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사랑은 믿을 수 없이 유혹적이다

[소설] 이별열차 : 마지막

by Jade in x

마지막 역으로 향하는 열차 안은 첫 모습보다 훨씬 활기를 띠고 있다. 열차에 올라탈 때만 해도 이별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나 눈앞이 캄캄했던 사람들도 끝이 다가오니 그동안의 여행이 한없이 짧고 허무하게 느껴진 것이다. 무겁게만 느껴졌던 미련과 떨쳐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상실감은 초라하게 흩어져 오직 ‘지금’만 남았다. 얼마나 후련할까. 이전 역에서 내린 사람들은 절대 알지 못할 것이다.


어떤 곳은 그새 서로 친구가 된 사람들끼리 모여 재잘재잘 수다를 떨고, 어떤 곳에선 신나는 음악을 틀어놓고 다 함께 춤을 추고 있다. 간혹간혹이지만 어느새 눈이 맞은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돌아다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나도 그런 사람이려나 싶다.


“벌써 다 마셨네. 맥주 더 마실래요?”


질문을 했으면서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비어서 잔뜩 구겨놓은 우리 사이의 맥주캔들을 손에 든다. 그리고 나를 본다. 싱긋-


“먹고 싶은 안주 있어요? 가는 김에 사 오게.”

“전 마른오징어면 돼요.”

“다녀올게요.”


곧 매점을 향해 유유히 떠나는 뒷모습을 우리 칸의 문이 닫힐 때까지 붙잡아 봤다. 꽤 멀 것이다. 매점칸은 열차의 초입부에 있는데, 우리는 그로부터 한참을 더 깊숙이 들어왔으니까.


이름이 ‘바람’이라고 했다. 누가 들어도 가명인데, 스스로 지은 이름 치고는 과하게 감성적인 이름이라 부를 때마다 약간씩 닭살이 오른다. 자유로워지고 싶은가? 이름마저 본인 자유일 테니 그러려니 했다. 그래서 왜 가명을 쓰느냐 묻지도 않았다. 그래서 왜 당신을 열차에서 볼 때마다 옆에 있는 사람이 다르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 또한 본인과 그 옆에 있던 사람의 자유일 테니까. 지금 그 옆에 있는 나도 마찬가지고.


“우리 열차는 곧 마지막 역인 ‘체념’역, 체념역을 향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역에 도착한 후 새로운 승객들을 모신 후 다시 열차 출발할 예정입니다. 열차에 계속 타는 것도, 열차에서 내리는 것도 승객 여러분의 마음임을 알려드립니다.”


벌써 종점에 다다랐다. 슬슬 집으로, 일상으로 돌아갈 때가 됐다는 말이다.


숨을 크게 쉬고 노트를 꺼냈다. 여행이 끝난 뒤의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기 위함이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들을 적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할 일은, 내 집에서, 내 방 침대에서 푹 잠잘 것. 그다음 할 일은, 빨래하고 청소하고, 회사에 밀린 업무는 뭐가 있는지 확인하기. 입을 옷도 잔뜩 사고, 쇼핑하러 나간 김에 노래방 가서 실컷 노래를 질러 부르고 싶다. 맛있는 거, 짬뽕에 소주, 파전에 막걸리, 치킨에 맥주도 잔뜩 먹고 싶다. 벌써 노트 한 면이 꽉 찼다. 아, 카프리제에 와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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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문이 열렸다. 생각보다 늦게도 왔단 생각에 고개를 드니 바람의 모습이 심상찮다.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입술에 새겨진 핏망울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부풀어 있다.


“혹시 연고나 반창고 없죠?”


들고 온 맥주와 안주는 테이블에 내려놓고 내 옆자리를 꿰차고 앉는다. 한 캔을 들어 자기 입술에 대며 바람이 말했다. 너무 놀라 말도 못하고, 묻는 말에 대답은 해야겠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바람은 그럴 줄 알았다면서 의자에 머리를 젖혀 기댔다.


