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산티아고 순례길 포르투갈길 (10) : 순례길의 자연친구들
카미노 포르투게스는 살아 숨 쉬는 식물도감이다. 올리브 나무, 오렌지 나무처럼 한국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나무가 아무렇지 않게 집 앞마당이나 마을 어귀에 자라고 있다. 먼 유럽에서 다시 만난 사과나무나 포도나무는 더 반갑게 느껴진다. 순례길에서 가장 흔하게 보이는 것도, 순례자들에게 땀을 식힐 그늘 한 조각을 나눠주는 것도 나무다. 늘 곁에 있다는 익숙함에 눈이 멀어 그들의 매력을 무시한다면 큰 오산이다. 어떤 건축물보다 정교한 아름다움을 가졌고 어떤 위로보다 힘이 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유칼립투스 나무는 순례길 초반 함께 걸은 타일러가 알려줬다. 첫인상의 강렬한 색감 때문에 유칼립투스 나무는 500원짜리 동전만 한 파란 잎에 하얀 가루가 솔솔 뿌려진 모습으로 기억한다. 타일러가 키가 작은 나무의 무리를 가리키며 이름을 알려줘서, 내 키와 비슷한 나무만 유칼립투스라고 알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본 하늘을 뚫을 기세로 키가 큰 유칼립투스 나무는 충격적이었다. 순례길을 걷는 내내 유칼립투스 나무를 볼 때면 타일러 생각이 났다. 그녀와 걸었던 추억과 기억에 남는 대화가 마음속에서 싹을 트고 자라났다.
사람이 각자 이름이 있듯 나무에도 이름이 있다. ‘그냥 숲에 있는 이름 모를 나무’라고 지나갈 때보다 이름을 알고 ‘유칼립투스 나무구나.’ 이름을 불러주면, 말 한마디 안 나눈 나무들이 오래된 친구로 느껴지고 혼자 걷는 길이 훨씬 든든하다. 다른 나무 사이로 숨바꼭질하는 친구들을 찾는 재미도 상당하다.
물 마시듯 와인을 마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포도나무를 논하지 않을 수 없다. 포르투갈에서는 제대로 열린 포도를 본 기억은 별로 없다. 하지만 포도나무 옆에 세워진 트럭에서 예전에 수확해둔 포도가 가득 쌓여 있었다. 트럭의 옆을 지나니 와인의 달콤하고 시큼한 향이 들이쉬는 숨 가득 따라왔다. 스페인에 넘어가서 드디어 알맹이 큰 포도가 주렁주렁 열린 나무를 만날 수 있었다. 잘 자란 포도는 달았고, 와인 맛은 알지 못해도 진한 향은 종종 떠올랐다.
왜 지금까지 한 번도 키위가 어디서 자라는지 궁금해하지 않았을까? 그동안 먹은 수많은 키위에게 미안하다. 일단 키위는 나무에서 자라고 모양은 포도나무와 비슷했다. 나무줄기가 천장처럼 얽히고설켜 열매가 자란다. 생전 처음 보는 키위나무가 신기해서 쳐다보니 나무를 관리하시던 농부 아저씨가 그 자리에서 키위를 따서 먹으라고 주셨다. 아저씨 말로는 원래 12월에 수확한다고 하셨다. 아직 시기가 일러 약간 시고 딱딱했지만, 당도가 높고 알찬 키위였다.
키위를 받고 30분 정도 더 걸으니 이번엔 비닐 가득 막 따서 싱싱한 무화과를 든 부부가 걸어왔다. 무화과를 두 손 가득 주시고는, 포르투갈어로 감사 인사를 하자 함박웃음을 짓고 떠나셨다. 입안에서 상큼하고 달콤하게 씹히는 과육은 에너지 드링크 열 병도 부럽지 않다. 리스본에서 걷기 시작한 순례자들은 무화과를 손쉽게 먹을 수 있다. 우리나라의 가을이 되면 거리에 셀 수 없을 정도의 은행이 떨어지는 것과 비슷하게 포르투갈길에 무화과가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 살던 빌라 마당에는 앵두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여름이 되면 가족들과 다 같이 마당에 나가서 앵두를 따 먹고 남은 열매로 청을 담갔다. 이사를 한 다른 지역의 아파트에서는 그런 추억은 쌓을 수 없었다. 그때 생각이 났다. 어렸을 때나 성인이 된 지금이나 나무는 마음과 입을 모두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마당에 한 그루의 나무가 있고 손쉽게 과일을 따 먹을 수 있는 그들에게 스멀스멀 질투가 났다.
