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de in x Feb 08. 2019

순례길에서 스위스 사람한테 고백받으면 어떤가요?

[에세이] 산티아고 순례길 포르투갈길 (9) : 사람은 역시 어려워

신기한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순례길 첫날 도착한 알프레드(Alpriate)에서 그와 처음 만났다. 숙소에 일찍 도착해 공동 주방에서 빵과 바나나를 먹고 있었다. 현관을 열면 테이블 하나와 의자 네 개가 전부인 주방이 바로 보이는 크지 않은 숙소였다. 순례자들은 첫 날을 무사히 마쳤다는 기쁨에 상기된 얼굴로 작은 주방을 둘러싸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그가 들어와 호스피탈레로 (숙소의 자원봉사자)에게 질문을 몇 가지 하더니 짐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호스피탈레로는 웃으며 숙소 규칙을 설명하고 주방에 모인 순례자를 한 명씩 소개해주었다.


내 차례가 되니 그는 대뜸 중국인 외모라고 추측했다. 한국인이라고 대답하자, 장난스럽게 당연히 북한 사람은 아닐 거라면서 자신은 꼭 북한 여행을 가고 싶다고 말했다. 어느새 대화 주제는 북한에 대한 민감한 문제로 바뀌었다. 영어로만 말하는 분위기에 긴장한 탓인지 그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고 소외감이 들어 괜히 서러워졌다. 그의 첫인상은 얄밉고 재수 없었다.



그리고 5일이 지나 알바이아제르(Alvaiazere)의 숙소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어렴풋이 서로 만났던 날을 기억하고 어색하게 인사를 나눴다. 인사를 다 하고 쉬려고 하는데 그가 여전히 옆에 서있었다. 왜 안 가는지 몰라서 계속 쳐다보니 우리나라를 여행한 사진을 보여줬다. 핸드폰 지도에는 서울 외에도 국내의 다양한 지역들이 표시되어 있었고, 위치를 누르면 직접 찍은 사진도 볼 수 있었다. 호기심 어린 시선에 만족한 듯 템플스테이나 찜질방에서 느낀 신선한 충격을 한껏 신나서 풀어놓기 시작했다.


Matt(전체 이름은 Matthias)는 스위스 사람으로 3년 동안 세계 곳곳을 다닌 배낭 여행자였다. 그는 걸음이 무척 빨라 첫날 이후 하루씩 앞서 걷고 있었다. 내가 파티마에서 탄 택시로 인해 간격이 줄어들어 다시 만나게 되었다. 여행지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해본 그는 누구와 어떤 주제로든 쉽게 대화하고 친해졌다. 그리고 말이 정말 많았다. 끊임없이 무언가 물어보고 말을 걸고 장난을 쳤다. 말소리 대신 사물을 톡톡 치는 소리라도 나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알바이아제르에서도 세종대왕이 그려진 만원부터 여행했던 모든 국가의 지폐까지 설명한 뒤에 대화를 마무리했다.



다음 날 해 뜰 무렵, 다른 순례자들은 이미 숙소를 떠나고 나와 그만 남아있었다. 우연히 같이 출발했고 그는 아침부터 쉬지 않고 말했다. 다짜고짜 특정 가사 반복되는 스위스 동요를 알려주더니 자신이 선창을 하면 후창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잠시 뒤엔 한국어로 노래를 불러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거절해도 포기하지 않아 ‘곰 세 마리’를 불러주었다. 환하게 웃으며 따라 부르고 뜻까지 궁금해했다. 초반부터 시작된 오르막길과 185cm인 그의 보폭을 따라잡느라 가뜩이나 힘든데, 노래까지 시키니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는 내가 숨 고르는 모습을 말이 많은 자신 때문에 쉬는 한숨으로 오해했다. 그래서 장난스럽게 5분 후에 먼저 앞질러 가겠다고 말했다. 이미 헉헉거리며 온 정신이 걷기에 팔린 상태라서 영어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5분 동안 조용히 하겠다는 말로 착각하고 시간을 셌다.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앞서가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최대한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다음 숙소인 라바칼(Rabacal)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의 말을 오해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계속 같이 걸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보다 먼저 출발한 라바칼에서는 금방 따라 잡혔다. 다음날 코임브라(Coimbra)에서는 그가 먼저 출발했는데 중간에 길을 잃었다며 뒤에서 등장했다. 오해와 우연이 쌓여 친해진 우리는 자연스럽게 동행이 되었다. 시시콜콜하게 나누는 대화는 즐거웠다. 사납게 짖는 개도 막아주고 맛있는 것도 챙겨주는 아빠 같은 친구였다.


음료수 뒤에 있는 저 사람이다

슈퍼 아주머니가 우리를 커플이라고 착각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관계에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지나가던 순례자들도 비슷한 질문을 여러 번 물었고 그도 숨겨둔 마음을 드러냈다. 예를 들어 ‘넌 프로페셔널하게 귀여워.’ 같은 손발 오글거리는 칭찬을 한 시간에 한 번 꼴로 했다. 매일 길에서 꽃을 꺾어 같이 걸어줘서 고맙다는 등 점점 적극적으로 변했다. 그리고 다시 만난 지 7일 만에 그에게 고백을 받았다.


