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옥광 Nov 18. 2023

주동자들

<식은 연애> 스물여덟 번째 이야기



8시 30분, 오늘도 유익한 수업이었다.


반드시 여차하면 맞이하게 될 퇴사하는 날. 혜은은 그날까지 ‘내일 배움 카드’를 야무지게 이용하기로 마음먹고 애오개역과 공덕역 사이에 위치한 ‘H신문사 문화센터’에서 ‘컴퓨터 영상 편집’을 수강 중이다. 오늘도 이 핑계로 칼퇴, 지각 한 번 없이 듣고 있는 수업은 생각보다 유익했고 재밌다. 뿌듯하다. 수강 인원은 전체 정원 16 명으로 시작해 초반에 지루한 반응을 보이던 몇 명이 잦은 지각에 이어 중반부를 지나 장기 결석을 선보여 고정인원 9명으로 바뀌었다. 나잇대는 27살 혜은보다 많게는 38살부터 적게는 22살까지 다양했지만 다들 좋은 사람 같았다. 한 명 빼고.


38살 두 사람 중 한 명인 이민수 씨. 낮에는 분명히 가을이었는데 수업이 끝난 8시 30분 갑자기 겨울이 시작된 11월 초, 카디건 하나로 발을 동동 구르며 지하철역까지 전력으로 걷던 혜은에게 운전하던 차를 가까이 대고서 이민수 씨가 말을 걸었다. 하필이면 같이 지하철을 타는 22살 민정이도, 26살 지선이도 결석해 혼자 걷고 있었다.


“어휴, 혜은 씨 춥겠다. 집이 어디더라? 내가 가는 길까지 태워 줄게.”


이민수 씨는 마포구의 어떤 국회의원 사무실에서 일하는 직원이라고 했다. 다들 캐주얼한 복장인 수강생들 사이에서 혼자 양복을 고수해 나이보다 들어 보이고, 어쩌다 나누는 대화에서는 자기가 아는 게 진실이라며 눈치 없이 강요하고 무슨 주제가 나와도 기가 막히게 기승전 자기 자랑으로 끝내는, 자발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고 싶은 그런 아저씨였다. 국회의원 밑에서 일한다 길래 첨엔 보좌관인 줄 알았는데 또 다른 38살 경아 언니가 그것 때문에 우리끼리 있을 때 한 소리 한 적이 있었다. “그 사람 디게 웃기네. 아니야, 그냥 거기 직원이야. 왜 자기가 국회의원 보좌관인 것처럼 말을 이상하게 꽈서 하냐.”

 

“저 말씀은 고마운데 괜찮아요. 걸어갈게요.”

“아니야, 그러다 감기 든다. 빨리 타. 집이 이수라고 했지?”

 

그때 코가 에이는 찬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문제다. 이 바람이 혜은의 경계심을 나약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럼, 지하철역까지만…” 그래, 지하철역까지만 얻어 탈 건데 무슨 별 일이야 있겠나 싶었다. 그런데 이민수 씨는 기어코 이수까지 데려다주겠다며 공덕역을 지나고 마포역까지 지나 강변북로를 진입했다.

 

이민수 씨의 차는 새 차 같았다. 안전벨트 버클의 새 비닐이 안 벗겨진 채 그대로였고 카시트도 사용감 일도 없이 주름 하나 없는 매끈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짙은 방향제 냄새를 뚫고 올라오는 새 냄새가 지독했다. 모든 게 불편한 혜은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버클에 씌워져 있던 비닐을 그만 살짝 뜯어버렸다. 정말 아주 조금.


“어?! 이거 죄송해요. 제가, 저도 모르게 그만 이걸…”

“하하하, 어디 봐 봐. 아, 괜찮아, 괜찮아.”

“저기, 차 뽑은 지 얼마 안 되셨나 봐요. 새 차 냄새 엄청나네요.”

“아, 뽑은 지는 좀 됐지. 오빠가 차를 아껴 타서 그래. 운전도 부드럽게 하잖아.”


뭐래, 누구 맘대로 오빠라는 거야. 아까부터 혜은은 차를 얻어 탄 것에 후회가 밀려왔다. 강변북로를 달리는 부드럽게 주행 중이라는 차는 거짓말 보태서 걸어가도 이것보단 빠를 것 같이 느렸다. 진짜 엄청 아끼긴 아끼나 보다.


