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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광 Dec 09. 2023

인커전

<식은 연애> 스물아홉 번째 이야기



윤수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교통사고. 단지 앞 마트에서 장을 보고 나서던 외할머니가 출발하려는 배달 오토바이에 부딪쳐 넘어지셨단다. 소식을 듣자마자 사색이 된 윤수의 입안은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도통 손에 일이 잡히질 않는다. 그러니 반차를 쓰고 싶어졌다.


“… 허윤수 대리님, 외할머니께서 얼마나 위중하신 거죠?”

“네?”

“많이 위중하세요? 중환자실이면 지금 가도 어차피 면회는 안 돼요.”

“저기… 팀장님, 저희 할머니 중환자실에 계시는 건 아니고요.”

“그럼 아주 심각한 건 아니네요. 그렇죠?”

“네, 네? 그래도 그렇지만…”

 

팀장님이 입술을 작게 찌그러트렸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나오는 그가 가진 특유의 버릇이다.

 

“허윤수 대리님 여기가 학교인가요?”

“네? 아… 아니요. 학교 아니죠, 당연히 아니죠. 제 말씀은 그게 아니라…”

 

팀장님이 윤수를 빤히 바라본다. 그 눈빛에 윤수의 목소리는 점점 더 쪼그라든다.


“학교… 아닙니다. 잘 알겠습니다.”

“그렇죠?”

“네, 돌아가서 마저 업무 마치겠습니다. 잠시 심려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사과를 하는 윤수는 머리가 책상에 닿을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팀장님은 윤수의 사죄에 일언반구 대꾸도 없이 자리로 돌아가라며 손만 까딱거렸다. 윤수는 고개를 떨군 채 곁눈질로 시계를 바라봤다. 퇴근까진 아직 4시간도 더 남았는데 서러워져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허윤수 대리, 지난번 지시한 레이아웃 내일 9시까지 완료해 주세요.”

 

팀장님이 힘겹게 돌아선 윤수의 뒤통수를 되돌린다.


“그게, 지난 회의 때 클라이언트 요청 사항 반영된 버전으로 수정하시라고 하신 거 말씀하시는 거죠?”

“…”

“저기… 확인은 다음 회의 때 하신다고… 그래서 아직… 그리고 9시면 내일 아침 9시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럼 밤 9시겠습니까? 허윤수 씨, 지금 다음 회의 때까지 100% 완벽한 레이아웃을 가져올 수 있다는 말로 들리는데 맞아요? 허윤수 씨가 그렇게 할 수 있어요?”

 

팀장님의 목소리가 다른 팀까지 다 들리도록 커졌다. 윤수는 슬슬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얼마 전 들어온 신입 부사수의 눈치가 제일 보인다.

 

“아, 아니요. 내일까지… 내일 출근하시면 바로 검토해 보실 수 있도록 제출하겠습니다.”

 

윤수는 목소리의 떨림을 감추기 위해 최선을 다해 목소리를 눌렀다. 팀장님은 모니터만 바라보며 짧은 한숨만 툭 뱉었다.



**********



“똘아이 새끼. 팀장 그거 완전 미친놈이라니까!”


윤수는 주말이 돼서야 겨우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할머니는 미추(꼬리뼈) 골절로 8주 진단을 받았다. 뒤통수도 7 바늘이나 꿰맸고. 윤수는 할머니를 보자마자 왈칵 쏟아진 눈물을 겨우 진정시켰다.


“미친놈이 자기가 분명히 다음 회의 때까지 수정만 해오라고 했거든. 그래 놓고선 갑자기 지가 먼저 확인을 해야 된다고 하잖아. 그게 무슨 말이겠어. 나더러 야근을 하라는 거지.”

“그래서 잘했어? 뭐 책 잡힌 건 없고?”

“그럼! 내가 누구야? 할머니 딸이야. 완전 갓벽했지!”

“그럼, 당연하지.”

“할머니, 아.”


