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은 연애> 서른 번째 이야기
“안 돼. 나 못 가.”
[“말도 안 돼. 무슨 회사가 주말까지 일을 시키냐? 그러면 지금 어디야, 회사야?”]
“아니야, 집이야. 아무튼 그렇게 됐으니까 네들끼리 재밌게 놀다 와.”
[“그러지 말고, 상미도 지금 출발한다는데 거기 묻어오면 안 돼?”]
화창한 토요일 아침, 서인은 주말을 맞이해 양양으로 놀러 간 친구들과 함께 하지 못했다. 대신 침대 구석에 짱 박혀 이번 달 ‘자재 재고 관리 대장’을 붙들고 있다. 입사 동기인 ‘성기준’ 님한테 넘겨받을 땐 대충 기입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일 줄 알았는데 엑셀을 열기 전 폴더 안 파일 개수에서부터 뇌정지가 올 것 같았다.
“서인아, 뭐 해?”
“뭐야, 엄마! 내 방 들어올 땐 노크 좀 하라고 했지?”
“노크했거든!”
주말 약속이 있다며 아빠만 여행을 보낸 엄마가 서인을 찾았다.
“으이그, 아침부터 뭐 하나 했더니 겨우 회사 일이야? 황서인, 회사 일은 회사에서 끝내야지 왜 집으로 끌어들여. 회사는 그렇게 다니는 거 아니야.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
“엄마 좀 제대로 알고 말을 해. ‘공과 사’는 이럴 때 하는 말이 아니야.”
“어머, 애 말하는 것 좀 봐. 내가 왜 모른다고 생각해? ‘공과 사’라는 거 그거 별 거 아니야.”
아, 엄마도 재작년까진 회사원이었지. KT에서 일하다 정년퇴직하셨다.
“아니, 엄마 회사랑 우리 회사는 업종 자체가 다르다고. 그러니까 그냥 들어온 거면 빨리 나가.”
“그냥 온 거 아니야. 볼일 없으면 나도 네 방 안 들어오거든. 지금은 당당하게 부탁할 일 있어서 온 거야.”
안 되는데. 평소 자잘한 심부름 같은 걸 잘 안 시키는 엄마라 저렇게 작정하고 들이밀면 쉽게 물러서지 않는데.
“엄마는 왜 부탁이 당당한 건데?"
“마침 노트북도 들고 있네. 간단한 거야, 이것 좀 해 줘.”
“왜? 아빠 노트북 있잖아?”
“그 노트북 너네 아빠가 놀러 가면서 심심하다고 가져갔어. 그러니까 네가 좀 해 줘.”
서인의 엄마는 동시에 서인에게 톡을 보내기 시작했다. 서인은 노트북에서 톡을 열어 내용을 확인했다.
“이게 뭔데?”
“민정이 이모네랑 하는 우리 모임 지난 번이랑 지지난 번 정산 내용.”
“그래서? 이걸 뭐 어쩌라고?”
“그 자료 반영해서 엑셀로 표 좀 짜 줘.”
“뭐? 이모네들은 이런 것까지 엑셀을 써? 그냥 이 톡 내용 공유하면 되잖아.”
“해 줘. 우리는 엑셀로 봐야 편하단 말이야. 오후에 이모들 만나기 전에 엑셀표 공유하기로 했으니까 좀 해 줘.”
“그냥 아빠 노트북으로 엄마가 하면 안 돼?”
“애가 왜 벌써부터 깜빡거리지? 너네 아빠가 노트북 가져가버렸다니까.”
"그러니까 엄마도 노트북 하나 사!"
"싫어! 엄마는 노트북 지겨워!"
아, 모르겠다. 엄마는 웬만해선 물러서지 않을 테고 ‘관리 대장’은 여기저기 꼬여 진행이 안되고 있었으니 서인은 리프레쉬도 할 겸 엄마의 부탁을 신속하게 처리해 주기로 했다.
“알았어.”
엄마가 보낸 정산 내용을 하나하나 컨트롤 씨 컨트롤 브이 해서 엑셀 표에 집어넣기만 하면 되겠거려니 했는데,
“그게 아니지. '황금노래방'이랑 '마산아귀찜' 항목은 분리해야지.”
일을 맡기고서도 무어가 못 미더운지 곁을 떠나지 못하는 엄마가 계속 참견을 한다.
“참여 인원이 다르잖아. 그건 그냥 단축키를 써. 컨트롤, 쉬프트, 엘 누르면 되지. 언제 일일이 마우스로 클릭하고 있어?”
