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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de in x Oct 20. 2018

상실의 실상, 상처를 아무는 시간에 대하여

영화 '레빗홀' '버닝맨'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는 법.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며 내게 소중한 사람들을 꼽아보자. 나의 가족, 친구, 연인. 할 수만 있다면 재산과 장기를 기꺼이 내줄 수 있는 인연들은 이별을 염두한 만남들이 아니다. 그럴 수가 없다.

  당신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다. 그 ‘당신’은 내 인생에 너무나도 당연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때로는 무심코 상처를 줄 수도 있고, 너무 쉬운 대상으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단 한 순간도 사랑하지 않은 순간이 없다.

  그런 사람을 잃는다는 건, 그런 사람을 ‘죽음’으로써 잃는다는 건 하루이틀 울고, 진탕 술을 마신다고 잊히는 고통이 아니다. 전 세계를 수소문한다고 찾을 수도 없다. 전 재산을 바친대도 살려낼 수 없다. 신이 당신과 나 사이를 묶은 실을 뚝 끊어버린 듯 다시 붙일 수도, 새로 묶을 수도 없다.

  돌이킬 수 없는 이별에 대한 절망감. 그 절망감의 화살을 내 가슴에 꽂아 영원히 간직하는 상처. 상실을 다룬 영화는 그들이 상실을 이겨내는 것이 아닌 상처를 아물어 고통에 익숙해지는 모습을 담는다.


  

  살아있는 한 언제나 누군가의 죽음을 감당해야 한다. 병, 사고, 사건 등 저마다의 이유는 달라도 죽음이라는 끝선에는 사망자와 그의 사망으로 인한 생존자가 생긴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죽음 앞에 선 생존자들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언젠가 상실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할 순간을 갖는다.

  단지 그 순간이 인생에서 더 없이 행복해야만 하는, 행복을 누림이 마땅할 순간에 불쑥 나타난다면 어떨까.

  「래빗홀」 속 베카와 하위 코벳 부부는 아들을 잃었다. 이제 막 유치원에 들어갔을 법한 어린 아이, 그의 삶이 가진 무궁무진한 미래와 그 삶마다 사랑을 아끼지 않을 부모의 사랑을 등지고 세상을 떠나기엔 너무 어린 아들을 허망하게 잃었다. 미성년자가 서툴게 몬 차에 치여 어린 몸에서 뜨거운 열기가 빠져나감을 그들은 직접 목격해야만 했다.

  「버닝맨」의 부자는 아내이자 엄마의 죽음을 지켜봐야만 했다. 호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던 여자는 누군가의 아내가 되고, 누군가의 엄마가 되는 동안 암을 앓게 된다. 항암치료를 받느라 풍성했던 머리카락을 비처럼 쏟아내고, 안 그래도 마른 몸은 뼈만 남게 됐으며, 시든 꽃잎처럼 안색이 파랗게 질려갔다. 살아있는 사람의 몸을 이루던 세포들이 암으로 바뀌면서 생명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젊은 아빠 톰과 어린 아들 오스카는 지켜만 봐야 했다. 이제 막 온 가족이 신나는 추억을 쌓으며 앨범을 채워가기 바쁠 때, 그들은 가족의 죽음을 준비해야 했다.

  두 영화를 보고 나면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다. 이별을 준비할 시간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상실의 상처가 덜 아플 수 있을까? 대답은 ‘아니다’.

  죽음을 직면하는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 그 어떤 사유의 죽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든 남은 사람의 시간은 애도와 그리움으로 가득하고, 그들의 빈자리를 처절하게 감당하는 것은 같다. 사별(死別)은 그런 것이다. 죽음이 누구에게나 공평하듯,


  세상으로부터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겼을 때의 고통은 세상에 있는 그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다. 그 정도의 고통이 한꺼번에 나를 짖누를 때 그 고통을 감히 감당할 수 없다. 계속해서 표현하며 내 안에서 분출하고 싶고, 누군가를 손가락질하며 탓할 대상을 찾기 마련이다. 쉽게 말해, 화풀이할 대상이 필요할 때가 있다.

  베카의 어머니는 그녀의 오빠이자 아들을 마약 중독으로 잃은 경험이 있다. 이에 똑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베카에게 상실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자 한다. 그러나 베카는 그런 어머니를 비웃는다.

  “4살짜리 내 아들은 개를 따라가다 사고를 당했고, 아서는 30살에 헤로인 중독으로 죽었는데 똑같다고 말하니까 화가 나네요.”

  불의의 사고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모임에 간 베카는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아파하고 있을 때 시종일관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주위 사람들을 둘러본다.

  “주님이 우리 딸을 데려갔어요. 아마 천사가 하나 더 필요했나봐요.”

  “주님은 신인데, 천사를 하나 만들면 되잖아요. 안 그래요?”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베카도 안다. 영화 속 사람들, 영화 밖 사람들도 안다. 우리 모두 알지만, 때로는 방향을 잡을 수 없는 분노와 절망, 그리고 고통을 감당할 수 없어 화풀이할 대상을 찾곤 한다.  