“어때? 전기차 엄청 조용하지? 혜은이 전기차 처음이지? 타 본 적 있니?”

“네. 타 본 적 있는데요.”

“어?! 아 그래?”

“요새 웬만하면 택시도 다 전기찬 데요.”

“아… 택시가 그래? 하하하, 이런 이 오빠는 자차를 모니까 택시 타 볼 일이 없어서 그걸 몰랐네. 하하하하하.”

 

정말 저 오빠라는 말 거슬려 죽겠네. 혜은은 찌푸린 얼굴을 숨기기가 어려워 창밖을 내다봤다.


“혜은아, 이런 건 본 적 있니?”

“뭐를요?”

 

문득 드는 불길한 생각에 창밖으로 향한 혜은이 다시 이민수씨쪽으로 돌아봤다. 이민수 씨가 운전대를 안 잡고 있다. 운전대에서 양손을 다 뗐고 운전대는 혼자 움직이고 있었다. 와, 미치겠네. 유치해서 미치겠다.


“이거 봐, 이게 자율주행이라는 건데 혜은이도 영화 같은 데서 봤지? 자율주행에는 1단계부터 5단계까지 있거든. 지금 이건 몇 단계냐면…”

“1단계가 아니라 0단계부턴데요.”

“어, 그래?”

“…”

“와우, 역시 혜은이 똑똑하구나.”

 

똑똑하다는 이민수 씨의 칭찬에 혜은은 웃음만 나왔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제발 이수역까지 조용히 입 다물고 가주면 좋으련만 차자랑은 시작에 불과했고 밟으라는 자동차 액셀은 안 밟고 대신 자기 돈자랑 액셀을 밟아대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빠가 여윳돈이 좀 있거든. 당장은 한 7천 정도? 다음 달이면 1억이 좀 넘는데 어떻게 돈 모으는지 궁금하지? 그런데 방법은 쉽게 알려줄 수 없고, 하하하.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 혜은은 입만 억지로 열심히 웃어줬다.  

“그냥 오빠가 경제 공부를 많이 하거든. 그러면 뉴스만 봐도 돈의 흐름이 보인다니까. 그래서 말인데, 혜은이는 꿈이 뭐라고 했지?”

“저요? 제 꿈이요? 저… 꿈 없어요.”

“하하하, 혜은이 꿈 이야기하려니까 쑥스럽구나? 저번에 왜 민정이랑 하는 말 들어보니까 예쁜 문구류 사업해보고 싶다면서?”

 

흠, 대놓고 남 이야기 엿듣는 사람이라고 광고까지 하는구나.


“오빠가 요새 여윳돈 투자를 어디다 할까 고민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요새 문구류 쪽 전망이 밝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혜은이랑 단 둘이 이야기해 보고 싶었지.”

“뭐를요?”

“혜은이는 어떠냐고? 오빠가 투자해 줄 테니까 문구류 사업 한 번 해 볼래?”

 

어떠긴 뭐가 어떻고 하긴 뭘 하냔 말이냐. 혜은은 무조건 문구류 사업의 전망이 아주 어둡다고 말했다. 사실 문구류는 개인적으로 그냥 예쁜 걸 좋아하는 것뿐 비즈니스적인 측면에서 밟은 지 어두운지도 정확히 모르지만 그래도 그냥 무조건 어둡다고 했다.


“그래도 한 번 잘 생각해 봐. 구체적인 운영면에서는 오빠가 도와줄 테니까.”

차가 동작대교 끝자락에 다다랐다. 혜은은 그냥 뛰어내리고 싶었다.

“그나저나 혜은이 너 혼자 산다고 그랬지? 이 오빠가 파스타를 아주 잘 만들거든. 먹어 보면 너무 맛있어서 깜짝 놀랄걸. 초대만 해줘, 오빠가 만들어 줄게.”