그 날은 원래 계획했던 일정이 각자 달랐다. 포르투갈의 대도시 포르투(Porto)까지 거의 40km가 남은 지점에서 하루 만에 도착할 예정이던 그와 달리 나는 이틀에 걸쳐 걷길 원했다. 포르투에서 15km 떨어진 작은 마을 그리조(Grijo) 숙소에 도착해서 작별인사를 했다. 그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내가 오늘 여기 남으면, 앞으로 나랑 같이 걸어줄래?”

“하고 싶은 대로 해. 나 때문에 네가 정한 계획을 바꿀 수는 없어.”

“아니야. 나한테는 네가 제일 중요해. 결정해줘. 넌 나랑 걷는 게 좋아?”

“너의 여행은 너 꺼야. 남고 싶으면 남고, 가고 싶으면 가는 거지.”

“너를 좋아해. 넌 정말 멋진 사람 같아. 그래서 같이 걷고 싶어. 넌 어떻게 생각해?”


분명히 그와 걸으면 훨씬 편했다. 4개 국어가 가능하고 친화력이 뛰어난 그 옆에서 덩달아 나도 다른 순례자와 포르투갈 사람들과 금방 가까워질 수 있었다. 영어로 서툴게 말해도 찰떡같이 잘 이해했고, 다른 사람들의 영어를 못 알아들으면 쉬운 단어로 풀어서 설명해줬다. 혼자가 아닌 둘이기 때문에 조금 어두워도 걱정 없이 아침 일찍 나갈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캄캄한 밤에 저녁을 먹고 골목길을 걸어도 무섭지 않았다. 비가 와 움푹 파인 웅덩이나 가파른 오르막길을 걸어도 서로 격려하며 기운 낼 수 있었다.


배울 점도 있었다. 그는 취향이 확고하고 자신의 결정을 믿는 사람이었다. 라바칼에서 함께 식사를 하던 아일랜드인 부부가 그에게 돈을 벌지 않고 세계를 여행할 수 있는지 질문했었다. 그는 자신의 여행 스타일이 남들과 다른 것 같다며 넉살 좋게 웃었다. 단순히 SNS에 자랑하기 위해 뉴욕 빌딩을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40유로를 쓰지 않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대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순례길 걷기, 산악마라톤처럼 스스로 좋아하는 여행을 했다. 그의 여행 스타일이 무조건 옳다고 말하고 싶지 않지만, 타인에게 폐가 되지 않는 선에서 좋아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행동하는 삶이 부러웠다. 얼마나 여행을 더 다녀야 온전한 취향을 가질 수 있을까?



선택의 혼란스러움은 잠깐이었다. 그의 고백에 대한 대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것 같다. 어떤 누구도 아닌 스스로를 위해 산티아고 순례길에 왔다. 미련하게 보여도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혼자 힘으로 해내고 싶었다. 어색해도 다른 순례자들에게 먼저 말을 걸고 내 안의 두려움과 싸우면서 걷고 싶었다.


그리고 습관처럼 예의를 지키려는 강박은 그도 느낄 정도였다. 그의 걸음을 맞추려 속도를 높이고 아무 곳이나 주저앉아 쉬고 싶어도 그의 눈치를 보며 참았다. 무리해서 걸은 탓에 발바닥엔 작은 물집이 생겨 따끔거렸다. 친구가 필요했다. 맞지 않는 유리구두를 든 동화 속 왕자님 말고.


“너 먼저 가는 게 나을 것 같아. 순례길을 걸은 이유는 말한 적이 없지? 작년에 많이 힘들었어. 올해는 온전히 날 위한 시간을 줬고 여기에 온 이유도 나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서야. 내가 누구이고 뭘 좋아하는지. 그래서 혼자 걷고 싶어.”


영어로 말이 잘 나오지 않아 더듬거리며 거절했다. 그는 용케 알아듣고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끝까지 조심해서 걸으라는 말을 남긴 채 포르투로 떠났다. 일주일 만에 혼자가 된 기분은 생각보다 훨씬 홀가분했다. 그와의 이야기가 이렇게 끝나는 줄 알았다.



여행을 마치고 한 달쯤 지나서 SNS를 통해 그에게 연락이 왔다. 그는 안부를 묻는 인사와 함께 순례길에서 필름 카메라로 찍어준 사진들을 보냈다. 사진을 보내줘서 정말 고맙고 앞으로의 있을 여행에 행운이 가득하길 바란다고 답장을 보냈다. 하루가 지나고 또 다른 사진이 왔다.


“나의 산티아고 순례길 기념품이야. (웃는 이모티콘)”


사진 속 알몸의 그는 순례길의 상징인 노란색 화살표가 그려진 파란 팬티만 걸치고 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재빨리 대화창을 나가 계정을 차단했다. 아련했던 추억은 엽기적인 결말을 맞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뭐 먹고살았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