가 뭔 지 물어봤었거든요. 그래서 처음에…”
“어머, 그럼 목원님 인생 영화가 ‘스타쉽 트루퍼스’야?”
“아니, 그게 아니라요 처음에 그렇게 물어보긴 했는데, 그러다가…”
“목원님 그렇게 안 봤는데 SF장르 좋아하는구나. 의외다. 나는 되게 예술 영화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스타쉽 트루퍼스’ 면 외계인하고 싸우는 거잖아. 그게 어떻게 인생 영화가 됐을까?”
“외계인이요? 외계인인가? 하긴, 외계인일 수 있지. 아무튼, 수진님 그게 아니라요...”
소정은 점점 스스로가 난처해지는 것을 느꼈다. 중요한 몸통은 쏙 빠져 있고 머리와 꼬리만 남아 있으니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목원의 쓰나미 같았던 대답을 옮겨보려니 엄두가 안 난다. 꼬리만 이야기했어야 했나? 어떻게 요약이라도 해봐야 할까? 머리를 굴리고 굴려 쓰나미를 복기해 보았지만 역시 어렵다. 쓰나미는 작은 물줄기로 바뀌기는커녕 더 큰 쓰나미가 되어 머릿속 여기저기를 휩쓸기만 한다.
“내 인생 영화는 ‘라라 랜드’인데.”
“아, 네… 네?”
“‘라라 랜드’, 설마 ‘라라 랜드’를 몰라?”
“아, 알죠.”
”나는 뮤지컬 영화를 좋아해. 너무 아릅답잖아. 그리고 너무 감동적이었어.”
‘스타쉽 트루퍼스’에 관한 오해를 풀어야 하는데 갑자기 ‘라라 랜드’라니. 그냥 이대로 넘어가도 되는 건가? 소정은 목원이 못내 신경 쓰여 곁눈질로 힐끗 그를 보았다. 심드렁한 표정의 목원은 이쪽 사정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소정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앉아 있던 소정의 맞은편 자리로 돌아오지는 않고, 캡슐 머신 앞에 그대로 서서 방금 내린 뜨거운 커피를 목구멍으로 넘기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수진은 ‘라라 랜드’가 정말 좋았는지 ‘좋았다는 말’과 ‘감동적이었다는 말’만 계속 반복했다. 소정은 반사적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라라 랜드’가 왜 좋은 지에 관해 같은 칭찬을 다섯 번쯤 반복해 듣고 ‘라라 랜드’ O.S.T에 관해 비슷한 이야기를 세 번쯤 들었을 때였다.
“저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목원이 몇 발자국 걸음을 옮기더니 가벼운 목례를 했다. 소정이 눈알을 조용히 굴려 목원의 커피잔을 티 안 나게 확인했는데 아직 커피가 많이 남아 있었다.
“응. 들어가요, 목원님.”
수진의 친절한 하이톤 목소리가 휴게실에 울린다. 소정은 목원의 ‘스타쉽 트루퍼스’에 관해 제대로 못 들은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일단 꾸벅 목례로 답했다. 목원이 있던 캡슐 머신 앞에 어느새 수진이 가 서 있었고 수진도 커피를 내렸다.
“소정님도 커피 마실래?”
“아, 저는 마셨어요.”
소정은 앞에 있던 잔을 살짝 들어 올려 컵의 바닥에 깔린 커피를 보여주었다.
“아휴, 정말 커피는 핸드 드립인데, 소정님 내가 내린 핸드 드립 커피 마셔봤었나?”
“아… 아니요. 제가 사실 ‘커알못’이라.”
“진짜? 너무 안타깝다. 내가 지원님은 몇 번 내려줬는데. 커피는 핸드 드립이야. 향이랑 맛이 다르다구.”
수진은 소정보다 5살 위다. 그래서 '님'자 호칭과 반말을 혼용해서 쓰고 있다. 물론 수진만 그런 것은 아니고. 소정보다 나이가 많은 다른 몇몇 분들 중에는 수진처럼 이렇게 혼용하는 분들이 있고, 또 다른 몇몇 분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혼용하지 않고 있다. 전부 ‘케바케’다. 이러하니 소정은 이 회사가 굳이 '님'자 호칭 사용을 고집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할 때가 있기도 하지만… 그러다가 종국엔 그러려니 하고 넘긴다. 소정은 생각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결국엔 ‘호칭 사용’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소정님, 그런데 말이야, 아까 목원님이랑은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길게 한 거야?”