윤수가 할머니의 입에 방금 깎은 사과 한 조각을 넣어 주었다. 할머니는 아프니까 이런 호강을 누린다며 사과 조각을 맛있게 베어 무신다.


“아이고, 할머님 손녀신가 보네. 할머니를 쏙 빼다 박은 게 아주 예쁘게 생겼어.”

 

디스크가 안 좋다는 옆 환자 분이 허리에 복대를 차고선 산책을 마치고 들어오셨다.

 

“손녀? 아닌데 얘가 어딜 봐서 내 손녀야? 아니야.”

“엥, 아니라고요? 아니면 뭐여요?”

“이보우, 내가 어딜 봐서 할머니같이 보여요? 할머니가 아니라 내가 얘 엄마예요.”

 

당구장을 운영했던 윤수의 할머니는 어린 윤수를 제약 회사에 근무하는 딸 내외를 대신해 키워 주셨다. 그러니 윤수의 기억 속 엄마의 자리엔 항상 할머니가 있다. 할머니가 눈을 찡긋하자 윤수는 할머니께 더 드리려던 사과 한 조각을 옆 침대의 환자분께 건넸다.

 

“하하하하, 저 딸이에요. 우리 할머니 막내딸이요.”

“어머나, 느지막이 막둥이 보신 거예요? 그런데 왜 할머니래?”

“하하하, 왜긴 왜겠어. 할머니니까 할머니지. 크크. 어때, 예쁘지 내 딸?”

 

기분 좋은 할머니가 딸 같은 손주의 뺨을 예쁘다며 문질러댄다. 윤수는 입으로는 자기 뺨 닳아 없어진다며 그만하라 말리면서도 고개는 할머니 손에 계속 기댄다. 볼이 따뜻해지는 게 참 좋다.


윤수에겐 여러 개의 우주가 있다. 팀장님 앞에선 제대로 기도 못 펴는, 한없이 쭈그러지는 회사에서의 우주. 그리고 세상 무서울 것 없이 든든한 할머니와의 우주.


“아휴, 할머니 손주님, 예쁘다고 아주 오냐오냐 컸구나.”



**********



“아니, 우리 할머니 옆에 아줌마가 나더러 오냐오냐 컸냐고 그러더니 나 사과 못 깎는다고 무안을 주더라니까요.”

“진짜?”

“네에. 그 아줌마 정말 웃기죠?”

 

윤수는 서울에서 할머니가 입원해 계신 안양 병원으로 자신을 데려다주고 기다리던 남자 친구를 만나자마자 방금 병실에서 만난 아줌마에 대해 토로했다. 지금은 몇 달 전부터 사귀기 시작한 남자친구와의 우주에 와 있다.


“그래서 너는 뭐라고 그랬어?”

“뭘 뭐라고 그래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그래, 잘했어. 괜히 나서서 뭐라고 해 봤자 네 입만 아프지.”

“그런 게 아니고요 내가 나설 필요가 없어서 그렇죠. 우리 할머니가 대신 뭐라고 해줬거든요.”

“응?”

“우리 할머니, 나 어릴 때부터 여자는 부엌일 잘해봤자 부엌일밖에 안 한다고 그런 거 안 시켰거든요. 그래서 그런 아줌마나 친척 만나면 항상 뭐라고 해줬단 말이에요. 우리 윤수는 그런 거 안 하고도 잘 먹고 살 거라고.”

“…”

“뭐야? 왜 아무 말도 없어요?”

 

남자 친구의 입술이 작게 찌그러진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들 때 나오는 그의 시그널.


“왜요? 또 뭐가 마음에 안 드는데요? 레이아웃 수정한 거 완벽했잖아, 아니에요?”

“맞아, 레이아웃은 괜찮았어.”


