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산티아고 순례길 포르투갈길(6) : 나는 누구일까?
사랑보다 재미있는 책은 없다. 사랑에 빠지면 좋아하는 사람에게 허구의 캐릭터를 부여하고 그 사람의 행동이 순간을 뒤흔드는 드라마틱한 사건이 되니까. 시선이 향하는 방향이 한치의 의심도 없이 자신이라며 설레고, 아주 사소한 손짓과 배려를 찾아내 자신과 연관되었다고 확신한다. 다른 이에게 보이지 않는 매력에 빠져 끝도 없는 소설을 쓴다.
사랑이 스스로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커져 로맨스에서 스릴러, 치정극으로 변하거나 이 세상에 다신 존재하지 않을 만큼 슬픈 엔딩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헤아릴 수 없는 감정 속에서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걸 보기도 하지만, 정작 봐야 할 사실을 놓치기도 한다. 지금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경험이 허구일지도 모른다는 가정까지도. 평생을 지나치게 사랑하고 넘치도록 미워해서 본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존재, 바로 나 자신이다.
겁쟁이. 이 단어보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내 모습을 잘 표현하는 단어는 없다. 여행을 준비하며 도망가고 싶을 정도로 새로운 도전이 두려웠다. 걷기 시작한 후로도 지나가던 개가 짖기만 해도 깜짝 놀랐고 지나가는 차를 피해 도로 가장자리에 최대한 가깝게 걸었다. TV와 책에서 봤던 세계 여행자들의 겁 없고 용기 있는 모습에 비해 심각한 수준이었다. 자기 입으로 말하기 민망하지만 겁쟁이 순례자가 분명하다.
그런데 길에서 만난 순례자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너는 강한 사람이구나. 정말 용감하다.”
이해가 되지 않아 미간 사이를 찡그렸다. 먼 곳에서 어린 여자애가 혼자 왔기 때문일까? 어떻게 걷고 있는지 신기할 만큼 겁이 많은데 사람들은 어째서 강하다고 말하는 걸까? 이유가 어쨌든 조금 전 순례길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 듣는 첫인상은 신선했다. ‘내가 강한 사람이라고?’
자신에 대한 생각과 타인이 본 이미지가 정반대일 경우 무엇이 진짜 모습인지 가늠할 수 없어 혼란스럽다.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처럼 당연한 사실을 부정당한 듯 충격적이다. 피식 코웃음 치던 진부한 드라마 대사가 떠오른다. “나 다운 게 뭔데?” 스스로에 대한 무조건적인 확신만큼 다른 사람의 말에 지나치게 연연하는 것도 위험하지 않을까? 주인공의 마음이 어렴풋이 이해가 된다. 겁쟁이인지 강한 사람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재미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말 그대로 ‘웃긴’ 사람. 반 친구들과 두루두루 잘 지내는 편이고 단짝 친구들도 있었다. 그래도 누군가를 웃기는데 소질이 없는 나와 다르게 재밌고 인기 있는 친구들을 보면 부러웠다. 사춘기 마음에 재미없다는 이유로 친구들이 떠날까 봐 걱정한 것 같다. 하루는 웃길 생각도 없이 평상시 말투로 단톡방에 메시지를 보냈는데 한 친구에게서 답장이 왔다.
“넌 좀 오글거리는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재미도 없는 주제에 오글거리다니, 정말 최악 아닌가.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 이후로 오글거린다는 친구의 말이 계속 신경이 쓰였다. 친구들과 잘 놀고 집에 돌아와 분위기를 망쳤는지 의기소침해지고, 하고 싶은 말이 오글거릴지 몰라 자기 검열을 반복했다.
고등학교 3학년 대학교 수시 원서를 위해 자기소개서를 썼고 평소에 잘 챙겨주시던 윤리와 사상 선생님께 첨삭을 받았다. 항목 중에 자신의 장단점을 기술하라는 항목이 있었고 뭘 써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고 헤맸다. 선생님이 한참 동안 써온 자기소개서를 보시더니 말씀하셨다.
“선혜(제이드)는 진지한 사람인 것 같아.”
‘또… 이게 내 단점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진지하다는 게 어떤 뜻이냐면, 어떤 사람이 이 자리에서 교무실 문까지 걸어간다고 생각해봐. 선생님이라면, 3초 안에 쓱 훑어보고 간결하게 설명할 거야. 근데 선혜(제이드)는 사람이 지나가는 걸 더 사소한 부분까지 세세하게 설명할 수 있어. 그건 정말 큰 장점이라고 생각해.”
누가 뒤통수를 때린 줄 알았다.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을 다른 사람 입을 통해서 들으니 생각보다 많이 놀랐다. 스스로조차 미워하던 모습이 좋은 평가를 받으니 괜스레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선생님은 모르셨겠지만, 자격지심을 가진 학생의 미래를 송두리째 바꿨다. 이후로 ‘웃긴’ 사람이 되려고 집착하지 않았다. 대신 더 진지하고 편한 마음으로 친구들과 대화했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나에게 고민을 꺼내는 친구들이 많았다. 재미는 없어도 믿을 만한 친구가 되지 않았을까?
오히려 타인이 더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이 존재하지 않을까? 친오빠에게 연애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 “걔는 너랑 안 사귈 것 같은데?”의 ‘걔’와는 맘고생하다가 사귀지 않고 끝났으며, “그놈은 만나지 마. 아주 속이 훤히 보인다.”의 ‘그놈’은 본인도 인정한 쓰레기였다. 더 빨리 끊어낼 수 있는 인연을 오빠 말을 듣지 않아서 시간만 질질 끌며 오래 아팠다. 머리로 알아도 감정의 미련을 끊기는 쉽지 않다.
결국 판단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판단을 선택하고 받아들일지에 대한 문제일까? 나 자신과의 관계도 타인과의 사랑처럼 결핍, 자책, 미련 등 복합적인 감정들이 교묘하게 얽혀 있다. 따라서 마치 연애 상담처럼 보고 싶은 모습만 보려고 애쓰고, 듣고 싶은 대로 듣다가, 결국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마치고 온 지금도 여전히 스스로를 겁쟁이라 생각하지만, 수백 번 용감하다는 말을 들었으니 믿어 보기로 했다. ‘사실은 이순신 장군님이나 세종대왕 같은 위인들도 마음 한편에 두려움은 갖고 있지 않았을까?’라고 자기 합리화를 하며 겁 먹었던 이야기는 이제 그만 적기로 다짐한다. 이왕이면 ‘정말 강하고 용감한 사람이었노라’ 외쳐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