“네?”
“아니, 나는 주목원님이 그렇게 말 많이 하는 거 처음 봤잖아.”
“아… 그런 가요?”
“뭔 이야기를 했는데?”
“음, 그냥 ‘스타쉽 트루퍼스’…”
막상 멍석이 깔리니 소정은 설명이 귀찮아졌다. 방금 전, 목원님의 태도로 봐서 본인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으니. 소정은 말 끝을 흐려 시간을 끌다가 컵 바닥에 깔린 식은 커피를 마저 마셨다. 커피의 양이 너무 적어 커피가 금세 사라졌다. 계속 고개를 젖힌 채 컵 안의 공기도 마셨다.
“그런데 소정님, 나는 목원님… 사람이 쫌… 그렇더라.”
“네?”
“아니, 지금도 봐봐, 사람이 들어왔는데 그냥 뚱한 얼굴만 해가지고 고개만 까딱거리고, 말도 항상 자기 필요한 말만 하고. 뭔진 모르지만 아까 소정님한테 길게 말한 것도 그렇게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을 거야. 그렇지?”
“아… 그게 그런 건 아닌데요…”
“어머, 소정님이 너무 착해서 그래. 어떻게 그걸 다 듣고만 있니. 가만 보면 너무 오냐오냐 해주는 경향이 있다니까. 사람은 할 말이 있을 땐 똑 부러지게 해야 되는 거야. 사회생활 그렇게 하면 호구 잡혀.”
아, ‘스타쉽 트루퍼스’의 오해는 오해도 아니었구나. 소정은 수진이 진짜 궁금한 건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듣고 싶은 말 대신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이다. 수진이 의자를 당겨 앉으며 말소리를 낮춘다. 문 밖에서 누군가 엿듣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 것처럼 비밀 이야기하 듯 점점 다가온다. 소정은 반대로 허리를 쭉 폈다.
“아니 왜, 그때 소정님 있지 않았나? 없었나?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 그때 말이야.”
“그때요? 언제요?”
“그때, 왜 그 무슨 영화더라… 그 왜 디자인팀에 황연수님이.”
“황연수님이요? 아, 아닌데. 한이요. 연수님은 황연수가 아니고 한연수님이에요.”
“어머, 그래? 황이 아니고 한이야? 뭐, 그래. 아무튼 그 연수님이 말이야, 저번에, 언제더라, 왜 ‘시나몬 롤’이라고 가져온 적 있었잖아. 기억 안 나? 몰라? 그때 분명히 소정님도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튼 그때 연수님이 자기가 그 ‘시나몬 롤’을 직접 만들었다고 먹어보라고 하면서 무슨 영화 이야기도 했었잖아. 뭐였지? 뭐였더라?”
“… ‘카모메 식당’이요?”
“그래, 그 영화.”
소정은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 자리에 있었다고 말하진 않는다.
“그때 목원님도 있었거든.”
“아.”
수진의 기억이 맞다. 그때 목원도 있었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수개월 전, 장소는 이곳 휴게실. 소정은 그날의 이곳을 매우 선명하게 기억한다. 방금 전까지 목원과 수정이 앉아 있었고 현재 수진과 소정이 앉아 있는 이 테이블에 소정, 수진, 목원, 연수, 그리고 프로그램팀의 지원 이렇게 5명이 앉아 있었다. 테이블 중앙에는 연수가 만들어 온 ‘시나몬 롤’이 있었다. 먹기 전에 에어프라이로 데웠던 터라 향이 기가 막혔다. 달콤한 계피향이 솔솔 났고 그 뒤를 고소한 버터향이 바짝 뒤따랐다. 건포도가 듬뿍 들어간 게 보였고 슬라이스 된 아몬드도 아낌없이 뿌려진 게 보였다. 테이블의 5명 중 소정을 제외한 4명은 ‘시나몬 롤’을 먹었다. 소정은 반 발자국 물러나 앉아 있었다. 소정은 계피향은 좋아하지만 계피향이 나는 베이커리를 맛보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애플파이’도 안 먹는다.
“연수님이 그때 그릇까지 챙겨 왔었잖아. 그게 그 영화 ‘카모메 식당’에 나오는 그릇이라고.”
