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de in x Apr 15. 2019

이런 사랑의 삶이라면 이렇게는 못 살 것 같다

[무비패스] '러브리스(2017)'

이 글은 브런치 무비 패스 시사회 참석 후 작성되었으며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을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참고해주시길 바랍니다.


지치는 영화다. 그건 각오해야 한다. 그래서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영화 속 인물들도 지치고, 보는 관객들도 지친다. 그래서 이 영화를 둘러싼 모든 인물들은 영화의 끝을, 그 이후의 끝까지 끝이 나기만을 바라고 또 바라는 영화다.


사실 소재부터 뻔하다. 이혼을 앞둔 부부, 실종된 아들. 아마도 부부는 아들을 찾기 위해 일시적으로 단합하고,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사랑의 결실인 아들의 존재를 통해 서로의 사랑 또는 아들에 대한 사랑을 다시금 깨닫게 되지는 않을는지. 그리고 아들을 무사히 찾고, 해피엔딩. 그런 뻔한 영화인 줄로만 알았다. 그걸 바라기도 했다. 이렇게 꿈도 희망도, 제목 그대로 사랑도 없는(Loveless) 영화라고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영화는 너무할 정도로 냉정한 시선으로 서있기만 해도 얼어버릴 것만 같은 겨울을 담는다. 인적 하나 없이 바람만 허공에 맴도는 산 속을,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기 싫어 한참을 떠도는 아이의 뒷모습을, 옆모습을 바라보며 따라간다. 그리고는 툭- 앵글에서 아이를 놓는다. 처음엔 학교 앞에서, 다음은 아이가 지나친 나무 앞에서, 엄마를 지나치고 도망치며 내려간 비상계단 앞에서. 어렴풋이 잡고 싶지만 이렇게 아이의 가출을 모른 척하는 것이 아이에게 최선이라는 것을 아는 듯이 말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내내 실종된 아이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영화는 아이의 실종을 방관하기만 한다. 그러니 아들의 행방을 도무지 찾을 수 없어 답답하기만 한 아이의 부모도, 그들과 함께 한 아이를 찾아온 동네를 헤집는 경찰과 자원봉사대도, 이들과 함께 아이를 찾기만을 염원하는 관객들도 이 지루한 시간싸움에 지칠 수밖에 없다. 영화가 아이를 놓아주었기 때문이다.


왜? "사랑 없는 삶, 그렇게는 못 산다”는데, 이 따위 사랑이라면 안 살아도 될 것 같아서.



“애한테는 엄마가 필요해.”

“이 나이 때 애한테는 아빠가 더 필요해.”


제냐와 보리스 부부는 이미 이혼을 앞두고 재산을 분할 중이다. 각자 새롭게 만나는 연인이 있고, 이혼도 전에 새로운 결혼까지 약속했다. 그들에게 남은 숙제는 하나뿐인 아들 알로샤를 누가 키우는가 뿐이다. 그런데 서로 자기가 키우겠다며 싸우기도 모자랄 판에 서로 안 키우겠다며 싸우고 앉았다. 너도 안 되면 네 어머님은 안 되겠느냐, 네 어머님은 돌아가셔서 좋겠다라면서 아들을 떠넘기기 바쁘다. 심지어는 남편도, 아들도 정말로 사랑하는 건 아니라는 말까지 서슴치 않는다. 결판 나지 않는 말싸움에 지레 지친 두 사람은 각자의 방문을 닫고, 서로의 공기를 차단하고, 결국은 집을 나서 각자의 연인들의 품에 안긴다.


알로샤가 문제다. 다시 말하지만 누가 그를 키우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자기를 안 키우겠다며 언성을 높이는 부모의 말을 알로샤가 듣고 만 것이다. 차라리 내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나는 부모님의 대화를 듣는 알로샤의 심정이 어땠을까. 여태까지 본 영화 중 남녀노소를 통틀어 가장 이렇게 마음 아픈 눈물연기는 본 적이 없다. 서럽고, 힘겹고, 가슴을 찢고 싶을 정도로 절망스러운 와중에도 방구석에서 입을 꾹 다물고 신음소리 하나 새어나지 않게 눈물을 삼키는 그 모습이 알로샤의 모든 것이다. 그 눈물을 본 이상 알로샤의 가출에 손가락질할 수 없다, 절대.


