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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de in x Nov 19. 2018

마음껏 글을 쓸 수 있는 작가의 길

영화 '비커밍제인(2007)' '킬 유어 달링(2013)'

1. 방구석 글쟁이의 애장영화

  

처음 글을 쓰던 때가 정확히 초등학교를 들어가면서부터다. 손에서 놓지 않았던 캐릭터 수첩에 내 머리 속에서 그려지는 장면들과 내 마음 속에서 울려퍼지는 대사들을 끼적끼적 적어내려갔다. 일기 쓰긴 싫어해도 소설 쓰긴 좋아했다. 학교에서 쓴 글을 집에 가져와 읽으며 고치고, 그걸 다시 학교에서 고치며 다음 장면을 적어가길 매일매일, 본격적으로 논술학원에 들어가 글을 배우기 전부터 나는 이미 작가‘지망’생이었다.


두 가지 문제가 생겼다. 그리고 이 문제들은 10년을 훌쩍 지나도록 여전히 글을 부여잡고 있는 나를 괴롭히고 있다. 첫째는 스스로도 글을 잘 쓴다고 확신하는 자신감이며, 둘째는 남에게 내 글에 대한 비평을 듣길 거부하는 자존심이다.


밖에서 생각나는 대로 메모장에 휘갈겨 쓴 글을 집에 와서 제대로 정리하며 내 글에 스스로 감탄한다. 내 글을 더 좋은 글로 가공하는 그 과정이 즐겁다. 다만 그 과정뿐이었다. 그 과정 밖으로는 아무 것도 새어보내질 않았다. 나를, 내 글을, 내 글의 의도를 잘 알아주지도 못할 사람에게 내 글을 보여주어 괜히 불편할 상황을 겪고 싶지 않았다. ‘나’라는 작가와 ‘나’라는 독자, 그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하고 살았다.


그 결과 나는 방구석 글쟁이가 됐다. 좋게 말해야 작가‘지망’생이지, 그저 방구석에 박혀 좋아하는 펜의 필기감을 느끼고, 키보드의 타닥거리는 소리를 느끼고, 그것을 통해 내 문장을 구현하는 사람, 그 외엔 아무도 아닌 사람, 나는 그뿐인 사람이 됐다.


그랬던 나, 방구석 글쟁이의 가슴에 ‘욕심’이라는 불씨를 지핀 두 영화가 있다. 두 영화 모두 미국문학의 역사를 논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굵직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작가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그들이 작가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영화들은 내게 끊임없이 물었다. 아니, 나로 하여금 내 스스로에게 묻도록 끊임없이 자극했다.


작가 ‘나’, 독자 ‘나’, 정말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어?

여태 살면서 해온 것이 글뿐이라면서 네 존재를 세상 그 어딘가에 표현해야 할 때 그 수단이 ‘글’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니야?

네 존재를 세상에 알리려 하려는 목적에 ‘글’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야?


이 질문에 적합한 답은 너무 쉽다. 그러나 그 답을 말하기 위해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것들을 ‘감당’해야 한다고 말하는 나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 매너리즘에 빠져있는지 나는 인정해야 했다.


2. 나를 행동하게 하는 영감의 원천, ‘뮤즈’ 


  “Are you a writer? Cause I got a job for a writer. (너 작가였어? 마침 작가한테 맡길 일이 있는데.)”

  “No… I’m not. (아니… 아니야.)”

  “Hmm. Boy, you’re not anything, yet. (아직은 아니겠지.)”

  - 「킬 유어 달링」 中


모든 예술이 다 그렇지만, 작가가 자기 작품을 창작하기 시작하는 순간은 자신만의 뮤즈를 찾았을 때다. 그저 막연하게 ‘내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게 아니라 분명한 목적을 갖고, 그 목적을 이루려는 의지에 이끌려 폭풍이 몰아치듯 작품을 만들 때, 내 상상력을 부추겨 나를 그렇게 행동하게 만드는 영감의 원천이 바로 뮤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하얀 캔버스에, 노트에, 키보드에 손가락을 마주 댔을 때 비로소 작가로서 태동하기 시작했다 말할 수 있다.


뮤즈는 그 어떤 것도 될 수 있다.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장소가 될 수도 있고, 물건이나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어떤 것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창작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면 그것이 뮤즈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뮤즈에 대한 사랑이 가장 기본적인 감정이자 창작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에 작가에게 뮤즈는 사랑하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다. 「비커밍 제인」 속 제인 오스틴의 연인인 톰 르프로이와 「킬 유어 달링」 속 앨런 긴즈버그의 친구인 루시엔 카처럼 말이다.