연수는 영화 속 ‘카모메 식당’ 분위기를 꼭 내보고 싶었다며 영화 속, 오니기리를 담아냈던 ‘ARABIA 핀란드 AVEC 접시(영화 속에 나오는 것과 같은 블루패턴)’,를 가지고 왔었다. 영화 ‘카모메 식당’의 인기 때문인지 당시에는 쉽게 구할 수 없는 접시였다. 그런데 실물을 영접하게 되다니 소정은 ‘시나몬 롤’보다 접시에 더 눈이 갔다. 연수는 그 접시를 아는 지인을 통해 ‘세컨드 핸드 숍’에서 구입했다고 했다. 많이 아끼는 접시라며 뽕뽕이로 여러 번 둘러서 가지고 왔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포장을 풀려고 보니 너무 꼼꼼히 붙인 테이프를 떼어 내는 게 쉽지 않았다. 그때 소정이 커터칼을 빌려줬었다. 연수는 최대한 뽕뽕이가 다치지 않도록 조심조심 컷팅했다. 접시를 다시 집에 가져갈 때 사용해야 할 소중한 뽕뽕이이므로.
“소정님도 그 영화는 본 거지? 그럼 그 영화에 나오는 그릇들 비싸다는 거 알아?”
“아… 네, 뭐 대충?”
‘아, 그때 그거 때문에 이러는구나.’
수진은 연수의 ‘시나몬 롤’을 먹으며 “다들, 거기 알아?” 홍대 앞에 자신이 잘 가는 맛집 이야기를 시작했고, 그 집 ‘시나몬 롤’이 진짜 ‘시나몬 롤’이라는 이야기를 한참 했고, 끝으로 연수의 ‘시나몬 롤’이 자기 입 맛에는 좀 달지만 그래도 꽤 먹을만했다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연수가 가져온 접시를 비싼 그릇이라며 지금과 거의 비슷하게 말했었다. 물론 웃으면서.
“‘카모메 식당’, 그 영화에 나오는 그릇들 비싼 거잖아. 브랜드.”
그때 연수는 별 대답 없이 미소만 지었다.
“연수님, 이거 거의 10만 원 넘게 주고 산 거지? 그렇지?”
연수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대충 긍정의 의미인 것 같은 미소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좀 재밌다는 생각 안 들어? 영화는 소박한 힐링 라이프를 하자고 하면서 그릇들은 왜 이렇게 비싼 걸 쓰는 거야.”
수진은 말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없이 듣기만 했던 소정은 속으론 의아했다. 순간 수진이 ‘카모메 식당’을 제대로 봤는지 궁금해졌다. 영화는 배경이 핀란드 헬싱키이고 ARABIA는 핀란드 브랜드. 눈앞의 접시는 거기선 핀란드, 국산 접시다. 그러니 다른 나라인 우리나라만큼 구하기 힘들지도 않을 테고 그만큼 비싼 가격일리도 없다. 아니면 혹시 ‘소박’이란 단어를 ‘가성비’로 치환해서 소박하다면 정말 저렴한 가격의 그릇을 사용했어야 했다고 말하는 걸까? 그래도 그렇지 명색이 식당인데 ‘다이소’ 같은 데서 구입한 식기를 쓸 수는 없다. 물론 핀란드에 ‘다이소’ 같은 매장이 있는지 없는지 소정은 알지 못한다. 아무튼 그러한 배경에서 그러한 식기를 쓴 것을 왜 저렇게 표현하는 걸까? 흠… 설마, 아닐 거다. 눈앞에 접시가 비싸다는 걸 영화랑 같이 뭉퉁그려서 표현한 거겠지… 혹은 영화를 따라 한다고 접시까지 구매한다는 건 일종의 허세라고 지적해 보고 싶은 걸까? 설마, 저걸 농담으로 포장된 정곡을 찌르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입 밖으로 꺼내면서 자신이 통찰력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니겠지? 소정은 생각만 할 뿐 이 궁금증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사실, 수진이 ‘카모메 식당’을 제대로 봤는지 궁금해진 진짜 이유는 다른데 있다. 수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모메 식당’을 자신의 인생 영화라며 양껏 칭찬을 늘어놓았는데 계속 ‘힐링’과 ‘슬로 라이프’라는 단어만 반복하고 있었다. 중간중간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신의 안타까운 현실을 곁들이면서. 대신 수진의 영화에 대한 찬사 속엔 ‘가차맨’도, ‘고양이’도, ‘숲’도, ‘버섯’도, ‘사우나’도 혹은 영화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어떤 장면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직접 언급되지 않았던, 그저 영화 속 분위기에 걸맞게 쓰였던 어떤 소품의 현 우리나라 시세는 알고 있으면서 다른 디테일은 전혀 언급이 없었다. 평소 ‘핸드 드립’과 ‘커피 원두’라는 이슈만 나오면 반드시 말이 길어지는 수진이므로 최소 극 중 나오는 ‘커피 루왁’ 혹은 ‘코피 루왁 주문’ 이라도 언급할 줄 알았는데 안 했다.