 

혜은은 너무 질렸다. ‘어쩜 저렇게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할 수 있지?!’ 소스라치게 기겁해하며 파스타는 아주 싫어한다고 답했다. 흥분해서 어릴 때 파스타 먹고 체해서 병원에 입원까지 했었다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에 있지도 않은 트라우마까지 만들어냈다. 그날 밤, 집에 도착하자마자 얼른 현관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전망이 어둡다며 맘에 없는 소리를 해버린 문구류들에게 미안해 쇼핑몰 장바구니에 담아 놨던 예쁜 문구류들을 다 구매했다. 핸드폰으로 구매 확정 문자를 확인하는데 이민수 씨가 덕분에 집에 오는 길이 즐거웠다며 파스타가 싫으면 김치볶음밥은 어떠냐는 갠톡을 보내왔다. 혜은은 막 끓인 라면에 김치까지 야무지게 먹고서 김치는 못 먹는다고 답톡을 보냈다.



**********



“지선아, 그 아저씨 왔어?”

 

혜은은 지난주 이민수 씨의 강변북로 만행을 한 주를 안 기다리고 지선에게는 미리 고했다.


“하필이면 그 아저씨 네 옆자리야. 너 그 아저씨가 무슨 뻘짓을 해도 다 무시해. 알았지?”

 

수업보다 일찍 도착한 혜은은 지선의 또 다른 옆 경화의 자리가 원래 자기 자리인양 앉아 있었다.


“혜은아, 사실은 말이야…”

“구혜은. 우리 자리 바뀌었어? 아주 여기에 가방까지 풀어놨네.”

 

지선이 우물쭈물 무언가 말을 꺼내려는데 경화가 도착했다. 곧이어 선생님까지 들어오셨고 결정적으로 이민수 씨가 왔기 때문에 지선은 가방을 보따리 봇짐 들 듯 부둥켜안고 본인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갈 때 즈음 수강생 단톡방이 아닌 혜은, 지선, 경화, 민정만 들어와 있는 새로 판 4인 단톡방으로 톡이 왔다.


경화     [끝나고 훌랄라!]

 

다들 일사불란하게 [콜]을 톡 했고 여자들끼리만 마시러 가냐고 투덜거리는 남자수강생 몇몇을 뒤로하고 훌랄라에 모였다.



**********



“그 아저씨, 갑자기 나타나는 건 아니겠지?” 혜은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경계하니

“내가 주차장으로 가는 거 봤어. 우리 못 봤으니까 걱정하지 마.” 경화가 안심시켰다. 그리고 지선을 가리키며 재촉했다 “너 아까 그거 보여줘.”

 

혜은은 지선이 보여준 톡을 보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3억? 3억! 자기한테 3억이 있데?”

지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응, 그걸로 나더러 쇼핑몰 하고 싶으면 하라고 자기가 투자하고 싶다고… 얼마 전엔 한남동 쪽에 쇼룸 낼만한데 보러 가자고 했었어.”

“아이씨, 그 인간 뻥카 오지네. 꼴랑 3억으로 무슨 한남동이야. 쇼룸은 한 30억 가져오라고 해야지” 경화가 기를 차하며 잔을 비웠다.

“언니! 언니는 그 아저씨 또라인 거 알고 있었어요?” 혜은이 물어보자

“어, 지선이한테 하는 거 보고 바로 눈치 깠지. 그런 인간 뻔해. 모르긴 몰라도 지금 안 나오는 여자애들 몇 명한테도 그렇게 추근거렸을걸. 아우 진짜 나이 먹고 꼴값이다.” 언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매운 불닭 하나를 입에 넣었다. “아오! 매워!!”

 

혜은은 화도 나면서 깊은 의문도 들었다.


“근데 지선아, 왜 나는 1억이고 너는 3억이야?”

“응?”

“왜? 나는 왜 1억이지? 내가 어디가 어때서?”

 

혜은이 뭔가 자존심 상한다며 구시렁거리자 다들 빵 터졌다. 민정이만 빼고.


“내가 봐도 지선이가 낫지, 크크크.”

“아니, 그러니까 어디 가요? 나는 모르겠는데, 크크크.”

“민정아, 너도 있지? 그런 인간 뻔해. 여기 돌아가면서 다 찔러봤을 거야. 괜찮아, 말해 봐.”

 

경화의 권유에 제일 나이 어린 민정이도 주섬주섬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고 말을 이었다.