회사라는 우주에선 팀장님, 연애라는 우주에선 남자친구로 곁에 있는 그는 윤수의 신입 시절 사수였다. 회사라는 우주는 학교라는 우주에서 어렴풋이 상상하던 것과 완전히 달랐다. 윤수는 회사에서의 수많은 시행착오에 당황했고 그때마다 바른 길라잡이가 되어준 팀장님이 어느 순간부터 멋져 보였다. 그래서 그가 고백을 해왔을 때 흔쾌히 연애라는 우주를 탄생시켰다.

 

“회의도 무사히 마쳤잖아요. 이사님도 내 칭찬 엄청 했던 것 같은데, 그런데 오빠는 왜 기분이 안 좋아요? 오빠의 허윤수 대리가 훌륭하게 미션을 수행했는데.”

“너는 그게 문제야.”

“네?”

“너는 칭찬이라는 걸 좀 의심해 봐야 할 필요성이 있어. 이사님의 약간의 긍정적 표현을 무조건 칭찬으로만 받아들이잖아. 네가 만든 이번 수정안에 우리 회사만의 특색은 하나도 없었다고.”

“네? 무슨 특색이요?”

“누가 봐도 ‘이건 우리 회사 작품이다.’ 이렇게 보여줄 수 있는 아이덴티티가 있었어야지. 이번 건 너무 클라이언트 취향에 맞춰줬다고. 이사님이 일단 오케이는 했지만 클라이언트 만나고 나면 말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어.”

“그래요? 그럼 회의 들어가기 전에 좀 봐주지 그랬어요. 아침에 바로 보겠다고 해서 전 날 야근까지 해가면서 싹 수정했더니 다음 날 출근도 안 하고 바로 외근 갔잖아요. 나는 그것 때문에 우리 할머니도 빨리 못 만나게 하고.”

“그래서 주말 일정 다 취소하고 데려다주고 데려다주잖아.”

“그러니까 내 말이, 여기까지 왔다가 가는 거면 들어가서 우리 할머니한테 인사도 하고 그러면 좋잖아요. 우리가 회사에서만 비밀연애지 가족한테까지 조심해야 되나.”

 

윤수는 공과 사를 철두철미 구분하는 남자친구가 못내 섭섭했다.


“윤수 네가 할머니 손에 커서 그런 게 맞나 보다.”

“네?”

“너 조금만 칭찬해 주면 마냥 좋아하고 조금만 싫은 소리 들으면 낯빛이 금방 변하잖아. 왜 그런가 했더니 이제 알겠네. 지금 보니까 딱 할머니 때문인 것 같아.”

“아니에요. 우리 할머니 저 아주 엄하게 키우셨어요.”

 

윤수는 몹시 억울했다. 할머니는 어린 윤수가 인사를 한 번이라도 놓치면 다시 붙잡아 와 바른 자세로 인사시켰다. 어린 윤수가 ‘고맙습니다’를 놓쳤을 때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약속한 시간을 어기고 TV를 더 보면 전원을 끄고 리모컨을 숨겨 버렸고 밥은 안 먹고 과자만 먹겠다고 하면 그 과자를 다 버려 버렸다. 대신 그래서 떼쓰고 울던 윤수가 눈물이 잦아들었을 때 꼭 안아주는 걸 잊지 않으셨다. 윤수가 인사를 잘하고 약속을 잘 지켰을 때는 잘했다는 칭찬을 잊지 않으셨다. 그러니 자기 때문에 할머니가 싫은 소리를 듣는 것 같아 윤수는 기분이 안 좋아졌다.


“거 봐. 지금 그거 싫은 소리 했다고 또 낯빛이 변했잖아. 그 아주머니 말도 일리가 있어. 너 너무 오냐오냐 컸어.”

“그러지 않았다니까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위급한 상황도 아니신데 업무시간인 거 뻔히 알면서 연락하는 거 좀 아니지 않나?”

 

윤수는 자신의 두 귀를 의심했다.


“지금도 그래. 내가 할머니라면 주말인데 올 필요 없다고 쉬라고 했을 거야.