물론 소정은 이 궁금증 또한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저 연수보다 더 조용히 미소만 짓고 있었다. 오직 지원만이 ‘카모메 식당’을 극찬하는 수진을 극찬했다. ‘카모메 식당’이 그렇게 좋은 영화인 줄 몰랐다며 자신은 아직 못 봤는데 꼭 보겠다는 숙제 같은 약속도 하면서.
목원은 그때도 먼저 일어났다. 대신 지금과는 달리 말을 좀 더 길게 했다.
“수진님, 언제 기회가 되시면 핀란드 여행을 해 보세요.”
“목원님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무슨 핀란드 여행? 왜?”
“접시요, 현지에 가면 그렇게 안 비싸요.”
“… 뭐?”
“그리고 이왕이면 거기까지 가신 김에 숲에도 들어가셔서 빛나는 황금 버섯도 캐 보시고요.”
“빛나는 황금 버섯?” 수진의 눈가에 당황, 아니 희미한 불쾌감이 번졌다. “그런 버섯도 있어? 무슨 독버섯은 아니지? 왜 나더러 숲에 들어가 보라고 하는 거야?”
“핀란드에 가면 있는 버섯이에요. 독버섯은 아니고요. 연수님, ‘시나몬 롤’ 정말 잘 먹었었습니다. 진짜 향이며 맛이며 너무 좋았습니다.”
“진짜요? 목원님 너무 고마워요.”
미소만 짓고 잠자코 만 있던 연수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저는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목원은 이미 자신이 머물렀던 자리를 깨끗하게 치운 후였다. 목원이 나가고 얼마 안 있어 급격하게 말이 없어졌던 수진도 나갔다. 수진은 나가기 전 뭔가 중얼거렸는데 목소리가 너무 작아 무슨 말을 했었는지 소정은 듣질 못 했다. 궁금했는데. 지원은 같이 못 치워줘서 미안하다며 수진을 얼른 쫓아 나갔다.
“어?! 소정님, 제가 치울게요! 소정님은 ‘시나몬 롤’도 안 드셨잖아요.”
연수가 테이블 정리를 하다 ARABIA 접시를 개수대로 옮기려는 소정을 다급하게 말렸다.
“에이 제가 먹기 싫다고 거절한 건데요. 그러니까 제가 미안해서 그릇만 닦아 드릴게요. 진짜 소중하게, 예쁘게.”
“아니 소정님이 뭐가 미안해요? 진짜 아니에요.”
“뭐가 아니에요. 저도 덕분에 ‘카모메 접시’를 영접해 보잖아요. 저 맨날 SNS로 눈팅만 했단 말이죠. 실물 보니까 진짜 예쁘네요.”
“진짜요? 저 진짜 고민고민해서 큰맘 먹고 산 건데… 소정님, 예쁘다고 해줘서 너무 고마워요.”
“예쁜 걸 예쁘다고 하는데 뭐가 또 고마워요. 연수님도 참, 크크크.”
결국 접시는 주인인 연수가 설거지했고 소정은 옆에서 물기를 닦고 뽕뽕이로 다시 감싸는 것을 거들었다.
그날 이후에도 연수는 몇 번 더 ‘시나몬 롤’을 만들어 왔다. 처음 재료를 구입할 때 너무 많이 구입해서 재료 소진을 위해선 어쩔 수 없다고도 했다. ARABAIA 접시는 더 이상 가져오지 않았다. 대신 소정에게 편의점 삼각김밥을 담고 찍은 예쁜 접시 사진을 보여주었다. 연수는 웃으면서 “다 좋은데, ‘우메보시 오니기리’는 제 입맛엔 안 맞더라고요. 역시 삼김은 참치마요예요.”라는 말도 덧붙였다.