“…”
“아니지, 거기선 정렬 기준을 바꾸면 되지. 아니, 그러려면 설정부터 바꿔야 되잖아.”
아 꼰대, 꼰대, 왕꼰대. 서인의 인내력이 계속 시험당하고 있다. 엄마는 저런 성격으로 어떻게 정년퇴직까지 버틴 거야?
“안 되겠다. 황서인, 나와봐. 내가 하는 게 빠르겠어.”
서인이 하는 걸 보고 있자니 답답해 죽겠다던 엄마는 급기야 서인의 무릎에 놓여 있던 노트북을 낚아챘다.
“그래도 내 노트북인데, 엄마가 마음대로 왜 가져가?”
“왜긴, 너 하는 거 기다리다가 엄마 제시간에 못 나갈 것 같아서 그런다.”
엄마는 서인의 침대맡에 노트북을 올려놓고선 제대로 자리 잡고 방바닥에 앉았다.
“마우스는? 마우스도 가져가지 왜?”
“괜찮아, 그런 건 필요 없어.”
마우스 따위 필요 없다는 말에 친절을 베풀어도 받을 줄 모른다며 투덜거리던 서인은 이내 눈이 휘둥그레지는 걸 감추기 급급해졌다. 엄마가 서인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단축키를 눌러가며 표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어? 엄마, 왜 거기만 합계가 돼?”
“범위를 그렇게 잡아서 그렇지.”
“그냥 다 더하면 되는 거 아니야?”
“안 돼. 황금노래방에 간 멤버들은 회비가 달라진단 말이야.”
“아… 엄마 그건 무슨 함수야? 뭐야?”
와, 우리 엄마 입만 산 꼰대는 아니었구나. 서인이 엑셀을 공부하려 봐왔던 여느 유튜버보다도 지금 눈앞의 엄마가 더 실력자같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행여나 이런 마음을 들킬까 떡 벌어진 입을 급하게 다문 순간 엄마는 마지막으로 컨트롤 에스를 누르고 표를 마무리한 후 자신의 카톡으로 파일을 보냈다. 물론 PDF변환도 잊지 않았다.
“너는 돈 내고 인강까지 들었으면서 지금까지 뭘 배운 거니?”
“아직 실무에 적용이 잘 안 돼서 그렇지. 나도 하면 다 해. 다 끝났지? 끝났으면 빨리 나가.”
실력자 엄마의 모습에 괜히 위축된 서인은 빨리 나가라고 투덜거렸다. 평소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엄마는 가볍게 일어나 서인에게 노트북을 넘겨주었다.
“서인아, 성기준 씨 잘 생겼니?”
“응. 키도 크고 잘 생겼어. 딱 내 타입.”
무릎 반사와 같이 훅 들어온 엄마의 물음에 자기도 모르게 대답한 서인은 깜짝 놀라 눈을 꿈뻑였다.
“뭐야? 엄마가 성기준을 어떻게 알아?”
“아, 진짜 잘생겼구나.”
엄마는 가볍게 턱을 움직여 화면에 열려 있는 서인의 엑셀 파일을 가리켰다.
“'작업자란’에 네 이름은 없고 '성기준'이란 이름만 있길래 물어본 거야.”
비밀이었다. 물론 가까운 친구들에게는 입사하자마자 널리 알렸지만 왠지 엄마한테 만큼은 꼭 비밀로 하고 싶었다.
성기준. 고달픈 회사 생활의 한 줄기 재미. 입사 동기로 그를 처음 본 건 입사 전, 지금 다니는 회사의 ‘최종 면접’에서였는데 큰 키에 잘생김이 딱 서인의 이상형이어서 자신의 합격만큼 그의 합격을 소원했으니 동기가 되었을 때 진심으로 반가웠다. 서인보다 두 살이 어려 그만큼 어리숙한 면도 많아 서인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있었는데 성기준은 도움을 받은 만큼 귀엽고 예쁜 디저트로 은혜 갚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다른 동기들이 둘이 사귀냐며 놀려댔는데 서인은 아니라고 손사래 치면서도 조만간 진짜 사귈 것 같은 마음에 들떠 있었다.
“엄마 다니던 데랑 우리 회사랑은 다르다고. 회사마다 다 각자의 시스템이 있는 거야.”
“그래그래, 잘 생겼단 말이지. 어쩐지 네가 회사를 다니는데 덜 찡찡거리더라.”
“내가 뭘 얼마나 찡찡거린다고 그래? 엄마, 볼 일 끝났으면 나가라니까. 나 바쁘다고.”