“저한테는요… 자꾸 영화 보러 가자고…”

“겨우 영화? 왜? 너한테는 돈자랑 안 했어? 웬일이래? 1억 도 없데?” 혜은이 자존심이 회복될 듯 물어보니

“그게… 영화 보고 자꾸 호텔뷔페에서 밥 먹자고. 그 아저씨가 풀코스로 어쩌고 저쩌고 했어요.”

“뭐? 호텔? 아휴, 진짜 깬다.” 조카 같은 애한테 하는 말이라니. 혜은의 자존심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L타워 시그니엘 바가 밤에 전망이 좋다고 가자고 할 때도 있었고요 청담동에 오마카세 잘하는데 안다고 링크 보내고 그리고…”

“우와, 이렇게 여러 번? 그걸 다 거절한 너도 대단하다.”

“그게… 그런데…”

 

민정이 이민수 씨한테 받은 톡 몇 개를 넘기더니 어떤 링크를 보여줬다.


“대학생이라고 해도 후줄근한 가방 메고 다니지 말라고 자기가 이거 사준다고…”

 

링크 속엔 이번 시즌 새로 나온 샤넬 신상백이 들어 있었다. 족히 9백은 훨씬 웃도는 가격이다. 민정이는 잔에 깔린 맥주를 말끔히 비워내고 의자에 걸어 놨던 자기 가방을 무릎에 올려놓았다.

 

“이거 우리 아빠가 대학교 입학 선물이라고 백화점에서 사 준 건데, 30만 원도 넘는단 말이에요. 언니들 이거 후진 거 아니라고요.”

 

경화가 말없이 민정의 등을 토닥이며 민정이의 빈 잔을 가득 채워줬다.


“이야… 너한테는 돈 1, 2억이 문제가 아니었구나.”

“왜 그래? 나 2억 아니고 3억.”


술도 들어가고 긴장도 풀린 지선이 농담조로 거들며 웃었다. 민정도 따라 웃었다. 4명은 사이좋게 먹태를 손에 쥐고 다른 손의 잔을 부딪치고선 동시에 잔을 비우고 내려놨다.


“캬.”, “캬아.”, “크으~”, “꿀꺽꿀꺽.”

 

어느 정도 마셨으니 소맥으로 갈아탈까 말까 한창 회의중일 때 민정이 경화에게 물었다.


“언니는요? 그 아저씨는 언니한테 뭐라고 했어요?”

 

경화는 민정의 물음에 말도 않고 놓여 있던 잔을 단박에 비웠다. 지선이 경화의 빈 잔에 바로 잔을 채웠고 경화는 먹태에 간장마요 소스를 잔뜩 무치고 다진 청양고추까지 잔뜩 올려 힘차게 씹어댔다.


“생각하니까 또 진짜 열받네. 나는 별 거 없었어. 진짜 별 거 없긴 한데!”

“뭔데? 언니는 차 바꿔준데? 아니면 뭐지? 사무실? 노트북? 그냥 심플하게 통장 준데여?”


혜은도 궁금해서 물어보자


“라면.”

“응? 라면? 라면을? 겨우 라면을 사줬다고?”

“아니! 라면 그까짓 거 왜 얻어먹어! 그게 아니고! 라면 없냐고, 나한테는 라면을 끓여 달라 하더라고.”


사건의 자초지종은 이러했다. 수업 초, 경화에게 동갑내기니 친구 먹자고 친근하게 접근한 이민수 씨는 수업 초에서 중반부쯤 가졌던 전체 회식 후 옥인동에 사는 경화를 차로 데려다준 적이 있었고 이때 차에서 내리는 경화를 붙잡고 라면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살다 살다 내가 먹고 가라고 해 본 적은 있어도 누가 집 앞에서 끓여 달라고 한 적은 처음이다.”

“진짜? 아! 너무 싫다!! 거의 12시였을 거 아니에요!”

 

혜은이 몸서리치며 황금비율로 만 소맥잔을 경화의 손에 안겨줬다. 경화는 한 모금 맛을 보더니 혜은에게 연신 엄지 척을 날리며 시원하게 반 잔을 마셨다.


“그때 깼지. 너무 깼지. 그게 무슨 데려다준 사람에 대한 예의라나 뭐라나? 그래서 너 그런 수작질도 다 할 만한 애가 하는 거다. 너는 하면 안 된다. 라고 했더니!”