제냐는 평소처럼 알로샤가 등교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알로샤의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알로샤의 부재를 느낀 건 그로부터 이틀이 지나서였다. 그동안 제냐와 보리스는 집에 있지도 않았다. 각자의 연인과 사랑을 나누며, 당신이 내 하나뿐인 사랑이라 말한다. 행복감에 젖은 채로 텅 빈 집에 들어와 인적 없는 공기를 느끼지도 못하고 곤히 잠든다. 일어난 뒤에도 제냐는 늦잠을 자서 알로샤가 먼저 등교를 했으려니 생각했다. 아들의 부재를 알게 된 건 알로샤의 담임으로부터 이틀째 무단결석을 했다는 전화를 받고부터다.


“애가 안 들어온 줄 당신은 왜 몰랐어? 조금만 기다려봐. 곧 돌아올 거야.”

“이 나이 때 애들은 평균 10일이면 갈 곳이 없어서 집으로 돌아와요.”


사람들은 특히 10대에게 가혹한 잣대를 들이댄다. 어리고, 세상 물정 모른다며 10대들의 행동을, 그들만의 이유를 무시한다. 그럼에도 알 건 다 안다며, 모르면 바보라며 무심하게 시선을 거둔다. 철저히 어린아이 취급을 하며 그들의 능력에 제약을 걸어놓고, 그 안에서 무엇을 하든 관심조차 주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12살의 알로샤가 가출을 했을 때 이를 대하는 어른들의 반응이 그리 놀랍지 않았다.


남의 집 일이긴 하다. 하지만 이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경찰들의 태도는 차갑다. 범죄의 흔적이 없으니 가출이 확실하다느니, 가출청소년들은 날씨도 춥고 배도 고파서 조금만 기다리면 알아서 집으로 들어온다느니, 애초에 가출 따위로 수사에 집중할 여력도, 관심도 없어보인다. 결국 인력이 부족해 수사가 더딜 것이니 정히 빨리 찾고 싶다면 실종자 수색을 도와주는 자원봉사대에게 부탁하라 말한다.


실종자 수색을 전문으로 해선지 봉사대의 움직임엔 막힘이 없다. 집 안만 들추던 경찰과는 달리 알로샤의 친구와 담임선생님을 인터뷰하며 알로샤가 갈만 한 곳을 추려서 아파트 근처와 숲을 집중적으로 수색한다. 알로샤와 친구의 아지트라던 먼지 가득한 폐건물도 샅샅이 뒤진다. 혹시라도 결혼하고 남남처럼 지내던 친정어머니에게도 찾아가지만 말리던 결혼을 감행하더니 꼴좋다는 말만 듣고 돌아온다. 그 어디에도 알로샤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제냐와 보리스는 알로샤를 찾는 것보단 서로의 책임을 재는 것에 더 열중한다. 제냐는 무표정을 일관하는 보리스를 원망한다. 결혼도 전에 임신부터 해 어쩔 수 없이 한 결혼이었다, 자신이 싫어지니 다른 어린 여자를 만나 똑같이 임신시켜서 그 사람 인생도 망치려 한다라며. 보리스는 자기 아이 간수도 못하면서 큰 소리를 낸다며 제냐를 꾸짖는다.


그래 봤자 알로샤에겐 똑같이 못난 부모일 뿐이다. 서로의 책임만 묻고 자신의 잘못은 잊은 채 눈물을 머금고 각자의 연인들에게 또 달려간다. 그 연인들에게 말한다. 당신과 함께라면 지난날의 잘못된 사랑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어둠 속에서 나눈 사랑이 진짜 자신의 사랑이라며 빠져든다. 하지만 그들은 그 옛날 사랑에 빠져 알로샤를 임신했을 때에도 이렇게 서로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것을 미움으로 덮어 잊었을 뿐.