엄마는 무언가 탐탁지 않은, 불만 가득한 미소를 머금고 서인을 바라봤다. 서인은 저 미소를 좋아하지 않는다. 대게 저 미소와 함께 이어져 오는 말은 뼈를 때리기 때문이다.
“내 딸 황서인아.”
“왜?”
“내가 너를 사람으로 낳았거든. 아홉 달을 꽉 채워 품어서 열 손가락, 열 발가락 다 달린 사람으로 낳았다고.”
“뭐야? 갑자기 사람은 왜 찾는데?”
“나는 네가 꼬리 열 몇 개 달린 불여시가 되는 것도 바라지 않고 온실 속에 사는 미련 곰탱이가 되는 것도 바라지 않아. 거기다 불여시인 줄 아는 곰탱이가 되는 건 더더욱 바라지 않지. 그러니 내 딸아 심플하게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그냥 사람이 되어다오.”
서인은 어이가 없었고 목소리는 커졌다.
“뭐야? 나 멀쩡한 사람인데 왜 그래?”
“아니야, 사람 되는 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야. 사람으로 살아가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 그래도 황서인, 나는 너를 멀쩡한 사람으로 낳아줬다. 그러니 그냥 사람만 되어다오.”
엄마는 말을 끝내고 이제 씻을 테니 찾지 말라며 방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박 황서인! 이 사람 그 사람 아니야?”]
엄마가 방을 나서고 몇 분 후, 핸드폰이 울렸다. 양양 가는 길에 가평휴게소에 들른 상미다. 상미는 핸드폰 통화와 동시에 사진 몇 장을 같이 보냈다.
[“서인아, 사진에 그 사람. 너 썸 중인 그 남자 아니야?”]
“누구? 잠깐만 확인해 볼게.”
상미가 보낸 사진 속엔 웬 남자가 웬 여자의 허리를 감싸며 걷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이번 주 서인이 잘 어울린다고 칭찬했던 리넨 카디건을 입고 있는 그 남자. 엑셀이 너무 어려운 가운데 몸살까지 걸려 돌아오는 월요일까지 자기가 맡은 이 달 ‘자재 재고 관리 대장’을 도저히 못 하겠다며 서인에게 시름시름 앓는 모습을 보였던 그 남자. 익숙한 큰 키, 자주 보는 잘생김. 사진 속 그는 성기준이었다. 그가 엄청 마르고 예쁜 여자애의 허리를 감싸고 있다. 게다가 찍힌 장소가 가평 휴게소이니 분명 어딘가로 놀러 가는 것일 테고.
“내 딸아,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사람이 되어다오.”
방금 전 엄마가 했던 말이 서인의 뼈에 박힌다. 엄마는 무엇을 내다본 걸까? 엄마 눈엔 서인이 무엇으로 보였을까? 확실히 불여시는 아니겠지.
[“야, 황서인. 너 이 썸은 끝내야겠다. 이 자식 여친 있나 봐. 장난 아니야.”]
서인은 머리가 멍해졌다. 정식으로 사귀는 사이는 아니니 화가 나도 대놓고 화를 내기도 애매하다. 서인은 잠시 손가락을 쥐었다 피기를 반복하며 상미가 하는 소리만 잠자코 들으며 통화를 이었다.
“그냥 사람이 되어다오.”
뼈에 박힌 엄마의 말. 엄마 말대로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사람이 되고 싶긴 한데 이럴 땐 어찌해야 할까. 서인은 문득 어릴 적 엄마와 같이 봤던 영화 ‘황산벌’이 생각났다. 엄마는 진짜 재밌다며 깔깔거리고 봤지만 어린 서인은 유치하다며 꾸역꾸역 봤던 가운데 유난히 기억에 남는 계백장군의 부인의 대사가 있었는데.
“호랑이는 거죽 땜시 죽는 것이고 사람은 이름 땜시 죽는 것이요.”
서인은 이름 때문에 죽는 건 싫지만 그래도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이름을 잃어버리는 일 역시 아니 된다는 결론을 내렸었다.
----- 기준님, 지금 어디세요? -----
혹시 몰라 상미와의 통화는 이어가면서 노트북으로 기준에게 톡을 보내봤다.
----- 서인님. 저는 약 먹고 집에서 쉬고 있어요. 저 때문에 서인님이 고생이 많죠? -----
[“서인아, 그 자식 너랑 톡 하는 거 확인했어. 여친같은 애도 톡하는 거 같이 보더라.”]
