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검열 과다 복용, 팩트는 맞는데 기분이 나쁘다면

by 글쓰는 트레이너

팩트는 사실이다.

그런데 왜 어떤 사실은 폭력처럼 느껴질까.

'팩트로 뼈 때린다', '팩트 폭격기' 같은 말에는 공통점이 있다.

사실은 언제나 정확히 나를 겨눈다는 것. 그래서 아프다.

나 역시 사실에 약했다. 예를 들면 이런 생각이다.

'이 일을 하는 사람인데, 이렇게 보이면 어쩌지? 나는 이 역할을 맡을 자격이 없는 걸까.'

회사원이라면 이런 생각을 해본 적 있을 것이다.

'성과를 내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으면 어쩌지?'

'야근을 하지 않으면 성실하지 않은 사람으로 보이진 않을까?'


전문직이라면 또 다르다.

'전문가라면 이 정도는 당연히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이 실수 하나로, 나는 자격 없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까?'

각자의 직업에는 보이지 않는 ‘이상적인 이미지’가 따라붙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미지에 나 자신을 끼워 맞추려 애쓴다.

그래서 마음속으로는 늘 더 잘해야 한다는 강박을 품고,

더 관리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낀다.

하지만 정작 그 기준을 매번 완벽히 실천하지는 못한다.


이제 팩트로 보자.

나는 그 이상적인 이미지에 항상 들어맞는 상태는 아니다.

그리고 걱정은 하지만 그 걱정만큼 행동하지 않는 순간도 있다. 이것은 변명도 아니고 판단도 아닌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겉으로 드러나는 조건은 분명 이점이 있다.

첫인상을 좋게 만들고,

초기 신뢰를 얻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조금만 시간을 함께 보내면

결국 드러나는 건 따로 있다.


그 사람이 자기 역할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일을 대하는 태도는 어떤지,

그리고 맡은 일을 실제로 잘 해내는 사람인 지다.


그래서 직업의 본질은 생각보다 단순해진다.

회사원이라면 직급이나 야근의 양이 아니라

자기 업무를 얼마나 책임 있게 다루는가.


전문직이라면 얼마나 알고 있는지가 아니라

끊임없이 배우고 그 전문성을 제대로 발휘하는 가.


어떤 직업이든 공통적으로 중요한 건

각 직업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그 기술을 위해 연마하는 것이다.

감정, 판단, 추측을 내려놓고

불편하더라도 내가 풋내기라는 것과

완벽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마주하는 것이

먼저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비로소 감정에서 한 발 물러날 수 있었다.

이렇게 보여야 한다’는 기준 대신

'무엇이 정말 중요한가'라는 질문으로

시선이 옮겨갈 수 있었다.


사실을 마주하는 힘이 생긴 건

존재, 역할, 행동을 구분하기 시작하면서였다.

예전의 나는 행동이 곧 나였고, 역할이 곧 나였다.

그래서 내 행동에 대한 피드백은 곧

'나라는 사람 전체'에 대한 공격처럼 느껴졌다.

누군가 내 행동을 지적하면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었고,

어떤 역할을 잘 해내지 못하면

내가 사라질 것 같은 불안이 따라왔다.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웠던 이유도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내 존재가 틀렸다고 느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러니 당연히 방어적일 수밖에 없었다.

존재, 역할, 행위 모든 것이 뒤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칸트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가 세계를 현상으로 간주할 경우, 세계는 현상이 아닌 중요한 것의 존재를 증명한다.’ 달리 표현하면, 철학자가 우리의 갑각에 부여된 세계를 떠나 정신의 삶으로 전환할 때, 그는 현상세계에서 자신의 단서를 취하고 그 기본적 진리를 설명하며 자신에게 노출될 중요한 것을 탐구한다

사실을 본다고 해서, 내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면

더 중요한 게 뭔지 그제야 탐구하기 시작할 수 있다.

누군가 말하면 이렇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아, 내가 그런 행동을 하고 있었구나.' 그냥 알아차리면 되는 일이었다.

이런 행동으로 나를 섣불리 단정 짓지 않기로 했다.

자각이 시작되자 내 행동의 이면을 보고 무엇이 중요한지 보기 시작했다.


모든 단어, 모든 행동에는 본래 좋고 나쁨이 없다.

그저 그러하다.

이거 아님 저거로만 나눈 건 내 해석이었다.


나는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었고,

나쁜 사람은 절대 아니어야 한다고 믿었다.


선과 악이라는 두 개의 거대한 환상과 사람들은 싸움을 벌인다. 가장 무지한 사람들은 선과 악이 적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선과 아기 같은 편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모든 진실을 파악하는 경지에서 세상의 삶과 죽음이 벌이는 시합을 둘러보고는, 그들이 이루는 조화에 기뻐하며 말한다 선과 악은 하나이다. - 『영혼의 자서전』 니코스 카잔차키스

선과 악으로만 봤던 나.

알고 보니 무지한 거였다.

사실은 어떤 행동이든 선과 악의 가능성을 동시에 품고 있다.

선한 의도가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기도 하고,

악처럼 보이는 선택이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기도 하듯이.

결국, 아무리 조심해도 악은 함께 있으니 한쪽만을 택할 수 없다.


내 진실은 이것이었다.

나는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옳은 방향을 선택하고 싶다는 것.

나의 진짜 성장은 이것부터였다.


아우렐리우스가 말하듯

모든 인간에게 이성이 있다면,

더 나은 내가 되고 싶다는 마음 역시

보편적이지 않을까.


이제는 피드백을 들으면 멈춰 서지 않는다.

사실에 대해 이면을 보고 중요한 게 뭔지 봐야 성장할 수 있으니까.

판단이 아닌 사실.

추측이 아닌 사실.

감정이 아닌 사실.

그 사실을 마주해도 내 존재는 다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여기 있고, 여전히 배우고 성장하고 싶은 사람이다.

그래서 이제는 ‘불편한 진실’도 두렵지 않다.

따끔한 순간은 있지만 그 아픔에도 내성이 생긴다.


근육이 고통을 지나 성장하듯,

내면도 아픔을 지나 단단해진다.

그렇다면 잘 살기 위해 아픈 건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대가 고통을 이기지 못하면, 고통이 그대를 이길 것이다.'라고 몽테뉴를 비롯한 많은 철학자들이 고통을 받아들이라고 하며, 고통을 피할수록 고통은 더 크게 찾아온다고 한다.

철학자의 말대로 고통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알아가는 고통은 이제 즐겁기까지 하다.


더 잘 살아갈 수 있겠다는 감각.

타인의 말에 많이 흔들리던 내가 세상과 인간,

그리고 나를 공부하기 시작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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