  그 시간 뒤에는 야속한 자책감이 따라붙는다. 당신 옆에 있었으면서, 옆에 있을 수 있었으면서도 당신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 교통사고를 당한 것도, 암에 걸린 것도, 모두 내 탓이 아닌데도 생존자들은 당연하게도 자책하고 만다. 그 모든 원인들을 원망하고 상관 없는 것들을 원망하다가 결국엔 내 잘못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내 탓이 아닌 걸 알지만, 차라리 내 탓이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나는 아무 것도 한 게 없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는 무력감이 든다. 할 수 있는 게 없는 건 당연한 건데, 당연하게도 내가 당신을 지켜내지 못했다며 스스로를 꾸짖는다. 기꺼이 원망의 화살을 제 가슴에 꽂는다.

  그래도 이 아픔은 견딜 수가 없다. 견디고자 뭐라도 해본다.

  하위는 자신의 아픔을 나누고 나눔 받아 서로 공감하길 원했다. 매일 밤 죽은 아들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보며 눈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은 아들의 추억을 곱씹으며 다 주지 못한 사랑을 주고자 하기 위함이다.

  베카는 자신의 상실에 끌려다니길 원치 않았다. 슬픔으로 슬픔을 이기고 싶지 않다. 죽은 아들의 물건을 정리하고, 이사를 가 새출발을 하길 원한다. 남은 사람의 행복을 추구하고 싶기 때문이다.

  서로의 애도 방법이 달랐던 부부는 각자의 방법을 따라 간다. 하위는 자신과 똑같이 자식을 잃은 개비를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며 아내와 나누지 못한 온정과 상실에 대한 공감을 나누고, 베카는 아들을 친 가해 학생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용서를 노력한다.

  그러나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다. 개비와의 만남은 하위에게 ‘바람’이라는 또 하나의 죄책감으로 자리잡게 되고, 베카는 자신이 가해 학생을 용서한 줄 알았지만 그가 너무도 행복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자 폭주하듯 울부짖는다. 각자 만난 사람들에게 위로를 받을지언정 내 옆에서 같은 이를 함께 잃은 이와의 내일이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톰과 오스카도 마찬가지다. 아직 어린 아들이 버젓이 있는데 그 앞에서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갖는 톰, 한 사람도 아닌 수많은 여자들과 하룻밤뿐인 관계를 가지면서 자신의 공허함이 채워지길 바랐다. 자신과 관계를 맺었던 여자에게 아들의 보모를 맡겨버리고, 창녀에겐 아내의 머리카락 모양과 비슷한 가발을 씌워 성행위를 갖는다. 그로써 잠깐이라도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다 주지 못한 사랑을 잊어보려고 한다.

  근데,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깨진 유리조각을 제멋대로 끼워 맞춘 듯 어지럽게 이어지는 장면과 장면 사이에 마치 톰이 초능력자인 것처럼 불에 타는 주위의 물건들. 그것은 또한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다 주지 못한 사랑이다. 아내의 시신이 담긴 관이 발인되는 순간이 매일 반복적으로 재생되듯.

  무슨 짓을 해서라도 떨쳐내고 싶은 순간이지만, 무슨 짓을 해도 다시 돌아와 떠오른다. 그리고 그의 앞에 오스카가 있다. 이젠 볼 수 없는 아내와 아내 없이 살아가야 할 자신을 닮은 아들이 있다. 아내를 잃은 사람은 그 혼자만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이겨내야만 한다. 이겨낼 수밖에 없다. 내일을 함께 할 아들이 있다.



  “Did it ever go away(잊어지던가요)?”

  “No. It changes, though. Some points, it becomes bearable(아니. 그래도 변하는 건 있어. 견딜만해지거든).”

  - 「래빗홀」 中


  시간이 약이란다. 언뜻 들으면 맞는 말처럼 들리지만, 시간은 결코 상실의 고통을 낫게 해주지 않는다. 상처 위에 켜켜이 쌓여 겉으로 보이기엔 그러려니 싶도록, 이젠 괜찮은가 싶도록 덮어주기만 한다. 그 안에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못해 꿈틀대지만, 여전히 꾹 누르면 통증이 올라오지만 견딜 수는 있게, 시간이 지날수록 무뎌지게, 시간은 그렇게 쌓이고 쌓일 뿐이다.

  그리고 그 시간을 함께 보낼 가족들이 있다. 당신을 여전한 기억으로 사랑할 친구들이 있다. 어제에 멈춘 당신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며 우리는 함께 내일을 향해 걸어간다. 당신이 건너지 못한 시간을 걸어가며 이따금 뒤를 돌아 아련한 눈빛으로 내가 모르는 미지의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다가도 다시 내일을 향한다. 그래야만 한다. 잊는 것이 아니라, 간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을 살지 못하는 당신을 내일 다시 꺼내어 볼 수 있도록 언제든 준비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은 오니까.


글 : 작가 안은

사진출처 : 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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