성기준은 상미의 얼굴을 모르고 상미만 그의 얼굴을 알고 있으니 상미는 혼잡한 가평 휴게소의 상황을 이용해 성기준에게 꽤 가까이 접근했고 그의 핸드폰 상황을 엿볼 수 있었던 상미의 확인을 끝으로 통화를 마쳤다. 그러고 보니 오늘 같이 그를 도와준 게 여러 번인데 서인은 성기준으로부터 제대로 된 밥 한 끼 얻어먹은 적이 없다.
괘씸하단 생각이 든 성기준이 더 괘씸해진다. 처음엔 이 괘씸함에 성기준 이름으로 작업한 ‘자재 재고 관리 대장’ 파일을 그만 지워버릴까 했지만 그러진 못했다. 아까웠다. 액셀을 하다 막히는 건 검색해 가며 이미 폴더 자료의 반 이상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작업은 끝까지 마치고 싶어졌다. ‘작업자란’의 이름을 사람으로 태어나 불여시가 되어가는 ‘성기준’에서 미련 곰탱이 짓을 했던 ‘황서인’으로 바꿨다. 사람이 되려고 이름부터 찾았다.
완성한 표는 성기준과 공유 없이 바로 부장님과 공유할 것이다. 왜 지시받은 성기준이 안 하고 서인이 작업했냐고 물어온다면 성기준보다 서인 자신의 업무 능력이 뛰어나서 그렇게 된 거라고 말할 것이다. 서인은 꼭 그렇게 말하고 싶어졌다. 이 작업에 황서인의 이름이 걸린 만큼 한 치의 오차 없이 꼼꼼하고 완벽하게 해내고 싶어졌다.
“엄마!”
서인은 노트북을 들고 거실로 뛰어나갔다. 거실엔 막 씻고 나온 엄마가 머리를 말리며 TV를 보고 있다.
“엄마! 아까 엄마가 본 거, 이 엑셀 좀 도와줘.”
“내가 왜?”
‘왜?’라고 대답하던 엄마는 힐끗 ‘작업자란’의 바뀐 이름 '황서인'을 확인하더니 씨익 웃는다.
“황서인. 내가 어떻게 널 도와? 너는 갑자기 왜 열심이고?”
“엄마 엑셀 잘하잖아. 그러니까 나 좀 도와줘. 나 이거 완전완전 잘하고 싶단 말이야.”
엄마는 한 번 부탁하기로 마음먹었을 땐 작정하고 밀어붙이는 만큼 거절할 때도 작정하고 거절하는데 그래서 조바심 나는 서인은 더 찡찡거린다.
“네가 왜 안 찡찡거리나 했다. 서인아, 요새는 검색하면 이런저런 엑셀, 꿀팁까지 다 나오더라. 그러니까 알아서 잘해 봐.”
“그러지 말고 그냥 엄마가 도와줘.”
“서인아, '공과 사'는 구분해야 된다고 했지?”
엄마는 서인을 가리키며 “공”을 말하고 자신을 가리키며 “사”를 말했다.
“'공과 사'가 지금은 또 왜 그러는데? 그러지 말고 엄마가 도와줘. 그냥 대충 보기만이라도 해달라니까.”
“안돼, 안돼. 엄마는 엑셀 다 까멌어. 나는 하나도 기억 안 나.”
“뭐?”
“엄마는 지금 엑셀이 뭔지도 모른다고. 그러니까 이럴 땐 네가 끝까지 파 봐. 그게 실무가 되는 거니까.”
엄마는 낯 빛 하나 안 바꾸고 “엑셀이 뭐더라?” 흥얼거리더니 옷을 갈아입겠다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서인은 더 열심히 찡찡거려 봤지만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외출 준비에만 집중했다.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서인은 그제야 엄마가 말하는 ‘공과 사’라는 게 어렴풋이 이해 갈 것 같았다. 이것이 진정한 사회생활인가.
서인은 대충 흘려만 봐왔던 엑셀전문가의 유튜브를 재생시키며 오랜만에 노트북을 들고 침대가 아닌 책상에 앉았다. 이상하게 진지해진 것 같다.
----- 서인님, 답이 없네요. 저 때문에 많이 바쁘죠? 제가 은혜 갚는 마음으로 서인님 좋아하는 ‘제주말차프라푸치노’ 보내요. 항상 고마워요. 부장님 공유 전에 꼭 확인 메일 부탁드려요^^ -----
6천 원 남짓 한 기프티콘. 서인은 계속 답장하지 않았고 성기준으로부터 받은 기프티콘은 엄마에게 보냈다.
Excel. by 옥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