“했더니?”

“이래서 너무 많이 아는 여자애들은 안 된데.”

“미쳤다, 미쳤어! 미쳤구나!” 혜은과 지선이 흥분했다.

“나이 38 먹고 진짜 오랜만에 여자애 소리를 들었다, 내가. 아놔!”

“아웅 언니 마셔요, 마셔.” 민정도 거들었다.


경화가 남은 소맥을 비우자 혜은이 빠르게 재제조 했다.


“아무튼 그때 그래서, 우리 다 친한 거 알 테니까 눈치껏 이 안에서는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웬걸 이렇게 죄 돌아가면서 찔러보는구나. 진짜 그런 인간들은 너무 성실해. 말 지어내는 것도 창의력 은 일도 없으면서 너무 부지런히 지어내.” 경화가 바닥에 남은 간장마요 소스를 먹태로 박박 닦아내는데

“그래도 라면은 너무 심했는데.”

 

혜은이 스스로 만 소맥을 홀짝이며 중얼거렸다. “야아~” 지선이 혜은의 어깨를 툭 밀었다. 경화가 고개를 똑바로 들어 혜은을 바라봤다.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내가 어디가 어때서? 네가 지금 1억이라고 자존심 타령 할 때가 아니야. 그렇지?”

“응.”

 

혜은이 위로하듯 경화의 어깨를 토닥였다. 넷은 또 키득거렸다.


“우리 안주 하나 더 시켜요. 우리 민정이가 불닭 다 먹었어.” 지선이 안주 중간 점검에 나섰다.

“앗! 제가 좀 배가 고파서…”

“아니야, 우리 민정이 많이 먹고 많이 커야지.” 민정이보다 키 작은 혜은이 민정을 격려했다.

경화는 손을 번쩍 들고 “나 화채! 화채 시켜줘!!”

 

경화는 취기가 살짝 오를 때마다 화채가 먹고 싶다고 했었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다들 안주로서 가성비가 안 맞는다며 퇴짜를 놨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 김용현만 빼고.


“뭐야? 우리 누나 화채 먹고 싶데? 그럼 시켜야지! 니들은 화채부터 안 시키고 뭐 했니?”

“뭐야? 김용현 네가 왜 거기서 나와?”

“그게요… 아무도 연락 안 받는다고 오빠가 저한테 연락했길래 제가 저희 여기 있다고…”

 

여자들끼리 마시러 간다고 투덜댄 남자수강생 1호 김용현이 2호 남인식과 함께 나타났다. 집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온 옷차림새의 둘은 32살 동갑으로 같은 회사 동기이고 공덕동에 함께 산다. 민정을 제외한 세 명이 일제히 핸드폰을 확인하니 용현으로부터 온 부재중 메시지가 떠 있다. 용현이 테이블의 벨을 눌러 부른 서빙맨에게 화채를 시키고 자리 잡고 앉으니 제일 먼저 핸드폰을 확인했던 경화가 경고한다.


“너 우리한테 이렇게 돌아가면서 연락하면 안 돼. 진상된다. 진상 중에 상진상! 너 경고야!”

“진상이 왜? 당신들 지금 무슨 일 있는 거지? 뭐야, 무슨 일인데?”

“그게 무슨 일이냐면,” 경화가 막 설명하려던 찰나,

“으아아아!” 용현의 부재중 통화를 확인하던 지선이 소리쳤다.

“왜, 왜 그러는데?” 다들 궁금해서 물어보는데

“으아아아아!” 혜은도 소리쳤다.

“엄마아아아아!” 민정도 소리쳤다.


[뭐 해? 자니?]


세 명에게 연달아 이민수 씨로부터 톡이 온 것이다. K은행 앱을 깔면 무료로 주는 이모지도 똑같았다.


“진짜 미쳤다. 우리끼리 이야기 다 할 거라는 거 모르나? 그 정도 머리도 안 돼? 아, 미쳤어. 미쳤어.”

“뭐야 이 와중에 메시지는 복붙 했나 봐.”

“너무 싫어요, 진짜!”