어머, 이 사람 말이 맞나 보다. 윤수는 싫은 소리를 연달아 듣자 얼굴이 흙빛을 지나 똥빛이 되었다.


“그렇잖아. 골절이면 윤수 네가 해 드릴 수 있는 것도 없어. 할머니는 그냥 꼼짝 않고 가만히 계시면 되는 거라고.”


생각지 못 한 기습이다. 그와 만든 연애라는 우주가 할머니와 만든 우주를 공격하고 있다. 그는 할머니의 안부를 궁금해하고 함께 할머니를 걱정해 주기는커녕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


“그래도 그렇게 말하는 건 좀 아니지 않아요? 우리 할머니가 어떤 할머니인지 알잖아요.”

“그래그래, 엄마 같은 할머니라고. 그렇다고 할머니가 진짜 엄마는 아니잖아.”


윤수는 할머니와의 우주에서 남자친구를 똘아이 새끼라고 투덜거리던 자신이 생각났다. 그 우주에선 쉽게 나오던 말이 이 우주에선 왜 못 나오는지 너무 답답하다.


“윤수야, 저녁은 뭐 먹을까?”

“…”

“윤수야? 허윤수 씨?”


낯빛이 똥빛인 윤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척 대답을 하지 않았다.


우주가 여러 개 인 만큼 각 우주의 윤수도 다 다르다. 시작이 언제인지도 모를 할머니와의 우주 속 윤수는 혼날지언정 입 속에 말을 담아두진 않았고 든 철도 안 든 척 어리광은 피웠지만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학교라는 우주에선 대인배까지는 못 돼도 소인배는 안되려 노력했고 쭈뼛거리더라도 자신의 취향은 드러냈다. 그러니 회사라는 우주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장담했는데 완전히 틀렸다. 회사라는 우주 속,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니 윤수는 앞선 우주와 달리 타인의 눈치에 의지했고 옳고 그름을 말하는데 머뭇거렸다. 회사 속 윤수는 여러 우주 속 윤수 중 가장 별로였다. 그런데… 지금 보니 외주 업체 문제로 예민해진 걸 거라며 그를 이해하려는 연애 속 윤수도 참 별로다.



**********



“윤수 대리님. 빨리, 빨리 와 봐.”


연애 우주가 냉탕인 채로 주말을 보낸 윤수가 클라이언트 미팅을 다녀오니 옆 팀, 입사 동기가 급하게 부른다.


“왜?”

“자기 부사수 아까부터 깨지고 있어.”

“상미 씨가? 누구한테 왜 깨져?”

“누구긴 누구야? 자기네 팀장님이지. 자기 부사수, 이번에 중국 쪽에 외주 준 거 개판 났다며. 그것 때문에 난리도 아니야. 여기서 한바탕 하고 지금은 회의실로 끌려갔다고.”

 

중국 쪽 외주라면 윤수가 잘 알고 있는 일이다. 팀장님이 직접 컨택한 3D 배경 제작 업체로 샘플로 받아본 결과물이 엉망이었음에도 내부 인력으론 진행이 불가하다며 그가 직접 외주 진행을 밀어붙였다.


“그건 팀장님이 직접 컨트롤…”

“아니야, 자기네 상미 씨가 작업 지시서를 잘못 보냈다던데?”

“에이, 아니에요. 아닌데, 상미 씨는 아직…”

 

벌컥, 회의실 문이 열렸다. 팀장님이 화가 덜 풀린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 나왔고 그 너머 울고 있는 상미 씨가 보였다. 윤수는 서둘러 상미 씨에게 다가갔다.


“상미 씨, 어떻게 된 거예요? 무슨 일이야?”

“대리님, 대리님. 저 정말 너무 억울해요. 그 이메일 제가 보낸 건 맞는데요. 팀장님이 작성한 작업지시서 저는 전송만 한 거라고요.”