“소정, 소정님! 지금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네? 수진님 뭐라고요?”
“주목원님 말이야. 사람이 이상하다고.”
“아…”
“글쎄, 나더러는 핀란드 여행을 해 보라더니 자기는 거기 가 보지도 않은 거 있지.”
“아…”
아마 수진의 말이 맞을 것이다. 평소 목원은 여행을 즐기지 않는다고 말해 왔었다.
“요새 같은 바쁜 세상에 누가 1배속으로 봐? 그리고 나는 지루한 것도 못 참아. 그래서 다른 일도 하면서, 바쁘니까, 주로 2배속으로 보거든. 필요 없는 구간은 Skip도 하고. 게다가 나는 자막을 안 봐도 대충 이해할 수 있거든.”
“아… 네…”
“나 어릴 때 일본 살았던 거 알지? 그래서 내가 일본어가 되거든. 영어는 연수 경험이 있고.”
소정은 또 궁금해졌다. 언어랑 상관없이 다른 일을 하면서 2배속으로 보다가 중간중간 Skip까지 하면서 본 것을 정말 제대로 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본 거라고 할 수 있다. 소정도 가끔 그렇게 한다. 하지만… 말하는 걸 들어보면 거의 제대로 본 장면이 없는 것 같은데… 그런데 본인은 봤다고 하니까… 믿긴 믿는데… 그런데 요컨대 2배속과 Skip이 문제가 아닌 것 같아서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2배속과 Skip을 그냥 가져다 쓰기 편리한 핑곗거리로 소비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궁금했다. 저 사람은 ‘본다, 시청한다, 감상한다’라는 행위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러나 아무리 궁금해도 절대 물어보지 않았다. 물어보지도 않을 것이다.
“아무튼 목원님 좀 이상해. 가만 보면 다른 사람들은 어려우니까 꼭 소정님한테만 뭐라고 하잖아. 그게 다 소정님을 만만히 보니까 그러는 거라고.”
“아, 하하, 네…”
마침 점심 휴식 시간이 끝났고 소정은 냉큼 자리로 복귀했다.
[소정님, 식사 맛있게 하셨어요?]
소정의 메신저 창에 반짝 1이 떴다. 누군가 봤더니 연수였다.
[네 연수님도 식사 맛있게 하셨어요?]
[네, 오늘 새로 생긴 샐러드볼 가게 다녀왔어요. 완전완전 제 입맛이었어요]
[오! 연수님은 마제소바 먹으러 안 갔나 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라면집 오늘 문 닫았더라고요. 사장님이 어디 가셨데요.]
[헐! 대박! 진짜요?]
[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먹고 싶은 거 먹어서 다행이다. 그나저나 연수님 요새 게을러지셨어요]
[앗 왜요?]
[휘낭시에 먹고 싶은데 소식이 없네요. ㅠㅡㅜ 정말 너무너무 맛있었는데 저 연수님이 만들어 준 휘낭시에 먹고 나서 다른 휘낭시에는 못 먹는단 말이에요 ㅠㅡㅜ]
[앗! ㅍㅎㅎㅎㅎ 거짓말?!!! 그래도!!!!!!!! 다음 주에 만들어 올께요!!!!!!!! 재료 많아요!!!!!!]
[오예!!!!!!!!! 그럼 저는 또 커피를 쏘겠습니다!!!!!!!!!!!!]
[ㅎㅎㅎㅎ 그런데요, 소정님. 아까 휴게실에 목원님이랑 너무 신나게 대화하고 계신 거 같아서 저 일부러 휴게실 안 들어갔었어요 ㅎㅋㅋㅎㅎㅎㅎ]
[헐, 아니, 왜요? 그러면 어떡해요? 저희 때문에 커피도 못 마신 거 아니에요? 그냥 오지 왜 그냥 갔어요?]
[아니에요 커피는 밖에서 사 먹었어요. 요 앞에서 연유라테 먹었어요]
[헐 샐러드로 까먹은 거 연유라테로 보충했군요 ㅋ]
[ㅋㅋㅋㅋㅋㅋㅋㅋ 네]
[그런데요 소정님, 진짜 무슨 이야기하신 거예요? 저 진짜 목원님이 그렇게 말 많이 하는 거 처음 봤어요!!!!! ㅋㅋㅋㅋ 완전 입 터진 줄!]
[네? 진짜요?]
[네! 진짜요!]