 

셋이 서로의 핸드폰을 보여주며 용현과 인식에게 이민수 씨에 대해 토로했다. 자초지종을 듣는 용현과 인식의 얼굴에서 점차 벌레 씹는 표정이 나타나더니 술 한잔도 안 마신 얼굴이 빨개졌다.


“아, 왜 이걸 듣기만 했는데도 내가 부끄럽지.”

“어, 이거 대리 수치심 오지는데. 그 형님 그거 안 되겠네.”


그런데 대충 상황파악을 끝낸 용현이 갑자기 10점 과녁에 꽂힌 화살 위로 안 꽂아도 될 화살을 꽂았다.


“그런데 누나는? 누나는 왜 혼자 톡 안 받았어? 지금 다들 돌아가면서 받은 거잖아.”

 

용현의 말에 경화는 깡통 과일은 다 건져 먹고 얼음만 동동 떠 있던 화채를 그릇째 들어 벌컥벌컥 국물을 들이켰다.


“왜 그래? 누나!” 그 모습에 용현이 어리둥절 놀라 외쳤다.

“이건 오빠가 잘못했네요.” 혜은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이며 용현의 눈치를 챙겨줬다.

“뭔데? 왜? 뭔지 몰라도 제가 잘못했습니다. 누나 화채 하나 더 시켜! 내가 시킬게! 여기요!!”

 

용현은 정확하게 무슨 실수를 했는지도 모르면서 급한 마음에 벨을 누르면 될 것을 저만치 서 있는 서빙맨을 육성으로 불렀다. 그런 용현을 화채 그릇을 시원하게 비운 경화가 괜찮다며 말렸다.


“괜찮아. 진실은 알 수 없으나… 나는 그 인간이 라면 끓여달라고 했을 때 바로 차단했거든.”

“아, 진짜 그랬어요? 언니 그래도 돼요? 그럼 저도 할래요!”

 

민정의 눈이 동그래졌다. 동시에 앉은키를 바짝 세우더니 핸드폰을 요리조리 터치해 바로 이민수 씨를 차단했다.


“어쩐지… 언니는 그 아저씨가 우리 단톡방에다 이상한 정보 같은 거 링크 걸어도 유난히 조용하더라.” 혜은도 수수께끼가 하나가 풀렸다며 이민수 씨를 차단했다.

“진작에 말해주지 그랬어요. 왜 언니만 혼자 차단했던 거야.” 지선도 섭섭하다고 입을 삐죽이며 차단했다.

“누나! 나는 잘할게요. 그러니까 나는 차단시키면 안 돼요.” 용현은 자기는 차단하지 말아 달라며 경화에게 빌었다. “나, 나도요. 누님” 인식이도 빌었다.


그 밤, 훌랄라에서 혜은, 지선, 경화, 민정 네 사람은 이민수 씨를 왕따 시키기로 주동했다.



**********



네 사람에게 평화가 찾아왔다. 네 사람은 톡과 메시지는 물론 수업 시간에도 이민수 씨와 대화하는 법이 없었다. 넷 중 가장 마음 여린 지선은 경화와 자리를 바꿨고 민정도 혜은과 꼭 붙어 있었다. 용현과 인식도 눈치껏 이민수 씨를 커버했고 나머지 두 명도 후에 자초지종을 듣고선 그를 멀리했다.


이민수 씨는 수업을 3회 정도 남겨놓고 결석하기 시작했다. 수업 종강이 다가올 때 즈음 용현을 통해 이민수 씨의 근황을 들었는데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단톡방에 자신의 직업 특성상 파생된 인맥을 한참 자랑하더니 아무래도 골프에 전념해야겠다며 남은 수업을 못 채우니 이해해 달라는 말과 함께 퇴장했다고 한다.


뭐, 골프? 웬 골프인가 싶었지만 이제 혜은과 지선, 민정은 골프와 이민수 따위 안중에도 없다. 종강 회식에서 경화와 용현이 사귄다고 커밍아웃을 했기 때문이다.


“이 음흉한 사람들! 정말 뭐야! 너무 축하해요!”

“웬일이지! 어디 한 번 예쁘게 만나 봐라!”

 

한 커플의 탄생과 함께 유익한 수업 하나가 끝났다. 그래도 좋은 사람들은 계속된다.











주동자들. by 옥광

매거진의 이전글 바퀴벌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