이런, 윤수도 이와 비슷한 일을 겪었었다. 당시 부장님은 클라이언트의 요구 사항을 임의로 누락시켰고 이에 문제가 생기자 ‘신입의 실수’라는 타이틀을 만들어 윤수에게 책임을 전가시켰다. 윤수는 억울해했고 끝까지 항의해 보려고 했는데 이를 말려준 것이 그때의 사수, 지금의 팀장님이자 남자 친구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참아야만 하는 상황에 대해 설명해 주며 동시에 부장님의 비겁함을 욕해줬고 억울하게 떠안게 된 윤수의 초과 업무를 도왔다. 또 회사라는 우주의 생리에 대해 설명하며 감정에 휩쓸리지 말 것을 충고해 줬다. 이제 윤수가 그의 역할을 할 차례가 온 것인가.


“대리님. 왜 그걸 제가 한 거라고, 제가 책임지면 된다고 하는 걸까요? 글쎄, 저한테 뒷수습 다 하래요. 그 업체 보낸 거 보셨어요? 저 일주일, 아니 한 달을 야근해야 될지도 몰라요. 이게 말이 너무 안 되잖아요.”

“상미 씨, 진정해. 여기 회사잖아. 감정을 그렇게 막 드러내면 안 되지.”

“그래도요. 당사자인 제가 아니란 걸 아는데 어떻게 저한테 이럴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상미 씨, 이메일 보내기 전에 나한테 한 번이라도 상의를 했어야지. 나라면 작업 지시서 작성자란 꼼꼼히 체크하고 그래서…”

 

윤수는 말을 하다 말고 멈칫했다. 순간 할머니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당신의 일터 당구장에서 어린 윤수를 돌볼 때 자주 해주던 말이 있다. 보통 만원 빵, 오만 원 빵 팀전을 할 때 점수를 못 낸 같은 편 아저씨들의 말다툼을 지켜보며 해 준 말이다.


“윤수야, 저 봐봐라. 이미 공이 틀린 길로 간 걸 보고 나서, 나라면 그 길 안 봤다고 하는 말만큼 세상 쓸데없는 말이 없다. 자기편을 진짜 위하고 싶으면 자기 차례에 그냥 잘하면 되지. 저렇게 이미 일어난 일 보고 나라면 안 그랬네 어쩌고 저쩌고 하는 사람들은 못났지, 못났어. 세상 못난 거야.”

 

지난주, 윤수의 연애 우주는 할머니의 우주를 침범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윤수도 모르는 사이 회사 우주와 연애 우주 사이에 이미 인커전(중첩. 평행 우주 세계관에서 2개의 우주가 만나는 충돌 현상. 보통 한 우주가 붕괴된다.)이 일어났고 할머니 우주는 연애 우주가 아니라 회사 우주로부터 위협을 당 한 것 같다. 이러다 여러 평행 우주의 여러 윤수 중 회사 윤수만 살아남으면 어떡하지.


“그럴 순 없지.”

“네? 대리님 뭐가요? 뭐가 그럴 순 없어요?”

“그럴 순 없어. 상미 씨, 나도 상미 씨 같은 신입 때 비슷한 일을 겪었었거든. 그때 생각하니까 참 그렇다. 회사가 참 그래.”

“대리님도요? 정말요? 대리님은 무슨 일이었는데요? 어떻게 하셨어요?”

“어쩌긴 그냥 입 꾹 다물고 내가 다 뒤집어썼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상미 씨의 얼굴이 빨개진다. 그걸 보고서 윤수는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회사 우주가 무너지더라도 할 수 없다. 인커전. 윤수 스스로 인커전을 일으킬 거다. ‘나라면 이렇게 저렇게 할 거다.’라는 쓸데없는 말도 안 할 거다. 그냥 할 일을 하면 된다. 할머니 우주의 힘을 약간 빌리면 된다.


“팀장님! 일 처리를 이렇게 하시면 안 되죠!”