아까 수진도 그렇게 말했던 것 같은데 연수까지 이렇게 말하다니. 소정은 웅크리고 있던 자세를 바로잡아 허리를 곧게 세웠다. 고개를 살짝 드니 업무에 집중하고 있는 목원의 뒷모습이 보인다. 소정은 방금 전 자신의 행동을 하나하나 반추해 보았다. 무언가 실수했나? 아마도 더 쉽게 가도 되는 것을 부러 어렵게 간 거 갔다. 하, 인생 영화라니… 어쩌면 목원의 영화 취향은 그렇게까지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정말 어쩌면.
비록 단 두 사람의 의견이었지만 이것만으로도 용기를 내어 보기로 했다. 소정은 연수와의 메신저 창을 옆으로 미뤄두고 메신저 대화 목록에서 목원의 이름을 두 번 클릭했다. 창이 열렸다.
[목원님!]
이름 뒤에 느낌표를 왜 붙였지? 마침표를 붙이거나 ^^ 표시, ~ 붙여야 했나 싶었으나 이미 목원이 읽은 후였다. 보내자마자 1이 사라졌다. 특별히 자세 변화는 없어 보였는데 엄청 빨리 확인한 것이다. 답도 바로 받았다.
[네 소정님.]
소정은 큰 숨을 길게 들이마시고 더 길게 내쉬었다. 심장이 너무 나댔기 때문이다. 미처 고려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심장이 너무 나대서 숨쉬기로 잡아 보려는데 잡히질 않는다. 잡을 수 없다. 심장이 좀 진정돼야 메시지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무리 들숨 날숨을 반복해 봐도 심장은 심장대로, 호흡은 호흡대로 따로 논다. 그러니 어쩌면… 소정은 일부러 숨을 오래 들이마시고 더 오래오래 내 쉬는 건 지도 모른다. 그러는 사이 목원에게서 또 메시지가 왔다.
[소정님, 왜요? 무슨 일이신데요? 궁금합니다.]
궁금하다고? 하, 그렇다. 부르고 대답 안 하는 거 좋지 않은 일이다. 소정은 더 이상 숨 쉬는 걸로 시간 낭비를 않기로 했다. 그래야 한다. ‘칼을 뽑았으면 무를 썰어야 하고 메신저 창을 열었으면 하고자 하는 문장을 보내야 한다!’ 소정은 본인 스스로 갖다 붙여 만든 이 어이없는 문장에 웃음이 났다. 그러면서 그 사이 여러 번 고치고 또 고쳐 심사숙고해 타이핑 한, 하고자 하는 문장을 보냈다.
[목원님^^ 오늘 퇴근하고 저랑 영화 볼래요?^^]
[네. 좋아요.]
즉문즉답. 대답이 바로바로 돌아온다. 의외다. 아니 기대했다. 아니 진짜야?
[ㅍㅎㅎㅎㅎㅎ 뭐야? 목원님 무슨 영화 볼 건지도 안 물어봐요?]
[? 무슨 영화 볼 건데요?]
[오늘 퇴근하고 제일 가까운 ‘Mbox’에 가면 볼 수 있는 영화 중에 제일 빠른 영화요!]
[네! 좋아요!!]
[밥도 먹어요!]
[네!!]
소정의 심장이 뇌까지 올라갔다 내려간다. 소정은 얼굴이 너무 빨개진 것 같아 얼른 고개를 숙였다. 사실 목원은 어떤 표정일지 너무 궁금했다. 안 들킬 수만 있다면 몰래 보고 싶었다. 그러나 절대 안 들킬 자신이 없었고 또 지금은 자신의 터질 것 같은 얼굴색을 숨기고 싶은 게 우선이었다. 입꼬리가 귀에 걸리고 웃음이 나왔는데 웃음소리까지 나오면 안 되니까 조용히 어금니에 힘을 줬다. 머리 부분을 단속하니 이번엔 어깨가 들썩인다. 같은 장단으로 엄한 콧소리를 뿜었다. 그 콧소리에 얼굴은 더 빨개진다.
Epilogue.
“목원아, ‘스타쉽 트루퍼스’가 왜 좋았어?”
“그냥 웃겼어. 웃기잖아. 근데 그게 왜 웃긴 지는 나중에 더 나이 들어서 알았지. 정말 중학교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웃었어.”