나무만 칭찬하면 듣는 꽃이 서운하다. 길가에 핀 들꽃은 한 무더기로 피어난다. 들꽃 한 송이는 너무 작아 주장이 강하지 않지만, 옹기종기 모인 들꽃은 강렬한 존재감을 뽐낸다. 진한 노랑, 분홍의 꽃은 너무 알록달록해서 촌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화려한 색이 오히려 지친 순례자의 시선을 끌고 잠시 멈춰 쉬어 갈 핑계를 준다. 작은 순간에 꽃을 보며 미소 짓고 활력을 얻는다.
가장 멋진 꽃은 수국이었다. 포르투갈 해안길의 비바도콘데(Viva do conde)부터 제대로 핀 수국을 볼 수 있었다. 사진이나 꽃집이 아니라 길에서 피어 있는 수국이라니. 활짝 피었다면 얼마나 사람들의 애간장을 태웠을까? 길을 걸으며 본 수국은 지는 중이었는데, 은은한 하늘색의 꽃잎은 마음을 홀리기에 충분했다. 꽃을 들고 고백하는 사람처럼 앞을 향해서 수줍게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홀로 두근거려 파란 수국을 결혼식 부케로 쓰겠다고 다짐했는데, 꽃말이 냉정이었다. 수국으로 부케를 만드는 일은 다시 신중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
나무와 풀, 꽃이 모여 숲이 된다. 숲은 다 같아 보여도 꼼꼼히 살펴보면 모두 다르다. 어떤 숲은 나무들이 굽이굽
이 마디가 둥글게 꺾여서 신비의 세계로 이어지는 터널 속에 있는 기분이다. 얼핏 보아도 오래된 키가 크고 두꺼운 나무를 보면 모르는 사이 자동으로 입이 쩍 벌어진다. 색도 다양해서 초록의 잎과 갈색의 줄기가 아니어도 황토색의 풀과 보라색의 꽃, 노란 화살표가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숲과 물의 만남은 낭만적이다. 잔잔한 물에 비친 숲의 모습에 눈으로 감탄하고 바위에 부딪히는 청량한 계곡 소리에 귀가 호강한다. 비가 살짝 내려 안개 낀 숲은 사진으로 보면 무서워도 실제로 보면 신비롭고 비밀의 정원 같다. 날이 좋을 땐 숲을 채운 빼곡한 나무 틈새로 한 줄기 햇살이 비춘다. 그로 인해 발을 디딘 땅에는 나무의 그림자가 생긴다. 이 정도면 숲을 두 발로 걸을 수 있어서 감격스러울 따름이다.
숲을 단순히 걸어서 지나치기엔 아쉬움이 남는다. 두 팔을 벌려도 남을 큰 나무를 끌어안았다. 누가 볼까 머쓱해 금방 팔을 내렸지만, 잠시라도 나무의 세월을 온몸으로 교감하고 나무를 향한 수줍은 마음을 표현했다. 그리고 지금 걷는 숲은 다시 돌아올 수 없으니 사진을 남겼다. 땅에 떨어진 예쁜 잎을 고르고 골라 하트를 만들어 찍기도 하고, 나무 그림자가 비친 발도 찍었다. 숲에서 맡을 수 있는 향기까지 담을 수는 없어도 사진이나마 숲을 기억하고 싶다.
숲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숲에 가득 채워진 강한 생명력 때문이다. 작은 나무들이 햇빛을 받고 비를 맞아 오랜 세월을 걸쳐 거대한 나무가 되고 숲을 이룬다. 오늘 본 나무를 내일 다시 본다고 해서 달라졌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삶보다 긴 시간을 지나도 나무는 자라고 끝내 살아간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에워싸는 숲의 건강한 힘 앞에서 불필요한 걱정과 만족스럽지 못한 마음은 하찮아진다. 자신의 나약함을 반성한다.
넓은 숲을 다른 사람 없이 혼자 걸으니 온 세상이 전부 내 것 같다. 이미 상상 속에서 숲의 요정이 되어 나무와 풀 사이를 거닐고 있다. 괜스레 이기적이고 뻔뻔한 마음이 생긴다. ‘나만 아는 노래’, ‘나만 아는 가수’를 외치던 사람들의 바람이 이해가 된다. 아름다움이 많이 보면 닳을까 아껴서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다. 혼자만 눈에 담고 오래오래 추억하고 싶다. 자신에게 소중한 물건만 담아둔 보물 상자처럼.
순례길에서 만난 바다의 모습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