“매점 갔는데 예전에 잠깐 만난 사람이 있더라구요. 반가워서 웃으면서 인사했더니 다짜고짜 그 옆에 있던 사람이 나한테 화를 냈어요. 이 사람이 나 때문에 힘들어서 이 열차에 탔대요. 이 사람 괴로워한 모습 자기가 다 봤다고. 나보고 쓰레기라고. 그리고는… 뭐… 무슨 일 있었는지는 얼굴 보면 알 거고.”


정말 놀란 건 힘들어서 열차에 탔을 정도로 이별이 잔인했었단 건데, 그런 사람을 오랜만에 만났다고 웃으면서 인사한 이 사람 때문도 아니고, 한 바탕 싸우고 돌아와서 무용담처럼 이야기를 하는 이 사람 때문도 아니다. 이 와중에 상처 난 자기 입술을 손가락으로 만지작대는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는 나 때문에 놀랐다. 상처가 아픈지 자꾸 움찔대는데… 아니, 그냥 놀랐다.


“기다리다 지쳐서 그새 딴짓하고 있었어요?”


그러면서 내 노트를 집어 본다. 괜시리 부끄러워서 휙- 뺏었는데, 그새 내용을 봤는지 나를 뚫어지게 본다.


“그냥 집에 가면 뭐할지 적은 거예요.”

“다음 역에서 내릴 거예요?”


당연한 걸 왜 묻나 고개만 갸웃하자 바람이 들고 있던 캔을 내려놓는다.


“열차 왜 탔어요?”

“왜냐뇨?”

“새출발 하고 싶어서 탄 거죠?”

“그렇죠?”

“그럼 나랑 같이 해요, 새출발. 체념역에서 내리지 말아요.”

“무슨 말이에요?”

“난 지금까지 역마다 내리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봤어요. 다들 내리는 역은 달라도 각자의 사랑을 다시 시작하고 싶어서 내린 마음만은 다 똑같아요. 당신도 열차에서 내리고 또 누군가를 만나겠죠.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다가 노력한 만큼 상처받고, 사랑한 만큼 이별이 아플 거예요. 결국 다시 이 열차에 타겠지. 지치지 않아요? 기를 쓰고 시작한 관계를 체념으로 끝맺는 걸 반복하는 거.”


당연히 지친다. 이별에 익숙해질수록 시작이 두려워 망설여지는 건 당연하다. 어쩌면 그렇기에 더더욱 새로울 것 없는 일상으로 돌아가고자 한 것은 아닐까. 노트에 끄적인 것들 중 그 무엇도 새로울 것이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까 나랑 여기 있어요. 사람들 틈에서 머리 쓰느라 또 고생하지 말고. 새로운 나랑 새로운 걸 보고, 새로운 경험하면서 즐겨봐요. 나한테 질리면 어디서든 내리면 돼요. 우린 여기서 그 정도만 하면 돼요.”

“머리 아프네요.”

“깊게 생각하지 말아요. 깊게 생각하면 나처럼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장난스레 자기 입술에 난 상처를 톡톡 건드리며 아픈 시늉을 하는데, 여기서 웃어야 할지 말지를 모르겠어서 가만히만 있었다.

“다음 칸에 있을게요. 난 당신이랑 열차에서 앞으로 좋은 시간을 보낼 거라고 확신해요,”


바람은 홀연히 다음 칸으로 사라졌다. 구구절절 말할 때는 내리지 말라고 애원하듯 어깨를 축 늘어뜨리더니 돌아설 땐 미련 없이 차가운 한기만 남겼다. 이따위 한기에 쉽게 흔들리는 내가 싫다.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사랑은 믿을 수 없이 유혹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여행지에서의 사랑을 꿈꾼다. 이만큼 익명성이 보장되면서도 온전한 나 자신으로 설 수 있는 곳은 흔치 않다. 나를 모르는 곳이기에 새로운 나를 만들어 갈 수 있고, 그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바라는 욕망만을 충족시켜주면 그만인 관계. 그런 깔끔하고 가벼운 관계. 아마도 깊게 생각해서 자기 꼴 난다는 말은 가벼운 관계에 의미를 부여해서 혼자 사랑에 빠지지는 말라는 경고일지도 모른다.


