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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방학 Aug 23. 2019

무슨 띠냐고 물으신다면

워킹대드 주짓떼로 9편

주짓수에 대해 많이 알고 계시는  같은데 무슨 띠세요? 라고 누가 물어보면, 나는  똑같이 부끄러워 하는 말투와 들릭락말락하는 볼륨으로 “흰띠입니다” 하고 대답한다. 겨우 흰띠 나부랭이(흰띠를 비하하지 않습니다. 저도 흰띠에요)에게 내가 이런 설명을 듣고 있었나 하는 자괴감과 ‘어이가 없네감정이 뒤섞인 표정이 상대의 얼굴에 떠오르는데 그럴   난감하다.

 

주짓수의 승급체계는 조금 ‘지랄맞다’(표준어입니다). 공인 제도가 있는 무술이 대체로 2 정도 수련하면 검은 띠를 받는  비해, 주짓수의 검은 띠는 10년이 걸린다. 그나마도 반드시 받는다는 보장이 없다.  10년이나 했는데 아직도 검은 띠가 아니야? 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주짓수의 승급(띠의 색깔이 바뀌는 과정) 철저히 도제식이다. 스승이 제자의 실력을 보고 띠를 준다. 그런 경우가 드물긴 하지만, 제자의 재능이 너무나 천부적이어서 바로 띠를 줘도  정도다 싶으면 띠를 준다. 그러면 주위에서 반발이 없냐고? 있겠지. 하지만 전에도 말했듯 주짓수는 증명의 무술이다.  사람이 승급할 자격이 없다고 판단되면 스파링을 해보면 된다. 권위를 인정할  없으면  이상 같은 스승 밑에서 수련을  수가 없다. 믿든지 떠나든지 양자택일이다.

 



 

그랄(스트라이프라고도 한다)이라는 제도가 어디서부터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추측하기로는 같은 띠를  년씩 메고 있어야 하니까  지루하달까, 승급이  된다는 보장이 없다 보니  기운을 북돋아주는 의미에서 시작한  아닐까 싶다.  3그랄이야 그러면 , 그래도  하네 라고 주위에서(그래봐야 주짓수인 안에서지만) 인정도 받을  있고.

 

 글을 쓰는 지금 나는 흰띠 3그랄이다. 다음달에 승급식이 있어서 4그랄이   있을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그와는 별개로 3그랄에  만족한다.    정도면 3그랄 맞지, 라고 생각한다.

 

이게  묘한 것이 승급을 하기 전에는 얼른 승급을 하고 싶다. 그런데 막상 승급을 했는데 나보다 띠나 그랄이 낮은 상대에게 스파링에서 밀린다? 증명의 무술인데 증명을 못한다? 그러면 띠야 달고 있겠지만 상당히 창피한 일이다. 거꾸로 흰띠를 달고 있어도 ‘저 친구는 흰띠 레벨이 아냐 정말 잘해’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을 것이다(그런 말을 들은 적은 없으니 상상이지만서도)

 

**

회사에서 한동안 승진을   시켜주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은  시기가 지나 ‘더  안시켜주는 시기’에 돌입했다. 다행히 나는 그냥 ‘잘  시켜주던 시기’에 승진을 했다. 입사8년차였다.

 

회사의 승진 체계는 주짓수와는 다르다. 표면상으로는 ‘우수한 사원’을 승진시켜주는 것이지만, 그것을 어디에서도 ‘증명’할  없다. 메리토크라시(성과주의)라는 말을 자주 입에 올리지만, 그것을 객관적으로 측정할  있는 능력이 회사에게 있는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회사라는 조직은 앞에서 일하는 사람, 뒤에서 받쳐주는 사람, 이를 관리 감독 하는 사람  다양한 역할의 인력을 요구한다. 하지만 흔히 말하는 ‘눈에 띄는 성과’라는  주로 현장직에 국한되는 것이지 사무직 입장에서는 신용카드   만들어오기도 쉽지 않다. (입사 초기에 주위에 신용카드 권하다가 인간관계 정리되는   비밀)

 

그래서 회사 내에는 누군가의 승진을 시기하고, 승진에서 밀려 분통을 터뜨리고, 인사 고과에서 물먹고  푸는 사람들이 많다. 억울한 것이다.

 



 

그래서인가. 비록 검은띠까지 10년이라지만, 별로 조급한 생각도(어차피 계속  건데), 억울한 기분도 들지 않는다(나보다 조금 수련한 사람이 그랄을 받아도). 그랄을 받는 사람과 스파링을 해보면 받을 만한 사람이 받았다라는    있다. 아마도 그는 나보다 꾸준히 나오거나 집에서 열심히 연습하거나 재능이 뛰어나거나   주짓수 신의 가호를 입었거나 여러 이유에서 출중한 실력을 갖추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을 함께 수련하는 모든 사람들이 인정한다. 내가 살면서 이런 문화를 가진 조직에 속해본 적이 있었던가, 하고 떠올려보면 거의 없었던  같다.

 

경쟁 사회라 말들을 하고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라고 하지만,  경쟁이 불공정한 기반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지 않은가?

 

“좋아, 경쟁해 근데 너는 3루에서 출발하잖아. 그래, 좋아 3루에서 출발하는 것도  능력이라고 . 근데 3루에서 홈까지    그리 대단한 업적이라고. 나였으면 만루홈런은 쳤겠다“

 

그런 목소리들이 많은  같다.

 

 

그런 기분이  때면 나는 도장으로 간다 (그래서 매일 가나보다). 그곳엔 역대 어떤 유능한 정치 지도자도 건설하지 못한 유토피아가 있다. 철저한 실력의 세계, 증명의 세계, 느리건 빠르건 결국 모두가 만나는 세계. 그런 곳에서 하염없이 롤링을 하다 보면 마음  깊숙이 들끓던 분노가 하얗게 불태워져 정화되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이런 거창한 얘기를 서슴없이 주절거리는 저요?

 

흰띠입니다.

 

(3그랄이에요)

 

덧.     이글을   3그랄 때였는데, 지금은 4그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띠가 바뀌었냐고요? 아니요. 흰띠입니다. 그냥 그렇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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