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각이 많은 편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
나를 알고 싶다는 명목으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도
그 생각들 사이에 늘 끼어 있다.
최근 테니스 경기를 보며
챔피언에 오른 한 선수의 정신력에 감탄했다.
점수가 잠시 주춤하면
기세가 꺾여도 이상하지 않을 순간이 있었는데,
그는 그 흐름을 되돌렸다.
점수를 뒤집고, 기세를 다시 끌어올렸다.
경기는 박빙으로 이어져 듀스 상황까지 갔고,
결국 그는 이겼다.
그는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를
미리 걱정했을까?
그럴 시간조차 없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상대의 공을 어떻게 받아낼지,
어떤 방식으로 허점을 노릴지,
그 집념이 그의 전부를 채우고 있었을 테니까.
그 바닥에는
자기 신뢰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지금
한국에 돌아가 엄마가 될 준비를 하는 일과
내 일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
나는 남들처럼 사는 게 싫다.
나답게, 내 방식대로 살고 싶다.
그 말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가정은 외면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역할에 대한 책임은 다하되,
나를 잃지 않는 방향.
그 지점을 찾고 싶다는 말이다.
책임과 나의 일 사이의 간극.
그 어딘가에 내가 서 있다.
남들처럼 사는 방식이
모두에게 정답일 필요는 없는데,
다른 사람이 뭐라 하든 내 할 일을 하면 되는 건데,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고
단정했던 건
남이 아니라 나였을지도 모른다.
일하는 엄마는
늘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말한다.
미안하지만
할 건 하는 엄마가 되는 것.
생각해 보면
나는 부모님이 바빴던 시간을
원망하지 않았다.
부모님의 심드렁한 무관심은
내게 믿음으로 읽혔다.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아도
뒤에서 자식 걱정을 하는 걸 보았으니까.
그럼에도 우리 스스로 책임지는 법을 배우도록
단 한 번도 두 분은 선택을 대신해 주지 않았다.
나도 아이를 대신 살아주지 않고,
책임을 스스로 지는 성인으로
키워낼 수 있다면
지금의 내가
부모를 원망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 아이도 그러지 않을까.
그래서 묻게 된다.
아이는 내가 키우는 게 아니라는 말,
나는 그 아이에게
사랑의 행동과 표현만 하면 된다는 말,
그 말을 믿어도 될까.
내가 정말로 걱정하는 건 무엇일까.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지일까.
아니면 아이를 방치하고 꿈을 꾸는 사람을 향한
따가운 시선일까.
내가 정말 아이를 방치할 사람인가.
경력 단절이 두려운가.
아니면 내가 나 자신을 잃게 될까 봐 두려운 걸까.
그래서 나는 아이를 낳을 준비를 하며,
내 정신의 현주소를 드러내며 다듬고
내 신체를 어떻게 단련시키고 있는지
기록해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