두 영화의 주인공인 제인과 앨런은 현재 자신의 글에 만족하고 그것만으로에 안주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제인은 깊숙하고도 좁은 시골마을에 살며 그만큼 좁은 시야로 글을 써왔다. 자신의 글에 안주하고, 자만했고, 그 글을 자신의 상자 속에 모셔두는 것에 만족해왔다. 앨런은 유명작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자신도 글을 쓰고자 하지만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지는 자신을 극복할 용기도 없었고, 자기 자신을 작가라고 소개하지도 못할 정도로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당시는 노골적인 외설이 금지된 시절이었기에 앨런을 포함한 청년들의 자유롭고 참신한 표현들을 제한하기도 했다. 두 사람 모두 소위 말해 우물 안 개구리 신세였던 것.


그런 두 사람 앞에 나타난 톰과 루시엔이 그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게 된다.


마을 사람 모두가 제인의 낭독회에 박수를 보내는 와중에 단 한 명, 톰만이 꾸벅꾸벅 졸아버린다. 도시에서 온 톰은 제인의 글에 그녀의 좁은 식견이 여실히 드러나 있으며 그마저도 스스로가 대단하다며 자만하고 있다며 혹평을 가한다. 제인이 처음 듣는 혹평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제인의 단점을 단번에 알아차리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제인은 그것을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해야 했고, 그래야만 자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자신의 무지를 일깨워준 톰과의 사랑으로 키웠던 것이다.


루시엔은 조금 다르다. 그는 앨런의 작가로서의 가능성을 제일 먼저 알아봤다. 앨런의 탄탄한 기본기와 더불어 당시의 정석에 대하는 참신한 생각에 호기심이 생겼고,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기숙사실에서 아마 서로 첫눈에 반했으리라 생각한다. 앨런은 루시엔과 함께 다니며 음지에서 외설을 누리는 청년들을 목격하고, 표현의 자유를 박탈한 시대를 거절하는 방법을 직접 찾아다니며 함께 혁명을 일으키고자 한다. 타자기에 손을 올린 앨런은 루시엔을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고, 루시엔을 위해 스스로를 작가로 만들어갔다. 


그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그 사람이 나의 뮤즈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나도 몰랐던 나를 나보다 빨리 알아채 나보다 먼저 나를 사랑해주어 결국 나로 하여금 나를, 내 글을, 내 작품을 사랑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와 내 작품의 한계에 직면했을 때 그 한계 앞에 굴복하거나 그 수준에 안주하지 않도록, 한계를 극복하도록 나를 부추기고, 더 나아가 발전하도록 욕심을 부리게 만든다.


그를 위해, 그를 사랑하는 나를 위해, 그에게 사랑받을 나를 위해. 


3. 찬란했던 젊음과 사랑, 처절한 이별 끝의 성취


  “Condemns you to it and your writing to the status of female accomplishment.(지금 당신의 글은 여성적 성취에만 머물러 있어요.)

  *If you wish to practise the art of fiction, to be the equal of a masculine author, experience is vital.(만약 당신이 남성 작가들과 동등한 반열에 오르길 원한다면 경험이 필수적이죠.)”

  - 「비커밍 제인」 中


첫사랑을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이런 사람은 생애 처음이었고, 마지막이었으면 싶고, 단 한 사람뿐이라고 확신했던 사람이었다. 그와 나를 잇는 ‘연인’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위해 반드시 만나야 했던 인연임을 증명하듯 사용됐다.


나를 보던 그 사람의 눈빛과 그 사람의 눈에 비친 나의 눈빛을 기억한다. 누가 더 상대를 사랑하는지 힘 겨루기가 한창이었을 때, 우리의 눈은 확신으로 가득 차 반짝였다. 눈 앞의 상대가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소중하고, 대단하고, 훌륭한 사람이고, 더 멋진 사람이 될 거라고 확신했다.


제인과 톰, 앨런과 루시엔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서도 찾을 수 있는 확신이다. 그 확신이 서로를 더 사랑하게 만들었다. 제인과 톰은 가난한 집안과 불확실한 미래로부터 벗어나 사랑뿐인 결혼을 쟁취하기 위해 오직 서로의 손에 의지한 채 사랑의 도피를 감행했고, 앨런과 루시엔은 서로의 가능성을 가로막는 금단의 시대를 극복하고자 감히 혁명을 계획한다.