“음… 자기들이 청춘 영화 찍고 있는 줄 알지만 사실은 전체주의에 물들어 버린, 선동된 바보들의 최종국면?”
”응, 벌레를 죽이는데 엄청난 사명감을 갖고 있지만 사실은 자기들 목숨이 벌레만도 못 한 취급을 받고 있잖아. 지구의 벌레를 밟아 죽이는 걸 광고하는 게 말이 되냐고. 그런데 그런 걸 설명하거나 가르치려고 들지 않고 우스꽝스럽게 보여주는 게 좋았어. 진짜 여러 가지 더 재밌는 건 나중에 알았지만.”
“나도, 나도 그랬는데. 그래서 여러 번 봤나 봐. 하아… 진짜 그 결말이, 친구라는 이름으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계급 사회 확인 사살. 진짜 이게 개소름. 나는 그 모범생 여주가 ‘폭력으로 해결되는 건 없다.’라는 말에 ‘아무 말도 못 하겠지. 히로시마는 완전히 파괴되었으니까.’라고 말할 때 소름. 그런데 남주가 그녀를 너무 사랑해.”
“결국엔 친구, 우정이라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전체주의 계급사회에 완전히 물들잖아. 그 ‘리코’한테 텔레파시 보내는 친구는 ‘나를 찾아줘’에서 불쌍한 호구 돼서 나오던데. ‘폭력으로 해결 되는 건 없어,’는 ‘리코’ 좋아하는 여주가 했던 말일 걸?”
“그랬나? 그러고 보니까 ‘로자먼드 파이크’가 약간 ‘블랙북’ 여주랑 닮았다. 이미지가 약간. 어… 그 여주 이름이 뭐였지? 뭐야? 알지? 기억해 줘.”
“‘카리시 반 하우튼’일걸? 나는 그 영화 포스터만 보고 여주가 ‘귀네스 팰트로’ 닮았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마 처음엔 그 영화 여주가 ‘귀네스 팰트로’라고 착각하고 있었을 수도 있어. 제대로 볼 때까지 그랬던 것 같아.”
“어?! 진짜 있다. 그 여주 얼굴에 ‘귀네스 팰트로’ 얼굴이 있다, 포스터에만. 나는 남주를 헷갈려했었는데. ‘블랙북’ 남주가 ‘포스맨’ 남주인 줄 알았다니까. 거의 몇 년을 그렇게 알았을 걸.”
”정말? 음, 그런데 소정이 네 말 듣고 보니까 그렇긴 해. 진짜 둘이 닮았어. ‘예로엔 크라베’, ‘세바스티안 코치’ 닮았어. 와, 나 두 사람 동일 인물 아닌 거 알고 떠올리는데 지금 헷갈리네.”
“목원아, 그것도 알지? 블랙북 여주 거기 나왔었던 거.”
“거기? ‘왕좌의 게임’? ‘멜리산드레’?”
“응, 나는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길래 누군가 했다가 나중에 동일 인물이라는 거 알고 너무 놀랬잖아.”
“맞아. 그 배우 ‘작전명 발키리’에도 나왔는데 그때도 나 못 알아봤었어.”
“아, 이러니까 괜히 ‘엘르’도 다시 보고 싶다.”
“나는 ‘토탈 리콜’. 그 머리 열리는 거 정말 좋아하는데.”
“어머 진짜? 어쩌면 좋니 목원아, 너 진짜 SF장르를 좋아하나 봐.”
“아… 나는 정말 장르 문화 지양해야 한다고 봐. 정말 무의미한 구분이라고.”
“크크크크. 그러지 좀 마. 너 자꾸 그런 소리를 하니까 어디 가서 맨날 샌님 소리를 듣는 거야.”
“소정아, 그러지 마. 나는 너한테는 샌님 소리 듣기 싫다고. 똑땅해.”
“뭐야? 주목원 누구 맘대로 귀여운 짓 하래? 크크크, 나는 ‘쇼 걸’을 처음 봤을 땐 그냥 좋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더 좋아지고 ‘블랙 스완’ 보고 나니까 더 더 좋아지더라.”
“‘블랙 스완’이 별로였어?”
“응, 싫어해. 아직 설득 당하지 못 했어. 왜냐면 말이야, ‘블랙 스완’은~”
극장이 깜깜해졌다. 두 사람은 다정하게 팝콘을 먹으며 ‘베네데타’를 관람했다.
인생 영화. by 옥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