그렇게 이어지는 두 사람의 말싸움 속에서 사라진 알로샤의 잔상마저 사라진다. 뒤늦게라도 붙인 알로샤의 실종 전단지는 자연스럽게 스치는 배경 속에 묻힌다. 시간이 지나고, 전단지 속 색이 하얗게 바랜다. 전단지도, 알로샤도 그 겨울 속에 묻혔다. 그 모습을 영화는 끝까지 바라만 보고 있다.



(스포주의)

“애초에 당신한테 보낼 생각 없었어. 내 아들이야. 내 아들이라고!”


수색과정에서 한 아이의 시신이 발견된다. 좁고 어두운 안치실에서 시신과 마주한 두 사람은 영화 시작 후 처음으로 처절하게 운다. 알로샤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알로샤가 아니라면 안도할 법도 한데도 마치 정말 알로샤의 시신이 맞는 것처럼 운다.


그리고 제냐가 소리친다. 처음부터 알로샤를 키울 생각이었다고. 자신이 알로샤의 엄마라고. 보리스의 뺨을 내리쳐대며 제냐가 말하지만 그 말에 더 이상 울컥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오려던 눈물이 쏙 들어가고 온몸에 끼친 소름 때문에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영화 처음부터 제냐는 지금의 가정을 벗어나고자 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편으로부터, 인생의 골칫덩이었던 아들로부터, 그리고 새롭게 만나 사랑을 약속한 연인에게로 말이다. 시종일관 이혼을 정당화하기 위해 남편과 아들을 욕하던 제냐는 어디로 갔을까. 이제 와서 그녀는 왜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엄마가 됐을까.


도대체 제냐에게 ‘사랑’이란 무엇이었을까? 어제는 지겹고, 그제는 미워 죽겠더니, 오늘 생각해보니 사랑스러운 것이 사랑이었을까? 만약 알로샤가 제냐의 이 마음을 알았더라면, 사실은 자신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았더라면 알로샤는 집을 떠나지 않았을까? 혹시라도 이제라도 제냐의 마음을 알게 된다면 알로샤는 집으로 돌아올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알로샤인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은 어린 소년의 시신을 맞닥뜨린 후 시간이 지난다. 제냐와 보리스 모두 사랑을 약속한 각자의 연인에게로 돌아간다. 그러나 제냐는 보리스와 있었을 때처럼 함께 있어도 함께 있지 않는 듯 무거운 침묵을 일관한다. 보리스도 마찬가지로 TV에 빠져있고, 앞에서 재롱을 부리는 갓난아이를 시끄럽다며 아기침대에 던져 울음을 터뜨리게 한다.


모두가 새로운 삶을 바랐지만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달라졌다. 결국 사랑했던 기억이 무뎌지는 시간을 견디지 못한 책임을 서로에게 돌리고, 이것은 사랑이 아니었다고, 새로운 사랑을 찾으면 달라질 수 있다고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었을 뿐이다. 결국 또 다시 사랑이 무뎌지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똑같은 미움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제냐의 연인은 애정 없는 남편과 골칫덩이 아들 때문에 인생을 허비했다며 우울해 하는 제냐를 이렇게 위로해준다.


“사랑 없는 삶, 그렇게는 살 수 없어.”


하지만 이런 사랑들 속에서 사는 삶이라면 살지 않는 것이 낫겠다. 내 맘대로, 내 뜻대로 버리고 취하는 사랑이 부모라면, 그런 사랑을 무조건적으로 받아야 하는 위치에 있을 바엔 안 사는 게 낫겠다. 그러니 알로샤가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가출을 감행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사랑이라면, 사람이라면, 이런 삶이라면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제목마저 지워버린 당신의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