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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de in x Feb 01. 2019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뭐 먹고살았어요?

[에세이] 산티아고 순례길 포르투갈길 (8) : 빵순이 순례자

태어나서 처음으로 고기가 질렸다. 구체적으로 돼지고기를 보기만 해도 지긋지긋했다. 원래 스페인은 이베리코를 비롯해 돼지고기가 다른 고기보다 맛있기로 유명하다. 처음에는 감탄하며 맛있게 먹었는데 순례길을 마무리할 무렵 저녁식사로 3일 연속 돼지고기를 먹고 단단히 물려버렸다. 보기만 해도 지긋지긋해서 한국으로 돌아와 한동안 삼겹살을 입에 대지 않았다. 미련하게 무슨 고기를 질리도록 먹었나 싶겠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작은 마을에서는 어쩔 수 없이 식당에서 밥을 먹어야 했다. 숙소 주변에 슈퍼가 없어 음식 재료를 살 수 없었다. 그렇다고 걷는 도중 미리 큰 마트에서 재료를 사서 챙기기엔 배낭에 공간도 없었고 요리 실력은 아찔한 수준이었다. 나름 사 먹는 게 낫다는 합리적으로 판단한 순례자가 작은 식당에서 선택할 수 있는 음식의 폭은 아주 적었다. 메뉴판이 없는 경우조차 허다했는데, 이럴 경우 스페인 사장님들은 일심동체로 돼지고기를 주셨다.

조리 방법도 다 같다

주로 ‘Pilgrim menu(순례자 메뉴)’를 먹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식당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순례자들을 위해 음식을 기존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한다. 음료와 디저트가 포함되는 경우도 많아서 든든하고 제대로 된 한 끼를 먹을 수 있다. 카미노 포르투게스(산티아고 순례길 포르투갈길)를 시작하고 며칠은 순례자 메뉴가 있는 식당을 찾기 어려웠으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에 가까워질수록 손쉽게 눈에 띄었다.

디저트로 나왔던 치즈 케이크

강렬했던 돼지고기 외에도 안 먹은 종류 없이 다양하게 먹었다. 포르투갈의 알바이아제르(Alvaiazere) 숙소 앞 뷔페식당의 4유로 닭고기 구이는 가성비 최고의 메뉴였다. 포르투갈 라바칼(Rabacla)에서는 바다의 짠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흰 살 생선 요리와, 스페인 알카디(Arcade) 식당의 아기자기한 생선 구이도 먹었다. 숙소에서 간단하게 먹기도 했다. 특히 미국에서 온 조와 메리 부부가 양이 많다며 나눠 준 익힌 양배추, 감자, 토마토와 통조림 생선은 순례길에서 외로울 때 두고두고 기억할 힘이 되었다. 

지금까지 소개한 음식들은 대부분 저녁 식사였고 순례길의 매 끼니를 식당에서 먹을 만큼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했다. 다행히 형편없는 요리 실력과 얇은 지갑 사정은 되려 새로운 취향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순례길에서 삼시세끼 먹어도 질리지 않고 찾아 먹을 정도로 좋아했던 음식은 흔하디 흔한 빵이었다. 어찌나 결연했던지 유럽에서 최대한 많은 빵을 먹고 가겠다는 다짐도 여러 차례 일기장에 남겼다.

빵에 갑작스레 빠지게 된 계기의 8할은 에그타르트 때문이다. 홍콩에서 먹었던 단단한 파이지 와 달리 포르투갈의 에그타르트는 겉면이 페이스트리 같았다. 한 입 베어 물면 겉에서 바사삭 소리가 나고 달콤한 내용물이 부드럽게 녹아 번진다. 포르투갈 어느 지역, 어느 가게에서 먹어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중 비아나 카스텔로(Viana do castelo) 숙소 옆 제과점에서 샀던 에그타르트는 바다 맛이 났다. 항상 내부에 사람이 붐비고 가게 앞은 고소한 빵 냄새가 진동해서 맛집처럼 보여서, 기필코 먹어야 한다는 의지가 생겼다. 다음날 아침,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단호박 빵과 에그타르트를 포장했다. 해안길을 따라 걷을니 약간 출출해져 바다 앞 돌 울타리에 걸터앉아 간식으로 빵을 먹었다. 약간 차갑고 눅눅해졌으나 바다 향기를 맡으며 먹으니 최고의 맛이라 더 사 올 걸 후회했다.

스페인에서 주로 먹은 바게트는 어린 시절 로망을 품고 있었다. 아득하게 먼 과거의 파편 속, 시장에 다녀온 유럽 사람들은 황토색 종이 봉투를 양 손으로 들고 있었다. 그리고 반드시 바게트가 봉투 바깥으로 빼꼼 튀어나와있었다. 기억과 달리 이젠 모두 비닐봉지를 사용했으나 바게트만은 그 모습 그대로였다. 식료품의 물가가 싼 유럽에서도 대형 마트의 바게트 가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팔뚝 만한 바게트가 1유로 미만이라니. 가방에 넣을 곳이 없어 사지 못하는 게 원통할 지경이었다. 

파운드케이크와 생 오렌지 주스는 서비스였다

대형 마트가 아니어도 바게트는 손쉽게 먹을 수 있었다. 스페인 카페에 아침 식사를 먹으러 가면, ‘Tosta’를 주문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토스트는 아니고 따끈하게 구운 바게트와 버터, 잼을 준다. 고소하고 쫄깃한 바게트에 버터와 잼의 조합은 간단하고 평범해서 더 자주 끌렸다. 바게트 로망을 현실이 되었다.

한국에서 평소엔 먹지도 않던 달달한 군것질도 원 없이 했다. 슈퍼에 가면 초콜릿이 잔뜩 덮인 도넛을 샀다. 엄마 몰래 먹던 불량식품처럼 몸에 죄책감을 느끼게 만드는 과도한 단 맛이었다. 그래도 먹는 순간만큼은 기분이 좋아져 패키지에 그려진 얼굴처럼 밝게 웃었으니 충분히 만족한다. 한 달 동안 1년 치 과자와 빵을 다 먹다 보니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과자 좀 그만 먹으라는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매일 빵을 먹고 또 먹어도, 늘 먹던 종류의 빵은 아는 맛이라 맛있어 보이고 가게마다 처음 보는 빵은 맛이 궁금했다. 진열장의 빵을 구경할 때마다 장난감을 구경하는 초롱초롱한 어린이가 되었다. 어떤 순간보다 진지하게 빵을 고르고 세상에서 가장 설레는 얼굴로 진열대 안의 빵을 가리켰다. 그 모습에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알베르가 리아 벨하(Albergaria a velha)의 제과점 직원들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빵을 포장하고 계산을 해주었다. 맛있는 빵은 물론이고 포르투갈 사람들의 친절한 웃을 덤으로 얻었다.


밤새도록 이야기해도 부족할 빵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주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엉뚱하고 독특한 취향으로 여겼다. 아무렴 상관없다. 매일 다른 장소에서 빵을 먹을 수 있어서 순례길은 더 매력적인 장소가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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