윤수의 목소리는 제대로 커서 사무실의 옆 팀, 옆옆 팀, 옆옆옆 팀까지 한 층이 다 들리게 쩌렁쩌렁 울렸다.


“허, 허윤수 대리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말까지 더듬는 그의 얼굴이 짜그라 들었다. 회사 우주와 연애 우주를 통틀어 처음 보는 얼굴이다.


“그 중국 업체, 팀 내부에서도 문제가 많다고 여러 번 말씀드렸었잖아요. 그런데도 팀장님이 독단적으로 진행시켜 놓고선 다 어그러지니까 뒷수습은 신입한테 맡기시려고요? 그게 책임자로서 옳은 행동입니까?”

 

윤수는 정확히 자신의 사수였던 그와 반대로 행동했다. 모두들 윤수의 모습에 놀랐고 서로 말리라고 눈치만 보니 반대로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허, 허윤수 대리. 지금 그런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라…”

“왜요? 잘잘못을 왜 지금은 안 따지죠? 신입한테 뒤집어 씌울 때는 따지고 지금은 따지면 안 되는 건가요? 그 이유가 뭡니까?”

“유, 윤수야. 왜 그래 정말?”

 

회사에서 연애하 듯 윤수의 이름을 부르다니.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한다던 그의 우주에서도 인커전이 일어나려나.


“여러분,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작지만 확실한 음성. 이사님이 등장했다. 이사님은 자신의 등장에 쪼르르 달려온 팀장 대신 윤수에게 자초지종을 들려줄 것을 요구했다. 소란은 신입인 상미 씨부터, 윤수, 팀장님, 다른 팀원들까지 이사님과 개인면담을 할 것을 약속받고 나서야 겨우 사그라들었다.


“허윤수 대리, 잠깐 이야기 좀 나눌까요?”


이사님이 돌아가자 팀장님은 옆 팀까지 다 들리도록 공식적으로 윤수를 불렀다.


“싫은데요. 이사님 개인 면담 전까진 팀장님과 업무 이외의 대화는 나누지 않겠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팀장님은 포기하지 않고 “허윤수, 너 나 좀 봐.”

윤수만 들리게 조용히 속삭였지만 윤수는 비공식적으로 못 들은 척했다.


“대리님, 어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윤수는 상미 씨와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잠시 휴게실로 나왔다.


“상미 씨, 괜찮아. 안 그래도 팀장님 좀 너무하다 생각하고 있었어. 거기다가 외주 업체는 업체대로 비용까지 다 지불했는데 왜 수습을 내부에서 해. 이건 말이 안 되지.”

“우와, 죄송해요. 저는… 지금까지 대리님 이런 분인 줄도 모르고…”

“응? 이런 분이 뭐야? 상미 씨는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알았는데?”

“저는… 당연히 대리님도 팀장님 같은 분인 줄 알았죠.”

“흠. 그래? 상미 씨 너무했다.” 윤수는 가볍고도 쓴 웃음이 터졌다.

 

윤수는 상미 씨와 스케줄에 관한 문제를 예상했다. 잘잘못을 가리든 못 가리든, 면담이 어떻게 진행됐든, 일은 일대로 해야 했기에 당분간 야근은 각오해야 한다.


그날 이후로 2주에 걸쳐 윤수의 연애 우주는 붕괴되었다. 이사님과의 면담 후 각오했던 회사 우주는 붕괴되지 않았다. 그러나 회사의 허윤수는 다시 태어났다. 할머니와의 우주가 건재했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퇴원하는 날, 윤수는 당당하게 반차를 쓰고 병원으로 갔다. 할머니는 윤수의 아주 약간 어두워진 얼굴만 보고도 남자친구와 헤어졌냐고 물어왔고 윤수는 사귄 것도 말 안 했는데 헤어진 걸 어떻게 알았냐며 놀랐다. 역시 할머니의 우주는 모든 우주를 꿰뚫어 본다.











인커전. by 옥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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