나한테 필요한 게 그것일까? 내가 바라는 것이 정말 그런 가벼운 관계일까? 아니라고는 못한다. 아니기 때문에 선뜻 바람이 건넨 술잔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지금 이렇게 끝낸다는 것도 아쉽고, 바람이 보장한 앞으로의 좋은 시간을 누리고 싶다.


하지만 여행도 언젠가 끝나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정확히는 끝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여행은 지겨운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이지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몸과 마음의 준비이기도 하다. 여행을 계속 잇는다고 해도 일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다.


머리가 깨질 것 같다. 어떻게든 움직이긴 해야 할 것 같아서 칸 안을 누비고 다녔다.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고 싶다. 당신이라면 어떡할래? 나를 향해 다가오는 손을 붙잡으려는 마음을 어떻게든 말리는 참이었다.


내게 다가오는 그 손이 나를 붙잡았다.


“네가 여기 왜 있어?”


익숙한 목소리. 내 손목을 붙잡은 손등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얼굴. 익숙한 눈빛. 너다. 내가 이 열차에 타기 위해 떠나보낸 너였다.


“네가 여기 왜 타고 있어?”


네가 여기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그렇다고 나를 여기서 만난 게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하는 너 때문에 섭섭하다.


“나는 여기 있으면 안 돼?”

“헤어지자고 말한 건 넌데, 네가 뭐가 힘들다고 여기 타고 있는지 궁금해서 그런다.”


이별은 일상에 가하는 폭력이다. 예고가 됐건 갑작스럽건.

이별을 당했건 가했건 상관없다. 나에겐 너뿐이고, 너에겐 나뿐인 단 하나뿐인 사람이, 내 삶의 일부였던 사람이 순식간에 일상 속에서, 가슴 속에서 잡아 뜯겨 나가버린다. 이별은 그런 것이다.


너와 이별을 택하고 내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너는 모르길 바랐다. 이별을 고한 그날 너의 표정을 똑똑히 기억하기에, 비 내리는 풍경이 잘 어울렸던 그날의 너를 기억하기에, 너를 그렇게 만든 내가 얼마나 힘든지 너 만큼은 모르길 바랐다.


그 마음을 너는 알기에, 너는 이 열차에서 나를 만난 것에 놀라지도, 놀리지도 않는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 나를 사랑했던 사람. 이 사람은 지금 나를 보며 웃고만 있다. 그 얼굴이 얼마나 그리웠는지는 네가 알았으면 좋겠다.


“좋아보여. 너.”

내가 말했다. 네가 소리내어 웃는다.


“너도. 좋아보여.”

“지금 만나서 다행이다. 조금만 빨리 만났으면 이렇게 웃지도 못했을 거야.”

“그러게.”

너와 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상처뿐인 사랑이 걷히고 지극한 정과 그리움만 남았다. 우리는 이제 다시 만나지 않을 것이다.

“난 이만 내릴게.”


네가 가던 대로 나를 지나치려 한다. 그 뒷모습에 대고 묻고 싶었다.


너라면 어떡할래? 평소 같은 일상 속에서 지금의 우리처럼 체념할 걸 알면서도 새로운 사랑을 할래, 아니면 아무 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즐겨보자면 즐겨볼래?


어떻게 너한테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까. 당연히 너를 보내고 홀로 남았다.


생각보다 머리가 맑아졌다. 깊게 생각할 것 없다. 너를 마주하고 알았다. 내가 이 열차에 타 바라던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이뤘다는 것을. 집착도, 미련도 없이 너와 내가 이 이별을 잘 이겨냈음을. 다음 칸으로 넘어가든, 열차에서 내리든 나는 어느 방향으로든 새출발을 할 준비가 되었음을.


바라는 대로 하자. 하고 싶은 대로 하자.


열차가 속력을 줄이기 시작한다. 별 것도 없는 짐을 서둘러 꾸렸다. 문손잡이에 손을 댔다. 심호흡 한 번. 달칵- 문이 열린다.


“이번 역은 우리 열차의 마지막 역인 ‘체념’, 체념역입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두고 가시는 분실물이 없도록 짐을 꼼꼼히 살피시고, 다음 승객들을 위해 두고 가시는 감정이 없도록 각별히 신경 써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이별열차는 앞으로도 승객들의 상처 없는 이별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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