이들의 행동과 결정을 과감하게 만든 동력, 함께이기에 더욱 힘을 낼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다름 아닌 젊은 사랑이었다. 수평선 너머의 목표를 향해 앞뒤 안 가리고 내달리는 젊음에게 연인이 생기면 그보다 무서운 기폭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행복하기만 한 사랑은 없고, 언제나 이별은 준비되어 있으며, ‘정답은 이별뿐’이라며 연인들을 시험에 올리는 시련들이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다. 톰에겐 혼자서 부양해야 하는 가족들이 너무 많았고, 제인은 그걸 알면서도 묵인하고 외면할 수 없는 양심이 있었다. 앨런은 친구인 루시엔을 동경하던 마음이 점차 사랑으로 변했지만, 어린 나이에 한 남자로부터 지속적인 스토킹과 성적 학대를 당한 루시엔은 앨런의 사랑을 절단하고 밀어내고 만다. 운명적 사랑이 필연적 이별을 맞이했다.


참 웃기게도, 인간의 삶은 그 처절한 이별을 겪고 나면 꼭 ‘성장’이란 것을 성취하게 된다. 여느 영화들처럼 이들 영화 또한 결국은 성장영화의 과정을 밟는다. 바닥까지 주저앉아 이별에 아파하고, 절규한다. 한 바탕 쏟아내고 나면 남는 공허함, 그 공허함 속에서 이별을 맞이한 이들은 온전히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렇게 끄적끄적-, 사각사각- 적어내려간 단어와 문장, 그 글들이 모여 만들어진 작품들은 그렇게 작가를 완성시켰다.


4. 감당할 수 있을까? 사랑도, 이별도, 아픔도, 전부


앞서 던졌던 질문들의 답은 앞서 말했던 것처럼 간단하다. 작가 ‘나’, 독자 ‘나’,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어? 절대 ‘아니다’. 그럴 수 없다. 하지만 이 대답을 하기 위해선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 참 많다. 그것들은 너무 당연한 것들뿐이다. 신선한 소재, 소재를 재밌게 쓸 수 있는 구성력, 그 구성력을 빛내는 문장력. 작가의 기본덕목들을 갖추기 위한 기본기와 재능과 노력. 노력과 연습. 비평을 들을 귀와 마음…. 너무도 당연한 이것들을 ‘감당’해야 한다며 표현하는 나는 그동안 얼마나 안일했던가. 외면하고 있던 이 모든 것들을 다시금 되새기며 스스로에게 또 한 번 질문을 던진다.


나는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아름다운 사랑의 유혹도, 그 사랑으로부터 버림 받아 처절하게 느끼는 고통도, 좀이 쑤실 정도로 의자에 앉아 머리를 쥐어짜며 펜을 굴릴 집중과 인내도, 그 모든 걸 나는 감당할 수 있을까? 단지, 오로지, ‘글’이라는 걸 쓰기 위해서?


그리고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떠올린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한다.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 그중에서도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 글을 읽고 싶다는 사람들, 그중에서도 내가 사랑해서 이 마음을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글이라는 것으로 세상에 그뿐인 글을 선물하고 싶은 사람들. 그들이 바로 나의 뮤즈들이다.


혼자만으로도 살기 버거웠던 삶이었는데, 이상하게 함께 있을수록 삶을 이어갈 용기를 북돋아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중에는 나를 떠나고, 내가 떠나 이별한 사람들도 숱하지만, 그들마저도 함께 했던 기억 속에서 내게 영감을 주고,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그들을 통해 사랑과 이별, 행복과 상처를 모두 배워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들로 인해 나는 또 글을 쓴다.


뮤즈는 그렇다. 타자기 앞에 앉아 무슨 글을 써야 할지 온종일 고민해야만 겨우 한 줄을 썼던 나를 바꾼다. 단 한 장면이 떠올라도 수백, 수천 가지 방법으로 표현하고 싶게 만든다. 나 자신의 세계에 빠져들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글을 쓰게 한다. 그렇게 글이 막힘없이 술술 쓰이는 순간에 중독되고 만다.


지금 나는 그 순간에 놓여, 그 중독을 도무지 맨몸으로 버틸 수가 없어, 꼼짝없이 종이와 펜과 키보드 속에 갇혀있다.


글: 작가 안은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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